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성 탐구, 관능적 엑스타시, 시적 모험, 새로운 출발의 작가” -노벨문학상 선정 이유
‘영원한 유배자’ 르 클레지오가 말하는 어린이의 세계
2023년 등단 60주년을 맞은 르 클레지오의 작품 세계는 다채롭다. 23세 첫 소설 《조서》로 르노도상을 수상하며 문단에 등장한 그는 현대 사회의 개인이 겪는 실존적 위기와 소통의 단절을 다뤘다. 이후 그의 작품 세계는 크게 세 범주로 나눠볼수 있다. 1960년대 프랑스 문단을 풍미했던 실존주의와 누보로망의 색채가 남아 있는 초기, 1970년 무렵 프랑스를 떠나 중남미 등에 머물며 고대 마야문명과 멕시코사에 매료됐던 시기, 1980년대부터 3대에 걸쳐 한 곳에 뿌리내리지 못하고 이주를 거듭했던 그의 가족사를 다룬 시기. 이 중에서도 가족사를 다룬 시기는 르 클레지오의 자전적 측면이 강하다. 실존 인물의 이름과 성격을 그대로 드러내거나 약간의 허구적 요소를 넣어 ‘소설(roman)’의 장르적 특징을 유지하거나 그 정도는 다양하다.
이번 르 클레지오의 작품은 ‘레시(récit, 이야기)’로 분류된다. 소설(roman)보다는 가볍고, 수필(essai)보다는 무거운 장르를 일컫는데, 르 클레지오의 레시는 보통 서사의 차원에서 소설적 요건을 두루 갖추고 있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이 작품은 자신의 어린 시절을 회고하듯 서술하는 점에서 기존 ‘르 클레지오의 레시’와는 거리가 있다. 첫 번째 이야기 〈브르타뉴의 노래〉에서는 유년 시절을 보냈던 브르타뉴에서의 일화를, 두 번째 이야기 〈아이와 전쟁〉에서는 “인생의 첫 다섯 해를 전쟁 속에서 살았던” 르 클레지오 자신의 제2차 세계대전 시기를 그린다. 두 편의 글은 분명 작가의 어린 시절을 돌아보지만, 작가는 이것이 연대기도 추억담도 회고록도 아님을 분명히 밝힌다. 기억의 변질성을 분명히 인식하면서, 이 이야기는 단순한 ‘개인’의 회고가 아닌 ‘인간’의 본질과 역사에 대한 섬세한 성찰로 이어진다.
“전쟁 중에 태어났다는 것은 본인 의지와 상관없이
그 전쟁의 가깝고도 먼 증인이 되는 것이다.”
왜 르 클레지오는 ‘브르타뉴’와 ‘전쟁’이라는 두 이야기를 한 권의 책에 담았을까? 〈브르타뉴의 노래〉에서 작가는 “태어나지도 않았고, (…) 그저 매해 여름 몇 달 정도만 보냈을 뿐”인 브르타뉴에 깊은 향수를 갖는다. 이는 ‘클레지오’라는 그의 성이 브르타뉴어 ‘클뢰지우(kleuziou)’에서 유래해서 뿐만이 아니라, 브르타뉴의 역사에서 볼 수 있었지만 이제는 거의 사라져버린 고유의 문화와 생명력의 영향이 크다. 한편 〈아이와 전쟁〉에서는 “내 삶의 첫 번째 기억은 폭력에 대한 기억”이라며 전쟁의 파괴적인 이미지를 강조한다. 특히 전쟁 과정에서 그저 ‘부수적 피해’로 분류되는 여성과 아이에 대해, “그들은 피해자가 아니다. 그들은 피해다”라며 소외된 자에 대한 연대의식을 표명한다. 만인의 기억 속에서 흐려지는 “대문자 역사의 주변인”을 이야기하는 과정으로부터 브르타뉴와 전쟁이 만나는 것이다.
“이 이야기를 다시 하고, 기억의 조각조각을 맞추고,
삶의 흐름을 다시 발견하고자 하는 것은 결코 향수에 젖기 위함이 아니다.”
《브르타뉴의 노래·아이와 전쟁》은 르 클레지오의 회고록으로 볼 수도 있지만, ‘회고’처럼 보이는 일련의 이야기에는 무차별 현대화에 대한 비판, 고유한 생명력의 회복 등 우리 시대를 위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실제 서구에서 태어났지만 서구의 틀에서 벗어나 영원한 노마디즘을 추구하는 르 클레지오의 삶이 이러한 이야기에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상대적 약자와의 연대의식 등 르 클레지오의 일관된 가치관에서 독자는 작가의 외침을 더욱 선명하게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찌는 듯한 더위 속에서 잘 구워진 진흙 항아리’를 위하여
_‘독후감’: 최수철(소설가)
그리하여 비로소 우리는 앞에서 제기한 질문에 대답할 수 있을 듯하다. 르 클레지오는 스스로 자신에게 묻고 있다. 심리적 사실주의에 바탕을 두고서, 근원적인 어떤 것에 대한 반성과 숙고를 깊고 넓게 이끌고자 할 때, 더 나아가, 감정을 고양하고, 영광과 기쁨을 누리고, 교훈과 가르침에 귀 기울이고자 할 때, ‘이야기’가 할 수 있는 역할은 무엇일까. 달리 말해, 시간의 화학 작용에 의해 변화되고 변질된 기억에 어떻게 접근해야, 그로부터 현재를 진단할 수 있는 의미적인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까. 작가의 메타포를 옮기자면, ‘찌는 듯한 더위 속에서 잘 구워진 진흙 항아리’는 어떻게 얻을 수 있을까. 어쩌면 그것은 소설 이전의 소설, 혹은 소설 이후의 소설, 이를테면 그야말로 계시적인 “신기루”에 대한 절망적인 노력을 통해서만 가능한 게 아닐까. 그렇게 볼 때, 어쩌면 이 책은 작가가 지금까지와는 조금은 다른 이야기 형식을 시도하는 도정의 시작 그 자체가 아닐까. 그렇다면 우리는 그 도정의 잠정적인 성취로서 르 클레지오의 새로운 작품에 대한 기대감을 가져도 되지 않을까. 분명 그러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