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명이 세 번이나 바뀐 등대있는 오붓한 섬, 당사도(唐寺島)
배 닿은 당사도 선창은 한적하다. 방파제에는 온통 눈으로 뒤덮혀 있었다. 물론 사람이 다닌 공간에는 눈이 없지만. 같이 내린 사람이 1톤 트럭 운전석으로 간다. 그리고는 시동을 건다. 우리는 포구 한 번 둘러본다.
포구 주변은 한 마디로 썰렁하다. 포구도 작을뿐더러 배도 눈에 뜨이는 것이 별로 없다. 선착장보다 훨씬 높게 자리해 있는 마을길은 깎아지른 해안 절벽만큼이나 경사가 급하다. 마을은 포구에서 오른쪽 구릉지에 있었다. 포구와 조금 떨어져 있다.
오르막길로 해서 올라간다. 그렇게 급한 경사길은 아니지만 빙판길이라 조심스럽게 올라가야 했다. 빙판길에 차가 올라갈 수 있나 싶을 정도로. 길은 한 번 꺾여 들어가는데 왼쪽에 상수원시설이 있다.
여기에 124m 지하까지 파고 들어가 물을 끌어들여 산 언덕에 있는 물탱크로 보내 저장해 식수원으로 사용한다.
여기서 조금 더 올라가면 오른쪽에 넓은 터가 있고 공사를 하기 위해서인지 컨테이너박스가 있다. 그리고 그 앞에 책읽는 소녀상 동상이 있다. 이곳에 학교가 있었나 했더니 학교는 다른 곳에 있었다고 한다. 즉 발전소 있는 곳이 예전에는 학교터였다고 한다. 이 주위는 온통 밭이다. 그리고 이곳에서 조금 더 올라가면 왼쪽에 밭 한 가운데에 허름한 하얀색 건물이 나타난다. 바로 치안센터인 소안파출소당사도초소. 그러나 지금은 운영하지 않는다. 마을은 이곳을 지나면 나타난다.
차 한 대 지나갈 수 있는 시멘트포장길. 오른쪽에 파란 철판으로 된 창고를 지나면 바로 왼쪽으로 길이 나있다. 이 앞에 안내판이 있다. 한국전력당사도태양광발전소를 알리는 표지판이다. 그리고 이 길 입구에 비석이 하나 있다. 제법 오래된 추모비다. 이 길로 해서 올라간다. 목사님은 나갈 때의 배를 섭외하기 위해 다른 곳으로 가고 나는 일단 당사도등대를 찾아가기로 한 것이다.
이 골목 입구 오른쪽에 장작더미와 함께 큰 솥에 불을 떼우고 있다. 메주를 만들기 위해 콩을 삶는지 냄새가 참 좋다. 잠시 손을 갖다 댄 후 길을 걷는다. 조심스럽게 올라가면 집들이 돌담으로 이루어져 있고 주변은 밭. 집은 그렇게 다닥 붙은 것이 아니고 사이사이에 밭들이 있다. 밭에는 하얀 눈이 눈부시게 한다. 전형적인 어촌구조다. 아래를 내려다보면 집들이 보이고 바다도 눈에 들어온다. 마침 아저씨가 있어 붙들고 물어본다. 마을 현황부터 해서. 예전에는 70여 가구가 있었지만 지금은 30여 가구 정도라고 한다.
조금 더 올라가면 길이 만난다. 이곳이 한국전력 가는 길이자 당사도등대 가는 길 합류지점. 등대 가는 길은 왼쪽으로 이어진다. 갈림길에 당사도 등대 가는 길 표시판이 소박하게 세워져 있다. 이후는 온통 밭이다. 여기까지 마을이고 이후는 임야지대. 여기서 내려다보는 조망도 괜찮다. 그리고 조금 더 올라가면 오른쪽에 물탱크시설이 있다. 이 시설이 아래에 있는 정관을 통해 물을 끌어올려 모아두었다가 각 가정마다 식수를 공급하고 있다. 그리고 여기까지 시멘트포장길이고 이후는 말 그대로 산길이다.
등대로 가는 길은 조용하다. 오솔길 사이로 나무들이 둥근 터널을 이루었다. 한동안 그런대로 산길이 이어지더니 어느 새 길이 바뀐다. 사실 말이 길이지 물길이다. 비가 오면 흘러내리는 그 길. 수로가 등대 가는 길을 하고 있다. 과연 등대원이 이 길로 등대에 갈까 생각할 정도로 험악한 길이다. 아까 아저씨가 30분 정도 걸린다고 하던데. 그리고 고개만 넘으면 그 이후는 편하다고 했는데 언덕을 넘어서니 정말 내리막길이 이어진다. 그러나 그것마저 좋은 길은 아니다. 제법 길게 이어진 산길.
등대 가는 길에는 당숲이 있다. 섬 주민들은 음력 9월 9일에 이곳에서 ‘중구제(重九祭)’를 지낸다.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고 무사안일을 빈다. 신성한 곳으로 여태껏 나뭇가지 하나 꺾지 않으며 모셔왔다.
선착장과 물양장 지을 비용을 마련하려고 섬에 있는 후박나무를 베어냈을 때도 이곳만은 손대지 않았다. 그리고 매년 음력 섣달 그믐날 마을 대표가 목욕재개하고 당에 제례를 올리는 행사로 도서민의 무사와 풍어를 비는 당제가 있다.
마지막 내리막길로 내려서니 조금은 평지가 보이고 주위로 돌담들이 보인다. 이곳에서 보니 저 앞에 등대가 보인다. 그리고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이곳에도 예전에는 마을(?)이 있었다. 4~5채의 집이 있었던 것. 지금은 흔적만 남았다. 이곳을 벗어나면 좌우로 이어진 시멘트길이 보인다. 그리고 흑염소가 몇 마리 묶여 있다. 그제야 분명 등대 가는 길은 다른 곳에 있음을 알았다. 이 시멘트길이 등대원들이 다니는 길이고 내가 온 산길은 일반인들이 다니는 길이었던 것이다.
오른쪽 오르막길로 해서 오른다. 역시 제법 가파른 경사길이다. 사람이 다니지 않았는지 눈이 그대로 발자국이 하나도 없다. 여기에도 후박나무숲 터널이 있고 이곳을 지나면 바로 등대. 역사의 현장인 당사도등대다. 그런데 등대가 두 개나 된다. 왼쪽 큰 등대와 오른쪽 작은 등대가 그것이다.
등대는 섬의 끝자락에 위치해있다. 당사도 남쪽 끝자락이다. 벼랑 끄트머리, 하늘과 바다 위에 떠 있는 것처럼 있다. 깨끗한 정문을 들어서면 공원화가 된 마당이 보인다. 주변을 빙 두른 난간 뒤로 드넓은 바다가 한 눈에 들어온다. 쉼터 옆에 가면 1997년에 세운 ‘항일전적비’가 있고, 옆에 일부가 파손된 일본의 조난기념비가 있다.
1909년 2월 24일 동학군의 일원인 이준화 외 5인이 등대를 습격 일본인 4명을 살해하였는데 이 사건을 기념하기 위하여 1997년 11월 ‘소안항일운동기념사업회’에서 세운 것이 ‘항일전적비(抗日戰績碑)’이고 이 사건으로 일본인 4명이 살해되자 죽은 이들을 기념하기 위하여 일본이 세운 것이 ‘조난기념비(遭難記念碑)’다. 1997년 항일전적비 건립 당시 ‘소안항일운동기념사업회’에서 파손되어 방치되어 있던 비의 일부를 항일운동의 중요 증거자료로 보존키 위하여 ‘항일전적비’ 옆에 파손된 일부를 다시 세우게 되었다. 조난비는 해방 후 파손되어 비의 일부만이 남아있어서 자세한 기록은 알 수 없으나 대략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등대간수가 1909년 적의 흉탄에 쓰러졌기에 이를 후세에 알리고자 1910년 이 비를 세운다.’
“일본은 1876년 체결된 병자수호조약을 빌미로 우리나라에 대한 주요 항구의 개항, 해안측량권, 해도작성권, 개항장에 거주한 일본인의 치외법권 등을 요구하면서 강제통상을 추진하였다. 일본은 이런 무리한 요구를 강행하기 위하여 우리나라 동·서해와 남해에 일본 선박을 항행토록 하였다. 이에 따라 일본 선박의 안전 항해를 돕기 위한 수단으로 우리나라 남단의 자지도에도 1909년 1월 등대를 설치하게 되었다. 이런 일련의 사태를 지켜보고 있던 이 지방 사람들이 의분을 참지 못하고 있던 터에 소안출신 동학군 이준화 선생과 해남 이진 출신 성명 미상의 의병 5~6명이 1909년 2월 24일 자지도등대를 습격 일본인 등대 간수 4명을 사살하고 주요 시설물을 파괴하는 의거를 감행하였다. 이 사건이 일어나자 일본은 헌병 1개 소대 30여 명을 소안에 파견하여 소요에 대비한 후 맹선리에서 1박한 후 철수하였다.
그런데 등대 구내에는 의거 당시 피살된 일본인 조난자를 기념하기 위해 일본에 의해 ‘조난기념비’가 세워졌으나 해방 후 파손된 채 방치되어 왔다. 이 파손된 비에는 ‘등대간수가 1909년 2월 24일 흉탄에 쓰러졌기에 이를 후세에 알리고자 1910년 이 비를 세운다.’는 요지의 글이 남아있다.
이것은 역으로 이 의거에 참가했던 선열들의 애국정신과 이 지방 항일 운동의 치열성을 증언해 주고 있는 중요한 사료로 길이 보존되어야 할 것이다.”
항일전적비에 있는 내용이다. 그리고 이 전적비 앞에 세워진 작은 등대가 원래의 당사도등대다. 따라서 이 등대는 100년의 역사를 갖고 있다. 이른바 ‘자지도 왜인 등대 습격 사건’의 현장이다. 일제가 일본으로의 전쟁물자 수송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지은 것으로, 소안도 사람들이 당사도에 상륙해 일본인 등대지기를 처치한 곳으로 유명하다.
당사도등대는 1909년 1월에 불을 밝혔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가 소안군도 해역을 항해하는 일본 군함과 상선들의 안전 운항을 위해 세웠다. 동학군 이준화 선생 등 의병 6명은 이러한 일제의 침략에 항거하며 등대를 습격, 일본 간수 4명을 사살한다. 이 사건은 1920년대 소안도 항일운동으로 이어졌다. 이들에 대해서는 이후 인근 청산도로 끌려가 한 많은 생을 살았다는 이야기와 독립활동 중 청산에서 체포되어 총살형을 당했다는 이야기 등이 전해지고 있다.
1876년 병자수호조약 이후 일본인들은 우리나라와 통상을 요구하며 주요 항구의 개항을 요구하였는데 일본 상선들이 우리해역을 항해하기 위해서는 등대의 설치가 필요하게 되었고, 부산-인천 방면으로 항해하는 1만 톤급 이상의 대형 선박 및 거문도-청산도-소안군도와 제주 해역에서 목포 방면으로 진입하는 선박을 위하여 광력이 높은 육지초인표지가 필요하게 되어 당사도 남단의 현 위치에 1909년 1월 조선총독부 산하 체신국에서 등대를 건립하였으며, 태평양 전쟁 시 소안도와 보길도 노화도 사이의 협수로가 해군함정들의 군사요충지로 이용되면서 전함들의 입출항 시 주요한 물표가 되었다.
구조는 백원형 콘크리트조로써 내부에는 사다리가 나선형으로 설치되어 있고 외부에도 등롱에 사다리가 설치되어 있다. 그리고 등탑의 높이 8.2m이며 평균해수면으로부터 등고가 95m에 이르는 고지대에 위치해 있다. 이 등탑은 현재 2006년에 등대문화유산(제21호)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
지금의 등대는 태평양전쟁 당시 미군 비행기 공격에 대파되었다가 1948년 새로 지어진 것이다. 2008년 새롭게 단장한 등대는 공원 같다. 높이 21m의 늘씬한 등탑이 새로 세워지고 찾아오는 이들을 위해 의자도 놓고 나무바닥도 깔았고 쉼터도 만들고 벤치도 몇 개 만들어두었다. 건물은 4개의 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등대 끝에 서서 낭떠러지 바다를 내려다본다. 정말 망망대해다. 새로 생긴 등탑에 올라가려고 사무실을 찾았다. 우리나라 유인등대의 대부분이 그렇지만 이곳 역시 소장을 비롯하여 모두 세 명이 3교대로 근무하고 있다. 인사를 하고 찾아온 이야기를 하니 일단 커피 한 잔 대접한다. 그와 등대와 관련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커피 한 잔 다 마신 후 등대원도 하던 일 끝내고는 등탑으로 안내를 해준다. 방명록 하나 작성해달라기에 보니 올해는 내가 첫 번째다. 그래서 ‘당사도등대여! 영원하라!’를 남겼다.
등탑 제일 높은 곳에 올라가서 문을 여는데 잘 열리지 않는다. 눈이 쌓여 문을 막아버렸기 때문이다. 가까스로 문을 열고는 주변을 본다. 그리고 남쪽을 바라보면 여기서 제주도까지 볼 수 있다고 하는데 지금은 날씨 탓으로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대신 지도에도 나오지 않는 ‘차수도’만이 희미하게 보인다. 그런데 나중에 이장과의 대화 중에 제주도가 보이면 그 다음 날 날씨가 좋지 않다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믿거나 말거나지만. 북쪽으로는 소안도와 보길도 일부가 보인다. 그러나 등대를 제대로 보려면 배를 빌려 타고 바닷가에서 바라봐야 한다.
등탑에서 내려와서는 인사를 하고 등대를 나온다. 시간을 보니 9시 40여 분. 정문을 나선 후 시멘트포장길을 따라 끝까지 가보기로 한다. 내려가는 길 주변에 돌담들이 제법 눈에 뜨여 이곳에도 집이 몇 채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돌담도 보통 높이가 아니었다. 아래로 내려갈수록 흑염소들이 제법 보인다. 어미염소는 묶여있고 새끼 염소들은 방목하고 있었다. 이 염소들은 등대에서 키우는 것이라고 한다. 이곳에도 후박나무숲 터널이 있다.
이곳을 벗어나 시멘트길을 끝까지 가면 또 다른 포구가 나타난다. 이곳이 바로 행정보급선이 드나드는 선착장이라고 한다. 등대에는 3개월에 한 번씩 행정보급선이 드나드는데 마을까지는 큰 산을 넘어야 하지만 이 선착장을 이용하면 아주 편하다. 그리고 바로 등대를 방문하고자 하면 이곳에 배를 갖다 대면 된다. 포구에는 별 다른 시설물은 없다. 물탱크와 대합실 정도의 하얀 건물 한 채. 그리고 조그마한 선착장이 전부다.
다시 길을 따라 올라간다. 왔던 산길로 해서 마을로 향한다. 왔던 거리만큼 다시 가야 하는데. 헥헥거리며 오르막길을 올라 언덕을 넘은 후 내리막길. 험한 산길을 내려가다가 목사님을 만났다. 배 섭외가 실패했다고 오후 4시에 있는 여객선을 이용하는 수밖에 없단다. 분명 오후에는 배가 오지 않는다고 했는데. 목사님은 등대로 올라가고 나는 마을로 들어간다.
이어 시멘트포장길로 들어서고 마을 입구에 닿는다. 한국전력당사도태양광발전소. 예전에 이곳에 초등학교 분교가 있었다. 이 섬은 남과 북, 우리나라 역사의 아픔을 그린 ‘그 섬에 가고 싶다’는 제목의 영화 촬영지였는데 영화 속에 보여진 귀성도 학교 운동장이 당사도 초등학교 운동장을 배경으로 찍은 것이라고 한다.
학교는 폐교된 지 10년이 넘었단다. 그 자리에 지금의 태양광발전소가 들어섰는데 2명의 직원이 근무하고 있으며, 태양광60kw(내연75*2)의 시설용량으로 수용가(48호)에 전력을 공급하고 있다고 한다. 발전소 왼쪽으로 난 도로를 따라 언덕을 넘어간다. 포장길이 계속 이어져 있어 뭔가 있을거라는 생각에 계속 걸어간다.
언덕을 넘어서자 서쪽으로 바다가 보인다. 옆으로 보이는 섬이 보길도. 계속 내려가면 축사가 보인다. 양쪽에 축사가 있는데 오른쪽은 완전 개방된 축사지만 왼쪽은 폐쇄된 축사다. 오른쪽 축사에는 돼지 한 마리가 보인다. 계속 내려가면 갯돌해안. 이곳이 감태 바닷가라고 한다. ‘감태 바닷가’는 크고 작은 갯돌로 이뤄졌다. 차르륵 차르륵 갯돌 구르는 바닷가 너머로 하늘과 바다가 맞닿아 있다.
그리고 보길도 앞 바닷가 한가운데 우둑 솟은 바위섬. 바로 ‘복생도(卜生島)’다. 바위 틈틈이 소나무 동백나무를 안고 있어 절경이다. 보길도 십경에 ‘복생풍란향(卜生風蘭香)’이 있다. 어부들이 안개에 길을 잃었을 때 복생도의 진한 풍란향이 길과 방향을 알려줬다고 한다. 마침 눈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그래서 그 뒤로 보길도가 있는데 짙은 안개로 구별이 안된다. 그만큼 날씨가 좋지 않다.
다시 마을로 올라간다. 눈이 왔다가 그쳤다가를 반복한다. 올라면 왕창 오던지. 발전소 뒤로 난 길로 해서 마을 안으로 들어선다. 조상 대대로 치밀하게 쌓은 돌담들. 작은 섬마을에선 그 돌담들이 집을 이루고 있다. 돌담에 감싸인 주황빛 하늘빛 파랗고 빨간 원색 양철지붕 너머 푸른 바다가 내려다보인다.
당사리사무소이자 노인회관. 안에서는 할머니들의 소리가 들려온다. 그 앞을 지나 계속 북쪽으로 간다. 겨우 차 한 대 지나갈 수 있는 좁은 골목길. 사실은 차도 지나다닐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 골목길을 따라 계속 가면 양쪽에 교회건물이 보인다. 이 조그마한 섬에 교회가 두 개나 있나 했는데 그게 아니다. 오른쪽 밭에 있는 동화 속의 건물처럼 잘 만들어진 건물은 다름 아닌 천주교회. 말 그대로 공소다. 건물 하나만 있고 부속건물은 전혀 없다. 그리고 그 맞은편에 있는 것이 기독교인 교회로 등대교회다. 역사는 공소가 오래다.
당사도에 공소가 생긴 것은 1970년대로 올라간다.
기록에 의하면 1974년, 당시 등대에서 근무하던 백남철(본명:시몬) 씨가 마을사람들의 생활이 너무 미신적인데 치우쳐 있어 마을에 신앙적 구심점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매주 일요일 밤 주민들을 등대로 오게 하여 교리를 펼치게 된 것이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이후 완도천주교회 이재홍(본명:힐라리오) 신부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마을 학교를 빌려 사용하면서 본격적인 전파활동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이후 완도천주교회에서 마을에 선박접안 시설이 없는 점을 안타깝게 여겨 ‘천주교구재위원회 한국본부’에 요청하여 선착장 시설이라는 막대한 지원을 받게 된 것이 지금의 선착장이라고 한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본다. 아무도 없는 성당. 조그마한 공간에 양 옆으로 긴 의자 10여 개. 정면에는 제단이 있다. 우리가 흔히 보는 그런 성당 내부의 모습이다. 양쪽 창문이 아라베스크무늬로 해 성당 분위기를 풍기게 한다. 입구 쪽에 아주 작은 한 사람이 앉을 수 있는 공간이 있다. 고해성사 하는 장소다. 성당 안에 걸린 사진을 보니 신자들은 거의 할머니들이다. 신부님과 수녀님이 와서 같이 기념사진을 찍은 것을 액자에 담아 걸어두었다. 성당 안에는 두 개의 난로가 있다.
공소에서 나와 오른쪽으로 이어진 길로 해서 넘어간다. 이곳을 넘어가면 산길이 이어진다. 역시 후박나무로 된 숲 터널을 지나면 오른쪽으로 임야지대가 나타난다. 당사도에는 후박나무가 많은 편이다. 그래서 주민의 대부분은 해산물과 한약재(후박나무 표피)를 채취하여 오랫동안 살아왔다. 그러나 국립공원지정 이후 후박나무 표피채취를 금지하여 많은 주민들이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다.
길과 길 사이에 낮으마한 돌담이 있다. 일종의 안부지점이다. 마을이 있음직한 곳이나 확실하지는 않다. 마을이 아니면 밭이었을텐데 자세히 보니 고구마밭처럼 보인다. 사실 이곳은 고구마가 많이 난다. 예전에는 당사도 사람들은 두 끼가 고구마였고 한 끼는 고구마 반 보리쌀 반 섞인 밥이었다고 한다. 고구마가 식량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1930년경에 처음 고구마가 들어온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어느 때인지는 모르겠지만 누군가가 이 섬에 처음 왔을 때 산이 전부인 섬은 땅이라고 할 게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산을 개간할 수밖에 없었는데 순전히 돌이었다. 물 가두기가 어려웠다. 넓적한 돌을 바닥에 깔고 흙을 다지고, 다시 돌을 깔고 흙으로 다지고, 이러한 작업을 계속해 한 뙈기 논을 만들었다. 한 해에 한 평씩 두 평씩 늘려갔다. 지금은 묵혀 있는 그 논들은 농부가 10년, 20년 개간해서 만든 것이다. 논 하나에 평생을 바친 사람들이 당사도 사람들이다.
양쪽으로 확 트인 공간이라 조망이 일품이다. 왼쪽 바닷가에는 복생도와 그 뒤로 보길도가 오른쪽으로는 소안도가 보인다. 여기서 정면을 바라보면 능선이 좌우(동서)로 이어진다. 올라가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올라가지 않고 중간에 가다가 더 이상 가지 않고 묘지 앞에서 발길을 돌린다.
주변을 돌아보면 해안에는 해식애가 발달하였고, 섬 전체에 난대성 수목들이 우거졌다. 아찔한 벼랑길로 이뤄진 당사도. 섬은 바위투성이 ‘갱번’이 많아 여기저기 해초가 푼더분하다. 돌미역, 자연산 톳, 세모(세모가사리), 우무가사리, 천초 등이 철따라 갱번을 푸르게 채운다. 가장 생기가 왕성할 때 마을 사람들은 공동작업으로 해초를 뜯어낸다. 한 날 한 시에 모여 거둬들이고 그 몫을 나눈다. 오랜 옛날부터 해온 작업이다.
다시 마을 안으로 들어가 골목을 누빈다. 골목이라고 해봐야 집으로 가는 길이다. 그래서 갔다가 다시 나와야 하는 그런 구조. 돌담을 끼고 깊게 이어진 집으로 들어가면 뒤는 밭. 긴 산죽밭이 나타난다. 안에 들어가 밀월을 나눠도 괜찮을 공간이다. 돌고 돌아도 길은 만나게 되어있다.
마을 한 가운데에 ‘동트는 집’이란 간판이 붙은 집이 있다. ‘동트는 집’. 당사도의 하나밖에 없는 민박집이다. 목재로 조립식 건물이다. 선박출입대행신고소를 대행하는 곳으로 ‘당사도길 17-6’번지에 들어섰다. 이곳을 지나면 다시 원점. 추모비가 있는 곳으로 나온다. 그래서 다시 추모비를 바라본다. ‘김해인고김석주공찬송추모비’. 추모비 뒤를 보니 추모의 내용이 적혀있는데 1974년도에 세워진 추모비다.
嗚呼라! 金公은 日帝虐政時에 海南千某氏의 個人所有였든 者只島를 買收하기 爲하여 七個星霜 勞苦中 地主로부터 西紀 1941年 8月 15日字 사드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을 洞民 各 個人 私有財産으로 만드려 地主로부터 小作의 奴隸生活을 免케 한 그 功을 洞民은 追慕하고 千秋萬代永世不忘코저 金公의 讚頌碑를 建立하나이다.
西紀 1973年 8月 15日 者只里洞民一同
당사도에 처음 들어온 시기는 조선시대 선조 때로 청주 황씨가 처음 들어왔으며 그 후 김해 김씨, 전주 이씨 등이 들어와 마을을 형성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비석의 내용에 의하면 원래 이 당사도는 해남의 천 모씨의 개인 섬이었다고 한다. 마을주민들이 소작생활을 하던 섬이었는데 김석주 옹이 일제시대 때 섬사람 몇 명과 함께 지주로부터 이 섬을 매입하기 위해 7년 동안 노력을 하여 마을사람들의 재산으로 만들었다는 이야기다.
마침 앞에 나이 많은 어른이 열심히 일을 하고 있어 이에 대해 물어보니 자세히 이야기를 해준다. 소작을 하면서 이 앞에 원래 앞이 안보일 정도로 무성했던 큰 나무들을 베어다 팔아서 십시일반으로 이 섬을 샀다고 한다. 그게 1941년 8월 15일자로 섬은 완전히 당사도 주민들의 소유가 되었다. 그렇게 하여 지금의 섬으로 만들었고 그것을 추모하여 이 비석을 세운 것이라고 한다.
그 아들이 이곳에 산다고 한다. 이곳에서 가장 큰 기와집이 아들집이라고 한다. 아까 봤던 그 집인데 만나볼까 했는데 병원에 검진검사를 받으러 육지로 갔단다. 김석주 옹의 자식 중에 유일하게 생존해 있는 이곳 유지로 당사도 공소의 회장이자 직전 노인회장이었다고 한다.
눈발이 조금씩 내리는 가운데 아저씨는 계속 축사를 수리하고 있었다. 이 축사에는 세 마리의 소가 있었다. 몇 년 전에 당사도등대를 새로 만들고 복원하면서 흘러나온 양철판 등의 폐기물을 가져와서 활용하고 있었다. 올해 73세라는 최 할아버지는 쉼없이 일을 하는데 버리는 것이 하나도 없다. 언덕 건너편 돼지축사도 최 할아버지 거라고 한다. 이곳에서는 유일하게 소와 돼지를 기르고 거기에다 배도 갖고 있다. 성공한 삶을 사는 분이다. 이 섬에서 태어나서 자란 이 섬의 역사를 잘 아는 몇몇 유지 중의 한 분이란다.
이 축사 옆에는 공동목욕탕이 있다. 옛날에는 시골 어디나 마찬가지였겠지만 이곳 역시 목욕을 할 만한 시설이 없었던 시절. 완전히 노출된 야외목욕시설이다. 제주도에서나 볼 수 있는 그런 목욕탕이다. 아니나 다를까 제주도에서 기증한 것이라 한다. 탈의실에 쓰여진 기증단체의 이름이 잘 안보인다.
할아버지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을 보낸다. 아직도 목사님에게서는 연락이 없다. 등대에서 돌아왔는지 어디에 있는지. 시간은 이미 11시가 넘어버렸다. 할아버지는 말도 잘 한다. 그래서 쉴 틈이 없다. 그러면서도 열심히 일을 한다. 손놀림이 멈추지 않는다. 참 부지런하다는 인상을 준다. 이렇게 하니 이 섬에서 가장 부자가 될 수밖에 없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일이 없으면 일을 만들어서라도 하는 분처럼 보인다. 자식들은 다 육지에 가 있다고 한다.
당사도는 한때 사람(남자) 몸의 두 배설기관을 지명으로 딴 희한한 섬이다. 지금도 뱃사람들 사이에서는 ‘자지도’라 불리고 ‘당사도’라 하면 지금도 모르는 노인들이나 사람들이 많다. 오히려 여기서는 자지도라고 해야 쉽게 알아듣는다. 섬 모양새가 ‘다만 지(只)’자와 비슷하다 해서 생겨난 이름이 바뀌고 바뀌었다. 사연이 많다.
을사늑약 이후 일제가 소안도 맹선리에 소규모 군항을 구축하고 ‘항구의 문’이라 하여 ‘항문도(港門島)’라 했다가 해방이 되고 ‘자지도’란 이름을 되찾았지만 어감이 좋지 않다 하여 1980년대 들어와 당사도라는 이름으로 바꿔 불렀다.
당사도라는 이름이 바뀌게 된 사연도 기가 막힌다. 할아버지가 들려준 이야기에 의하면 전두환 시절의 이야기다. 그때 선거를 했는데 개표상황을 보고하게 되었단다. 할아버지의 표현에 의하면 ‘새파란 처자’의 입에서 ‘자지 %’를 계속 해서 올렸더란다. 전국이 다 보는 방송에 대고 그런 말을 했으니. 차라리 ‘리(里)’라도 붙였으면 그나마 나았을건데 계속 ‘자지 %'라고 표현하는 바람에 그 방송을 듣고 있던 자지도 섬사람들이 노발대발하여 그 새파란 처자를 해고시켰다고 한다. 물론 믿거나 말거나지만. 그 이후 섬에서는 배웠다 하는 사람들에게 섬 이름을 부탁했다. 그렇게 해서 바뀐 것이 ’당사도(唐寺島)‘.
‘당사도’라는 이름의 연유는 해상왕 장보고가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한 통일신라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호남대 정종주 교수(한국풍수지리학회 학술연구원)는 “이 섬이 당나라에서 바라보면 임금 왕(王)자의 형세라 하여 당나라 도인이 임금의 명을 받고 와 임금 왕(王)자 가운데 획의 혈처를 깎아내리고 그곳에 절을 하나 짓는다. 섬 모양을 ‘왕(王)자’가 아닌 ‘구슬 옥(玉)’자가 되게 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당나라의 절이 있는 섬’이라 하여 당사도(唐寺島)가 된 것이다. 다른 견해로는 신라시대 청해진이 설치되었을 때 당나라를 왕래하는 배들이 이곳에 기항하면서 무사고를 빌었다 하여 당사도라 하였다고 전해진다.
당사도는 임철우의 소설을 영화로 만든 <그 섬에 가고 싶다>(1993년)가 촬영됐던 곳. 그래서 할아버지에게 물어보니 이 마을 전체가 촬영지라고 한다. 섬 주민 모두가 단역으로 영화에 출연했다. 가장 많은 뭍사람들이 한꺼번에 섬에 들어왔던 그 때, 잠 잘 곳이 없어 섬 주민들은 자신의 집 방 한 칸을 내줬다.
다시 마을 한 바퀴를 돌아본다. 마을회관에도 다시 가본다. 마을회관에 부착된 마을현황을 보니 가구는 비농어가 2세대 포함하여 모두 26세대다. 아마도 비농어가는 목사부부를 뜻하는 모양이다. 인구는 모두 46명인데 이 중 65세 이상이 28명이란다. 선박은 11척이나 있고 소가 8마리, 돼지가 20마리다. 그리고 해조류양식으로는 김양식이 2곡, 다시마양식이 1곳이라고 되어 있다.
사실 당사도를 포함한 소안면은 전국에서 알아주는 김 생산의 메카다. 물이 맑고 깊은데다가 자연 포자를 써서 길러내는 당사도 김은 품질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좋다. 특히 두 번째 채취하는 ‘두벌김’은 그 빛깔만 보고도 탐내지 않을 수 없다.
당사도의 김양식은 옛 방식이다. 포자를 붙여 김발을 넣는 것이 아니라 포자가 많이 나는 바닷가에 김발을 집어넣어 물결 따라 자연적으로 엉기게 하는 방법이다. 옛 방식을 고집하고 있는 것은 다른 곳에서 탐낼 정도로 바다가 좋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당사도의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작업할 만한 인력이 부족하기 때문으로 알려지고 있다. 지금은 젊은 사람들이 없어 갈수록 작업이 힘겹다. 전에는 70가구가 살았지만 이제 채 30여 가구도 안되는 가구가 마을에 살고 있다.
추운 날씨에 다시 공소로 가서 몸을 푼다. 그리고 잠시 자리에 앉아 있다가 나온다. 공소에는 두 개의 난로가 있긴 하지만 사용할 생각을 못하고 그냥 앉았다가 몇 분 되지 않아 다시 일어나 나온다. 그리고 다시 마을로 가는데 마침 목사님에게서 전화가 온다. 교회로 오라고.
교회에 들어가서 몸을 녹인다. 이곳에 온 지 3년이 된다는 목사님 내외분. 은근히 내게 종교에 대해 강의한다. 냉담자인 내게 교회에 다니라는 의미에서다. 아직도 배편이 해결되지 않은 상황. 객선이 오나 안오나를 알아보기 위해 이곳저곳 물어본다. 오전에 분명히 못 온다고 이야기했던 것 같은데. 객선 선장에게서는 3시 넘어서야 확실할 것 같다는 말만 들었다. 이곳에서 호떡을 먹고 점심 식사를 하고는 다시 나온다.
참으로 막막한 시간이다. 여기서 나가야 다음 대책을 세울 수 있을건데. 그냥 시간만 축내면서 다시 마을을 돌아다니다가 선착장까지 가본다. 그리고 여기저기 구경을 하다가 다시 목사님에게서 전화가 왔다. 이장집에 오라는 말. 배를 구했나 하고 갔지만 막상 이장집에 가니 술판이 벌어졌다. 모두 네 명이 앉아 있는데 아침에 올 때 만났던 그 남자도 있었다. 한전에 근무하는 이 섬 사람이었다. 안주는 푸짐하다. 아까 엄청 잡아온 아구를 각 집집마다 분배하더니 남았는지 그것으로 안주삼아 한 잔 하고 있었다.
배는 없단다. 객선도 없고 이장을 통해 예작도에 있는 배를 구해 이곳을 통해 나갈 배도 공교롭게도 없단다. 이장님은 아예 이곳에서 하룻밤 자고 갈 수밖에 없다고 한다. 목사님도 반 포기 상태. 나도 몇 잔 마셔댔다.
그래도 어떻게 하든 나가야 한다고 고집을 부렸다. 여행을 온 것도 아닌데 여기서 잠을 잔들 새벽에 배가 있는 것도 아닌데 그렇게 되면 내일 이곳을 나섬과 동시에 바로 섬 답사 일정은 끝날 수밖에 없다고 주장.
그렇게 되자 결국 소안도에 있는 권 목사님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사실 이곳에 올 때도 그 배를 이용하기로 했었는데 못온다 하는 바람에 틀어졌던 것이다. 날씨 탓으로. 그래도 꼭 와야 된다고 고집을 부려 그렇다면 오겠다는 확답 아닌 확답을 받아냈다. 그러나 언제 올 지는 모른다. 시간은 4시가 넘어 자꾸 가는데. 이장님과 한 잔 하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이장님은 젊은 측에 속한다. 이번에 새로 이장이 되었단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역시 새로 된 노인회장 집으로 갔다. 그곳에서 잠시 이야기를 나눈 후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배가 오는지 안오는지 확인도 하고. 5시가 다 되어가는 시각인데. 그러다가 저 멀리 배 한 척이 오는 것이 보인다. 그래서 선착장으로 내려간다.
목사님의 친구분인 소안도의 권 목사님이 배를 끌고 열심히 달려온다. 시간을 보니 5시. 완도로 가야 하는데. 소안도에서 출발하는 배를 타기에는 무리가 있을 것 같았다. 소안도에서 5시인가 5시 10분인가에 출발하는데. 이미 5분이 지나 10분을 바라보는데. 소안도에서 노화도까지는 10여 분 거리. 노화도 동천에서 출발하는 배를 타야 했다.
우리가 소안도 부근에 닿았을 때 배는 이미 소안항을 출발했다. 그래서 열심히 배를 뒤쫓았다. 배가 작은 것이기도 하지만 권 목사님이 엄청 속도를 낸다. 그렇게 하여 노화도 동천항에 닿은 것은 5시 18분. 마침 완도 가는 배가 도착하여 승객들을 태우고 있다. 인사를 할 겨를이 없다. 그냥 감사의 말을 전하고는 내가 앞서 배로 가고 목사님이 매표소로 간다.
그렇게 하여 5시 20분에 출발하는 배를 탔다. 우리를 싣고 온 배가 동천항을 빠져나가는데 나갈 때도 속도를 엄청 낸다. 평상시에도 그런 듯싶다. 배가 동천항을 출발한다. 그리고 화흥포항을 향해 순항한다. 날씨는 그다지 나쁘지 않은데 그렇게 호들갑을 떨었다니. 섬사람들의 교통장애다.
화흥포항에 도착한 것은 6시가 채 안된 5시 55분. 노화도에서 완도까지 35분 이상이 걸렸다. 이미 선착장에는 가로등이 다 켜져 있었다. 버스도 와서 대기 중이다. 마침 날씨가 흐릿해서인지 해도 없다. 아니 이미 졌는지도 모르겠다. 여기서 바라보는 일몰도 일품인데 보지 못한다. 차에 올라타서는 완도시내로 나간다. 다음 코스를 위해. 다음 코스는 ‘토도’라는 섬이다. 아직 6시가 채 안된 시각. 바삐 달린다.
첫댓글 소안면 당사도인거죠? 30대 시절에 딱 한번 가본거 같은데..,
이렇게 보니 새롭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