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성경이야기는 인간 구원이라든지, 축복이야기라든지, 인간승리라든지, 가 아니라 단지 하나님 나라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그 근거는 여자의 후손이야기가 성경 전체를 이룬다는 것입니다. 여자의 후손이란 남자들과 달리 힘없는 존재인 여자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특성이 증거 된다는 것입니다.
여자의 후손 은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가 본체이신데 그 모습을 마른땅에서 올라오는 나약한 싹으로 표현 합니다. (이사야53:2~4)“2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3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4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힘없이 십자가에 죽으시는 일이 과연 무엇인가를 알게 되어야 힘으로 통하는 세상과 힘을 배제한 하나님 나라의 특성이 무엇인지를 분별하여 알게 되는 것입니다.
힘이라는 것에는 반드시 선악과의 마귀 논리가 들어 있습니다.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탐스럽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마태복음4장에서 떡과, 종교 세력과, 천하의 영광이라는 육신적인 것과 직결 되는 것이고,
(요한일서 2:16-17)에서는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이나 하나님 나라는 상기의 육신의 일이 배제된 것입니다. 고로 영적인 일만이 실체이고 육적인 일은 무조건 거짓이고 안개 같은 허망한 것으로 여기라는 것입니다. 고로 육이 배제되어 영으로 서서 “하나님과 화목”된 것을“구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죄라는 용어나 실체는 그 범위가 방대하여 인간이 잘 감지 할 수 없는 영역이 되는 것이지만 실상은 그리스도를 가리는 모든 것을 다 죄라고 합니다. 그러기에 창녀나 세리를 차별하는 의식마저 인간의 선악과 논리에서 나온 것이기에 악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고로 인간이 설정한 선하게 사는 것도 그리스도의 세계에서는 사실상 죄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유는 선함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가리기 때문입니다.
고로 인류사를 보면 하나님과 관계없는 이방인들이 오히려 인간중심의 생의 구조가 잘 발달 되어 있고 그들이 오히려 유대인들보다도 더 윤리나 도덕이나 선함이 강조 되어 왔던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죄라는 범위를 행위에 두지 않고 존재에 두고 있다는 것을 유념해야 합니다. 즉 선악과 먹은 상태로 바라보는 존재를 죄인이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말하는 구원은 제물의 희생의 피의 능력을 입고 그 죽음의 능력으로 오히려 생명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대할 때마다 인간들이 세운 기준들을 적용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간 세계에서 비교 심과 우월성을 부여하는 선과 도덕성과 종교성을 들고 거기에 기준한 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성경 밖의 일반 종교들에서 흔히 보게 되는 광경입니다. 이것은 인간들이 일반 종교들의 기준으로 해석하고 적용하려 드는 경향 때문에 결과적으로 성경의 절대 진리를 배척하는 결과를 가져 온다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의로운 계명이나, 경건한 종교의 교리 같은 것들만 찾으려 한다는 것이고, 그것이 실상 그리스도를 가리는 치명적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모르는 일반인들이 인정하는 범위에서 인간들의 집단을 만들고 세상이 설정한 도덕적 기준에서 단순히 죄만 짓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기쁘게 자신을 받아 주실 것으로 믿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다보니 인간들의 기준에서 선을 행하고, 타에 끌려 하나님 일에 헌신한다는 것과, 열심을 내는 우를 범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이 일하시니 너희는 가만히 있어 지켜보라고 말합니다. 특히 안식일의 의미 또한 하나님이 쉬시는 일에서 인간의 존재 이유를 보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핵심적으로 말하자면 사람은 예수님을 믿든 부처님을 찾든 사람 안의 죄성 은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무슨 기준을 세워도 죄 안에서 존재 한다는 것이고, 기준을 안 세워도 죄라는 구도 안이 인간의 실제 실체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이미지를 지키기 위해 늘 꾸미고, 거짓말하고, 시기하고, 당을 짓고, 자기들만의 독립된 자아상들을 주변에 홍보를 한다거나 아니면 통하지 않으면 단절된 구조를 가진다는 것입니다. 선악과로 무장된 상태로 늘 자신의 고생을 한탄하고, 자신을 높이고, 자기만 잘 보아주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오직 육체로 사는 일에 가치를 부여하고 육체인 자기로 무장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간혹 타(他)를 위한 희생도 있지만 그것은 교육이라는 과정을 통한 것이지 본성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짓과 본성의 차이를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은 자는 이미 마음에 간음했다고 하는 말이 인간 본성을 지적하는 말씀 입니다.
고로 인간은 누구나 다 재난이 닥치고, 손재가 발생하고, 환난과 시련이 닥치면 운명을 탓하고 하나님을 원망하게 됩니다. 교만과 이기심과, 간사함과 교활함, 원망과 핑계 등의 죄성이 깊이 뿌리내려져 있는 것이 우리네 인생들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짓는 본성과 사탄의 성품은 결코 해결되지 않아 죄 사함을 천 번, 만 번 받아도 역시 죄의 굴레에서 철저히 빠져나올 수 없다는 것을 누구나 인정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은 인간의 소관이 아닙니다. 오직 십자가만 바라보게 만들어 지는 것이 구원입니다. 왜 그럴까요? 거기에 인간 저주와, 실패와, 인간의 오판이 모두 다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손에 처참히 찢긴 현장에서 비로소 하나님의 언약인 가죽옷 되시기 위하여 죽음 속으로 들어가 생명의 부활을 만들기 때문입니다.
고로 십자가는 인간의 구원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는 죽음이 없다는 것을 보여준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탐욕에 빠진 인간들이 아무리 구원! 구원! 외쳐도 십자가에서 사탄의 머리가 깨어진 것이 없이 어떻게 사망의 왕인 사탄의 사망에서 해방될 수 있겠습니까?
다시 말하지만 구원이란 자기 착각에 빠진 사람들도 흔히 외치는 말입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단들도 자기 구원을 말하지 않는 사람들은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구원을 확신하는 사람들의 특징은 성경구절을 여기저기 짜깁기 하여 심리적으로 인정하도록 성경을 난도질 한다는 것입니다. 즉 영접하라는 내용도 요한 계시록 3장의 라오디게아 교회에서 차용하는데 그것은 그렇게 상담하라는 것이 아니라 당시 요한이 증거하는 라오디게아 교회는 (요한계시록3:17~20)에 있는 데로 “17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18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19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20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위와 같이 금을 사야하는 것과, 흰옷을 입어야 하는 것과, 안약을 발라야 하는 것과, 회개와,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지 못한 문제, 를 지적하는 것입니다. 즉 거짓 믿음으로 거짓 만족을 누리는 존재에게 하는 말입니다. 이 말이 영접기도가 아니라 거짓 믿음을 지적 한다는 말입니다.
이무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