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 기도)
주님,
금요기도회로 위로하여 주시고
새날을 맞이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오늘은 청년들의 기도 모임이 시작되는 날입니다.
비록 한 달에 한 번이지만 이 출발이 주님의 기쁨이 되기를 원합니다.
은혜 내려 주옵소서.
말씀 앞에 나아갑니다.
십자가 보혈을 의지합니다.
거짓된 마음, 간사한 마음을 덮어 주옵소서.
정결한 마음으로 생명의 말씀을 받아먹게 하옵소서.
성령님, 인도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본문)
1.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으로 나를 구원하시고 주의 힘으로 나를 변호하소서
2. 하나님이여 내 기도를 들으시며 내 입의 말에 귀를 기울이소서
3. 낯선 자들이 일어나 나를 치고 포악한 자들이 나의 생명을 수색하며 하나님을 자기 앞에 두지 아니하였음이니이다 (셀라)
4. 하나님은 나를 돕는 이시며 주께서는 내 생명을 붙들어 주시는 이시니이다
5. 주께서는 내 원수에게 악으로 갚으시리니 주의 성실하심으로 그들을 멸하소서
6. 내가 낙헌제로 주께 제사하리이다 여호와여 주의 이름에 감사하오리니 주의 이름이 선하심이니이다
7. 참으로 주께서는 모든 환난에서 나를 건지시고 내 원수가 보응 받는 것을 내 눈이 똑똑히 보게 하셨나이다
(본문 주해)
시편 54편의 표제어는 ‘다윗의 마스길, 인도자를 따라 현악에 맞춘 노래, 십 사람이 사울에게 이르러 말하기를 다윗이 우리가 있는 곳에 숨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던 때에’이다. 그 배경은 사무엘상 23장이다.
다윗은 사울에게 쫓기는 입장임에도 불구하고 블레셋으로부터 그일라성을 구원하였으나 그일라 성 사람들이 자신을 사울에게 넘기려는 것을 알고, 십 광야로 도망친다. 그러자 십 사람들이 또 사울에게 다윗의 거처를 알려주는 것이었다.
1~2절 : “하나님, 주님의 이름으로 나를 구원하시고, 주님의 권세로 나의 정당함을 변호하여 주십시오.
하나님, 나의 기도를 들으시고, 이 입으로 아뢰는 말씀에 귀를 기울여 주십시오.”(새번역)
다윗이 급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는 외침이다.
다윗은 자기 이름의 영광이 아닌, ‘주의 이름’의 영광을 위해 기도한다.
3절 : “무법자들이 일어나 나를 치며, 폭력배들이 내 목숨을 노립니다. 그들은 하나같이 하나님을 안중에도 두지 않는 자들입니다.(셀라)”
‘낯선 자들’과 ‘포악한 자들’은 십 사람들과 사울을 지칭하는 말일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자기 앞에 두지 않는다는 것이다. 새번역에서는 ‘하나님을 안중에도 두지 않는 자들’이라 표현한다.
십 사람들에게나 사울에게나 하나님은 죽은 신일 뿐이었다. 만약 하나님께서 자신을 왕으로 세우시고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심판을 믿는다면 그렇게 행동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윗은 그들 앞에 하나님이 없다고 말한다.
4~5절 : “그러나 하나님은 나를 돕는 분이시며, 주님은 내게 힘을 북돋우어 주는 분이시다.
원수가 나에게 악한 짓을 하였으니, 주님이 내 원수를 갚아 주실 것이다. 주님의 진실하심을 다하여 그들을 전멸시켜 주시기를 빈다.”(새번역)
계속되는 사람들의 배반과 고발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여전히 하나님 앞에 있었다.
비록 상황은 계속되는 도망자의 삶이지만 여전히 자신 삶은 하나님의 도우심 가운데 있으며 자신의 생명도 하나님께 있다고 고백한다.
또한 자신이 원수를 갚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갚으실 것을 믿는다.
그런데 시인은 원수의 멸망을 비는 기도를 한다(5절).
원수에 대해서는 자비 없는 복수를 기원하는데, 이는 인간 본성에 뿌리 박혀 있는 일반적인 성향이다. 이 점에서 이 시편은 구약 신앙의 한계를 보여준다. 그 한계는 인간의 악행과 그에 대한 하나님의 보응이라는 상관관계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를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을 향하여 복수가 아닌, 용서의 탄원을 드렸으니, 신약 시대의 모든 성도들은 구약 시대의 복수를 넘어선 예수님의 용서의 탄원을 따를 것이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눅23:34a)
6~7절 : “내가 즐거운 마음으로 주님께 제물을 드립니다. 주님, 내가 주님의 선하신 이름에 감사를 드립니다.
주님이 나를 모든 재난에서 건져 주셨으며, 나의 이 눈으로, 원수들의 멸망을 보았기 때문입니다.”(새번역)
시인의 탄원은 감사와 찬양으로 바뀐다.
낙헌제(자원제)를 드리겠다고 한다. 이는 하나님의 호의와 선하심에 대해 예배자가 자발적으로 드리는 감사 제사이다.
그리고 확신의 찬양으로 마무리한다.
‘주께서 모든 환난에서 나를 건지시고 내 원수가 보응 받는 것을 내 눈이 똑똑히 보게 하셨다’는 것은 아직 본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인생으로서 믿음의 고백을 드린 것이다.
(나의 묵상)
하나님을 자기 앞에 두는 자와 하나님을 자기 앞에 두지 않는 자의 삶의 모습이 뚜렷한 대조를 이룬다.
하나님을 자기 앞에 두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안중에도 없는 자라는 말이다.
그들은 그저 자신들의 이익을 따라 발 빠르게 이합집산(離合集散)하는 무리들이다.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지가 되어 서로 입을 맞춘다.
자신들을 블레셋에서 구원하여 준 다윗을 배반한 그일라 성 사람들이 그랬고, 유다 지파임에도 불구하고 다윗을 고발한 십 사람들(수15:24)이 그러하다.
물론 그들도 어쩌든지 살려고 한 짓이지만, 살아계신 하나님을 생각했더라면 그와 같이 배반하고 또 신의를 저버릴 수는 없는 것이다. 그들에게 하나님은 죽은 신에 불과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행하는 다윗은 자신의 힘으로 그일라 사람이나 십 사람에게 복수하지 않는다. 자신의 생명을 노리는 사울에게도 그랬다. 그저 도망치고 또 도망칠 뿐이다. 이유는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판단하시고, 심판해 주실 것을 믿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원수에게 악으로 갚아 주시고 그의 멸망을 기원하는 5절이 있다.
“주께서는 내 원수에게 악으로 갚으시리니 주의 성실하심으로 그들을 멸하소서”(5절)
시편에는 자신을 괴롭힌 원수들을 작살내 달라는 저주시들이 있다(시35, 52, 69. 83, 109편). 이런 시편들을 읽으면 당황스럽기도 하지만, 죄성이 가득한 나의 옛사람의 마음은 이런 시편들을 통해 쾌감을 느끼기도 한다.
그래서 때때로 감당할 수 없는 어려움에 나도 이런 솔직한 마음의 기도를 할 수도 있지만, 마음이 편치 않고 결국 주님께 항복한다.
그것은 나의 주님께서 어떻게 십자가 길의 고난과 수치를 당하셨는지, 주님을 못 박은 자들을 그런 중에도 어떻게 용서하셨는지 성경을 통해 알고 있으니, 곧 나의 옛사람의 본성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다.
이는 내가 수준이 높아져서 되는 일이 아니라, 할 수 없다고 반항하고 몸부림치는 나를 성령께서 주관하시니 되어지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을 내 앞에 둔 자, 코람데오의 사람으로 살게 하시는 성령의 인도하심이다.
코람데오!
이 유명한 말의 무게를 다시 한번 묵상하는 아침이다.
(묵상 기도)
주님,
하나님을 안중에 두지 않았던 자가
성령의 이끄심으로 코람데오를 원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수시로 변하는 얕은 마음입니다.
날마다 말씀 앞에 서지 않으면 또다시 주님을 생각하지 않는 자일 것입니다.
상황을 이기는 힘은 코람데오 할 때만 가능하다는 것을 오늘도 가르쳐 주시니 감사합니다.
코람데오!
이 복을 내려 주시니 감사하며
성령께서 한결같이 인도해 주실 것을 믿고 기도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