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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게시글
♡―탐방후기 사진 등 스크랩 무인석이 있는 오명항의 묘소와 오달제,오윤겸, 김수환추기경의 묘소
산바위솔 추천 0 조회 399 16.05.19 21:09 댓글 3
게시글 본문내용


2016년 5월 17일 (화)


사진은 죽전역 화장실이다. 오명항 선생의 묘를 찾아보기 위해 죽전역에서 광주 방향으로 가는

660번(수원역 출발) 버스를 타고 가다 오산리 정류장(천주교 묘역)에서 내렸다.                   

먼저 찾은 곳은 오달제 선생의 묘. 버스정류장에서 왼편으로 가면 된다.(사진은 대낭장비)

오달제(1609~1637) 선생은 병자호란때 홍문관 수찬으로 재직했다. 인조와 함께 남한산성으로   

피신한 오달제 선생은 윤집,홍익한,등과 함께 끝까지 청나라와 싸워야 한다고 주장하다 청나라로

끌려가 목숨을 잃은 삼학사 중의 한 분 이다. 당시 선생의 나이는 29세 였다.                            

청나라의 수도 심양에서 처형되어 시신도 수습하지 못한 선생의 묘는 후에 손자인 오경원이  

선생이 지녔던 요대와 주머니를 묻어 묘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 사유를 비석에 새겨 세웠는데

 그비가 "대낭장비(帶囊葬碑)"다. 대낭장비는 향토유적으로 지정되어 있다.                                    

선생의 묘 앞에는 두 기의 묘가 있는데 배우자인 고령신씨와 의령남씨의 묘'이다.


묘 앞에 있는 동자석.

비록 시신은 없어도 두 부인 뒤에 혼백이라도 와 있지 않을까 싶다.


고령신씨가 원비, 의령남씨가 계비다.

청나라의 옥중에서 오달제 선생은 아내인 남씨에게 아래와 같은 뜻의 편지를 보냈다.               

  우리 사랑  은혜롭고 두터운 정 서로 만나  2년도 채 못 되었소 이제 만 리 밖에 헤어져 있고 보니 

 백년가약은 다 헛것이 되었구려 길이 멀어 편지도 부칠 수 없고 산이 첩첩하니 꿈길도 더디다오 

                  내 목숨은 점괘로도 모르는 것 부디 뱃속 아이나 잘 돌보구려 (인터넷 펌)                                                

 그러나 유복자는 일찍 죽어 양자를 들여 대를이었다고 해주오씨 종보에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도로에서 본 오달제 (吳達濟) 묘소

오달제 선생의 묘소를 나와 이번엔 원점에서 오른쪽에 있는 해주오씨 선영으로 향 했다.

해주오씨 문중의 사당 외삼문

외삼문 뒤의 건물은 제를 준비하는 건물이고.....


사당 옆에 해주오씨 시조단이 있다.

시조단의 외삼문.

외삼문을 들어서면 비가 1기 있고

위에는 내삼문이 있다.

내삼문을 들어서면 좌우에 문무인석과 망주석이 있고


전면엔 석등과 그 뒤로 조상들의 비가 있다.


무인석과 내삼문 그리고 석등

내삼문과 외삼문 사이의 공간에 있는 비와 석등

시조단이 있는 옆 문으로 나오면 오명항 선생의 묘로 가는 길이 있다.


시조단에서 산 길로 약 10여분 정도 오르면 오명항 선생의 묘가 있다.

오명항(1673~1728)은 현종(14)때부터 영조(4년)때 까지 살았던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인조대에 영의정을 지낸 윤겸의 현손으로 아버지는 수량이다. 오명항은 1728년 3월에 이인좌의  

  난이 일어나자 병조판서 겸 4도 도순무사로서  서울로 진격하던 반란군을 안음과 죽산에서 격파    

 하여 난을 평정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그 공으로 분무공신 1등이 되고 해은부원군에 봉해졌다

이때 어사로 유명한 박문수도  분무공신 2등으로 책봉 되었다. 공신 책봉에 따르는 토지 지급과   

같은 은전은 없었으며 이 분무공신을 끝으로 조선시대의 공신 책봉은 없었다.                           

오명항의 묘 앞에 세운 거대한 비.


오명항의 묘가 특이한 것은 일반사대부나 관료의 무덤에는 관례적으로 세우지 않던 무인석 한 쌍 

을 세웠기 때문이다. 조선 전기에는 한명회의 묘,등 무인석을 세운 묘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으나

김장생 선생이 가례집람을 쓴 이후에는 관료의 무덤에서 무인석이 거의 사라졌다.                     

가례집람에는 1품 이상의 무인이거나 난을 평정한 경우에만 무인석 1구와 문인석 1구를 세울 수 

 있다고 기술해 놓았다.                                                                                                    

오명항 선생의 묘를 바라보며 좌측에 있는 무인상의 모습

키가 2미터는 넘어 보였다. 박문수 묘의 무인석과 키는 비슷하나 몸집은 더 큰것 같았다. 


우측의 무인석

칼에 비해 작은 칼 집.

칼자루에 새겨진 귀면

망주석에 새겨진 세호가 다른 망주석에선 볼 수 없을 만큼 정교하다.



이 곳에 실린 사진들은 크릭하면 모두 크게 볼 수 있다. 세호의 모습을 크릭해 보자.


오명항 묘의 후경

묘 앞의 석물들.

정교한 갑옷의 문양.


장명등과 동자석

동자석의 앞과 뒤



오명항의 묘에서 내려 와

다시 들른 해주오씨 사당.


채밀 중이던 후손이 들어 오라고 하더니

방금 딴 꿀을 먹어 보라며 한 잔씩 줬다.

와! 진짜 꿀 맛이였다.

엄청 진해서 반쯤 먹다 얼음 물을 넣어 희석해서 먹었다. 정말 대박'''



내삼문, 저 안에 사당이 있다.

해주 오씨의 묘역

해주오씨 선영에는 12세 부터 22세까지 11대가 모셔져 있다.













영의정을 지낸 오윤겸 선생의 묘 비를 살펴보는 모습.



오윤겸 선생 묘 앞의 문인석

오윤겸 선생의 묘 비

동자석.






해주오씨 묘역에서 나와 3~4키로 정도 더 위로 올라 가면 천주교 묘역이 있다.

묘역에 있는 성당


이 묘역들을 보며 도로를 따라 정상으로 오르면








사제의 묘역이 나오는데


이 곳에 김수환추기경님의 묘가 있다.


아래에 평사제들의 묘가 있고

제일 윗쪽에 세분의 묘가 있는데 좌로 부터 노기남대주교, 김수환추기경,김옥균 주교 이다.




세분 성직자의 묘 뒷모습. 가운데가 김수환 추기경이 잠들어 계신 곳이다.

사제단 묘소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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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6.05.20 13:43

    첫댓글 좋은곳을 다녀오셨군요.. 자세한설명과함께 무더운날씨에 수고하셨습니다.

  • 16.05.21 07:11

    자세한 설명을 해주셔서 뜻깊게 잘 봤습니다
    역사공부 잘 하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 16.05.21 17:02

    오달제, 오명항님을 알게 되어 의미롭습니다.
    김수환추기경 묘 잘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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