♣복음말씀의 향기♣ No3620
9월21일[성 마태오 사도 복음사가 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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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강론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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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n0O2WByHGpo?si=aroDEvMUHAIh8hZL
(예수회 박민웅 요셉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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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세리가 사도가 되다니...>
끝도 없이 반복되는 악습으로 인한 괴로움이 사무칠 때마다, 어둡고 깊은 죄의 동굴 속에 앉아있을 때마다 큰 위로와 위안을 주는 복음이 있으니, 예수님께서 세리 마태오를 제자로 부르시는 대목입니다.
예수님 시대 당시 세리 마태오 제자 발탁 사건은 제자 공동체뿐만 아니라 유다 사회 전체에 엄청난 스캔들이 되는 사건이었습니다.
당시 세리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곧 매국노요 돈만 아는 수전노, 민족의 반역자요 대죄인이라는 말과 동일시되고 있었습니다. 누군가가 세리 일을 하고 있다면, 그는 깊은 어둠의 세계로 발을 들여놓은 사람으로서 가문과 민족의 수치로 여겼습니다. 더 이상 새로운 삶에 대한 희망은 기약할 수 없는 존재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께서는 세관에 앉아있던 세리 마태오에게 가까이 다가가십니다. 그를 눈여겨보십니다. 그의 말못할 내면의 고통을 바라보십니다. 그의 깊은 상처를 들여다보십니다. 그가 평생토록 받아온 수모를 헤아리십니다. 이윽고 세상 다정하고 따뜻한 음성으로 그를 부르십니다.
“나를 따라라.”(마태오 복음 9장 9절)
세리 마태오의 제자단 입적 사건으로 인한 제자들의 반발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제자들 사이에 이런 수근거림도 분명이 있었을 것입니다. 아니, 우리 스승님 해도 해도 너무하신 것 아냐?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세리가 사도가 되다니...그가 우리 동료가 되다니...적어도 이건 아니지 않은가?
평소 배배꼬인 시선으로 예수님과 제자들을 바라보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비아냥을 더 심했습니다. 정말이지 저 집단은 웃기는 집단이로군. 인간말종 세리를 핵심 멤버로 발탁하다니, 저 집단 미래가 불을 보듯 뻔하군.
이런 분위기 속에서 던지는 예수님의 촌철살인의 말씀이 죄인인 오늘 우리 모두에게 얼마나 큰 위로요 희망이 되는지 모릅니다. 참으로 관대하고 너그러운 주님, 정녕 좋으신 주님이 아닐 수 없습니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태오 복음 9장 12~1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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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자비를 입은 사람은 자신이 죄인임을 결코 잊지 않는다>
덴마크의 유명한 조각가들 가운데 한 사람이 예수님의 상을 만들려는 열정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는 승리한 왕과 같은 형상을 조각하기 시작했습니다.
머리는 뒤로 젖혀있고, 두 팔은 위엄 있게 하늘을 향해 들려져 있었습니다. 왕이신 그리스도의 강하고 권위 있는 모습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조각상이 완성되던 날 “이것이야말로 나의 걸작이 될 거야.”라고 그는 말했습니다.
그 날 밤 짙은 안개가 그 지역에 끼여, 물보라가 조각가 방의 열려진 창틈으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습기가 조각을 상하게 하여, 아침에 본 조각은 매우 손상된 모양을 하고 있었습니다. 조각에 붙은 물방울들은 마치 그리스도의 피를 연상케 했습니다. 머리는 숙여져 있었으며, 얼굴 표정은 엄격한 얼굴에서 동정 어린 모습으로 변해 있었습니다. 그리고 두 팔은 모든 사람을 환영하듯이 축 내려져 있었습니다.
이 조각가는 그 형상을 바라보며 다시 시작할 생각을 하니 낭비된 시간이 아깝기만 했습니다. 그러나 어떤 신비한 힘이 그의 마음을 변화시키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진정한 모습이 바로 이 모습임을 깨달았습니다. 그 후 새롭게 만들어진 상에다 이렇게 써 붙였습니다.
“내게로 오라!”
우리가 기대하는 예수님은 어떠한 모습이신가요? 십자가에 달려 팔을 벌리신 예수님만큼 예수님의 본성을 잘 표현하는 모습은 없습니다. 예수님은 승리의 예수님이기보다는 자비의 예수님이시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자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세리와 죄인들과 한 식탁에 앉으신 이유는 무언가 보여주시기 위함만이 아닙니다. 하늘나라에서도 주님의 식탁에는 죄인들밖에 없을 것입니다.
의인들은 예수님의 식탁에 앉을 수 없습니다. 의인들은 예수님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로 가시고 그들과 함께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주실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자비’입니다. 그 자비를 필요로 하지 않는 바리사이들은 그래서 그분과 한 식탁에 앉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라고 하십니다.정말이지 자신이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큰일입니다.
고 임언기 신부님이 한 말기 간암 환자에게 병자성사를 주러 가셨습니다. 그 환자는 오랜 냉담을 하고 있었고 친척들이 신부님을 부른 것입니다.
그러나 환자는 한 마디도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결국 어쩔 수 없어 신부님이 일어설 때 그가 신부님의 등 뒤에서 이렇게 소리쳤다고 합니다.
“나 죄 없어.”
이 말은 “나는 의인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필요 없다.”라는 뜻입니다. 이런 사람이 정말 죄인인데 그 사람들은 죄를 지었기 때문에 남을 심판하게 됩니다. 남을 심판하면서 자신의 죄책감을 감추어야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자신의 죄를 잊어버립니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이 죄인들을 심판하고 그들과 함께 식사를 하는 예수님도 판단하고 있었던 것과 같습니다. 그들은 의사가 필요하지 않은 건강한 이들이었습니다. 구원이 필요하지 않은 지옥의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결코 남을 심판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 자체가 자신이 의인이 되어서 예수님을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이 되겠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때에 이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알게 될 것입니다.
죄인만 구원받습니다. 우리가 항상 죄인으로 머물기 위해서는 예수님께서 우리 행위가 아니라 본성을 보신다는 것만 기억하면 됩니다.
예수님은 간음하는 것을 보시지 않고 음란한 마음이 있는지를 보십니다. 예수님은 살인하는 모습을 보시지 않고 그 사람 안에서 화가 솟아나는지를 보십니다. 화가 나는 것이나 살인하는 것이나 같은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어떻게 죄에서 자유로울 수 있겠습니까? 사실 단 한 순간만이라도 하느님께 감사하지 못하다면 그것 자체가 영원히 후회할 죄입니다.
부모에게 감사하지 못하고 원망하는 것이 불효인 것과 같습니다. 겉모양이 아니라 본성이 자신이라는 것만 알면 우리는 결코 자비 없이는 구원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자비를 받은 사람이라야 자비로울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다는 것 자체가 죄인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죄인이 누구를 심판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기도나 제물이나 봉사가 아니라 바로 ‘자비’ 하나뿐입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세리에서부터 사도가 되었기에 자신이 부르심 받은 이 은총을 기록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도 항상 주님의 자비를 노래하는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자비를 노래하는 사람만이 결코 이웃을 심판하지 않고 자비로울 수 있습니다. 자비를 입은 사람은 자신이 죄인임을 결코 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자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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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9,9-13: “나를 따라라.” 그는 예수를 따라나섰다.
마태오 사도는 본래 로마를 위해 세금을 걷는 세리였다. 이 직업은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매국노와 같은 미움을 받는 직업이었다. 세리였기 때문에 미워하고 좋아하지 않으면서도 어쩔 수 없이 착취당하는 그런 처지였다. 이러한 세리가 예수님께 불림을 받고 예수님의 사도가 되었다. 마태오는 60-90년 사이에 마태오 복음서를 아람어로 저술하여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하였다. 마태오는 동방으로 가서 순교하였다고 하는데 에티오피아나 페르시아에서 순교하였다고 전해진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세관에 앉아있는 마태오를 부르신다. 마태오는 즉시 예수님을 따라나섰다. 마태오는 자기 집에 예수님을 모셔서 음식을 대접하였다. 여기에 마태오는 지금까지 함께 일하며 사귀었던 친구들도 함께 초대하여 식사하였던 것 같다. 아마 그들을 부른 것은 주님을 따라나서기 전에 그들과 인사를 하는 기회를 만들었을 것 같다. 이렇게 예수께서는 죄인들과 세리들과 함께 자리하게 되었고 또 그렇게 된 것을 본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예수님을 비난한다. 제자로 삼는 것도 너무나 큰 죄인인 세리를 뽑고, 노는 것도 그런 부류하고만 논다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 말을 들으시고 한 마디로 그들의 입을 막아버리셨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12-13절)
주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을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 인간이 어떤 처지에 놓여있건 하느님께서는 우리 인간 모두가 당신의 자녀로서 살기를 바라시고 부르신다. 그러나 거기에 대한 응답이 마태오처럼 즉시 일어나서 그분을 따르듯이 응답을 할 것인지 아닌지는 각자 인간의 의지적인 응답에 달렸다. 언제나 하느님 앞에 우리 자신이 부족하고 죄스러운 인간임을 느끼지만, 항상 주님의 가르침으로 되돌아가는 삶, 회개하는 삶이 있다면 그것으로 주님께서는 기뻐하신다. 마태오와 같이 세관에 있는 것이 지금까지 편안하고 안정된 것이었겠지만, 용감하게 그 자리를 떠나 전혀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려고 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언제든지 이렇게 첫발을 내딛기가 어려운 것이다.
내가 이렇게 하면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착각 때문에 우리는 이를 실행하지 못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다. 이러한 생각을 버리고 과감히 일어날 수 있을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을 다시 한번 잘 알 수 있고, 또 변화되어 가는 나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주님의 뜻 안에 머무르려 노력할 때, 우리는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다. 예수님께서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 8,32) 하셨다. 마태오 사도와 같이 매 순간 용감한 결단으로 주님의 부르심에 즉시 응답할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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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1)
지난 5월에 저는 장례예배를 다녀왔습니다. 특별히 인연이 있는 것은 아니었는데 아는 분이 꼭 가야하는 자리이기에 함께 했습니다. 고인의 부인은 고인의 손에 묵주를 걸어 주었습니다. 저는 고인의 손에 있는 묵주를 보고 고인의 부인에게 위로의 인사를 전했습니다. 그렇게 3개월이 지났고 8월에 우연히 카페에서 고인의 부인과 아들 부부를 만났습니다. 고인의 부인은 저를 한번 만나고 싶어 했다고 합니다. 저는 장례예배에 대한 기억을 잊고 있었는데 그렇게 우연히 만나게 되었습니다. 가볍게 인사를 하면서 고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고인과 저의 부친의 기일이 같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고인과 저의 부친은 5월 5일에 선종하였습니다. 고인과 저의 부친이 같은 ‘뱀띠’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고인과 저의 부친은 이름도 비슷하였습니다. 저는 이런 인연으로 고인에 대한 기도를 부탁받았고, 저도 기꺼이 기도를 하겠다고 이야기하였습니다. 사제인 제가 교회의 장례예배에 간 것도 평범한 인연은 아닙니다. 잊고 있던 분을 우연한 기회에 카페에서 다시 만난 것도 평범한 인연은 아닌 것 같았습니다. 새삼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여러분이 받은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 겸손과 온유를 다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사랑으로 서로 참아 주며, 성령께서 평화의 끈으로 이루어 주신 일치를 보존하도록 애쓰십시오.” 우리가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간다면 언제 어디에서 누구를 만나든지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간다면 주님께서는 우리를 구원사업의 동반자로 초대해 주실 것입니다. 독특한 친화력으로 신자들의 마음을 여는 사제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매일 간결한 복음 말씀을 카톡으로 보내 준다고 합니다. 신자들은 신부님의 복음 말씀으로 하루를 시작하니 기분이 좋다고 합니다. 신자들이 김치를 만들면 옆에서 노래를 불러 주기도 하고, 신자들을 위해서 밥상을 차려 주기도 한다고 합니다. 마음을 여는 친화력과 감동을 주는 강론은 공동체에 활력을 준다고 합니다. 깊은 영성으로 신자들의 마음을 여는 사제의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매주 금요일 저녁부터 토요일 오전까지 밤샘 성체조배를 한다고 합니다. 성목요일의 성체조배처럼 교우들은 조를 편성해서 성체조배를 하고 있다고 합니다. 신부님의 영성이 공동체에 위로와 용기를 준다고 합니다. 신부님들이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고 있으니 공동체는 풍성한 결실을 맺을 것입니다.
오늘은 마태오 사도를 기억하는 축일입니다.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던 마태오입니다. 그날은 몸도 좋지 않았을 것 같았습니다. 운명처럼 예수님을 만났고, 예수님의 부르심에 ‘예’라고 응답하면서 따랐습니다. 마태오 사도는 예수님의 부르심에 기쁨 마음을 가졌고, 행동으로 응답하였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이 변하였습니다. 주님의 제자로서 우리에게 주님의 가르침을 알 수 있는 ‘마태오 복음서’를 남겨 주었습니다. 우리는 마태오 복음서를 통해서 주님께서 어떻게 우리에게 오셨는지, 주님께서 하느님 나라를 위해서 어떤 일을 하셨는지 알 수 있습니다. 또한 마태오 복음서는 주님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의 영광을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부활에 대한 희망을 가졌던 제자들은 모두 ‘과거와 미래’를 예수님께 맡겼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과거와 미래 모두를 버렸던 제자들과 함께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가셨습니다. 오늘 제1독서는 우리에게 말해 줍니다.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모두 한분이신 하느님께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는 일의 직책도, 능력도 모두 한분이신 하느님께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를 부르시는 예수님께 마태오 사도처럼 우리도 ‘예’라고 응답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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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친하게 지내던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제가 키가 크지 않았기 때문에 주로 앞 번호의 친구들과 친하게 지냈습니다. 1979년에 입학했으니 벌써 43년이 지났습니다. 같은 교복을 입었고, 방과 후에는 학교에 남아 농구도 하였습니다.
제가 고등학교에 다니던 때는 격랑의 시대였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하였고, 신군부가 등장하였고,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광주 민주화 운동이 있었습니다. 저는 그런 격랑의 시대가 있었다는 것을 신학교에 가서야 알았습니다.
43년이 지난 친구들의 모습을 봅니다. 형준이는 일찍 미국으로 이민 와서 우편배달부 일을 하였습니다. 찬행이는 조경에 관심이 있어서 아직도 조경 일을 하고 있습니다. 정식이는 대학을 중도에 포기하고 자동차 중개업을 하고 있습니다. 달순이는 반도체와 친구가 되어 반도체 회사에서 일하였습니다. 저는 사제가 되어서 지금 미국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같은 학교를 다녔지만, 같은 과목을 배웠지만 친구들이 하는 일은 모두 달랐습니다. 이렇게 흐르는 시간 속에 우리는 익어가고 있습니다.
1982년에 신학교에 입학했습니다. 교가는 이렇습니다.
“진세를 버렸어라. 이 몸마저 버렸어라. 깨끗이 한 청춘을 부르심에 바쳤어라. 성신의 그느르심 아늑한 이 동산에 우리는 배우리라 구원의 Veritas!"
친구들은 10년간 신학을 배우고 1991년 사제가 되었습니다. 31년 동창사제로 지내고 있습니다. 제가 신학교에 다니던 때는 교회에 큰 행사들이 있었습니다. 1984년에는 103위 성인의 시성식이 있었습니다. 성인이 되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 방한하셨고, 시성식 미사를 봉헌하였습니다.
1989년에는 44차 세계성체 대회가 있었습니다. 한국교회는 10년마다 100만 명씩 신자가 늘어나는 성장의 시대였습니다. 같은 신학교를 나왔지만 동창 신부님들의 직책은 많이 달랐습니다. 사제로 지내는 친구, 교구청에서 지내는 친구, 신학교에서 지내는 친구, 장애인 복지시설에서 지내는 친구, 교포 사목을 하는 친구가 있습니다.
저는 뉴욕에서 가톨릭평화신문을 만들고 있습니다. 이렇게 직책은 다르지만 우리는 모두 사제로 지내고 있으며 흐르는 시간 속에 익어가고 있습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부르실 때에 하나의 희망을 주신 것처럼, 그리스도의 몸도 하나이고 성령도 한 분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누어 주시는 은혜의 양에 따라, 우리는 저마다 은총을 받았습니다. 그분께서 어떤 이들은 사도로, 어떤 이들은 예언자로, 어떤 이들은 복음 선포자로, 어떤 이들은 목자나 교사로 세워 주셨습니다.
성도들이 직무를 수행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성장시키는 일을 하도록, 그들을 준비시키시려는 것이었습니다. 받은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 겸손과 온유를 다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사랑으로 서로 참아 주며, 성령께서 평화의 끈으로 이루어 주신 일치를 보존하도록 애쓰십시오.”
우리의 신앙은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시작되었습니다. 신앙인으로서 우리가 하는 직분은 다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겸손과 온유를 다하는 것입니다. 인내심을 가지고 서로 참아 주는 것입니다.
오늘은 마태오 복음사가 축일입니다. 어둠 속에 있던 마태오는, 절망 중에 있던 마태오는, 조롱과 멸시를 받던 마태오는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사랑과 자비의 주님, 용서와 온유의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래서 마태오는 이제 또 다른 세상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세상 무엇보다 소중한 주님의 말씀을 전해 주었습니다.
우리들 또한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되면 좋겠습니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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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우리는 모두>
“예수님께서 그곳을 떠나 길을 가시다가 마태오라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마태오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 예수님께서 집에서 식탁에 앉게 되셨는데, 마침 많은 세리와 죄인도 와서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과 자리를 함께하였다. 그것을 본 바리사이들이 그분의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당신네 스승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 예수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태 9,9-13)
예수님께서는 온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려고 오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복음은, 구원을 받으라고 ‘모든 사람들’을 부르신 ‘초대’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글자 그대로 ‘모든 사람들’입니다. 단 한 명도 제외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구원을 받으라고 사람들을 ‘부르신’ 일과 신앙인들 가운데에서 특별히 열두 사도를 ‘뽑으신’ 일을 구분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마태오 사도의 경우, 예수님께서 그를 신앙인이 되라고 ‘부르신’ 일은, ‘모든 사람’을 부르신 일에 속합니다. 그리고 그를 사도로 뽑으신 일은, 그가 ‘사도의 자격’을 갖춘 사람이었기 때문에 하신 일입니다. 그가 세리였기 때문에 ‘부르신’ 것도 아니고, 세리였기 때문에 ‘뽑으신’ 것도 아닙니다. 마태오 사도의 직업이 세리였다는 것을 부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것은 옳지 않은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을 뽑으실 때 직업 같은 것은 보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의 직업이 무엇이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어떻게 살다가 어떻게 죽었는지가 중요할 뿐입니다. 우리도, 신앙인이 되기 전의 ‘과거의 삶’이 어땠는지는 중요하지 않고, 또 세속에서의 직업이나 지위 등도 중요하지 않고, 신앙인으로서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지만 중요합니다. 다른 사람의 ‘과거의 삶’이나 세속의 직업과 지위 같은 것을 의식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의 과거와 직업과 지위를 의식한다는 뜻이기도 한데, 그런 것들이 인간적인 기준으로 ‘안 좋은 것’이라면, 겸손해지는 계기가 될 수도 있고, 또는 열등감에 빠지는 이유가 될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인간적인 기준으로 ‘좋은 것’이라면, 우월감과 교만에 빠지는 원인이 될 수 있습니다. 열등감에 빠지는 것은 자신을 불러 주신 주님의 은총을 믿지 못하는 것이기 때문에 옳지 않은 일입니다. 우월감과 교만에 빠지는 것은 그냥 ‘죄’입니다. 따라서 남의 과거든지 나의 과거든지 간에, 또 남의 직업이든지 나의 직업이든지 간에 전부 다 잊어버리는 것이 옳습니다. 우리는 오직 신앙인으로서 겸손하고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것에만 집중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참석하신 식사는, 마태오 사도가 예수님을 위하여 베푼 잔치인데(루카 5,29), 아마도 제자로서 본격적으로 예수님을 따라나서기 전에 예수님께 감사드리려고, 그리고 동료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려고 베푼 잔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 잔치를 본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서 세리들과 어울리는 모습만 보았습니다. 바리사이들은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면 부정하게 되고, 같은 죄인이 된다고 생각했던 자들입니다. 그래서 “당신네 스승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라는 말은, “당신네 스승이 세리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을 보니, 당신네 스승과 당신네들은 세리들과 다르지 않은 죄인들이다.”라고 비난하는 말입니다. 이 말에는 두 가지 생각이 들어 있습니다. “나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이다.”라는 생각과 “저자들은 회개해도 소용이 없는 자들이다.”라는 생각입니다. 그 두 가지 생각은 모두 ‘악한 생각’입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도 없고, ‘회개해도 소용없는 죄인’도 없습니다.
“나는 의인이다.”라는 생각은 ‘교만’이고, 교만한 사람은 구원받지 못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회개와 변화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을 거스르는 ‘큰 죄’이고, 그런 죄를 짓는 사람도 역시 구원받지 못합니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라는 말씀과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라는 말씀은, “나는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려고 왔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을 만난다.”라는 뜻입니다. 세리들도, 바리사이들도, ‘구원해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도 만나셨습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라는 말씀은, “형식적으로 하느님을 섬기지 말고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대로 자비를 실행하여라. 그것이 하느님을 제대로 섬기는 것이다.”로 해석할 수도 있고, “하느님은 사람들이 제물 같은 것을 많이 바치기만을 바라시는 분이 아니라, 사람들이 모두 회개해서 구원받기만을 바라시는 자비로우신 분이다.”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구원을 받을지, 또는 못 받을지는 우리가 판단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인간은 모두가 똑같은 처지의 피조물이라는 것만 생각해야 하고, 함께 회개해서, 함께 구원받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남의 회개를 시비 걸지 말고 나부터 회개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대로 사는 것입니다. 즉 자비를 실행하면서 사는 것이고, 동시에 하느님께 자비를 청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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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인천교구 정천 사도 요한 신부님]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부르심이 응답에 앞선다는 사실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이는 관계의 주도권이 우리가 아닌 하느님께 있다는 뜻입니다. 그분께서 불러 주시지 않는데, 우리가 어떻게 응답하고 믿을 수 있겠습니까? 따라서 부르심은 그 자체로 은총의 선물입니다. 이 선물은 특별히 죄인들을 위하여 마련된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그 시대에 죄인으로 취급받던 세리 마태오를 제자로 부르시고, 그런 부류의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시며 식사하십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불편하게 여기는 바리사이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이는 자칫 예수님께서 의인들을 부르시지 않겠다는 말씀으로 오해될 수 있으나, 사람은 누구나 죄인이기에 부르심에서 제외되는 이는 사실 아무도 없습니다. 다만 자신이 건강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의사를 찾지 않듯이, 자기 자신을 의롭게 여기는 사람은 예수님을 찾지 않고 그분의 부르심에도 응답하지 않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여러분이 받은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 겸손과 온유를 다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사랑으로 서로 참아 주며, 성령께서 평화의 끈으로 이루어 주신 일치를 보존하도록 애쓰십시오.” 죄인인 우리가 은총의 부르심을 받아 하느님의 거룩한 자녀가 되었다면, 이제는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삶으로 그 본보기가 되어 주셨습니다. 제자는 스승을 닮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스승께서 온유하시고 겸손하신 분이셨듯이(11,29 참조), 우리도 겸손과 온유를 다하여야 하고, 스승께서 당신 사랑으로 끝까지 제자들을 인내하시고 참아 주셨듯이(17,17 참조), 우리도 형제들의 부족함을 인내하고 참아 주어야 하며, 스승께서 아버지와 하나이셨듯이, 우리도 성령 안에서 서로 일치하여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요한 17,11.20-24 참조) 마태오 사도는 비록 세리였지만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사도가 되어 죽기까지 스승을 닮고자 노력하였던 참된 제자였습니다. 오늘 축일을 기리는 성 마태오 사도를 본받아 우리도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도록 노력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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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강수원 베드로 신부님]
세리 마태오는 다른 공관 복음서들에서 ‘레위’로 소개됩니다.(마르 2,14; 루카 5,27 참조) 주님께서 마치 시몬에게 ‘베드로’라는 이름을 주셨듯이, 레위에게 마태오라는 새 이름을 주신 듯합니다. 마태오(그리스어로 마태오스)라는 이름은 히브리 말 이름 ‘마티트야’에서 온 것으로 ‘주님의 선물’이라는 뜻입니다. 동족에게 세금을 걷어 로마에 바치는 세리였던 그가 제자로 부르심을 받은 일은 정녕 주님의 선물이었습니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마태오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 소명과 응답이라는 이 단순한 장면은 그 자체로 언제나 감동을 줍니다. 예수님께서 사시던 카파르나움(마태 9,1; 마르 2,1 참조)의 세리였던 마태오는 예수님에 관하여 이미 많은 소문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가 평소에 세리라는 수입이 보장된 직업과 매국노라는 비난 사이에서 깊이 고뇌하며 떳떳하고 기쁜 삶을 살고 싶은 열망을 품지 않았다면, 어찌 예수님의 말씀 한마디에 모든 것을 버리고 따라나설 수 있었겠습니까?
하느님의 예언자라고 들어 알고 있던 분께서 죄인인 자신에게 “나를 따라라.” 하셨을 때, 지독히도 원망스러운 그 모든 과거를 온전히 용서받고 새 삶으로 초대받은 그 순간에, 마태오가 느꼈을 전율과 환희가 생생히 느껴집니다.
죄와 부덕함을 인정하며 하느님의 자비에 자신을 온전히 열었을 때, 탐욕과 억압의 장소인 세관이, 그리고 죄인들과 세리들의 식탁이 하느님의 은총이 베풀어지는 구원의 자리가 되었습니다.
주님과 죄인들을 탓하며 구원의 기쁨에서 스스로 멀어졌던 바리사이들이 아니라, ‘부르심받은 사람답게 겸손과 온유 그리고 인내와 사랑을 실천하면서’(제1독서 참조) 우리 모두 주님의 사랑받는 제자로 살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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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은총을 담는 그릇은 우리가 준비해야 한다>
“제 눈에 안경이라” 는 옛말이 있습니다. 남은 우습게 보는 것도 마음에 들면 좋게 여겨진다는 뜻입니다. 물론 자기는 좋게 생각하는데 상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나와 다른 너의 모습을 인정하면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자기중심으로 사는 고집이 살아 움직일 때가 있습니다.
고집 센 어린이들의 비유를 들으면서 남 이야기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루카7,32)는 얘기는 고집을 피우면서 상대편을 그냥 바라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피리를 부니까 장례식 놀이를 하고, 장례식 놀이를 하려고 하니까 결혼식 놀이를 하며 피리를 부는 고집불통의 어린이들은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남이 잘되면 축하해 주고 어려움에 직면하면 같이 아파하고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남이 잘되면 배가 아프고 시기 질투의 마음이 생깁니다. 그리고 잘못되면 고소해 하고 그 기회를 이용하여 나의 잇속을 챙깁니다.
그러고는 사람들로부터 현명한 사람으로 인정받습니다. 세상이 그렇습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다고 합리화해 버립니다. 실은 내가 그렇기 때문에 세상이 그렇게 되어가고 있는데 세상을 탓하는 것이 나의 모습입니다.
오래전의 일인데 구상 시인의 강의를 들었습니다. 청중에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세상이 지랄 같습니까? 사람이 지랄 같습니까?” 너무 적나라한 질문이었습니다. 이어서 “사람이 지랄 같아서 세상이 지랄 같아집니다.” 하셨습니다.
결국 자기중심적인 삶은 우리를 구원으로부터 멀어지게 합니다.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을 너무 금욕적이라고 하여 미쳤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거룩하지도 않고 세리들이나 죄인들과 어울리는 세속적인 사람이라고 보았습니다.
요한은 회개를 촉구하였지만, 사람들은 각자의 잣대를 가지고 판단하고 비판하며 자기 구미에 맞는 메시아, 구세주를 만들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정작 그분께서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습니다.(요한 1,11) 그러나 구원의 길은 자기 자신을 버리고 하느님께로 마음을 돌리는 데 있습니다. 완고한 마음을 버리지 않는 한 구원의 길은 멀고도 멉니다.
아무리 은총이 크다 하더라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사람은 담지 못하고 준비된 사람에게서는 하느님의 지혜가 빛나게 됩니다. 지혜서를 보면 “지혜를 찾으러 일찍 일어나는 이는 수고할 필요도 없이 자기 집 문간에 앉아 있는 지혜를 발견하게 된다.
지혜를 깊이 생각하는 것 자체가 완전한 예지다.”(지혜 6,14-15)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은총은 풍부하고 담을 그릇은 없으니 안타깝습니다. 어서 그릇을 준비해야 합니다.
가득 차 있는 그릇에는 아무것도 담지 못하는 법입니다. 그릇을 비울 수 있는 지혜를 얻어 하느님의 풍성한 은총을 기꺼이 누리시길 바랍니다.
“지혜로운 사람의 눈은 머리이신 그리스도님께 고정되어 있습니다. 빛 속에 거니는 사람이 어둠을 전혀 볼 수 없는 것처럼 그리스님께 시선을 고정시킨 사람은 시선을 헛된 것에 둘 수 없습니다.”(니사의 성 그레고리오)
사랑합니다.
@@ 정채봉 @@
진자와 가짜
진짜 사랑의 주머니 속에는 꿈이 들어 있고
가짜 사랑의 주머니 속에는 욕심이 들어있다
장애물 경주
장애물 경주와 같은 것
출발보다 도착이 중요한 것
사랑의 경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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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부모님께서 돌아가시고 얼마 동안은 꿈에서 계속 뵐 수 있었습니다. 비록 어떤 대화도 나눌 수는 없었지만 꿈에서라도 뵙고 나면 그날 참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러나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나면서 이제는 도통 꿈에서 뵐 수 없었습니다. 보고 싶다는 마음은 간절하나 전처럼 꿈에 뵐 수 없으니, 밤늦게 모임을 마치고 아무도 없는 방에 들어오면 허전한 마음이 밀려오곤 했습니다.
이런 허전한 마음이 밀려올 때, 우연히 인터넷에서 어느 방송 프로그램을 보게 되었습니다. 세상을 떠난 가족의 목소리와 모습을 가상 현실 VR로 구현해서 유가족과 만나게 해주는 프로그램이었습니다. 인공지능 AI의 능력이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동시에 이렇게까지 만나야 할까 싶었습니다. 진짜 사람이 아닌데, 그렇다고 그 영혼이 찾아온 것도 아닌데 이를 보면서 대화를 나누고 또 다짐까지 한다는 것이 과연 진짜 의미가 있을까 싶은 것입니다. 그리고 과학이 죽음의 영역까지 점령하려는구나 싶었습니다.
진짜 같지만, 또 과학 기술의 발달로 앞으로는 더 진짜 같겠지만, 이런 식의 만남은 크게 의미가 없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는 인간이 만든 하나의 영상일 뿐이니까요. 이를 영상으로 보지 않고 진짜 살아 있는 실체로 여기면서 자기가 듣고 싶은 말만 들으려고 한다면, 계속해서 가상의 현실에만 머물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자기가 원하는 세상에만 머물려고 합니다. 편하고 쉬운 길, 아무런 문제가 없는 길, 고통과 시련은 전혀 없는 길, 스스로 생각하고 원하는 대로만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길만을 찾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로 그런 세상이 있을까요? 우리에게 필요한 모습은 주님께서 가신 길을 함께 걸어가는 것뿐입니다. 자신의 욕심과 이기심을 내려놓고 대신 주님의 뜻이 가득 담긴 사랑의 삶을 걸어가는 것이 가장 필요합니다.
오늘 우리는 성 마태오 사도 복음사가 축일을 지냅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카파르나움에서 로마제국을 위해 세금을 걷는 세리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세관에 앉아 있는 마태오를 향해 예수님께서 “나를 따라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을 따르는 것은 모두를 버리는 삶이었습니다. 자신이 그렇게 욕을 먹으면서까지 모으고 있었던 재산을 버리는 것이고, 편하게 앉아 세관을 지키는 삶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세상 끝까지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 멈추지 않고 걸어가야 하는 삶이었습니다. 그러나 마태오 사도는 주저하지 않고 곧바로 일어나 주님을 따릅니다.
지금 자기 삶 안에만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특히 세상 안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주님 안에 머물고 주님과 함께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에서 위로받는 것이 아니라, 전지전능하신 주님께 참 위로를 받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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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함께 먹는 밥>
마태오 9,9-13 (마태오를 부르시고 세리들과 함께 음식을 드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마태오라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마태오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 예수님께서 집에서 식탁에 앉게 되셨는데, 마침 많은 세리와 죄인도 와서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과 자리를 함께하였다. 그것을 본 바리사이들이 그분의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당신네 스승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 예수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함께 먹는 밥>
그저 주린 배만
채우는 것이 아니라
더불어 삶을
함께 이루는 것이니
차린 거 별로 없어도
여럿이 함께 먹어야
밥은 맛날 뿐만 아니라
참으로 밥이지요
함께 밥 먹을 사람 많은
사람에게야
함께 먹는 밥이
뭐 그리 대단할까 마는
아무도 선뜻
밥 함께 먹자 하지 않아
서럽게 홀로
밥알 삼키는 사람에게
함께 먹는 밥은
참으로 꿈같을 테지요
이 자그마한 소중한 꿈
우리 함께 이뤄보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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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어울리지 않는 사람과 어울리는 사랑>
“당신네 스승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
오늘 주님께서는 죄인들과 어울린다고 바리사이들에게 비난을 받습니다. 그래서 어울린다는 말을 가지고 오늘 축일의 의미를 성찰코자 합니다.
어울린다는 말에는 당신에게는 감색 또는 감색 옷이 잘 어울린다는 말처럼 무엇이 서로 조화롭고 좋게 보인다는 뜻입니다.
어울리는 한 쌍이라고 할 때도 격에 차이가 있지 않고 조화로움을 말합니다. 생김새나 신분이나 부 등이 어느 한쪽으로 기울 때 우리는 그들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하잖습니까?
아무튼 주님께서 세관원을 제자로 부르시고 죄인들과 어울린다고 오늘 바리사이들이 비판하는데 주님께서는 그렇게 생각지 않으십니다.
그러니까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은 그들이 보기에 그런 것이고 주님께서는 그들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전혀 생각지 않으시고 그래서 같이 어울리고 한데 어우러지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만과 사랑의 차이입니다. 우리의 시조에 서로 다른 두 시가 있습니다.
“까마귀 싸우는 골짜기에 백로야 가지 마라. 성낸 까마귀가 흰빛을 샘낼세라. 맑은 물에 기껏 씻은 몸을 더럽힐까 하노라.”
“까마귀 검다 하고 백로야 웃지 마라. 겉이 검은들 속조차 검을쏘냐. 겉 희고 속 검은 것 너뿐인가 하노라.”
이 두 시에서 바리사이는 까마귀 노는 곳에 백로가 가지 말라고 하는 것이고, 주님께서는 그런 바리사이의 위선을 지적하시면서 오히려 가서 어울리십니다.
교만은 차이를 얘기하지만 사랑은 필요를 얘기합니다.
교만은 차이가 나는 사람에게 가지 말라고 하지만 사랑은 사랑이 필요한 사람에게 가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교만은 죄인과 어울리면 자기도 죄로 더럽힌다고 겁내는 것이고, 사랑은 자기가 더러워지는 것을 겁내지 않고 씻어주겠다는 것이며, 설사 내가 더러워진다고 해도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깨끗한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랑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당신이 우리에게 오셨다고 말씀하십니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이에 대해 바오로 사도는 주님께서 하느님과 똑같음을 고집하지 않으시고, 우리와 똑같은 죄인이 되어 오셨다고, 그렇게 당신을 낮추셨다는 취지로 필리피서 2장에서 노래하지요.
교만은 영적인 고고함에 집착하지만 실은 죄를 두려워 피하는 약함이고, 사랑은 사랑하지 않는 죄만을 두려워하고 다른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아무튼 어울리지 않는 사람과 어울리는 사랑을, 오늘 마태오 사도의 부르심을 통해 묵상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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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나를 따라라.”>
-홀로와 더불어, 따름의 여정-
모든 종교에 기도가 필수이지만 가톨릭 교회야 말로 기도의 보고寶庫입니다. “가톨릭 기도서”에 순서대로의 네 기도문이 기도의 기초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성호경, 주님의 기도, 성모송, 영광송입니다. 집무실에 들어와 “만세육창” 기도를 바치기전 우선 순서대로 바치는 네 기도문입니다. 사실 가톨릭교회 신자로서의 정체성을 견고히 하는데 십자성호를 그으며 바치는 성호경보다 더 짧고 좋은 기도는 없을 것입니다. 새벽 휴게실에 들렸다 신간서적의 표지 그림과 글자가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땅이 주는 치유의 선물, 맨발로 걸어라, 돈이 안 들고 부작용이 없는 최고의 자연치유요법, 일상의 감기부터 암, 심혈관, 뇌질환, 고혈압, 당뇨, 아토피, 치매, 코로나19 등 질병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다면 지금 당장 맨발걷기를 시작하라!”
정말 바람직한 맨발걷기 운동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기에 반드시 하나 추가하고 싶습니다. “주님과 함께, 주님을 따라 맨발로 걸어라.” 이렇게 의식하면서 걷든다면 걷기는 그대로 기도가 되고 최고의 의사이자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께서 친히 치유해주실 것입니다.
오늘은 성 마태오 복음 사가 축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세리 마태오를 부르는 과정이 극적입니다. 마태오에게는 주님과의 극적인 만남이자 은총의 만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길을 가시다가 세관에 앉아있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십니다. 길이신 주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세관에 앉아 길이신 주님을 기다리는 마태오의 간절한 눈빛을 보셨음이 분명합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에 앞서 마태오의 주님을 찾는 갈망이 우선했음을 봅니다. 주님을 찾는 갈망이 없으면 주님 찾아오시지도 않고 찾아 오셔도 모릅니다. 마태오의 갈망의 눈빛을 일별하자마자 즉시 마태오를 부르십니다.
“나를 따라라.”
마태오는 즉시 일어나 주님을 따랐습니다. “나를 믿어라”, “나를 사랑하라” 말씀하시지 않고 “나를 따라라” 하십니다. 그동안 얼마나 기다렸던 주님이시겠는지요! 부질없는 질문이지만 만약 마태오가 주님의 부르심을 받지 못했다면, 또 우리가 주님의 부르심을 받지 못했다면 그 삶은 어떠했을런지요? 그러니 주님의 부르심은 크나큰 은총임을 깨닫습니다.
누구나 마음 깊이에서는 길을, 빛을, 희망을 찾는 갈망이 있습니다. 살아있다하여 다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참길이자 참빛이자 참희망인 주님을 만나 따를 때 참으로 살아 있다 할 것입니다. 도대체 주님이 아니곤 누구를 따르겠는지요?
“나를 따라라.”
주님은 누구도 무시하거나 차별하지 않으시며 있는 그대로의 갈망을 보시고 부르십니다. 참으로 무시받고 사람 대접 못받던 마태오에 대한 일체의 편견이나 선입견 없이 있는 그대로의 그의 갈망을 보고 부르십니다. 평생 날마다 주님을 따라 나서는, “따름의 여정”중인 우리들입니다. 각자 홀로 또 더불어의 따름의 여정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을 따라 나선 마태오를 당신 제자 공동체에 합류시키는 주님이십니다. 이제 홀로와 더불어, 주님을 따르는 여정에 오른 마태오입니다. 세리와 죄인들이 어울린 제자공동체를 보자 바리사이들은 즉시 제자들에게 이의를 제기합니다.
“당신네 스승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
밥이 하늘입니다. 하늘인 밥을 함께 나누는 식탁 공동체입니다. 예수님의 답변이 명쾌하여 복음적 제자 공동체, 교회 공동체의 진수를 보여줍니다. 그대로 하느님 마음이, 하느님 사랑이 반영된 제자공동체입니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예나 이제나 예수님의 제자공동체, 교회공동체, 수도공동체, 가정공동체는 엘리트 의인들의 공동체가 아니라 죄인들의 공동체, 병자들의 공동체, 참으로 주님의 자비를 필요로 하는 부족한 이들의 공동체임을 깨닫습니다. 회개할 것 없는 의인들의 공동체가 아니라 회개한 죄인들의 공동체라는 것입니다.
죄가 없어서, 병이 없어서 부름받기로 한다면 세상에 부름 받을 사람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도대체 세상에 죄없는 사람, 병없는 사람 어디있겠는지요? 죄를 용서받고 병을 치유받기 위해 부르심을 받은 우리들입니다. 사실 길이자 빛이자 희망이신 주님을 잃으면, 잊으면 누구나에게 뒤따르는 죄요 병입니다.
오늘 제1독서 에페소서는 제자들의 교회공동체의 특징과 삶의 원리를 분명히 밝혀줍니다. 우선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라 말씀하시며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기본적 덕목 지침을 명시합니다.
“겸손과 온유를 다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서로 참아 주며, 성령께서 평화의 끈으로 이루어 주신 일치를 보존하도록 애쓰십시오.”
정말 필요한 덕목이 겸손, 온유, 인내심, 평화, 일치요 이 또한 성령의 선물임을 깨닫습니다. 이어 하나 중심의 공동체의 특성을 밝힙니다.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부르실 때 하나의 희망을 주신 것처럼, 그리스도의 몸도 하나이고, 성령도 한 분이요, 주님도 한 분이시고, 믿음도 하나이며, 세례도 하나이고, 만물의 아버지이신 하느님도 한 분이십니다. 그분은 만물 위에, 만물을 통하여 만물 안에 계십니다.”
한 분 하느님 아버지를 일치의 중심에 두고 더불어 주님을 따르는 순례 여정중의 공동체라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공동체 성원의 내적성장에 관한 말씀도 은혜롭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나누어 주시는 은혜의 양에 따라, 저마다 은총을 받았습니다. 이 사실은 공동체 형제들이라면 누구나 깨닫는 진리입니다. 저마다 받은 고유의 은총들이 상호보완되면서 그리스도의 몸인 공동체의 성장이요 각자의 성장임을 참으로 아름답게 묘사하는 바오로입니다.
“성도들인 공동체의 형제들은 각자 직무를 수행함으로 그리스도의 몸을 성장시키게 됩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모두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한 믿음과 지식에서 일치를 이루고 성숙한 사람이 되며 그리스도의 충만한 경지에 다다르게 됩니다.”
그러니 날로 주님을 따르는 따름의 여정에 충실하면서, 그리스도 안에서 일치를 이루고 성숙한 사람이 되어, 그리스도의 충만한 경지에 이르는 것이 우리 공동체의 궁극의 목표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의 일치와 성숙, 충만한 경지에 이르는데 결정적 도움이 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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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1)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태9,9)
<하느님 감사!>
오늘 복음(마태9,9-13)은 '예수님께서 마태오를 부르시고 세리들과 함께 음식을 드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마태오를 부르십니다. "나를 따라오너라." 그러자 마태오는 일어나 예수님을 따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드십니다. 그것을 본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와서 투덜거립니다. "당신네 스승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태9,12-13)
예수님의 이 말씀으로 당신께서 이 세상 안으로 들어오신 이유를 분명하게 밝히십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신 이유, 그리고 성체와 성혈의 모습과 말씀의 모습으로 매일 우리에게 오시는 이유는 우리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죄인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시대 당시 세리는 자신의 백성들로부터 세금을 거두어 로마제국에 바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유다인들로부터 죄인 취급을 받았던 사람입니다. 그런 세리의 우두머리 격인 마태오를 당신의 제자로 부르십니다. 그리고 그런 죄인들과 함께 어울리시면서 음식을 드십니다.
'하느님 감사!'
우리는 죄인입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드러난 하느님의 완전한 사랑 때문에 죄인입니다. 이 사랑을 믿고 나도 너에게 이 사랑이 되겠다고 약속해놓고 각자의 자리에서 이 사랑에 완전히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죄인입니다.
그러니 내가 죄인이라고 숨거나 작아지지 말고, 그런 나를 부르시는 주님께로 당당하게 나아갑시다!
그리고 나도 너에게 자비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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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나를 따라라.' 그러자 마태오는 일어나 예수님을 따랐다."(마태오 9,9)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세관에 앉아 있는 세리 마태오를 부르십니다. 당시 세리는 죄인 취급을 받았던 인물이니, 예수님께서 죄인을 부르신 것입니다. 죄인인 마태오는 일어나 예수님을 따라나섭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복음(마태오 9,9-23)이 전하고 있는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죄인을 부르러 이 세상에 오셨고, 지금도 그런 죄인들을 부르고 계십니다.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어울리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본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말합니다. "당신네 스승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마태오 9,11)
이 말을 들으신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태오 9,12-13)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
죄인들을 부르시고, 죄인들과 함께 어울리시는 예수님!
저는 이런 예수님을 믿고 따라가고 있습니다. 저는 이런 예수님이 참 좋습니다. 그래서 저는 매일, 아니 매순간 이런 임마누엘이신 예수님 앞에서 죄인임을 고백합니다. 은혜를 받기 위해서.
오늘 독서는 사도 바오로의 옥중서간(에페소서.콜로새서.필리피서.펠레몬서) 중에 하나인 에페소서의 말씀인데,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주님 안에서 수인이 된 내가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여러분이 받은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 겸손과 온유를 다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사랑으로 서로 참아 주며, 성령께서 평화의 끈으로 이루어 주신 일치를 보존하도록 하십시오."(4,1-3)
오늘도, 죄인인 나를 불러주신 자비이신 주님께 깊은 감사와 찬미를 드리면서,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아내려고 애쓰는 자녀들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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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MvroXyWfjA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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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마태오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마태 9, 9)
진실한
사랑에는
조건이 없다.
거부할 수 없는
사랑이다.
사랑을
품고사는
죄인들이다.
용서와 사랑의
복음이 간절한
우리들이다.
죄가 아니라
복음이다.
죄인이 아니라
사랑이다.
사랑의 의미인
함께하는
삶을 우리에게
보여주신다.
함께 먹고
함께 마시고
함께 어울리는
진정한 사랑을
아픈 우리들에게
보여주신다.
삶의 기쁨을
잃어버린
우리들이다.
예수님 친히
복음이 되시어
우리가운데
오셨다.
목마른
우리 역사안으로
들어 오셨다.
복음은
생생한 체험이며
다시 시작하는
이들의 간절한
만남이다.
복음은 오늘을
흔들어 깨운다.
참된 열매는
주님을 끝까지
따르는 따름의
열매이다.
열매의 길은
부르심의 길을
믿고 따르는
것이다.
복음의 힘은
세리였던
한 사람을
복음의 사도로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다.
그 놀라운 힘을
그 가능성을
믿는 것이다.
마태오 사도는
체험한 주님을
기쁘게 기록하여
생생히 우리에게
전하여 준다.
우리는 무엇을
전하고 있는가.
주님의 현존인
복음을 나누는
것이다.
자격이 있어
나누고
따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기에
따르는 것이다.
따르기에
복음이고
열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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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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