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춘 땅에 다시 봄이 오면
빗새
신림역 6번 출구를 나오면
사람들의 발길은
강물처럼 하루 종일 흘렀지만
그 곁의 한 땅은
삼십 년 동안
시간을 멈춘 채 서 있었다
한때 백화점을 꿈꾸며
땅속 깊이 기둥을 세우고
벽을 올렸으나
천구백구십육년,
우방건설의 부도와 함께
공사는 한순간에 숨을 멈추었다
땅 위의 계절은
서른 번이나 바뀌었지만
지하 골조는 어둠 속에 남아
오지 않는 다음 공정을
말없이 기다리고 있었다
사람들은 물었다
삼십 년 전의 뼈대가
아직도 건물을 받칠 수 있겠느냐고
다른 회사가 손댄 공사를
우리가 왜 이어야 하느냐고
건설회사의 회의실마다
오래된 콘크리트보다 더 단단한
망설임이 앉아 있었다
나는 정밀안전진단서를 펼쳤다
수치와 도면을 짚어 가며
이 골조는 아직 살아 있다고
보강하면 다시 일어설 수 있다고 말했다
사십 년 넘게
도면과 현장 사이를 걸어온
내 설계 경력도 함께 내놓았다
말만으로 믿어 달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살아온 시간을 걸고
책임지겠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나는
회의실의 닫힌 얼굴들을 향해
거듭 말했다
여기는 신림역 6번 출구에
바로 붙어 있는 땅입니다
수많은 사람이 오가는
서울의 금싸라기 같은 이 땅을
삼십 년째 버려두는 것은
한 사람의 손해도
한 회사의 손해도 아닙니다
집이 들어설 자리
상가가 불을 밝힐 자리
사람들이 일하고 살아갈 자리가
삼십 년 동안
허공으로 사라진 것입니다
도시의 심장 가까운 곳에서
이토록 귀한 땅의 시간을
멈춰 두는 것은
국가적으로도
얼마나 큰 손해입니까
누군가는 이 공사를 이어야 합니다
누군가는 멈춘 시간을
다시 흐르게 해야 합니다
우리는 건물 하나를
새로 짓자는 것이 아닙니다
삼십 년 동안 닫혀 있던
도시의 한쪽 문을
다시 열자는 것입니다
그러나 말은 자주
벽에 부딪혀 돌아왔다
조금 더 검토해 보겠습니다
부드러운 그 한마디 뒤에는
수많은 거절이 숨어 있었다
회의실에서는 웃으며
악수를 나누었지만
돌아오는 차 안에서는
내 한숨만
늦은 저녁의 유리창에
희미하게 번졌다
어떤 날은
하루에도 두세 곳을 찾아가
사업성을 설명하고
미래의 가치를 펼쳐 보였지만
그들의 계산기는
희망보다 위험을 먼저 두드렸고
숫자는 언제나 냉정했다
시공사가 고개를 돌리자
금융도 문을 닫았다
금융이 움직이지 않자
시공사는 다시 뒤로 물러섰다
서로가 서로를 기다리는 동안
사업은 얼어붙은 강처럼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했다
나는 밤마다
사업계획서를 다시 쓰고
공사비와 금융비용
분양수입과 수지분석의 숫자를
수없이 고쳐 적었다
컴퓨터 화면 속 숫자 하나가
올라가고 내려갈 때마다
가슴도 함께 오르내렸다
조금만 더 보완하면
길이 열리지 않을까
그 생각 하나로
밤이 깊어도
불을 끄지 못했다
사람들은 말했다
이제 그만 놓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요즘 같은 때에는 어렵다고
맞는 말이었다
나도 수없이
포기라는 말 앞에 섰다
하지만 신림역 앞에
말없이 버려진 그 땅을 바라보면
삼십 년 동안
누구도 끝내지 못한 일을
다시 외면할 수 없었다
함께 견뎌 온 사람들의 얼굴과
꺼지지 않은 믿음 하나가
나를 다시 일으켜 세웠다
사업은 숫자로 시작하지만
끝까지 끌고 가는 것은
사람의 마음이었다
수많은 문을 두드린 끝에
마침내 한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S건설과의 대화가
조심스러운 검토에서
구체적인 시공의 언어로 바뀌고
L증권과의 협의도
의심의 벽을 조금씩 허물며
신뢰 쪽으로 걸어왔다
작은 변화였지만
내게는 그것이
긴 터널 저편에서
처음 발견한
한 점의 빛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시공은 S건설
금융은 L증권
그 짧은 두 문장이
삼십 년 묵은 어둠 속에
등불처럼 켜졌다
나는 환호하지 못했다
그동안 눌러 두었던 숨이
한꺼번에 풀려나와
오랫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기쁨보다 먼저
안도가 찾아왔고
수없이 돌아섰던 회의실과
늦은 밤의 사무실 불빛
거절 뒤에 삼킨 한숨들이
한 장면씩
눈앞을 지나갔다
아직 공사는 끝나지 않았다
앞으로 넘어야 할 산도
건너야 할 강도 남아 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안다
오래 멈춘 땅에도
다시 시간이 흐를 수 있다는 것을
어둠 속에 묻힌 골조도
누군가의 믿음과 책임을 만나면
새 건물의 뿌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인생은
끝내 포기하지 않는 사람에게
아주 늦게라도
한 줄기 길을 내어 준다는 것을
언젠가 이곳에
높은 건물이 일어서고
창마다 환한 불이 켜지는 날
나는 신림역 6번 출구에서
잠시 발걸음을 멈추리라
삼십 년 동안
버려졌던 땅이 아니라
삼십 년의 어둠을 견디고
마침내 다시 살아난
한 도시의 봄을 바라보리라
카페 게시글
┌………┃빗 새 詩 人┃
멈춘 땅에 다시 봄이 오면
빗새
추천 0
조회 269
26.07.31 04:51
댓글 1
다음검색
첫댓글 진심으로응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