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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03. 묵상글 ( 연중 제4주간 토요일. - 듣는 마음.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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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03. 연중 제4주간 토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듣는 마음
“저는 어린아이에 지나지 않아서 백성을 이끄는 법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니 당신 종에게 듣는 마음을 주시어
당신 백성을 통치하고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오늘 열왕기는 솔로몬의 청원 기도로서
듣는 마음과 분별 능력을 주십사고 청하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나는 무엇을 주십사고 청할까 생각해봅니다.
나도 듣는 마음을 주십사고 청해야 할까?
분별의 능력을 청하는 것은 안 좋지 않을까?
그리고 듣는 마음보다 사랑을 주십사고 청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이런 생각들이 왔다 갔다 합니다.
그러면서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을 달라는 것은
여러 면에서 문제가 있지 않나 하는 생각도 합니다.
우선 불교의 가르침과 비교하여 문제가 있지 않나 생각이 됩니다.
불교에서는 분별심이나 분별지를 안 좋은 것으로 얘기하지요.
이 분별심과 분별지에서 악이 발생하고 불행이 시작된다고 얘기하지요.
지어낸 얘기겠지만 인도에 어떤 사람이 갔을 때 한 식당에 들어갔더니
종업원이 바닥을 닦던 걸레로 식탁을 닦더랍니다.
그래서 어떻게 걸레로 식탁을 닦느냐고 따지니
그 종업원은 아직도 당신은 구별하느냐고 오히려 어리석다고 하더랍니다.
유달리 더러운 것과 깨끗한 구별하는 사람,
그래서 결벽증이 있다고 할 정도로 조금의 더러움도 못 견디는 사람은 불행하지요.
그리고 다 좋은 사람이 행복하지
이것은 좋고 그래서 저것은 싫은 사람은 불행합니다.
그러니 이런 선악 분별심은 청할 것이 못 되고,
솔로몬이 청하는 선악 분별심이 의미하는 것이 뭔지도 잘 알아야 합니다.
여기서 선악은 하느님의 선과 악입니다.
자기중심의 선악 곧 내가 좋아하는 선과 내가 싫어하는 악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좋아하시는 선과 하느님께서 싫어하시는 악을 말하는 것입니다.
솔로몬이 주십사고 청하는 선악 분별력은 바로 하느님의 선과 악을 분별하고,
나의 선과 악이나 세상의 선과 악과도 분별하는 능력입니다.
비근한 예로 우리는 마약은 주십사고 청하고 약은 쓰니 싫다고 하잖습니까?
솔로몬은 또한 듣는 마음을 주십사고 청합니다.
이것 참 훌륭한 자세입니다.
우리는 흔히 들으려고는 하지 않고 들으라고 하고,
통치자들은 더 백성의 소리를 들으려 하지 않는데
솔로몬은 듣는 마음을 달라고 하니 말입니다.
그런데 백성의 소리를 들으려는 마음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하느님의 음성을 들으려는 마음이지요.
다른 사람의 소리를 들으려 하지 않는 것도 문제지만
귀가 너무 얇아서 하느님의 음성은 듣지 않고,
그저 인간의 이런저런 소리를 분별없이 듣는 것도 문제입니다.
그래서 유혹하는 소리와 달콤한 소리에 하느님의 선악 분별력을 잃게 되고
백성들의 소리에서 하느님의 음성을 듣거나
그 반대로 하느님의 음성을 듣고 사람들의 소리를 가려듣지 못하게 됩니다.
하느님을 잘 믿는 사람 그리고 기도를 잘하는 사람은
사람들의 소리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줄도 알고,
기도 안에서 사람들의 소리를 분별할 줄도 아는 사람이겠지요.
아무튼 듣는 마음을 달라는 솔로몬의 청원에서
위에서 명령하는 것이 아니라 밑에서 들으려는 겸손과
백성의 소리를 들으려는 사랑을 느끼며 이런 솔로몬에게서 배우는 오늘 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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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03. 연중 제4주간 토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습니다.”(마르 6,34)
오늘 <복음>은 “참된 목자”이신 예수님의 마음을 세 가지로 그리고 있습니다. <첫째>는 지친 제자들을 향한 ‘배려의 마음’이요, <둘째>는 몰려든 군중들을 향한 ‘측은히 여기는 마음’이요, <셋째>는 양들을 가르치는 ‘스승의 마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파견 받았던 사도들이 돌아오자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외딴 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마르 6,31)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을 만큼 군중이 몰려왔건만, 예수님께서는 지친 제자들에게 ‘가서 좀 쉬어라’고 배려하십니다. “쉬어라”는 이 말씀에서, “하느님께서는 하시던 일을 모두 마치시고 이렛날에 쉬셨다. 하느님께서 이렛날에 복을 내리시고 거룩하게 하셨다.”(창세기 2,3)는 <창세기>의 울림을 듣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쉼”은 하느님께서 창조된 모든 것에게 ‘복을 내려주시고’, ‘거룩하게 하셨음’과 같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쉬게 하고, 그들이 한 모든 일에 복을 내리고 거룩하게 하십니다. 그리하여 ‘쉼’ 안에서 당신이 바로 ‘주님’임을 알게 하시는 일입니다. <시편> 작가는 말합니다.
“너희는 멈추고(곧 쉬고) 내가 주 하느님임을 알아라.”(시편 46,11)
또한, 두 번씩이나 반복되는 “외딴 곳으로 가서”라는 말씀을 들으면서, 우리는 “이제 나는 그 여자를 외딴 곳 광야로 데리고 가서 다정히 말하리라. ~너는 나를 ‘내 남편’이라 부르리라. ~내가 너를 아내로 삼으리니, 네가 주님을 알게 되리라.”(호세 2,16-22 참조)는 <호세아서>의 울림을 듣습니다. 그러니 “외딴 곳”에서 벌어질 일은 바로 이 일입니다. 당신을 낭군이라 부르게 되고, ‘주님’을 알게 되는 일입니다.
한편, 예수님께서는 피곤함에 지친 제자들은 쉬게 하시면서도,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습니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과 같았기 때문입니다.”(마르 6,34). 이는 <민수기>(27,15-17)의 표현을 연상시켜줍니다. 거기서 모세는 하느님 백성이 “목자 없는 양처럼”(민수 27,17; 1열왕 22,17) 되지 않도록 한 사람을 세워달라고 간청합니다. 목자의 주요업무 중 하나는 양떼를 위한 음식을 마련하는 것이고, 모세는 광야에서 만나를 공급하고(탈출 16장), 엘리사는 백 명을 먹이기 위해 빵의 양을 늘렸듯이(2열왕 4,42-44), 예수님께서도 이제 그러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먹을 음식을 마련하기에 앞서, 먼저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기 시작하였습니다.”(마르 6,34). 그들이 진정으로 굶주리고 목말랐던 것은 바로 ‘진리’인 생명의 말씀이었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양들을 “진리”에로 인도하는 이가 바로 “참된 목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먼저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참된 양식’을 받아먹는 ‘양’이어야 합니다. 오늘 진정, 우리가 그분의 ‘양’이라면, 우리를 ‘측은히’ 여기시는 그분에게서 ‘진리’인 말씀의 양식을 얻을 것입니다. 그리고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외딴 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마르 6,31)
주님!
저를 외딴 곳, 당신의 거처로 데려 가소서.
당신 안에 쉬게 하소서. 그 쉼 안에서 사랑에 젖게 하소서.
당신 사랑을 알게 하소서. 그 사랑 안에서 당신을 낭군이라 부르게 하소서.
오, 주님! 당신만이 진정한 쉼이오니, 당신 사랑의 속삭임 안에 쉬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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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03. 연중 제4주간 토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참 휴식은 주님과 더불어 사는 것입니다
사람은 때때로 ‘쉬고 싶다’ 는 생각을 합니다. 지금 하는 일과 환경에서 벗어나 자유를 누리고자 합니다. 그런데 맘먹고 쉬려고 하면 꼭 일이 생기고 맙니다. 그러니 때로는 지금 있는 자리를 떠나는 것이 필요하고, 어느 특정한 날을 정하여 쉬는 것보다, 일상 안에서 쉬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도 좋지만, 지금 하는 일을 즐기는 법을 터득해야 오래도록 지치지 않을 것입니다. 20세기 위대한 별이었던 슈바이처는 “현대인이 하루에 단 몇 분이라도 밤하늘을 쳐다보며 우주를 생각한다면 현대 문명이 이렇게 병들지는 않았을 것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창조를 마치시고 이렛날에 쉬셨으며 이렛날에 복을 내리시고 그날을 거룩하게 하셨습니다(창세2,2-3). 휴식은 꼭 필요합니다. 재충전의 기회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이 바쁘게 지내다가 휴식을 취하기 위해서 배를 타고 외딴곳을 찾아 떠났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예수님과 제자들이 가는 곳에 이미 도착하여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배를 타고 이동하였는데 모든 고을 사람이 육로를 통해 이동하였다는 것은 어떤 어려움도 기꺼이 감당하였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동시에 그들의 적극적인 태도를 엿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고을에서 나왔다는 것은 자기들의 삶의 현장을 떠났다는 것을 말해 주는 데 그만큼 예수님의 인기가 좋았습니다. 스스로 내 세워서가 아니라 사람들이 그분을 둘러쌌습니다. 바깥에 있으려 해도 사람들이 그분을 중심에 모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보시고 측은한 마음이 드시어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습니다. 가르쳐 주셨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고기를 잡아 일시적으로 먹여 주시는 것이 아니라 고기를 잡는 방법을 알려주셨다는 것으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가르침을 통해서 영적인 갈증을 채우게 된다는 것입니다. 세례를 받으면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난 것처럼 지내시는 분이 많은 데 사실은 이제 시작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고 또 부족한 것은 다시 배우고 …….주님께서 가르쳐 주셔야 할 것도 많고 우리가 배워야 할 것도 많습니다. 한 번에 모든 것을 이룰 수는 없는 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주변에 사람이 많아서 너무 고달프셨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사랑이시고 우리에 대한 사랑이 크시기에 모든 수고로움을 수고로움으로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측은한 백성과 함께할 수 있음이 오히려 기쁨이요, 행복입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사랑에 불타는 영혼은 조금도 피로하지 않고 또 남을 피로하게 만들지도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원동력은 외딴곳에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에 들어가 밤을 새우시며 기도하셨고(루카6,21), 이른 새벽, 동트기 전 외딴곳에서 당신을 파견하신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는 시간을 결코 소홀히 한 적이 없으십니다.
주변에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되셨던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바쁘다는 핑계로 기도를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너무 바빠서 기도하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진정한 휴식은 주님과 더불어 사는 것입니다. 무슨 일을 해도 내 일을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일을 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11,28).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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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03. 연중 제4주간 토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신학생 때입니다. 철학시간에 신부님께서 이런 말씀을 해 주었습니다. “배고픈 사람에게 매일 물고기를 주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그러나 더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배고픈 사람에게 물고기를 잡을 수 있는 그물을 주는 것입니다. 그물이 있는 사람은 배가 고프면 강가에 나가서 고기를 잡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매일 물고기를 기다리지 않아도 됩니다.” 지금도 정확하게 기억나는 것을 보면 제게는 큰 울림을 주는 이야기였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솔로몬은 하느님께 이렇게 청하였습니다. “당신 종에게 듣는 마음을 주시어 당신 백성을 통치하고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솔로몬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그것을 청하였으니, 곧 자신을 위해 장수를 청하지도 않고, 자신을 위해 부를 청하지도 않고, 네 원수들의 목숨을 청하지도 않고, 그 대신 이처럼 옳은 것을 가려내는 분별력을 청하였으니, 자, 내가 네 말대로 해 주겠다. 이제 너에게 지혜롭고 분별하는 마음을 준다. 또한 나는 네가 청하지 않은 것, 곧 부와 명예도 너에게 준다.” 철학시간에 신부님께서 해 주신 이야기를 구약성서는 이미 3000년 전에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물고기를 잡을 수 있는 그물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복음을 선포하는 권한입니다. 그것은 병자를 치유하는 권한입니다. 그것은 마귀를 쫓아내는 권한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주신 권한을 받아서 복음을 선포하였고, 병자를 치유해 주었고, 마귀를 쫓아냈습니다.
제게도 사제생활을 잘 할 수 있도록 ‘그물’을 주신 신부님들이 있습니다. 저를 신학교에 추천해 주신 아버지 신부님이 있습니다. 신부님께서는 은퇴하신 후에 모든 것을 혼자 하셨습니다. 혼자서 세탁하고, 청소하고, 식사준비하고, 장을 보았습니다. 신부님은 신부님의 장례 때 오는 사람들에게 국밥 한 그릇 대접할 만큼만 남겨두고, 모든 재산을 시골의 어려운 본당에 기부하였습니다. 첫 번째 본당의 주임 신부님은 언제나 기도하는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신부님의 기도 방에는 큰 초가 녹아내렸습니다. 제 방에는 작은 초도 늘 그대로 있었습니다. 기도는 어떤 어려움도 이겨낼 수 있는 큰 그물이었습니다. 두 번째 본당의 주임 신부님은 언제나 저를 믿어 주었습니다. 제가 할 수 있도록 지지해 주었습니다. 신부님의 지지와 격려로 가족캠프를 할 수 있었습니다. 신부님은 교우들의 이야기를 먼저 듣고 판단하였습니다. 중요한 일은 수녀님과도 상의하였습니다. 본당은 늘 웃음꽃이 피었습니다. 세 번째 본당의 주임신부님은 일의 우선순위를 잘 알았습니다. 주일학교를 위해서 아낌없는 지원을 해 주었습니다. 연극반을 위해서 배우를 초빙하기도 했습니다. 음악반을 위해서 악기를 마련해 주기도 했습니다. 우선순위를 잘 알았기에 본당 신축이라는 큰일도 잘 해 냈습니다. 네 번째 본당의 주임신부님은 늘 책을 가까이 하였습니다. 제게도 ‘팡세, 중세 철학사, 준주성범’과 같은 책을 사 주셨습니다. 신부님은 신학 이외에도 미술, 음악, 건축, 경제에도 전문가 수준의 소양을 보여 주었습니다. 제가 33년 사제생활을 이어오는 것은 제게 ‘그물’을 주신 신부님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2020년 8월부터 브루클린 한인성당의 미사를 도와주고 있습니다. 팬데믹의 상황에서 본당신부님이 한국으로 가셨는데 올 때까지만 미사를 도와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신부님은 건강이 악화되었고, 결국 본당 업무를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어느덧 3년 6개월이 넘었습니다. 처음에는 제가 도움을 준다고 생각했는데 돌아보면 제가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내일 미사를 끝으로 저는 브루클린 한인성당 공동체와 아쉬운 이별을 하게 됩니다. 교구 인사이동으로 다른 곳으로 가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후임 신부님도 브루클린 한인성당의 미사를 도와주겠다고 하였습니다. 신문홍보 때문에 출장을 가면 은퇴신부님들이 도와주신다고 하였습니다. 작년에 부제서품을 받은 종신부제님도 있습니다. 하느님의 크신 사랑으로 브루클린 공동체에 좋은 사제들이 계속 올 수 있기를 바라고, 그렇게 되도록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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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03. 연중 제4주간 토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사도들이 자기들이 한 일을 주님께 말합니다. 저마다 어깨에 힘이 들어가 있습니다. 자신을 자랑스러워합니다. 또한 주님의 제자인 것을 더욱 자랑스레 여깁니다.
이런 열정적인 사도들을 주님은 바라보고 계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고생했어! 다들 참으로 수고했네. 그동안 제대로 쉬지도, 잠을 자지도 못했겠네. 어서 가서 조금 쉬는 것이 좋겠어.’라고 말입니다.
주님의 말씀에서 주님의 사랑을 저는 느낄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의 일에 큰 비중을 두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지쳐있을 제자들을 걱정하십니다. 일이 우선이 아닌 사람을 우선시하시는 모습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어디선가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사랑은 사람을 통해 전해집니다.
기적은 사람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랑과 기적의 도구로 자기 사람들을 사용하십니다.
주님께서 사람을 중요시하는 이유는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도구이며 소통의 창이고 기적의 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도 쉼을 권유하셨고 밀려든 사람들을 바라보며 애처로운 마음을 가지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도구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통해 사랑을 보여주시고 작거나 큰 기적을 일으키십니다.
내가 그 도구가 될 때도 있고 누군가가 나에게 다가오는 하느님이 도구일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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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반 팝콘
얼마 전 영화관에 갔습니다.
영화관에 가면 지나치지 못하는 곳이 있습니다.
팝콘을 파는 곳이 그곳입니다.
얼마 만에 온 영화관인가요….
팝콘의 종류가 많아져 있었습니다.
고심하다 ‘반반’을 선택했습니다.
캐러멜 팝콘과 오리지널 팝콘.
다는 아니지만 두 가지를 한곳에 담아낼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그렇게 한 손에는 반반을 한 손에는 음료를 들고 입장했습니다.
우리의 오늘이 팝콘 통이라면
그 안에 내가 좋아하는 ‘반반’을 담아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
행복한 맛 반
즐거운 맛 반
평온한 맛 반
따스한 맛 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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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03. 연중 제4주간 토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2001년 뉴욕 세계무역 센터 빌딩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비행기 테러로 자그마치 2,996명의 사망자와 6,000여 명의 부상자가 발생했습니다. 바로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인 알카에다가 일으킨 911테러입니다. 이때 시민들은 많은 연기와 함께 무너져 내리는 빌딩 속을 나와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탈출했습니다. 그런데 탈출하는 이들의 흐름을 거슬러서 오히려 무너지고 있는 빌딩을 향해 역주행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경찰관, 소방관 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위험하지 않을까요? 아닙니다. 이들이 비록 전문적인 교육과 훈련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그들도 똑같이 위험합니다. 그러나 한 생명이라도 더 구하기 위해서 죽음이 있는 곳으로 역주행했던 것입니다.
예수님도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 고통과 죽음을 향해 달려가셨음을 떠올려 보았으면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도 단순히 살기 위해 도망치는 삶이 아닌, 진정한 생명을 위해 세상의 흐름에 역주행할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남들 다 하는 것이라면서 죄를 범하는 사람들과 똑같이 사는 것이 아니라, 죄를 피하고 사랑을 실천하면서 세상에 주님을 증거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단순히 순간의 만족을 위한 삶을 살아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 더 큰 가치를 따르는 삶, 그래서 주님과 함께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사실 우리의 나약함으로 그런 용기를 내기가 참 어렵습니다. 그래서 협조자가 필요합니다. 함께함으로 용기를 내어 주님께로 같이 나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뽑으셨습니다. 특별한 능력과 재주가 있는 사람이 아닌, 지극히 평범한 사람을, 어쩌면 보통 사람보다도 더 부족해 보이는 사람을 제자로 뽑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제자들과 함께하면서 가르치셨고 세상에 전교 활동을 보내기도 하셨습니다. 이렇게 사도들을 뽑으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예수님 혼자서도 충분히 모두 다 하실 수 있으셨을 텐데도 제자들을 뽑으시고 함께하신 이유는 우리 역시 함께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들은 함께하면서 세상의 흐름에 역행하면서, 생명을 구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우리도 주님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세상의 흐름에 역주행하는 용기를 가지고 있을까요? 주님의 주 관심사는 오로지 사랑이었습니다.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고 성경은 계속해서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우리의 주 관심사는 무엇인가요? 가엾은 마음인 사랑을 간직하는 사람은 세상의 흐름에 맞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주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모습임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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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성공이란 당신이 가장 즐기는 일을 당신이 감탄하고 존경하는 사람들 속에서 당신이 가장 원하는 방식으로 행하는 것이다(브라이언 트레이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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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03. 연중 제4주간 토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지도자들은 물론 사람들의 필수 덕목
-섬김과 배움, 자비와 지혜-
제가 참 좋아하는 우리말 둘이 “섬기다”와 “배우다”이고 명사형으로 하면 “섬김”과 “배움”이 되겠습니다. 비단 지도자는 물론이고 참된 삶을 지향한다면 두 기본적 삶의 요소가 섬김과 배움일 것입니다. 둘은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하나로 연결되었음을 봅니다. 섬기는 것도 배워야 한다는 것이지요. 섬김뿐 아니라 기도도 사랑도 믿음도... 모두가 평생 배워야 할 것들입니다.
그래서 깨달은 겸손한 이들은 기도든 믿음이든 사랑이든 늘 초보자라고 고백합니다. 농사짓든 이들을 대해도 늘 초보자라는 말을 듣습니다. 그러니 무엇이든 배우는, 공부하는 겸손한 자세가 기본임을 깨닫습니다. 말 그대로 “배움의 여정”중에 필요한 모든 덕목을 배우는 우리들입니다. 결국 배우다 세상을 떠날 것입니다. 우리의 사부 성 베네딕도 역시 자신의 공동체를 주님을 섬기는 학원으로 정의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을 섬기는 학원을 설립해야 하겠다. 우리는 이것을 설립하는데 거칠고 힘든 것은 아무것도 제정하기를 결코 원치 않는다. 그러니 결점을 고치거나 애덕을 보존하기 위하여 공정한 이치에 맞게 다소 엄격한 점이 있더라도 즉시 놀래어 좁게 시작하기 마련인 구원의 길에서 도피하지 마라.”(머리45-48)
참 아름다운 규칙서 내용으로 수도생활의 핵심을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을 섬기는 학원인 배움터라는 것이요 여기서 평생 주님과 이웃을 섬기는 것을 배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섬김과 배움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참으로 마음의 눈만 열리면 섬김의 삶을 추구하는 자들에게는 온통 배움의 대상입니다.
학원보다는 순수한 우리말 배움터가 좋습니다. 마산 트라피스트 수도원 정문에는 “주님을 섬기는 배움터”로 쓰여 있습니다. 배움터, 쉼터, 샘터, 일터 순수한 우리말이 참 정겹습니다. 주님의 배움터, 쉼터, 샘터같은 미사시간입니다. 참으로 섬기는 지도자는 물론 사람들에게 기본적으로 배워야 할 바 두 필수적 자질이 자비와 지혜일 것입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자질인 자비와 지혜를 고스란히 이어받은 오늘 복음의 예수님입니다. 예수님뿐 아니라 불자들도 부처님의 자비와 지혜를 말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면 예수님의 자비와 지혜가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한 실재의 양면임을 봅니다. 참으로 자비로운 연민의 사람이라면 저절로 지혜로운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자비심에서 샘솟는 지혜이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이 예수님께 모여와 자기들이 한 일과 가르친 것을 다 보고했을 때 예수님의 분별의 지혜가 빛을 발합니다. 사도들의 피곤한 처지를 한눈에 직시한 배려와 공감의 자비하신 주님은 지혜롭게도 이들에게 관상적 휴식을 명하십니다.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일터에서 외딴곳의 쉼터로 옮기라는 것입니다. 관상과 활동의 균형과 조화는 건강한 영적 삶을 위한 리듬입니다. 참으로 참된 영적 삶을 위해 구체적으로 외딴곳의 장소와 시간 마련은 필수입니다. 이어 전개되는 내용이 또 흥미롭습니다. 외딴곳에 도착하니 이미 영육으로 굶주린 이들이 장사진을 치고 있는 것입니다. 착한목자 주님은 유연하게 현실의 필요에 임하시니 새삼 사랑은 분별의 잣대임을 깨닫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
그림같은 장면이 눈에 선합니다. 군중들의 절박한 요구에 응답해 휴식을 포기하고 이들의 구원활동에 전념하는 자비로우시고 지혜로우신 주님입니다. 가엾이 여기는, 측은히 여기는, 불쌍히 여기는 연민의 마음, 자비심은 그대로 하느님의 마음,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흡사 오늘 복음의 구조가 미사전례를 상징하는 듯 합니다. 말씀의 전례후에 이어질 오늘 복음에 오천명을 먹이신 기적은 그대로 성찬전례를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새삼 하느님의 자비와 지혜의 결정체같은 최고의 선물이 성체성사 미사임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를 주님을 닮은 섬김과 배움의 겸손한 사람들로, 또 자비와 지혜의 사람들로 만들어 줍니다.
오늘 열왕기 상권에서 지금까지 맹활약했던 다윗 임금은 역사무대에서 퇴장하고 그 후계자로 솔로몬이 등장합니다. 하느님께서 다윗에 대해 베풀었던 애정이 그대로 솔로몬에게 계속되니 이것은 순전히 부왕 다윗 덕분입니다. 주님의 솔로몬을 향한 물음은 그대로 우리를 향한 물음처럼 들립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과연 무엇이라 대답하겠습니까? 솔로몬의 대답은 통쾌할 정도로 정확했고 지혜로웠습니다.
“당신 종에게 듣는 마음을 주시어, 당신 백성을 통치하고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경청과 분별의 지혜를 청하는 것이 주님 보시기에 좋았고, 이어 주님은 엄청난 축복을 약속하십니다. 자신을 위해 장수를, 부를, 원수들의 목숨을 청하지도 않고 분별력을 청한 솔로몬에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솔로몬에 대한 편애가 지나칠 정도입니다.
“나, 내가 네 말대로 해 주겠다. 이제 너에게 지혜롭고 분별하는 마음을 준다...나는 네가 청하지도 않은 것, 부와 명예도 너에게 준다. 네 일생 동안 임금들 가운데 너같은 사람이 없을 것이다.”
솔로몬이 참으로 지혜로웠다면 부와 명예는 단연코 사양했을 것입니다. 부와 명예의 유혹에서 벗어날 사람은 거의 없기 때문이며 이들은 사람들을 타락과 부패로 이끌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전개되는 솔로몬의 삶에서 보다시피 그의 타락과 부패로 인해 다윗이 이루어 전해준 성취는 서서히 무너지고 물거품이 되고 맙니다. “세우기”는 평생이지만 “무너지기”는 순간입니다.
만약 제가 솔로몬이었다면 하나가 아닌 넷만 청했을 것입니다. 주님의 한결같은 “섬김과 배움”의 겸손한 자세, 주님의 한결같은 “자비와 지혜”의 자질만 청했을 것입니다. 섬김과 배움, 자비와 지혜, 이 넷이야 말로 지도자들은 물론 참사람이 되기 위한 우리 모두의 기본적, 필수적 덕목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날로 주님을 닮아 섬김과 배움, 자비와 지혜의 사람들로 변모시켜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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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03. 연중 제4주간 토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외딴곳일지라도>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마르 6,31)
사람에게
곁이 되어주려고
사람에게서
잠시 떨어져
홀로 쉬고픈
외딴곳에
애써 나를 찾는
사람 있다면
그 사람에게
곁이 되어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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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03. 연중 제4주간 토요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복되신 동정 마리아 신심 미사
http://www.ofmkorea.org/ofmhomily/544540
김명겸요한 2024.02.03 08:40
성모님께서 예수님을 찾아오십니다.
성모님께서 예수님을
혼자 만나러 가시는 것이 걱정되는지
형제들이 같이 왔습니다.
예수님께서 계신 곳을 알아보고
며칠의 여행길을 거쳐 드디어 도착했습니다.
예수님을 바로 만나리라고 생각하셨지만
예수님께서는 군중과 이야기하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에게
예수님께 말을 전해달라고 부탁하셨습니다.
그에게 부탁을 하고 기다리신 다음
듣게 되신 답은
한편으로는 예상 밖의 이야기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만나러 바로 나오시거나
적어도 기다려달라고 말이 나올 것 같았는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복음은 그 다음 이야기를 전하지 않습니다.
복음이 전하고 싶은 것은
이번 일에서 예수님께서 의도하신 내용을
전하는 것이기에
그것에만 충실합니다.
우리는 오늘 마리아 신심 미사를 드리고 있기에
복음에는 나오지 않지만
성모님의 관점에서
이 복음을 다시 한 번 읽으려고 합니다.
밖에 서 계시던 성모님은
그 대답을 듣고 어떻게 행동하셨을까요?
그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율법은 여성을 그리 존중하지는 않지만
어머니라는 관점에서는
아버지와 동등한 권리를 줍니다.
부모의 협력으로만 출산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아버지에게 효도하라고 말하지 않고
부모에게 효도하라고 말합니다.
성모님께서 생각하시기에
예수님은 그 누구보다도 어머니께 잘 하시는
분이었을 것입니다.
즉 성모님을 모른채 하기 위해서
어머니와 관계를 끊기 위해서
그렇게 행동하신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고 계셨을 것입니다.
그래도 예수님의 행동과 말씀이
곧바로 이해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예수님께서 하셨던 말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이란 무엇인지
생각하셨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 주어진 하느님의 뜻도 있지만
성모님 자신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뜻은 무엇인지
찾기 시작하셨을 것 같습니다.
그러시면서
예수님과 물리적으로 가까이 혹은 멀리 계셔도
예수님의 공생활에 함께 하실 수 있었을 것입니다.
신앙은 이해되지 않는 것 투성이입니다.
아니 우리의 삶도 그러합니다.
무엇인가 명확하다면 더 좋을 것 같은데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고민만 하면서 살 수는 없는 것이
또한 우리의 삶입니다.
그럼에도 순간 순간 떠오르는 고민들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는
우리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뜻입니다.
물론 우리의 삶을 하느님께서 정해두셨다는
의미는 아니지만
그 뜻을 찾고 살아가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신앙 생활의 목표이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오늘 복음환호송이 노래하듯
우리를 진정한 행복으로 이끌어 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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