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로새서 4장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문을 열어 주사 그리스도의 신비를 말하게 하여 주사 그리스도의 신비를 말하게 하여 주시도록 기도하라. 이로 인하여 내가 매인 바 되었나니
바울은 골로새의 성도들에게 보내는 편지입니다.
당시 초대 교회는 설교를 도 맡아 담당하는 지금의 목사와 같은 직분이 없었습니다.
감독과 집사와 성도뿐이었습니다. 지금처럼 목사라는 설교를 도맡아하는 사람은 따로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위의 말씀에 나타난 말문을 열어 그리스도의 신비를 말하게 되는 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것입니다.
원래 교회는 공동체로써 목사가 설교를 독점하지 않았습니다. 지금의 한국교회에서는 성도가 말을 하면 안되는 문화같은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신비를 듣지 못하는 손해를 입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제가 예전에 어떤 목사님의 푸념을 들었습니다. 그분은 설교할 것이 없어 그것을 준비하는 것이 스트레스로 여기는 것과 같았습니다. 성도들은 각자가 받은 은혜를 나누고 싶은데 나누지 못하고 목사는 너무 많은 설교에 나눌 은혜가 없어서 고민을 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여자가 조용하여야 하는 것은 맞지만 오직 목사만이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러한 사람의 전통을 한번에 바꾸는 것은 혼란으로 더 손해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하루 아침에 바꾸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성도들의
서로의 은혜를 나누는 장을 늘려가야 합니다. 다행인 것은 지금의 한국교회에서도 소모임을 만들어 성도들이 서로 말을 할수 있는 기회를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 이야기를 다른 사람들과 나누는 것은 교회가 아니어도 충분히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배하기 위하여 모인 자리에서 하나님의 뜻을 나누는 자리인데 교회목사만이 말할 권리를 가지고 성도들은 입막음이 되어 답답하고 그리고 목사는 이제는 더 이상 설교할 것이 남아있지 않은 상태이니 지금의 목사 중심의 교회는 비효율적인 것입니다.
저도 마찬가지로 여기에서 제가 혼자서 주도적으로 말씀을 나누므로 독점적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저는 억지로 글을 쓰지 않으며 누구라도 댓글을 달수 있습니다.
바울이 이것에 매인 바 되었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바울과 골로새 성도와 다른 것이 없는 것입니다.
모두 은혜를 간구하고 그리스도의 비밀을 서로에게 알려주는 영광을 구하고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일에 바울도 골로새성도들도 제 자신도 그리고 이름모르지만 당신도 포함이 되어있는 것입니다.
이는 내가 마땅히 해야 할 말을 하여 신비를 나타내려 함이라.
우리의 생각은 우리 자신과 하나님만이 아십니다. 말로 드러내지 않으면 제 자신안에 그리스도의 신비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알려지지 않고 묵혀버리고 맙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신비를 나타내어야 할 의무이자 은혜이면서 권리인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외부 사람들에게는 지혜로 행하여 시간을 사서 얻으라.
우리는 시간을 살 수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시간이란 다른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신비를 드러낼 시간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복음을 전할 기회를 비용을 들여서 만드는 것이지요. 그 대상은 외부사람들입니다. 아직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에게는 우리가 우리의 시간을 비용을 들이는 노력을 통해서도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전도는 이렇게 이것이 시작이고 마지막입니다. 복음은 전하는 것으로 우리의 몫이 끝납니다.
이런 것에는 비록 시간을 사서 얻지만 많은 돈이 들지는 않고 어려운 일도 아닐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도는 우리가 좁은 길을 가는데에 있어서 하게되는 일들 중에 가장 쉬운축에 드는 일입니다.
너희의 말이 항상 은혜와 더불어 있게 하고 소금으로 맛을 내듯 하라. 이는 각 사람에게 어떻게 대답하는가를 알게 하려는 것이라.
골로새서 4장 3절 4절 5절 6절
소금은 맛이 짭니다. 짜다는 것은 우리의 삶에서는 강한 주장으로 생각하면 맞습니다.
자신의 주장이 약한 사람을 우리는 싱거운 사람이라고 표현합니다. 그 반대의 표현은 따로 없지만
싱겁다의 반대말인 짠맛나는 사람인 것입니다.
복음을 전해보면 이를 갈며 반대하는 사람이 나타납니다. 심지어 믿는 사람도 그렇게 나옵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이 마치 굉장히 비 인권적이고 진보적이지 못한 강요라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것은 사람의 생각의 유행일뿐 아무가치가 없는 속임수와 같습니다.
세상이 진리라고 생각하는 것들은 시대에 따라 계속 변합니다. 대표적인 예가 패미니즘입니다.
사람의 생각과 지혜는 한시적으로 옳을 수 있으나 사람의 철학과 사상은 시대에 따라 틀리고 맞고를 반복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에 진리의 기준을 두면 뒷통수를 맞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영원히 변치않는 것을 붙잡고 매달려야 합니다. 물에 빠졌을 때 지푸라기를 잡으면 안됩니다. 아주 튼튼한 나무를 잡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영원히 존재하는 강력한 기준이 있는데 그 기준이 있음에도 세상의 기준을 잡는 것은 매우 위험하고 세상의 기준은 그 기준을 잡은 사람을 배신하여 죽이게 될 것입니다.
소금이 맛을 내듯이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사람들 사이에 전달하여 드러내야 하며 그 은혜를 나누어야 합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들의 신앙과 영적인 모습이 그들의 대답으로 드러날 것입니다.
그들의 모습은 우리의 책임이나 공이 아니며, 그것은 그의 하나님께서 심판하시거나 상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