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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사망 | 1850.2.12. ~ 1910.10.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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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에 품은 칼날 같은 마음/ 그 누가 이를 풀어 줄 수 있으랴./ 하늘마저 이미 끝나고 말았으니/ 죽지 않고서 또 무엇을 할까./ 내가 죽지 않고 있으니/ 향산옹(響山翁)이 빨리 오라 재촉하네.
위는 동은(東隱) 이중언(李中彦, 1850.2.12~1910.10.20) 이 남긴 술회사이다. 가슴에 가득 한이 쌓여 덩어리가 되니, 원이다. 비수 같은 덩어리가 되었다. 하늘이 무너졌으니, 다른 길이 달리 없다. 늘 존경하고 의지한 집안 숙부 향산(響山) 이만도(李晩燾)가 24일 단식한 끝에 순국했고, 스스로도 그 길을 따라 나섰다. 그래서 음식 먹기를 끊은 지 12일 되던 날, 이중언이 이 글을 읊었다. 힘들어도 이 길을 가겠노라고.
이보다 열흘 앞선 10월 11일(음 9.9), 곧 단식을 시작하던 바로 다음날, 그는 ‘경고문’을 지었다. 나라가 무너진 마당에 오직 나아갈 길은 사생취의(捨生取義), 목숨을 던져 의로움을 택하는 것뿐이라는 뜻을 선언했다. 내 한 목숨 던져 의로움을 세울 터이니, 동포들이여 나라가 무너졌다고 쉽게 꺾이지 말고 뜻을 세우고 맞서 싸우라는 강한 뜻을 담았다.
나라가 망했다. 이미 그럴 기미도 여러 차례 보였다. 그래서 1881년에는 만인소를 올려 나라가 잘못되고 있다고 지적했고, 1895년에는 의병을 일으켜 싸워도 보았다. 1905년에 외교권을 빼앗겼을 때는 서울로 가서 을사 5적을 목 베라고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 그렇게도 애를 썼건만, 끝내 나라를 잃었다. 그는 역사적인 책임이 있다고 생각했다. 집권 노론세력이나 세도가문처럼 관직을 오래 누리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대과에 합격하여 잠시라도 관직을 맡았다는 생각 때문이다. 나라가 무너진 지금, 이제 그가 택할 길은 의리뿐이라고 여겼다.
하계마을은 퇴계 종가가 있는 상계마을 바로 아래쪽에 있다. 도산서원도 가깝다. 하계는 퇴계의 유적지이자 퇴계가 영원히 잠든 곳이기도 하다. 일찍이 퇴계가 양진암을 짓고 사유하던 곳이자, 1546년에 ‘동암에서 뜻을 말하다’라는 ‘동암언지(東巖言志)’ 두 편을 노래한 곳도 여기다. 더구나 그가 마지막 유택을 정한 곳이 바로 이 마을 뒷산이다. 산소 입구에 버티고 선 동암은 마치 수호신인 듯하다. 이곳에 마을을 연 사람은 바로 퇴계 손자 동암(東巖) 이영도(李詠道)이다.
도산서원 <출처:동은 이중언선생 기념사업회>
동암이 터를 연 하계마을에서 조선후기를 장식한 많은 인재들이 배출되었고, 그들이 남긴 족적은 역사 속에 뚜렷하게 드러난다. 그렇지만 지금 이곳에 서서 옛 모습을 조금이라도 짐작할 사람은 전혀 없다. 1975년에 안동댐이 들어서면서 옛 마을은 사라지고, 그렇게 많던 고택들이 뿔뿔이 흩어지거나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이중언, 사간원 정언(正言)을 지냈다고 해서 ‘정언 할배’로 불리는 그는 철종 원년, 즉 1850년 2월 12일에 하계마을에서 태어났다. 그의 자는 중관(仲寬)이며 호는 동은(東隱)이다. ‘중관’이라는 자에는 너그럽고도 관대하게 살아가라는 어른의 가르침이 담긴 것이라 여겨진다. ‘동은’이라는 호는 그가 살아가는 동안에 사용한 것이 아니라, 생을 마감하면서 후손들에게 알려준 것이었다. ‘동(東)’에서 하계마을을 연 동암 선조의 뜻을 잇는 후손이라는 의미가, ‘은(隱)’에서는 뒤틀린 세상사를 외면하고 조용하게 들어앉은 삶을 살아왔다는 의지가 느껴진다.
진성 이씨 하계파는 학문과 관직이 끊이지 않고 빛을 내뿜은 명가 가운데서도 이름난 가문이다. 동암이 마을을 연 이후 문과에 급제한 인물만 쳐도 15명이나 된다. 대개 지방 출신 문과 급제자를 찾아보면 군 단위로 5,6명이거나 많더라도 10명을 넘는 경우가 흔하지 않다. 그런데 이 마을에서만 15명이나 되니, 글하는 마을이자 선비마을임을 말해주고도 남는다. 5대조 세관(世觀)은 이조참의에 증직되고, 4대조 구원(龜元)은 첨중추부사, 조부 휘제(彙濟)는 부호군, 부친 만우(晩佑)는 첨중추부사를 지내고 이조참판에 증직되었다. 한편 외가는 내앞(천전 川前)마을로, 어머니 숙부인은 김진두(金鎭斗)의 딸이다.
그는 가학을 이어받았다. 하계마을의 학문은 퇴계의 학문을 가장 전형적으로 계승 발전시켜 나간 곳이다. 이만도와 이중언은 동일한 가학 학맥을 잇는 인물로서 더욱 특별한 관계를 가졌다. 뒷날 자정 순국의 길을 함께 걸은 두 사람 관계가 서로 곁에 살았다는 사실만이 아니라 같은 학맥에서도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이중언은 재종숙 이만송의 영향으로 어릴 때부터 도리와 법도를 익힐 수 있었다. 이만송은 문자를 강독하고 해석하는 선에 그치지 않고 충효의 대표적 인물들을 역사 속에서 찾아 가르쳤던 것이다. 이중언은 15세가 되기도 전에 이미 사서삼경에 능히 통했다. 이어서 그는 집안 친척들과 산사로 들어가 본격적인 공부에 매달렸다. 4종숙인 이만규와 3종형 이중두는 함께 입산한 대표적인 친척이다. 이들 두 사람도 모두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을 두루 거치게 되는데, 이만규는 교리, 이중두는 이조참의를 지내게 된다.
이중언은 과거 준비에 심혈을 기울였다. 1872년(고종 9) 향시에 합격하고 1879년(고종 16) 5월에 ‘문과 갑과 제3인’으로 대과를 통과하였다. 상의원 직장(종7품)을 시작으로, 그는 성균관 전적(정6품)이 되고, 이어서 사간원 정언(정6품)이 되었다. 1880년(고종 17) 여름에 그는 사헌부 지평(정5품)에 제수되면서 다시 조정에 들어섰다. 능묘 제사에 책임을 맡아 나아갈 때마다 법도에 한 치도 틀리지 않게 일을 진행했으며, “멀리 떨어진 궁벽한 곳에 사는 한미한 신하가 나라에 보답할 것은 오직 이 한 길 밖에 없다.”고 말하곤 했다. 그러나 이마저도 그리 오래지 않아 그는 고향으로 돌아왔다. 격변의 시대가 눈앞에 닥쳤기 때문이다.
마침 나라를 뒤흔든 사건이 발생하였다. [조선책략]이란 책이 국내로 들어와 그 내용이 알려지자, 곳곳에서 유림들의 반발과 비판이 격렬하게 터져 나왔던 것이다. [조선책략]의 핵심은 러시아 남하를 막아내는 동아시아·태평양 연대를 형성하는 데 조선이 참가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러시아 남하로 말미암아 만주지역은 청국에게 가장 고민스럽고도 위험한 공간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마침 조선이 일본과 조약을 맺고 개항하자, 이홍장은 미국을 끌어들여 청-조선-일본-미국으로 연결되는 대러시아 방어 라인을 구상하고, 이를 위해 조선이 미국과 연대를 형성해야 한다고 요구하고 나섰다.
조선 정부는 청국이 제시한 정책을 수용하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아나갔다. 1880년 여름을 지나면서 정부의 정책 기조가 구체화되어가자, 유림들의 반발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11월 1일 도산서원에서 통문(通文)이 발송되었다. 이것이 ‘영남만인소(嶺南萬人疏)’라고 불리는 거대한 저항운동의 서막이었다. 도산서원이 [조선책략]으로 말미암아 벌어지던 난국에 대처할 방도를 찾자는 논의를 제기하고 나섰다. 도산서원에서 발송된 통문이 영남지역 전역으로 전달되었다. 통문 맨 끝에 발의자 11명 명단이 적혀 있고, 그 속에 이중언이 들어 있다.
1880년 11월 25일, 유림들의 도회가 안동 시내 태사묘에서 열렸다. 이것이 곧 영남만인소를 기점으로 삼은 신사(1881년) 대척사운동의 시작이었다. 퇴계 후손이자 도산서원 상유사이면서 ‘도산서원 통문’ 대표 발의자인 이만손이 도회의 대표로 뽑혔다. 영남만인소는 도산서원 통문과 내용이 대략 비슷하였다. 중국과 친하고 일본과 결속하며 미국과 연합하여 러시아를 막는다는 [조선책략] 내용을 비판하면서 “우리나라는 옛날부터 훌륭한 법규가 있으므로 서학을 수용할 필요가 없고, 황준헌이라는 자가 중국인이라고 하지만 일본 앞잡이”라고 주장하였다. 영남만인소는 개화를 추진하던 민씨 정권의 퇴진을 요구하는 정치적인 성격을 지녔다. 결국 민씨 척족에 도전장을 내밀고 개화정책을 반대한 것이어서, 정부는 영남만인소가 정권에 도전하고 있다고 규정하였다. 때문에 소수 이만손과 상소문을 쓴 강진규가 유배당하기에 이르렀다. 그러자 영남 유생들의 성향은 정치투쟁에서 점차 외세배척·반외세투쟁으로 변해갔다.
이중언이 돌연 산속으로 들어갔다. 1892년 마흔 두 살이라는 나이였지만, 농사지으며 은둔하겠다고 작정하고 산속 생활을 선택하였다. 그래서 찾은 곳은 봉화군 임당산 골짜기, 신암폭포였다. 이곳은 일찍이 퇴계가 찾고 시를 남긴 유적이다. 이 곳에 은거하던 그를 다시 세상으로 불러내는 사건이 터졌다. 1895년 민비(명성황후로 추존)가 시해되고 단발령이 시행되는 극한 상황이 그것이다. 1895년 11월 15일 내려진 단발령은 10여 일 지나자 지방에서도 시행에 들어가기에 이르렀다. 그러자 곳곳에서 유림들이 뜻을 모으자는 논의가 일어났다. 안동문화권에서는 예안에서 가장 먼저 통문이 나왔다.
단발령이 내린 지 14일 만에 예안통문이 나왔다. 대낮에 행인을 붙들어 강제로 상투를 잘라버리는 일이 자행되고, 그것이 지방에도 확산되기 시작했다. 단발령이 예안에 도착한 날이 음력으로 1895년 11월 27일, 즉 양력으로 1896년 1월 11일이었다. 그러자 길을 나다니기가 두렵고, 민심은 격앙되어 갔다. 급기야 곳곳에서 거병을 논하는 통문이 동시다발로 쏟아져 나온 것이다. 그 가운데서도 예안의 통문이 앞섰다.
이중언 선생 영정 <출처: 이중언 선생 후손>
여생을 보내겠다고 봉화 산골로 들어간 그였지만, 민족문제가 발생하자 다시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예안의진, 혹은 선성의진이라 불린 의병에도 참가하고 나섰다. 당시 기록에 ‘선성진’이라거나 ‘청량진’ 등이 쓰였다. 의병항쟁사에서 첫 걸음은 1894년 7월에 안동에서 일어났다. 갑오의병이라 불리는 이 항쟁은 청일전쟁을 일으키기 바로 전에 일본이 경복궁을 점령하여 명성황후를 시해하려고 시도한 만행, 즉 갑오변란에 항거하여 궐기한 것이다. 그러다가 1895년 실제로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단발령이 강행되자 전국에서 의병이 본격적으로 일어나고 1896년 병신년까지 이어졌으니, 이를 을미·병신의병이라 부른다. 이중언이 참가한 예안의병은 바로 을미의병이다.
단발령이 전해진 직후에 예안통문이 발표되고, 12월 11일(양 1896.1.25)에 선성의진이 거병하였다. 안동의진이 거병한 지 8일 뒤였고, 다른 지역에 비해서는 매우 이른 것이었다. 당시 봉화에 우거하고 있던 이중언은 분연히 나섰다. 선성의진은 앞뒤로 네 명의 의병장이 지도해 나갔다. 처음에 의병장으로 천거된 인물은 이만도였다. 그와 이중언은 이웃이자 4종숙이며 같은 줄기의 가학을 이어받은 각별한 사이다. 이만도는 집안 아저씨이자, 학문적 선배요, 과거시험과 관직에서 길잡이였으므로 그가 이끄는 의진에 이중언이 참가한 일은 당연하다. 그런데 선성의진은 거병한 지 8일만에 중단되었다. 그리고 온혜마을 위쪽의 용계 출신이자 1차 선성의진 부장을 맡았던 이중린(李中麟)이 해산 뒤 보름 만에 2차 의진을 조직했고, 이때부터 이중언의 이름이 확실하게 등장했다. 한편 이만도의 제자인 김도현은 영양군 청기 출신으로 일찍이 청량산에서 거병을 모색하던 인물이다. 김도현이 참가하면서 선성의진은 본격적인 전투의병 성격을 띠는 편제를 갖추었다. 그리고 바로 그 편제로 태봉전투를 치르게 되고, 거기에 이중언은 전방장으로서 참전하였다.
선성의진 선발부대는 예안을 출발하여 1차 집결지인 안동 풍산을 거쳐 3월 20일(음 2.7) 예천으로 향했다. 선성의진은 3월 26일(음 2.13) 예천읍내 강변에서 안동권 6개의진과 호좌의진 등 7개 의진 대표가 백마를 잡아 그 피를 마시며 동맹을 서약하고 승리를 기원했다. 예천회맹이라 불리는 의식을 치른 것이다. 그 자리에서 연합의진은 다섯 가지 맹약문을 선택하였다. 역적의 무리가 되지 말 것, 중화제도를 바꾸지 말 것, 죽고 사는 것으로 마음을 바꾸지 말 것, 사적으로 행동하지 말 것, 적을 보면 진격할 것 등이 그 내용이다.
태봉전투는 이틀 동안 벌어졌다. 그 선두에 선성의진이 나섰고, 풍기ㆍ순흥ㆍ영주의진이 뒤를 따랐다. 하지만 일본군의 전투력이 워낙 월등하여 의병들은 밀려났다. 선성의진도 다른 의진과 마찬가지였다. 일본측 자료에도 당시 일본군수비대와 응원군 2개 분대가 증파된 가운데 7천명과 치른 전투에서 의병 전사자가 30명에 이른다고 보고되었다. 29일 밤에 의병들은 대체로 예천으로 후퇴하였다가 출신지에 따라 흩어졌다. 선성의진은 용궁으로 갔다가 학가산으로 이동하고, 녹전을 거쳐 예안으로 돌아온 날이 3월 31일(음 2.18)경이었다.
일본군과 관군이 본격적으로 예안에 밀려들자 선성의진은 청량산으로 들어갔다. 청량산 산성을 기지로 삼고 버티자 일본군과 관군은 의병 근거지를 없애려 나섰다. 5월 31일(음 4.20)에 청량산 오산당이 불태워지거나, 심지어 그 전 날 퇴계종가에 불을 질러 1,400권 문서와 책이 소실된 일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중언의 집에서 멀지도 않은 상계마을 큰 종가에 방화사건이 일어났으니 모두들 황망하기 그지없는 사태가 아닐 수 없었다. 그 난리를 겪은 뒤 열흘 지난 6월 10일(음 4.29)에 2차 선성의진은 해산하였다.
을미의병이 끝나고서 이중언은 다시 신암폭포 아래 은거했다. 그가 다시 역사의 무대로 나타난 것은 일제에 외교권을 강탈당한 박제순-하야시 억지합의(을사조약·을사늑약) 소식 때문이다. 그는 광무황제에게 상소문을 올리기로 작정하고 소장(疏章)을 지었다. 그 제목이 ‘청참오적소(請斬五賊疏)’, 즉 ‘다섯 역적의 목을 베소서’이었다. 그리고는 조카 이빈호(李斌鎬)를 대동하고 서울로 향했다. 이에 앞서 옆집에서 이중업(李中業)이 부친 이만도(李晩燾)가 쓴 상소문을 갖고 서울로 향했다. 다리가 부어 제대로 걷지 못하는 아버지를 대신하여 이중업이 상경한 길이었다. 상소문을 써서 아들 이중업에게 상경하여 소를 올리게 하였다. 둘은 동시에 상소문을 대궐에 제출했다.
그는 ‘다섯 역적의 목을 베소서’라는 상소문에서 먼저 역사적 원수인 일본을 끌어 들인 잘못을 지적했다. 그러면서 일본이 강압함에도 불구하고 강제 병탄의 앞 단계로 가는 일제 정책을 단호하게 거부한 황제의 의지를 그는 높이 평가했다. 그렇다면 당연히 다섯 역적을 처형하는 일이 다음 순서라고 그는 천명하면서, 그 길이야말로 안으로 안정을 가져오고, 밖으로 조약이 거짓이라는 사실을 국제적으로 확인시킬 수 있다고 확언했다.
나라가 무너지는 것을 붙들 수도 없다. 의병도 일으켜 싸워보았고, 외교권을 빼앗길 때는 다섯 도적의 목을 베라고 상소도 올려 보았다. 그러나 어느 것 하나 이루어지지 않았다. 왜적을 막아 나라를 되살릴 길이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문을 걸어 잠그고 잠적한 채로 살았다. 이웃 어른 이만도는 산으로 들어갔다. 세상만사가 뒤틀려 어느 하나 바르게 돌아가는 것이 없는 나날이었다.
청참오적소 상소문.
<출처: [순절지사 이중언], 경인문화사>
국치(國恥), 마침내 나라를 잃었다. 1910년 8월 29일, 나라가 망했으니, 하늘이 무너진 것이나 한 가지다. 만 60세를 맞은 이중언, 목 놓아 통곡하던 그는 “을사년 조약이 강제로 체결된 이후 오로지 한 올의 명주실과 다를 바가 없이 목숨을 영위해온 사람이다. 나라가 이 지경에 이르게 되었으니 내가 어찌 감히 살아있는 인간으로 자처하겠는가.”고 말했다.
나라를 잃은 1910년 가을, 온 세상은 어둡고 갈 길은 보이지 않았다. 문을 걸어 닫고 세상과 발을 끊은 이중언은 갈 길을 가늠하고 있었다. 결국 자정순국이 유일한 길이라는 생각을 굳혀 나갔다. 나라의 자존심을 살리고 겨레의 가슴에 결코 꺾이지 않는 힘을 불어 넣겠다는 생각이었다. 그 날이 대개 9월 9일(음 8.6)이라 생각된다. 두문불출하며 각오를 굳혀가던 무렵에 마침 들려온 향산 이만도의 단식 소식이 그로 하여금 마지막 결단을 내리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이만도가 재산 묘막에서 단식에 들어간 지 나흘 뒤인 9월 21일(음 8.18)에 소식을 들은 이중언은 “과연 우리 숙부다”라고 외쳤다. 그는 이미 향산이 단식에 들어가리라 짐작하고 있었던 것 같다. 향산이 단식한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놀라 벌떡 일어나서 “우리 숙부니까 이런 일을 하시는 것이다. 나는 숙부의 이런 결행이 있으리라는 것을 진정 입산하시던 날부터 짐작하고 있었다. 훌륭하신 일이 아닌가! 통쾌한 일이 아닌가!”라고 말했다는 대목에서 확인된다.
마침내 10월 10일(음9.8) 이만도가 순국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는 마음에 새겨둔 그대로 밀고 나아갔다. 이승에서 마지막 인사를 드리러 조상의 사당을 찾아 나섰다. 마침 바람이 매서운데다 물마저 차가워 아들과 조카들이 가마를 타고 다녀오길 권했다. 그러나 그는 “내 몸이 상처를 입어 손상되었는데 어찌 발이라고 해서 아까워하겠는가.”라 말하고는 걸어서 강을 건너가 사당 앞에 엎드려 곡했다. 그리고는 곧바로 임북산에 있는 부모 묘소를 살핀 다음 큰 종가 이하 모든 선조들의 사당을 두루 찾아가 참배했다.
선조들에게 자신의 의지를 고하고 돌아온 순간이 단식 시작점이었다. 귀가하자마자 집안사람들이 권한 미음도 받지 않았다. 그가 단식을 선언하자, 부인과 아들은 당연히 만류하고 나섰다. 그러나 그의 뜻은 단호했다. 아들 서호(瑞鎬)가 울면서 고하였으나 한 치 흔들림도 없었다. 또 맏사위 김만식의 숙부인 김소락(金紹絡)이 찾아와 “황제로부터 받은 은총이 향산보다 적으니, 굳이 향산을 따라 단식할 필요가 없지 않겠습니까?”라면서 간곡하게 말렸다. 이에 이중언은 “부인의 수절 여부도 남편의 은공 차이에 따라 결정되는가?”라고 되물었다.
동은실기 내용 중 순국과정을 기록한 고종록. <출처: [순절지사 이중언], 경인문화사>
이중언은 단식을 시작한 다음날인 10월 11일(음9.9) 일제를 향해 ‘경고문警告文’을 썼다. 여기에 자신이 단식순국을 결행하는 이유와 목표를 분명하게 드러냈다. 그는 먼저 짐승 같은 무리들의 위협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의리’뿐임을 강조했다. 또 우리 동포가 모두 여기에 매진하여 일제 강점을 용납하지 않도록 하는 초석이 되겠다는 뜻을 밝혔다.
단식을 시작한 지 12일째 되던 10월 21일(음9.19), 족손(族孫)이자 선성의진에서 활약했던 이선구(李善求)에게 “옷을 칠한 좋은 관은 쓰지는 말라”고 당부하며, 시를 읊었다. 이것이 앞에서 본 ‘술회사’다. 칼날 같은 마음을 풀지 못하는 처지를 탄식하면서, 순국한 이만도가 자신을 어서 오라 부르고 있다고 읊었다.
며칠 뒤 그는 상복차림으로 대기하던 친족들에게 일일이 뒷일을 당부하면서 작별인사를 나누었다. 염습도 얇게 하고, 장례도 달을 넘기지 말고 간단하게 치르라는 것이 그의 당부였다. 맏딸이 와서 울고, 사위들이 안타깝게 인사드렸다. 보름이 지나니 목이 막혀 말하기 힘들어졌다.
10월 4일(양 11.5) 일본 순사 3~4명이 조사한답시고 방문하여 음식을 강제로 권하라고 요구했다. 혼미해 있던 그가 갑자기 일어나 곁에 있던 사람에게 “너는 저런 놈들을 빨리 쫓아내지 않고 뭘 하느냐. 내가 당장 저놈들을 칼로 베어 죽이리라.”고 했다. 정신을 잃어가던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의 기개는 서릿발 같았던 것이다. 임종이 가까워짐에 따라 시자(侍者)가 상투의 끈을 정돈하고 수염과 머리를 빗긴 다음 손을 들어 옷깃을 여미고 반듯하게 눕히니 숨을 거두었다. 단식을 시작한 지 27일 만인 10월 4일(양 11.5), 저녁 6시 무렵이다. 이렇게 그는 세상을 떠났다.
숨을 거두기 앞서, 그는 글을 남겼다. 자신이 세상을 떠난 뒤에 펼쳐보라고 가족들에게 일러준 봉서(封書)였다. 거기에 담긴 글이 바로 ‘경고문警告文’이다. ‘규범이 무너진 세상이라면 삶을 포기하는 한이 있어도 의리를 지켜야 하는 것이 성현의 가르침’이라는 점을 밝히면서, 우리 겨레가 힘써 매진할 때임을 일렀다. 바로 그 글 아래에 ‘동은(東隱)’이라는 호가 적혀 있었다. 이 세상을 떠나면서, 자신의 삶과 뜻을 담아낸 것이 바로 이 ‘동은’이라는 호였다. 동암 선조가 터를 잡은 마을, 그 마을을 지켜보던 ‘동암’ 바위 아래에서, 조용히 은거하고 살아간 선비가 바로 ‘동은’이었다. 그는 그렇게 불리고 평가되기를 원했던 것이다.
안동하계마을 독립운동기념비. <출처: 이중언 선생 후손>
1910년 늦가을 하계마을은 온통 잿빛이었다. 이만도가 단식한 지 24일, 그리고 이중언이 그 길을 따른 것이 27일이었으니, 50일을 동안 하계마을은 무거운 침묵에 휩싸였다. 뜻을 세우고 떠나는 두 어른을 보내고, 또 장례를 치러야 하니, 온 집안이 석 달이나 침묵과 통곡을 이어갔다.
이중언의 영향을 받은 인물로서 독립운동에 나선 사람으로는 맏사위 김만식이 대표적이다. 그는 내앞마을 도사(都事) 김진린(金鎭麟)의 차남 김효락(金孝洛)의 둘째 아들이다. 백부가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벌인 백하(白下) 김대락(金大洛)이요, 큰 고모부가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이다. 김만식은 큰 고모부를 도와 대한협회안동지회 설립에 참여하면서 본격적으로 구국운동에 나섰다.
안동문화권에는 스스로 삶을 마감하는 인물들이 줄을 이었다. 이만도가순국하기 하루 앞서 10월 9일, 와룡에 살던 권용하가 나라가 망한 소식을듣고서 기둥에 머리를 부딪쳐 자결하였다.
이만도의 순국 소식을 들은 봉화군 춘양면 내곡마을의 이면주가 9일 뒤인 10월 19일 음독 자결하였다. 물론 이때는 이중언이 단식에 들어가 있던 때였다. 또 나라가 망하고 종묘가 훼철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하회마을 류도발 은 절명시를 남기고서 음식을 끊은 지 17일 만인 10월 26일(음9.24) 순국하였다. 단식 시작 날짜가 바로 이만도가 순국하던 날이다. 또 풍천 출신이면서 도산 토계에 살던 진사 이현섭은 “내 차라리 목이 잘릴지언정 어찌 오랑캐의 백성이 될까보랴”라는 시를 남기고 단식했고, 21일 만인 11월 26일(음10.25)에 순절하였다. 풍산 소산 출신 김택진은 이강년의진에 참가했던 인물인데, 역시 나라가 망하자 가족들에게 “천만금이 생겨도 친일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단식한 끝에 11월 28일(음10.27)에 만 36세라는 젊은 나이로 순국하였다.
이중언의 생애는 크게 두 시기로 나뉜다. 만 60년 일생 가운데 전반기는 학문적 성장과 과거 시험 준비, 그리고 대과합격이 주류를 이루었고, 후반기는 나라가 무너지는 과정을 온 몸으로 버티면서 자신이 담당할 역사적 몫을 다하려 혼신의 힘을 쏟아 부은 나날이었다. 30대에 척사운동, 40대에 의병항쟁, 50대에 다시 척사운동, 그리고 60에 자정순국으로 그의 생애를 간략하게 표현할 수 있겠다.
당시 나라가 무너져 가던 그 시절, 민족지성이 선택한 길은 두 갈래였다. 하나는 전통을 계승하면서 나라를 붙들어 세워보려는 길이었고, 다른 하나는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여 혁신적인 변화 속에 새로운 틀을 만들어 보려는 것이었다. 이중언은 바로 전자의 길을 걷다가, 나라가 무너지자마자 함께 산화해 간 민족지성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가 선택하고 걸은 길은 오직 대의명분과 의리에 바탕을 두었다. 무엇이 옳은 길인지, 그는 그것만 묻고 답하며 살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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