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야 동물원 / 김재근
동물원으로 가주세요 장마는 시작되었고 택시는 자정을 건너 종로를 돌아 한강으로 달렸다 강변 연인들은 빗속에서 서로의 혀를 적셨고 신호등 눈자위는 붉었다 조금만 가면 되는데 더 가면 되는데 동물원은 보이지 않았다 택시는 물속으로 가라앉았다
물속에서도 요금은 내릴 줄 몰랐다 숨이 차올라 횡단보도에 멈췄을 때 물방울이 아름다웠다 여기서 얼룩말이 죽었지 그때 난 무얼 하고 있었을까 오로막이 시작되었다 동물원 냄새가 났다
우회전해서 세워주세요 주머니에서 죽은 새가 울었다 잔돈은 가지세요
잿빛 물속에서는 누구의 목소리도 메아리를 가지지 못한다
대문은 닫혀 있고 쪽문은 열려 있었다 쪽문을 열자 검은 밤이 보였다 고요한 방들의 시간, 누가 몰래 다녀갔는지 알 수 없지만 알아도 소용없지만
방마다 수인번호가 새겨져 있었다 벨을 누르면 사슴이 달려올 거 같았다 왜 사슴이 생각날까 횡단보도를 건너다 죽은 빗속 얼룩말의 마지막 냄새가 떠올랐다 사슴은 어디 갔을까
입안에서 사슴이 걸어 나왔다 다른 짐승은 생각나지 않았다 자신의 발자국을 헤아리며 검은 밤을 헤매는 사슴, 사슴을 찾는 목소리가 두 발을 끌며 방 안을 맴돌았다
메아리를 가지지 못한 목소리는 영원히 하늘로 오르지 못한다
그날 이후 냄새를 잃었다 가로수는 산발한 채 계절을 쓸어 갔고 나는 사슴을 생각하며 잠이 들었다 검은 밤이 영원히 열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