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621
9월22일[연중 제24주간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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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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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www.youtube.com/watch?v=N5n8hvFWMho&pp=ygUOVFbrp6Tsnbzrr7jsgqw%3D
(서울대교구 이현철 베드로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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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언제나 한결같은 자세로 기쁘게 봉사하는 여성들의 존재!>
예수님을 중심으로 한 공동체는 12사도 만의 공동체가 아니었습니다. 복음서에 따르면 일흔 두 제자가 있었습니다. 그 외에도 공동체의 이런저런 필요를 채워주던 협조자, 후원자들도 있었습니다.
뿐만아니라 예수님께 완전매료되어, 그분이 가시는 곳마다 뒤 따라다니던 추종자들까지 합하면 엄청난 사람이 무리를 지어 다녔습니다.
그 모습이 정말이지 엄청난 장관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알량한 권력이지만 쥐고 있었던 헤로데를 비롯한 권세가들의 우려도 컸을 것입니다.
자신들이 설교하는 회당은 파리만 날리고 있는데, 엄청난 수효의 군중이 예수님께로 몰려가니,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시기 질투는 하늘을 찔렀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는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특별한 인물들을 소개하고 있는데, 바로 여성들이었습니다.
“악령과 병에 시달리다가 낫게 된 몇몇 여자도 그들과 함께 있었는데, 일곱 마귀가 떨어져 나간 막달레나라고 하는 마리아, 헤로데의 집사 쿠자스의 아내 요안나, 수산나였다. 그리고 다른 여자들도 많이 있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들었다.”(루카 복음 8장 2~3절)
참으로 시대를 앞서가는 개방적인 예수님을 태도를 잘 엿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예수님 시대 당시 여성들이 당하던 차별대우는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냥 평범한 여성들이 아니라 악령과 병에 시달리다 치유받은 여성들, 그 어디에서도 사람 취급받지 못하던 여성들까지도 당신의 공동체에 들어오게 허용하셨습니다.
피정집을 운영하면서 새삼 느끼는 바가 큽니다. 피정이 잘 운영되기 위해서는 양질의 프로그램도 중요합니다. 시의적절한 명강의도 필요합니다. 쾌적한 환경과 숙소도 요구됩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이 한 가지 있더군요.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맛갈진 식사가 정말 중요합니다. 그 식사 준비는 남자인 제가 아무리 백방으로 노력해도 충족시킬 수 없는 부분입니다. 어머니의 정성스런 손맛이 필요한 것입니다.
예수님과 사도들이 행하던 복음 선포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지기까지 뒷전에서 묵묵히 봉사하고 헌신하던 여성들의 손길이 있었음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그 여성들이 자신들의 재산마저 팔아가며 공동체를 뒷바라지할 정도로 예수님께서 큰 매력과 사랑을 지니고 있었음도 기억해야겠습니다.
오늘 우리 공동체는 세상과 이웃을 위해 얼마나 활짝 열려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누구라도 와서 기쁘게 헌신하고 봉사하고픈 마음을 갖게 하는 매력을 갖춘 우리 공동체인지 살펴봐야겠습니다.
우리 교회 공동체의 든든한 기초요 기반으로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언제나 한결같은 자세로 기쁘게 봉사하는 여성들의 존재에 깊이 감사하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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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HClHN4ESQ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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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가 거짓이 되지 않게 하려면!>
이미 세상을 떠난 분을 다시 소환해서 매우 조심스럽고 죄송한 마음이지만, 우리에게 타산지석이 될 수 있을 것 같아 고인이 된 최성봉 씨 삶을 되돌아봅니다.
세 살 때 부모에게 버려져 보육원에 맡겨지고 형들의 구타에 이기지 못하고 탈출하여 껌과 박카스 등을 팔며 10년 이상을 살았습니다. 그 10년 동안 산에 산 채로 묻히는 등 죽을 고비도 여러 번 넘긴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처음으로 좋아했던 게 음악이라 성악을 하기를 원했고 다행히 그를 무료로 가르쳐 준 스승이 있어서 예고에 들어가고 대학에도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대학을 다닐 돈이 없어 학교를 자퇴하고 일용직을 전전하다가 스스로 생을 마감하려 했습니다.
그때 그의 스승에게서 전화 한 통화가 왔고 2011년 tvN ‘코리안 갓 탤런트’ 준우승을 차지해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적 관심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가난한 휴대폰 판매원에서 세계적 스타가 된 영국의 폴 포츠와 합동 공연을 하며 희망의 아이콘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2021년 코로나로 상황이 어려워졌고 다시 대장암 3기와 전립선암, 갑상선 저하증 및 갑상샘암 진단을 받고 투병 중이라 밝혔습니다. 암이 다른 곳으로의 전이가 일어났지만, 3억 대의 수술비 때문에 치료가 어려운 상황이라고 밝혔습니다. 그리고 한강 다리에서 극단적인 선택을 하려 했습니다. 다행히 많은 사람의 도움으로 뛰어내리는 일은 막았습니다.
이때 10억 원을 목표로 후원금 모금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다 그 모든 것이 거짓이었음이 드러났습니다. 그를 만났던 모든 사람은 그가 암 투병 중인지 의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가 입고 찍었던 환자복도 인터넷으로 구매한 것이 드러났습니다. 흡연과 음주, 폭식을 일삼는 것이 드러난 것입니다.
또한 2천만 원 정도 모인 후원금은 유흥비와 여자친구와의 사치로 탕진했다는 의혹이 일었습니다. 그는 이런 글을 올리고 생을 마감합니다. “나의 어리석은 잘못과 피해를 본 분들께 진심으로 죄송하고 거듭 사과드립니다. 지난 2년여 동안 후원금 반환 문의해 주신 모든 분에게 반환했습니다. 이제는 죗값을 치르려 합니다.”
그도 처음에는 나름대로 자선하려고 하기도 하였습니다. 그 의도는 알 수 없지만, 그래도 후원도 했던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하지만 그는 왜 점차 희망이 아닌 불행을 팔기 시작했을까요? 불행을 파는 이유는 ‘피해의식’ 때문입니다. 나의 불행은 내가 덜 받았다는 불만에서 나옵니다.
고 최성봉 씨는 그래도 당연해 보입니다. 부모에게 두 번, 세 번이나 버려지고 그가 말하듯이 자신에게 부모가 되어주겠다던 사람 중 하나도 자기 곁에 남지 않았기 때문에 더 절망적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끊임없이 자기를 보호해 줄 부모의 대체자를 찾고 있었던 것입니다. 몸은 컸지만, 어린이로서 보호받고 싶었는데 세상은 그를 이용하고 쓸모가 없어졌을 땐 잊었던 것입니다. 그는 더는 버려지는 것을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모든 여자 팬에게 사귀자고 할 정도였고 연인 사이로 발전한 사람에게는 폭력을 쓰기도 하였습니다. 자신이 한 말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을 무시하고 자존심을 짓밟는 행위라고 말했습니다.
우리에게 사랑은 나의 불행을 파는 사람이 아닌 감사하여 보답하는 삶으로 이끕니다. 성당에서 성체를 영할 때 솟아나야 하는 감사가 이 전환점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감사를 하지만, 진정한 감사가 아닐 때도 있습니다. 이것은 최성봉 씨의 마지막 글의 앞 부분입니다.
“제 삶의 마지막으로 팬분들께 보내는 글이면서 이 글이 보인다면 저는 이미 죽어있을 것입니다. 2011년부터 정말 많은 분들께 관심과 사랑을 받고 살아왔습니다.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 전합니다. 마지막 글이라 이 분통함을 알리고 싶지만, 여러분께 받은 사랑이 더 커 마음속에 묻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는 나름 노력하여 반환해 달라고 한 후원금을 반환하고 마지막 죗값은 안타까운 선택으로
끝을 맺었습니다. 나름 감사하려고 노력했지만, 결국 감사는 내가 가진 돈이 어디에 쓰이느냐로 결정됩니다. 최성봉 씨는 그 돈을 자기를 위해 썼습니다. 감사한다면 그것을 감사한 대상을 위해 썼어야 할 것입니다. 돈이 별 게 아닌 것 같지만, 그것이 어떻게 쓰이느냐에 따라 결국 감사하는지, 아닌지가 결정됩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는 주님께 돌려야 하는 감사의 선악과를 자신들이 먹어버렸습니다. 그렇게 감사한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감사하지 못하는 존재가 되어버렸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여러 여성의 이름이 언급됩니다. 그들이 구원받은 이유는 이것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들었다.”
감사가 거짓으로 드러나는 순간은 돈을 자기가 더 가지고, 더 즐기고, 더 높아지기 위해 쓸 때입니다. 삼구를 위해 돈을 쓴다는 말은 아직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오직 부모의 사랑만으로 채워질 수 있습니다. 참 부모는 하느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이라면 그분을 위해 보답하기 위해 돈을 사용합니다. 이를 봉헌이라고 합니다. 이것 없이 하는 감사는 아무리 찬미를 드려도 거짓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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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참을 인(忍)이 셋이면 살인을 면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공자의 제자 자공이 ‘왜 참아야 합니까?’라고 물었을 때 공자는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천자가 참으면 나라에 해가 없고, 관리가 참으면 그 지위가 올라가고, 형제가 참으면 집안이 부귀해지고, 부부가 참으면 일생을 해로할 수 있고, 친구 간에 참으면 명예를 더럽히지 않고, 자신이 참으면 재앙이 없을 것이다.” 참을 인(忍)의 반대말은 화낼 노(怒)라고 생각합니다. 대통령이 화를 내면 밑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줍니다. 본당 사제가 화를 내면 공동체가 큰 상처를 받습니다. 형제가 화를 내면 부모의 가슴에 멍이 듭니다. 부부가 화를 내면 자녀들이 불안합니다. 내가 화를 내면 곧 후회하게 됩니다. 참을 인(忍)도, 화낼 노(怒)도 모두 마음의 문제입니다. 평소에는 참을 인으로 지내는데 욱하는 성격에 가끔 화를 내곤 합니다. 돌아보면 별 것 아닌데 화를 내고 후회 할 때가 많습니다.
며칠 전에 전화를 한 통 받았습니다. 평화신문의 지면이 ‘좌파성향’이라고 하였습니다. 교회가 일본의 오염수 방출을 반대하였고, 그것이 지면에 보도되었는데 그런 기사는 좌파성향의 기사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좌파도 아니고, 우파도 아니고 예수님파라고 말하였습니다. 일본의 주교회의도, 한국의 주교회의도, 아시아 주교회의도, 교황님도 일본의 오염수 방출을 우려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좌파와 우파의 이념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바다는 좌파에게도, 우파에게도 필요한 소중한 자원입니다. 모든 생명의 시작은 바다입니다. 바다는 생명의 터전입니다. 교회가 오염수 방출을 우려하고 반대하는 것은 ‘환경’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일본이 오염수를 바다에 방출하는 것은 환경의 문제가 아니라 비용의 문제입니다. 환경을 생각한다면 비용이 더 들더라도 다른 방안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자본주의가 우리에게 풍요로움을 주지만 자본주의는 우리 삶의 터전인 바다와 땅 그리고 공기와 물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이익의 기준으로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임계점에 다다르면 자연은 자본주의가 쌓아놓은 바벨탑을 무너트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가뭄, 폭염, 화재’로 경험하고 있습니다.
과학과 산업의 발전으로 풍요해진 세상에 살지만 인류는 터무니없는 생각과 행동을 하였습니다.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면서 함께 살아야 하는 다른 생명을 존중하지 않았습니다. 무분별한 개발로 자연을 파괴하였고, 이는 기상이변과 코로나와 같은 자연재해로 돌아오고 있습니다. 그릇된 종교적인 신념으로 다른 문화와 종교를 배척하고 없애려고 하였습니다. 이념과 욕망의 늪에 빠져서 땅을 빼앗고, 목숨을 빼앗았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두 번의 세계 대전으로 뼈저리게 체험하였습니다. 지금도 종교적인 신념 때문에, 강대국의 욕심 때문에 국지적인 전쟁이 벌어지고 있고, 난민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이는 만물의 영장이라고 말 할 수 없는 생각과 행동입니다. 눈에 보이는 물질과 자본을 얻기 위하여 눈에 보이지 않는 양심과 사랑을 포기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성서 말씀은 우리가 가야할 길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의로움과 신심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추구하십시오. 믿음을 위하여 훌륭히 싸워 영원한 생명을 차지하십시오. 그대는 많은 증인 앞에서 훌륭하게 신앙을 고백하였을 때에 영원한 생명으로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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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8,1-3: 예수님을 도와드린 여인들
오늘 복음에서는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것으로 예수님과 제자들에게 헌신 봉사하며 따랐던 여자들이 나온다. 그들 중에는 대표적으로 마리아 막달레나, 수산나, 요안나라는 여인이다. 이 여자들과 수산나는 복음에 그 이름이 전해질만큼 예수님과 그 제자들을 헌신적으로 도운 여자들이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는 여자가 설교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고 복음에서 보면 예수께서도 시키시지 않으셨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들이 가진 것으로 복음 전파를 도운 것이다. 그들은 오로지 주님의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는데 구체적으로 아무 사심 없이 주님과 사도들을 도왔다.
이러한 모습은 교회의 역사 안에서 수많은 사람이, 수많은 여성이 헌신적으로 주님의 사업을 도와왔고 지금도 여성들이 그러한 열성을 보이는 것은 또한 주님의 부르심이다. 이들은 주님의 사업을 돕는데 그들 사이에 어떤 시기나 질투 같은 것이 보이지 않는다. 아마 그런 것이 있었다면 예수께서 그 봉사를 받아들이지 않으셨을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가? 우리도 이 여인들과 같이 모두 한 마음이 되어 봉사하고 하느님의 뜻에 맞는 실천을 하고 있는가?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 어떤 일을 한다고 하면, ‘그건 네가 시작한 일이니 잘 해봐!’라고 하면서 협조도 하지 않고 골탕 먹기를 바라고 있는 자세는 없었는지, 그래서 그를 어려움에 빠뜨리고 속으로 손뼉을 치고 있지나 않은지 반성해야 한다.
현대 교회의 모습은 사실상 여자들의 수가 더 많고 교회에서 봉사하는 이들도 여자들이 대부분이다. 이 여인들의 봉사로 교회가 살아있을 수도 죽어갈 수도 있다. 우리의 역할은 이렇듯이 매우 중요한 것이다. 주님 앞에 더욱 생동감이 넘치는 공동체가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어려운 가운데 서로가 깊이 일치한 이 여인들의 모습이 우리에게서도 나타나야 할 것이다. 역사의 인물 속에서나 지금에도 그러한 역할, 그러한 도움은 절대로 필요하다. 이러한 봉사는 눈에 잘 드러나지 않는 것일 수도 있으나 그러한 도움이 있어야 하고, 또 그러한 부르심에 따라 자기 소임을 잘한다는 것은 하느님 앞에 큰 영예가 아니겠는가? 예수님을 도와드린 여인들이 오늘날까지 그 이름이 전해질 수 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지 묵상해 보아야 한다. 우리도 봉사를 통해 주님께 항상 영광을 드릴 수 있는 삶이 되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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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내적인 부르심>
“예수님께서는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며,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시고 그 복음을 전하셨다. 열두 제자도 그분과 함께 다녔다. 악령과 병에 시달리다 낫게 된 몇몇 여자도 그들과 함께 있었는데, 일곱 마귀가 떨어져 나간 막달레나라고 하는 마리아, 헤로데의 집사 쿠자스의 아내 요안나, 수산나였다. 그리고 다른 여자들도 많이 있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들었다.”(루카 8,1-3)
사도행전을 보면, 마티아를 사도로 뽑기 전에 베드로 사도가 ‘사도의 자격’에 관해서 이런 말을 합니다. “주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지내시는 동안 줄곧 우리와 동행한 이들 가운데에서, 곧 요한이 세례를 주던 때부터 시작하여 예수님께서 우리를 떠나 승천하신 날까지 그렇게 한 이들 가운데에서 한 사람이 우리와 함께 예수님 부활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사도 1,21-22)
루카가 복음서에 여자들의 이름을 기록한 것은, 그 여자들이 열두 사도만큼이나 ‘사도의 자격’을 갖추었고, 사도들보다 더 ‘부활의 증인’의 자격을 갖추고 있었음을 나타내기 위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여기에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 여자들은 실제로 ‘부활의 첫 증인들’입니다.>
“악령과 병에 시달리다 낫게 된”이라는 말은, 여자들의 ‘믿음’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예수님과 여자들의 관계는 은총과 믿음으로 일치되어 있는 관계였음을 나타내는 말이고, 또 여자들이 예수님을 따라다닌 것은 단순히 예수님에 대한 인간적인 존경심이나 호감 때문이 아니라, 주님으로 믿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여자들이 특별한 은총을 ‘체험’했기 때문에 예수님을 따라다닌 것이라고 설명하는 이가 있는데, ‘체험’이 아니라 ‘믿음’입니다.
신앙생활은, 또 예수님을 따르는 생활은 믿음 때문에 하는 생활입니다. 언제나 항상 체험보다 믿음이 먼저입니다. 우리는 체험하려고 애쓰지 말고 믿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마리아 막달레나의 이름이 맨 앞에 있는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첫 번째로 만났고,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첫 번째로 전한 ‘특별한 제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일곱 마귀가 떨어져 나간”이라고 말한 것은, 바로 앞의 7장에 나오는 ‘죄인인 여자’와 마리아 막달레나를 구분하기 위한 것으로 해석됩니다. <두 여자는 같은 사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시중을 들었다.”라는 말은, 음식을 드렸다는 뜻인데, 아마도 ‘옷’도 마련해서 드렸을 것입니다.
시중을 들었다는 말에서 바로 떠오르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루카 9,58) 이 말씀에 대해서, “여자들이 자기들의 재산으로 시중을 들었다면, 예수님이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는’ 처지였던 것은 아니지 않은가?”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 상황을 반대로 생각해야 합니다. 여자들 덕분에 예수님과 사도들이 궁핍한 생활을 면하게 된 것이 아니라, 여자들이 예수님의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는’ 생활에 동참한 것이라고... ‘자기들의 재산으로’라는 말만 보고 여자들을 부자로 생각하는 것은 너무 지나친 억측입니다. 당시 시대 상황에서 남편이 있는 여자들이 과연 재산을 얼마나 마음대로 쓸 수 있었을지 의문입니다. 남편이 없는 과부라면, 거의 대부분 재산도 없었을 것입니다. <명단에는 없지만, 라자로의 동생 마르타와 마리아도 포함시켜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루카 10,38)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가실 때마다 베타니아의 라자로, 마르타, 마리아의 집에 들르셨는데, 그때마다 그들 남매는 정성껏 예수님을 대접했습니다.>
여자들은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믿음에서 비롯된 사랑으로 예수님과 사도들에게 시중을 들었는데, 우리는 그것을 ‘내적인 부르심’에 응답한 일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겉으로 표시 나게 여자들에게 직책을 맡기신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부르심’과 ‘응답’이 작용한 일로 생각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자들이 했던 그 일은 나중에 교회의 공식 조직과 직책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열두 사도가 제자들의 공동체를 불러 모아 말하였다.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식탁 봉사를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형제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에서 평판이 좋고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 일곱을 찾아내십시오. 그들에게 이 직무를 맡기고, 우리는 기도와 말씀 봉사에만 전념하겠습니다.’ 이 말에 온 공동체가 동의하였다.”(사도 6,2-5ㄱ)
바오로 사도는 ‘성령의 은사’와 교회의 여러 가지 ‘직분’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은사는 여러 가지지만 성령은 같은 성령이십니다. 직분은 여러 가지지만 주님은 같은 주님이십니다. 활동은 여러 가지지만 모든 사람 안에서 모든 활동을 일으키시는 분은 같은 하느님이십니다.”(1코린 12,4-6)
교회의 공적인 부르심이든지 개인의 내적인 부르심이든지 간에, 또 교회가 맡긴 공적 직분이든지 개인이 자발적으로 나서서 하는 봉사활동이든지 간에, 공동선을 위해서 하느님께서 성령을 보내셔서 하시는 일이라는 점에서는(1코린 12,7)‘같은 일’입니다. <우리 교회에는 공식 직책을 맡은 것이 아닌데도 자발적으로 봉사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봉사자들이 하는 일들도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하는 ‘거룩한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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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인천교구 정천 사도 요한 신부님]
오늘 복음은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 일행 가운데 여자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특별히 강조합니다. 루카 복음서 저자는 이 여인들의 이름을 일일이 나열하고 그들의 역할도 구체적으로 언급하여 예수님의 선교 여정에서 그들의 공헌이 컸다는 점을 부각시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들었다.” 여기서 ‘시중들다’는 뜻의 그리스 말 동사 ‘디아코네오’는 좁은 의미로는 식탁에서 시중드는 행위를 가리키지만, 그 밖의 다른 봉사나 물질적인 지원 등의 넓은 의미로도 이해될 수 있습니다. 여인들은 예수님의 구원 활동을 위하여 기꺼이 ‘자기들의 재산’을 봉헌할 뿐만 아니라 그 여정에 몸소 함께하면서 일행에게 필요한 여러 도움을 주고자 하였습니다.
그들이 그토록 헌신적일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예수님에 대한 강렬한 체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이 여인들이 ‘악령과 병에 시달리다 낫게 된’ 사람들이었다고 전합니다. 특히 마리아 막달레나는 일곱 마귀에 시달리던 여자였는데, 일곱이라는 숫자는 마귀 들린 상태가 매우 심각하였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강력한 속박에서 마리아를 벗어나게 하여 주셨고, 구원을 경험한 마리아는 예수님을 온전히 따르며 누구보다 그분을 사랑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갈릴래아에서부터 예수님을 따르던 여인들은 그분께서 예루살렘에서 돌아가시고 묻히시는 마지막 순간까지 늘 그분 곁에 있었습니다(23,49.55-56 참조). 그리고 빈 무덤에서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가장 먼저 듣고(24,1-12 참조), 부활하신 그분을 가장 먼저 뵙는 영광을 얻습니다.(마태 28,9-10 참조)
우리도 예수님과 함께 길을 걷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 동행에 과연 얼마나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혹시 예수님을 제대로 체험하지 못하여서 소극적인 것은 아닌지 생각하여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과의 인격적인 만남에 우리를 초대하시고, 그 만남 안에서 우리가 직접 맛보고 경험하기를 바라십니다. 기도 안에서 얻게 되는 강렬한 체험을 바탕으로 예수님과 함께하는 여정에 우리가 더욱 헌신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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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이기양 요셉 신부님]
“예수님과 함께 있던 여자들은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들었다.”
<예루살렘 여인들의 헌신적인 도움>
예수님의 직업은 목수였습니다. 그런데 젊었을 때의 직업이 목수이셨고, 삼십 세가 되어 공생활을 시작하셨을 때는 직업이 없으셨습니다. 하느님의 말씀만을 전하시기에도 바쁘셨지요.
그렇다면 이렇다할 일도 없으셨던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먹고 사셨을까요? 더군다나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던 열두 명의 제자들은 항상 스승을 따라 다녔고 그들 외에도 수십 명의 제자들과 함께 생활할 때도 많았습니다.
수십 명이 먹고 자고 입고 쓰는 공동체 생활에 많은 비용이 들었을 것은 뻔한 일이지요.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예수님께서 어떻게 그 재원을 감당할 수 있으셨을까요? 그 답이 바로 오늘 복음에 나와 있습니다.
"그 뒤에 예수님께서는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며,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시고 그 복음을 전하셨다. 열두 제자도 그 분과 함께 다녔다. 악령과 병에 시달리다 낫게 된 몇몇 여자도 그들과 함께 있었는데, 일곱 마귀가 떨어져 나간 막달레나라고 하는 마리아, 헤로데의 집사 쿠자스의 아내 요안나, 수산나였다. 그리고 다른 여자들도 많이 있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들었다."(루카8,1-3)
많은 여인들, 특히 예수님께 은혜를 입은 막달라 여자 마리아, 요안나, 수산나 등의 여인들은 자신의 재산을 바쳐 예수님의 일행을 돕고 있었습니다.
하느님께 은총을 입은 이 여인들은 드러내놓고 사람들 앞에서 설교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지요. 그래서 하느님의 일을 하는 예수님과 그 제자들을 말 그대로 물심양면으로 도왔습니다.
이들의 도움이 있었기에 예수님께서는 복음 선포에 헌신하실 수가 있었고 또 여인들은 끊임없이 하느님의 은총을 입을 수가 있었습니다.
이렇게 모든 것을 바쳐서 하느님 나라를 위해서 힘썼던 여인들은 예수님께서 돌아가셨을 때도 그 험난한 십자가의 길을 함께 하며 마지막 죽음의 순간을 지켰습니다.
여기에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을 입고서도 이 여인들이 예수님의 일행을 돕지 않았다면 그 은총이 지속될 수도 없었을 터이고, 예수님께서 복음을 선포하시는 일을 행하시기도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보이지 않은 여인들의 헌신적인 노력이 없었다면 예수님의 운신의 폭은 무척 한계가 있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도움은 베드로 사도나 바오로 사도, 그리고 다른 제자들에게도 다 마찬가지였지요.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일을 하는 사람은 도움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말씀하시며 제자들을 파견하실 때 빈손으로 보내십니다.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 돈도 지니지 마라. 여행 보따리도 여벌 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마라. 일꾼이 자기 먹을 것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마태 10,9-10)
실제로 파견을 받은 제자들은 많은 사람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잡음이 없지 않아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것이 싫어서 천막 짜는 일로 생계를 해결하기도 하였지만 여러 번의 전도 여행과 여러 교회를 돌보기 위해서는 역시 신자들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러한 도움은 지금도 계속이 됩니다. 성직자나 수도자들에게는 쌓아놓은 재물이 없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는 최소한의 것만을 취하도록 정해 놓았기 때문에 지금도 성직자와 수도자들이 어떤 일을 하려고 할 때 물심양면으로 돕는 사람들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 많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선교를 위해 오지에 나가는 성직자나 수도자는 뜻있는 신자들의 도움이 없이는 참으로 어려운 형편에 놓일 수밖에 없습니다.
본당 신부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야 할 때 신부가 할 수 있는 일은 도움을 줄 수 있는 신자를 찾아 연결해주는 것입니다.
신부에게 돈이 있어서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이 아니지요. 그래서 신부들 주변에는 늘 고마운 사람들이 있습니다. 제 주변에도 정말 필요하다고 요청하면 선뜻 도움을 줄 많은 사람이 있습니다.
저에게 세례를 받았거나 어렵고 힘이 들 때 위로를 받았던 사람들이 이런 은인이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풍요 속에 빈곤이라는 표현이 딱 들어맞는 처지가 또 신부들의 처지입니다. 신자들은 많은데 정작 아프고 힘이 들어 도움이 필요할 때 옆에 아무도 없을 수가 있습니다.
신부는 하느님 안에서 신자들과 함께 살아가는 삶을 택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가정을 꾸리지 않지요. 신부에게 있어서 가족이 누구이겠습니까? 바로 신자들입니다.
신부나 수녀들은 하느님 안에서 신자들을 바라보며 살아갑니다. 어렵고 힘이 들 때 누가 도울 수 있겠습니까? 개신교 신자들이 돕겠습니까? 불교 신자들이 돕겠습니까? 우리 신자들이 위하고 도와야지요. 그런데 가끔 이렇게 말하는 신자들이 있습니다. "신부님께 너무 잘 해 드리면 세속화되셔서 안 좋은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 정도 판단력이 없이 세상을 살면서 복음을 전하는 사제는 없지요. 모든 것을 버리고 하느님을 따르는 사람이 세상적인 작은 일로 본질을 흐리는 경우는 드물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신자들은 성직자와 수도자들이 복음적인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게 기도하며 힘이 되어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나름대로 도움을 준다고 하여 "우리 신부님, 내 신부님" 하며 지나치게 속된 방법으로 자기만을 위한 관계로 끌어가려고 합니다. 바람직한 모습이 아니지요. 신자들의 올바른 뒷받침은 기도하는 성직자와 수도자로,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일에 최선을 다하도록 이끌어주는 힘이 됩니다.
우리 한국 초대교회 많은 신자의 성직자에 대한 존경은 하늘을 찔렀습니다. '신부님' 하면 '하느님' 보듯이 했었지요. 이것이 바람직합니다.
하느님에 대한 존경이 크면 성직자에 대한 존경도 큽니다. 신심이 없으면 같이 갈 수가 없지요. 사람은 자기가 지닌 신심만큼 보게 되어 있습니다.
성직자를 하느님 보듯이 대하고, 또 성직자들은 신자들을 위해서 목숨을 아끼지 않고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고 기도하는 모습, 이것이 한국 초대교회의 모습입니다. 이것이 가장 복음적인 모습이지요.
좋은 공동체, 복음적인 공동체는 함께 만드는 것입니다. 성직자는 헌신적으로 하느님께 헌신하고 신자들은 존경과 믿음으로 성직자를 따르며 뒷받침하는 것이 가장 복음적인 공동체의 모습입니다.
오늘 예루살렘의 많은 여인은 예수님이 하느님의 말씀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여러 가지 뒷받침을 많이 했습니다.
지금도 교회는 많은 신자의 뒷받침을 통해 발전이 이어져 나가고 있지요. 그런 면에 있어서 신자들이 성직자, 수도자들이 하느님의 일을 할 수 있도록 돕고 격려하고 기도하는 것은 너무나도 바람직합니다.
신자들이 한마음으로 하느님께 의지하며 사제들이 하느님의 일을 할 수 있도록 기도로써 뒷받침하는 것은 더할 나위 없이 힘이 됩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 신자들은 사목자 수도자들이 하느님의 일을 할 수 있도록 기도하고 존경하며 믿고 따르면서 뒷받침하고, 성직자들은 헌신적으로 하느님의 일을 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공동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여인들의 많은 도움을 통해서 하느님의 일을 할 수 있었듯이 우리 신자들도 하느님의 일을 위해서 봉헌할 수 있고 실천할 수 있는 신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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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박상대 마르코 신부님]
<자매 신자들께 감사>
예수께서는 여러 도시와 마을을 두루 다니시면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고 그 복음을 전하셨다.
오늘 복음은 예수께서 행하시는 선교활동의 일상(日常)에 관하여 짧지만 종합적인 내용을 들려주면서, 활동에 함께 다니던 동반자들을 소개하고 있다.
그중에는 오늘 복음에 언급된 바대로 열두 제자와 십수 명의 여인들이 있었다. 여인 중에는 막달라 마리아, 요안나, 수산나의 이름이 거명되고 있다.
막달라 마리아는 일곱 마귀에 시달리다 치유된 여인이며, 요안나는 헤로데 안티파스의 신하 쿠자의 아내였다.
이 여인들은 자기네 재산을 바쳐 예수의 일행을 도왔다고 한다. 그 뿐만이 아니다. 이 여인들은 예수님의 마지막 십자가 죽음에까지 동행한 사람들이다.(루카 23,49) 참으로 진정한 동행이 아닐 수 없다.
허나 예수님의 동반자들이 어디 이들뿐이었겠는가? 예수께서는 선교 활동의 시작부터 많은 동행자를 얻으셨다.
예수께서 직접 제자로 불러 곁에 둔 사람들도 있었지만, 친지와 고향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고, 심금을 울리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병자치유와 구마기적에 마음을 뺏겨 그저 신이 나서 따라다녔던 사람들도 있을 것이며,
예수님으로부터 은혜를 입고 감사의 마음으로 따라다니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물론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로 구성된 감찰반도 빼놓을 수 없다. 우리가 예수께서 많은 제자들 중에서 특별히 열두 제자를 선별하셨던 내용이나(루카 6,13),
일흔 두 제자들을 뽑아 여러 마을과 고장으로 둘씩 짝지어 보내신 내용(루카 10,1)만 보더라도, 예수님의 동반자는 적어도 100명은 훨씬 넘어 200명 정도로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 둘 곳조차 없다.”(루가 9,58; 마태 8,20)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날 것이다.
이와 같이 예수께서는 집도 절도 없이 이 도시에서 저 도시로,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두루 다니시면서, 하느님 나라와 그 복음에 관하여 편력(遍歷) 설교를 하셨고, 병자들과 마귀 들린 사람들을 치유해 주셨다.
편력설교자에게 고정된 주거지란 있을 수 없다. 발 닿는 그곳이 그날 묵을 곳이며, 거저 그때 주어지는 음식이 그날의 양식이다. 이는 예수님의 동반자 모두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공식이다.
특별히 여인들이 자기네 재산을 바쳐 예수님의 일행을 돕고 있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루카복음이 가난한 이들과 불쌍한 이들, 죄인들, 여인들 등, 사회에서 소외된 계층의 사람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이들을 주제로 보도하는 고유의 특수사료가 다른 복음서에 비해 많다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루카복음은 특히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를 비롯하여, 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 예언자 안나, 나인의 과부, 마르타와 마리아, 어떤 부인의 성모칭송, 곱사등이 부인, 잃은 은전과 부인, 재판관과 과부의 청, 가난한 과부의 헌금, 예수님의 마지막 십자가 길을 동행하는 부인들 등에 관한 많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당시 이스라엘 여인들의 비교적 낮은 사회적 신분과 지위를 감안할 때, 예수님의 관심이 여인들에게 쏠린 것은 당연한 일이다.
여인들 또한 예수님의 관심을 외면하지 않았다. 이는 그 때나 지금이나 변함없다. 어디를 가든 신학교만 빼고 항상 자매님들이 더 많이 기도하고, 활동하며, 하느님 사업의 중심에 서있다.
따라서 교회는 대부분 여인들에 의해 살아가고 있다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렇다고 수적으로 열세인 우리 형제 신자분들이 마냥 놀고만 계신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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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라렛선교수도회 이회진 빈첸시오 신부님]
그<리고 다른 여자들도 많이 있었다>
루카 복음 사가는 예수님께서 당신의 선교 여행에 12 제자들뿐만 아니라 여인들도 여행의 동반자로 함께 초대하고 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선교 공동체의 구성을 보여주는 오늘 복음을 묵상할 때마다 예수님의 사랑이 참으로 위대하고 아름답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선교 여행에 제자들과 여인들의 동반을 허락하시는 것은 그들에게는 기쁨이자 희망의 원천이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그들을 당신 곁에 둘뿐만 아니라 그들의 도움을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본래 예수님 당신은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우리의 도움을 기꺼이 받아들이십니다. 그것은 마치 우리 삶이 예수님을 필요로 하듯, 당신 사랑의 세계는 우리의 존재와 우리의 협력을 필요로 하기에, 우리가 당신의 소중한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저의 좋지 않은 습관 중 하나는 일을 혼자 처리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혼자 하는 것이 더 빠르고 맘에도 들뿐만 아니라 편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부분을 다른 이에게 맡겨 두었다가 맘에 들지 않으면 그것을 맘에 들게 고치며 시간을 더 많이 허비해야 하는 것이 싫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고치면 상대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것은 아닐까? 하며 노심초사하는 것이 싫어서 가능하면 일을 혼자서 처리합니다.
그런데 혼자 일을 하면 할수록 일은 점점 더 늘어만 가고 일을 하지 않는 것 같은 다른 사람들을 보면 짜증과 미움은 마음속에 쌓여만 갑니다.
다른 한편으로 그들은 제게 “독불장군”이니, “혼자 다 지고 가느니” 하며 불만스러워합니다.
무엇이든 다 하실 수 있는 예수님은 제자들과 여인들의 도움마저 받아들이시는데, 예수님처럼 무엇이나 다 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저는 제 마음 하나 편해지자고 동료들을 멀리하고 거절합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들임으로써 그들 스스로가 자신도 무엇인가 예수님과 함께 한다는 기쁨을 체험하며, 자기 자신의 존재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스스로 깨닫게 합니다.
그러한 체험은 예수님께 다시 감사와 자기 삶의 희망을 돌리게 되는 한편, 다른 이들에게도 그런 사랑의 나눔과 희망의 가치를 전하게 할 것입니다.
그런데 저의 행위는 함께 사는 형제들 하나하나를 고립시키고 구별 짓게 만듭니다. 그리하여 나라는 존재는 일을 위해 필요할지 모르나 그것은 일을 위해서지 공동체를 위해서도 사람을 위해서도 소중한 존재가 스스로 되지 못하고 맙니다.
다른 형제들도 역시 자신의 무력함 혹은 무료함 안에서 자기 존중감이 결여되는 우(愚)를 범하게 되기도 합니다.
누군가를 받아들인다는 것, 그리고 그와 함께 일을 나누고 삶을 나눈다는 것에 비록 여러 어려움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안에서 만나게 되는 존재들의 소중함과 삶의 기쁨에 대한 체험은 우리의 삶에 큰 기쁨이 되고 자기 존재의 소중함을 일깨워줌으로써 자기 스스로 자신의 삶을 소중하게 여기며 자신을 사랑하게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혼자서도 모든 것을 다 하실 수 있는 하느님이십니다. 그런데도 그분은 우리의 존재와 우리의 협력을 기꺼이 받아주시며 당신께서 우리가 필요하기에, 우리가 당신의 희망이라고 알려 주십니다.
예수님이 던지는 이 희망의 메시지는 무엇보다도 우리 자신을 스스로 소중한 존재로 인식하게 만듭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먼저 예수님의 희망 자체이며, 또한 당신의 구원 사업을 함께할 귀한 존재들임을 예수님은 우리 스스로 깨닫게 합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우리를 받아주시고 함께 하시기에, 우리 자신이 예수님 당신에게 정말 소중한 존재임을 스스로 받아들이는 것처럼 오늘 나의 형제들과 가족들과 함께 일과 시간과 삶을 나눈다는 것은 그들과 나 자신에게 우리가 진정 서로에게 소중한 존재임을 확인시켜 주는 복음적 삶의 한 모습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많은 이들과 함께하시기 바랍니다.
“주님, 저의 아집과 독선을 꾸짖어주소서. 당신이 저에게 희망이요 기쁨이듯, 제가 형제들에게 희망이요 기쁨일수 있도록 당신을 배우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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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자기들의 재산으로 시중을 들었다>
“내가 남에게 베푼 것은 새겨 두지 말고, 남이 내게 베푼 것은 잊지 말라”고 했습니다. 은혜를 입었으면 걸맞은 응답을 해야 당연합니다. 억지로 마지못해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감사함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감사하게 되면 더 큰 감사를 할 기회가 옵니다. 빈첸시오 성인은 “나누면 나눌수록 풍요로워지고 버리면 버릴수록 자유로워집니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녀 마더데레사 수녀님은“쌓아 놓으면 쌓아 놓을수록 줄 것이 없습니다. 주면 줄수록 줄 수 있는 능력이 생깁니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사랑의 논리입니다. 사랑은 베풀면 베풀수록 풍요로워집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고 복음을 전하셨는데 제자들과 막달라여자 마리아, 헤로데의 신하 쿠자의 아내인 요안나, 그리고 수산나라는 여자를 비롯하여 여러 사람이 자기네 재산을 바쳐 예수의 일행을 도왔습니다.
그들 중에는 일찍이 악령과 질병에 시달린 사람도 있었는데 주님을 만나서 행복을 찾았습니다. 그들은 악령과 고통이라는 시련을 통해서 주님을 만났고 하느님의 은총을 체험했기에 모두를 바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따름으로써 주님과의 만남이 더 깊어졌고 나중에는 십자가 곁에도 설 수 있었고(루카 23,49) 천사들로부터 주님 부활의 소식을 듣고 이를 사도들에게 알려줄 수 있었습니다.(루카 24,10)
여인들은 주님을 만나 행복했고 자기의 것을 내놓음으로써 제자들이 주님의 일을 할 수 있도록 큰 힘이 되어주었습니다. 그들은 은혜를 베풀었지만, 보답을 바라지 않았고 자기네 재산을 바쳤지만 후회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분명 숨은 공로자들입니다. 그들은“은혜를 베푼 것은 모래밭에 새기고 은혜를 입은 것은 돌 판에 새겼습니다.” 재산은 이웃과 나눌 때 비로소 가치를 더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늘에 보화를 쌓는 일입니다.
오늘도 많은 사도직 단체의 구성원이 이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오직 주님만 바라보며 궂은일을 도맡아 합니다. 때로는 오해를 사고 무시당하는 일도 있지만 '하느님은 아시니까' 하면서 묵묵히 해야 할 일을 합니다.
하느님의 일을 하는 데 있어서 숨은 공로자가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그것으로 만족하시오. 부자가 되려고 애쓰는 사람은 유혹에 빠지고 올가미에 걸리고 어리석고도 해로운 온갖 욕심에 사로잡혀서 파멸의 구렁텅이에 떨어지게 됩니다.”(1티모6,8-9)
하느님께서 만드신 모든 것은 선한 것이지만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화가 되기도 하고 악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누가 부자가 된다 하여도, 제 집의 영광을 드높인다 하여도 불안해 하지 마라. 죽을 때 그 모든 것을 가지고 갈 수 없으며 그의 영광도 그를 따라 내려가지 못한다.”(시편4917-18)
따라서 여인들이 자기네 재산을 주님의 일에 쓴 것은 참으로 지혜로운 일입니다. 우리도 모든 것을 주님의 뜻에 따라 사용할 수 있도록 은총을 간구해야 하겠습니다.
“당신이 저에게 바라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려 주십시오. 저는 저의 뜻을 버리고 당신의 뜻에 저의 뜻을 맞추겠습니다.”(성 알퐁소)
그리할 때 우리 모두는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공로자가 됩니다. 지금 감사하십시오! 절대 미루지 마십시오! 그러면 더 많이 감사할 수 있는 은혜를 만날 것입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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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자녀들이 집에서 멀리 떨어져 살고 있을 때, 부모는 자녀가 어떻게 사는지 궁금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부모는 자녀가 전화나 SNS, 문자로라도 연락하기를 바랍니다. 물론 ‘무소식이 희소식이다.’라는 말도 있지만, 그 어떤 연락도 오지 않으면 잘살고 있는지, 혹시 어떤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지 계속해서 걱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부모가 먼저 조심스럽게 연락해 보았음에도 연락되지 않는다면 걱정은 더 커지고 맙니다. 하지만 자녀와 부모가 서로 연락을 자주 한다면 어떨까요? 부모의 걱정은 크게 줄어들 것입니다.
하느님과의 관계도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요? 기도는 우리가 하느님과 연락하는 가장 중요한 수단입니다. 즉, 기도는 하느님께 연락해서 잘 지낼 수 있게 합니다. 성 야고보 사도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을 가까이하시오. 그러면 그분이 여러분을 가까이하실 것입니다.” (야고 4,8)
하느님과의 관계가 끊어져서는 안 됩니다. 무엇이든 다 알고 계신 하느님이시지만,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의 연락을 간절히 원하십니다. 그리고 기도를 통해 자주 연락하면서 훨씬 더 가까워지고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을 더 충만히 받을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이십니다. 따라서 당신의 그 힘으로 무엇이든 할 수 있습니다. 즉,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는 분입니다. 하지만 당신 혼자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고 복음을 전하지 않으십니다. 제자들과 함께하셨고, 제자들만이 아니라 오늘 복음에도 등장하듯 많은 여자들도 함께하셨습니다.
사실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 가운데 여자가 있었다는 것은 당시 시대에는 커다란 물의를 일으킬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여자는 오직 남자에게만 종속되어 있었고, 율법을 지킬 의무도 없었으며 그 어떤 권리도 누릴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함께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예수님을 따르는 것에는 남녀노소의 구분이 없다는 것을, 또 죄인이든 의인이든 상관없다는 것을, 즉 모든 이는 주님을 따라야 함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주님을 온전하게 따르고 있습니까? 부족함이 없으신 분께서는 우리와 함께하기를 계속해서 우리에게 요구하십니다. 바쁘다는 이유로, 여유가 없다는 이유로, 지금 어렵고 힘들다는 이유로 주님과의 연락을 스스로 끊어버리고 있는 것이 아닌지를 묵상해 보았으면 합니다.
오늘 독서의 사도 바오로 말씀처럼 세상의 사람이 아닌, 하느님의 사람이라고 불릴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의로움과 신심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추구하면서 영원한 생명의 주인공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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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당신과 나>
루카 8,1-3 (여자들이 예수님의 활동을 돕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며,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시고 그 복음을 전하셨다. 열두 제자도 그분과 함께 다녔다. 악령과 병에 시달리다 낫게 된 몇몇 여자도 그들과 함께 있었는데, 일곱 마귀가 떨어져 나간 막달레나라고 하는 마리아, 헤로데의 집사 쿠자스의 아내 요안나, 수산나였다. 그리고 다른 여자들도 많이 있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들었다.
<당신과 나>
당신
내 곁에
계시어
당신
나에게
기쁨과 희망
되어주시듯
나
당신 곁에
있어
나
당신께
기쁨과 희망
되어드리리다
=====================
[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교만의 결과들>
“그는 교만해져서 아무것도 깨닫지 못할 뿐만 아니라 논쟁과 설전에 병적인 열정을 쏟습니다. 이러한 것에서부터 시기와 분쟁과 중상과 못된 의심과 끊임없는 알력이 나와, 정신이 썩고 진리를 잃어버린 사람들 사이에 번져갑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의 가르침은 주님의 건전한 말씀과 신심에 부합하지 않으면 교만해지고 교만으로 인해 각가지 안 좋은 결과가 나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교만의 첫 번째 결과는 아무것도 깨닫지 못함입니다.
우리는 깨달아야 할 것이 많습니다. -우선 진리를 깨달아야 하고, -그런데 진리를 깨달아야 할 자기가 얼마나 어리석은지 깨달아야 하며, -어리석기에 자기가 대단한 줄 그리고 모든 것을 다 아는 줄 착각하고, 반면에 자기가 얼마나 유한한지를 깨닫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렇게 자기의 어리석음과 한계를 깨달아 겸손해지고 지혜롭게 되면 -우리 인생의 목적이 행복이란 것을 깨닫게 되고, 무엇이 우리를 행복하게 하고 무엇이 불행하게 하는지 곧 사랑과 가난이 우리를 행복하게 하고 교만과 욕심이 불행케 함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교만은 이 모든 것을 다 깨닫지 못하게 하고, 그래서 어리석게도 잘난 척하고 남을 무시하며 그래서 싸움닭처럼 누구하고든 싸우려고 덤벼들게 하는데 이것이 교만의 두 번째 결과이며 바오로 사도는 이것을 병적인 열정이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은 가히 병적이라고 할만합니다. 싸우지 않고 평화로이 사는 것이 정상이고 행복인데 나보다 잘난 놈 있으면 나와 봐 하는 식으로 싸우려 들고 싸우지 않으면 심심하고 싸우는 데서 자기의 존재 가치를 확인하니 말입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이런 병적인 열정에서 시기와 분쟁과 중상과 못된 의심과 끊임없는 알력이 나온다고 하는데 당연하지요.
교만의 세 번째 결과는 정신의 타락입니다. 그런데 병적인 열정과 정신의 타락이 실은 같은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얼마간 교만하다고 할 수 있는데 교만이 어느 정도를 넘으면 누구도 그것을 고쳐줄 수 없을 정도가 되고, 정신마저 제정신이 아니게 하거나 썩어빠진 정신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열정이나 정신 모두 어딘가에 힘을 쏟게 하고 어딘가로 치닫게 하는 힘인데 진리에 바탕을 둔 건강하고 건전한 가르침과 관계에 힘을 쏟거나 향하게 하지 않는다면 그것이야말로 병적인 열정이고 썩어빠진 정신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저는 요즘 우리 사회가 정신적으로 병들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비단 우리나라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그렇게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신자유주의라는 악마가 그렇게 몰고 가는 것입니다. 신자유주의는 자유를 아무런 통제 없이 각자에게 맡기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자유주의는 자유롭게 무한 경쟁하게 하자는 것이 아닙니까? 이 무한 경쟁의 삶이 요즘 젊은이들을 정신적으로 힘들게 하고 병들게 하며, 경쟁에 적응치 못하거나 패배한 사람을 자폐하게 하거나 칼을 들게 하는 겁니다. 요즘 우리 대통령이 말끝마다 자유를 외치고 실로 자유가 좋은 것이긴 한데 자유는 위험한 칼과도 같고 요즘 칼부림을 자주 보듯 참으로 위험한 겁니다. 정신병자에게 칼이 들려있다고 있다고 한번 생각해보시면 알 수 있겠지요.
옳게 쓸 줄 알면 다시 말해서 사랑하는 쪽으로 쓰면 너도나도 모두 행복케 하지만 잘못 쓰면 다시 말해서 이기주의적이고 자기중심적이고 경쟁적으로 쓰면 앞서 봤듯이 사회 전체가 정신적으로 병들게 하여 모두 불행하게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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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선교 여정중인 교회 공동체 삶의 기본 원리들>
-중심, 비전, 치유, 섬김-
"하느님, 내 마음을 깨끗이 만드시고, 내 안에 굳센 정신을 새로 하소서."(시편51,12)
"네 근심 걱정을 주님께 맡겨드려라. 당신이 너를 붙들어 주시리라. 의인이 흔들리게 버려둘리 없으리라."(시편55,23)
오늘 루카복음은 3절까지로 짧고 참 특이합니다. 여자들이 예수님의 활동을 도우며 그 일행을 따라 다닙니다. 당시 여자들이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바로 곁에서 추종하는 일은 팔레스티나에서 매우 이례적일 뿐만 아니라, 크게 물의를 일으키는 일이었습니다. 당시만 그런게 아니라 오늘날도 이런 남자들과 여자들이 혼성된 무리들이 예수님을 따라 다니면 주위의 시선들을 견디기 힘들 것입니다.
저는 오늘 복음을 통해 공동체 삶에 대한 묵상을 나누고 싶습니다. 그래서 오늘 강론 제목을 “선교 여정중인 교회 공동체 삶의 기본 원리들”로 했고, 그 원리들은 “비전, 중심, 치유, 섬김”으로 나눠봤습니다.
연상되어 떠오른 것이 9년 전 산티아고 순례 여정이었습니다. 순례 여정중 저절로 남성과 여성들의 혼성 공동체가 이뤄졌고 숙소에서도 함께했지만 전혀 문제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비전과 목표가 뚜렷했기에 국적, 인종, 언어, 성별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순수했고 일치된 모습이었습니다. 말은 통하지 않아도 “산티아고 순례”라는 목표로 순수한 마음이 하나로 통하니 저절로 서로 신뢰하는 분위기였습니다. 진리를 찾는 구도자들의 공동체요, 서로 마음이 통하니 시종일관 따뜻하고 부드럽고 평화로운, 서로 돕는 우호적인 분위기였습니다.
함께 모였다고 공동체가 아니라, 공동체가 바라보는 비전과 중심이 선명하고 새로울 때 비로소 참된 공동체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복음의 공동체나 오늘 우리 교회 공동체 역시 그 비전과 중심은 한결같이 똑같습니다. 바로 다음 복음의 첫절에서 중심과 비전이 분명히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는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며,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그 복음을 전하셨다.’
바로 공동체의 중심은 “예수님”이요 비전은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오늘 지금 여기서 예수님 중심으로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는 그 공동체 자체가 하느님 나라의 실현입니다. 이런 중심과 비전이 뚜렷했기에 복음 선포의 선교 공동체 역할에 충실할 수 있었음을 봅니다. 이미 선교는 기본적으로 전제되어 있는 순례 여정중의 남성과 여성의 혼성 선교 공동체였던 것입니다.
참으로 모두가 바라보는 일치의 중심인 예수님의 뚜렷한 존재와 하느님 나라의 생생한 비전이 공동체 삶의 핵심적 요소가 됨을 봅니다. 이는 우리 수도공동체는 물론 미사봉헌하는 교회공동체를 통해서도 그대로 입증됩니다. 이 거룩한 미사전례중 우리는 일치의 중심인 파스카 예수님을 바라보며 하느님 나라의 비전을 현실화합니다.
말그대로 미사전례를 통해 하느님 나라의 실현이요 우리는 하느님의 나라가 되어 각자 삶의 자리로 파견됩니다. 새삼 우리 역시 순례 여정중인 선교공동체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열두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랐고 악령과 병에 시달리다 낫게 된 몇몇여자도 그들과 함께 있었다 합니다.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고 복음을 전하면서 살아갈 때 자연스럽게 뒤따른 치유의 은총입니다. 이런면에서 미사전례보다 우리의 치유에 도움에 되는 수행은 없을 것입니다. 말그대로 힐링의 가톨릭 교회요 힐링의 가톨릭 교회 전례라는 것입니다. 정말 살아 계신 주님을 만남으로 하느님 나라의 체험과 더불어 영육의 치유, 힐링입니다.
그러니 예수님 “중심”과 하느님 나라의 “비전”의 실현과 더불어 “치유”의 은총입니다. 그리고 치유에 이은 “섬김”입니다. 치유를 완벽하게 보완하는 섬김의 활동입니다. 메타노니아 회개에 이은 코이노니아 친교, 그리고 마지막 정점을 이루는 것이 디아코니아 섬김입니다.
예수님과 열두제자의 선교활동이 원활할 수 있음은 치유받은 부인들의 한결같은 충실한 섬김 때문임을 다음 복음 마지막 대목이 입증합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들었다.”
이에 대한 주석을 소개합니다. 때로 수도원 주방 봉사하는 자매들을 연상하면 그 이해가 확연해집니다. ‘시중들었다는 것은 주로 음식을 대접했다는 뜻이다. 부인들이 예수님 일행을 따라다닌 것은 당대 관습을 고려할 때 파격적이다.
사실 예수님 시대 이스라엘에서는 남녀가 공공연히 이야기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여자들을 스스럼없이 대하셨다.’
일체의 스캔들 없이 참으로 남녀 모든 제자들 공동체의 일치의 중심이었던, 예나 이제나 일치의 중심을 이루시는 파스카 예수님이셨습니다. 바로 이런 일치의 중심이신 주님의 은총이 공동체 성장에 결정적 도움이 됩니다. 오늘 제1독서 티모데오 1서는 건강한 교회공동체 형성에 좋은 가르침을 줍니다.
첫째,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건전한 말씀과 신심에 부합되는 가르침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교만해져 아무것도 깨닫지 못할 뿐만 아니라, 논쟁과 설전에 병적인 열정을 쏟게 됩니다. 여기서부터 시기와 분쟁, 중상과 못된 의심과 끊임없는 알력이 나와, 정신이 썩고 진리를 잃어버린 사람들 사이에 번져갑니다. 우리에게는 생소한 체험이지만 주님의 진리를 벗어나 이단에 빠질 때 겪는 어려움이요 역시 초대교회 바오로 사도의 체험을 반영합니다.
둘째, 자족할줄 아는 신심을 지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않았으며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없습니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우리는 그것으로 만족합시다.
바오로 일행의 세상사에 초연한 참 자유로운 이탈의 모습들입니다. 예수님 중심과 하느님 나라의 비전에 충실할 때 저절로 무욕의 초연한 삶임을 깨닫습니다.
셋째, 부자를 부러워하지 않음이요 돈을 사랑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 수도자들은 거의 해당되지 않지만 세상에서 살아가는 교회공동체 형제자매들은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부자가 되기를 바라는 자들은 파멸과 멸망에 빠뜨리는 유혹과 올가미와 어리석고 해로운 갖가지 욕망에 떨어집니다.
이어지는 말씀도 충격적입니다. 돈을 사랑하는 것은 모든 악의 뿌리이며, 돈을 따라 다니다가 믿음에서 멀어져 방황하며 많은 아픔을 겪습니다. 예나 이제나 돈 욕심을 자제함이 참으로 영적 건강에 절대적임을 봅니다.
넷째 충고가 최종적이요 결정적입니다. “하느님의 사람”이라 칭하며 바른 삶을 권하는 내용이 좋아 그대로 인용합니다. 바로 비오로 사도가 티모테오는 물론 교회공동체에 몸담고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주는 유익한 가르침입니다.
그대로 이 거룩한 미사중 주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당부하시는 말씀입니다. 역시 우리 신자들의 신원은 좌파도 우파도 아닌 예수님파 “주님의 용사(勇士)들”임을 새롭게 확인합니다.
“하느님의 사람이여, 그대는 이러한 것들을 피하고, 그 대신 의로움과 신심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추구하십시오. 믿음을 위하여 훌륭하게 싸워 영원한 생명을 차지하십시오.”(1티모6,11-12ㄱ).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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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그들은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들었다."(루카8,3)
<영원한 생명을 위하여!>
오늘 복음(루카8,1-3)은 '여자들이 예수님의 활동을 돕는 말씀'입니다. 예수님 주변에는 여자들이 많았는데, 그들이 바로 예수님의 활동을 도왔던 '예루살렘 부인들이라는 여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끝까지 예수님과 함께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 하느님의 은총을 입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악령과 병에 시달리다 나은 사람들'이었고, '일곱 마귀가 떨어져 나간 막달레나라고 하는 마리아'였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을 입고 다시 태어난 그들은 자신들의 재산으로 예수님의 활동을 도우면서 예수님께서 걸어가셨던 '십자가의 길'을 함께 걸어갔습니다.
오늘 독서(1티모6,2ㄹ-12)는 사도 바오로가 사랑하는 제자 티모테오에게 전하는 '사목서간'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이 서간에서 이렇게 권고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않았으며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없습니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우리는 그것으로 만족합시다. 사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악의 뿌리입니다. 돈을 따라 다니다가 믿음에서 멀어져 방황하고 많은 아픔을 겪은 사람들이 있습니다."(1티모6,7-8.10)
"하느님의 사람이여, 그대는 이러한 것들을 피하십시오. 믿음을 위하여 훌륭히 싸워 영원한 생명을 차지하십시오. 그대는 많은 증인 앞에서 훌륭하게 신앙을 고백하였을 때에 영원한 생명에로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1티모6,11.12)
'성인 세례식' 때 주례 사제와 주고받은 질문과 응답은 이렇습니다.
"여러분은 하느님의 교회에서 무엇을 청합니까?"
"신앙을 청합니다."
"신앙이 여러분에게 무엇을 줍니까?"
"영원한 생명입니다."
세례 때의 은총을 다시 떠올리면서, '영원한 생명을 위하여' 오늘도 화이팅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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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youtu.be/wV2PHUdc-Q0?si=Hypld2v6OkvtACO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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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들었다.”(루카 8, 3)
하느님보다
커져버린
우리의 삶이다.
하느님 중심이
되는 삶이 바로
시중드는 삶이다.
시간을 바치는
시중이다.
모순된 삶을
바로잡아 주는
봉사이다.
되살아나는
기쁨이며
되살아나는
믿음이다.
시중드는
봉사가 사람을
아름답게한다.
결국 나를
살리는
봉사이다.
기도의 삶은
시중드는
봉사의 삶으로
드러난다.
우리의
삶을 바꾸어
놓는다.
계산하지 않는
진실된 나눔이
참으로 그립다.
요란한 소리의
봉사가 아니라
하느님과 함께하는
진실된 봉사이다.
우리 인생에서
가장 의미있는
시간은 봉사의
시간이다,
마음을 바치고
시간을 드리는
봉사로 성장한다.
교회의 역사는
봉사의 역사였다.
봉사를 통해
성장하고
기도를 통해
우리는
봉사한다.
시중드는
이들을 통해
교회는 빛난다.
분주한 봉사보다
하느님께 집중되는
봉사로 우리는 더욱
풍요로워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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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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