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산 동쪽에 묻었다’… 1300년 넘게 못찾은 신문왕릉
신라 신문왕과 관련된 추가적인 유물이 1942년 경북 경주 황복사지 삼층석탑에서 발굴되면서 황복사지 주변에서 신문왕릉을 찾으려는 노력이 활발해졌다. 당시 삼층석탑에서 출토된 높이 12.2cm의 금제불좌상(왼쪽·국보 제79호)과 높이 14cm의 금제불입상(국보 제80호).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흔히들 삼국통일을 이룬 신라왕으로 문무왕을 지목하지만, 그의 아들 신문왕의 역할도 간과할 수는 없다. 신문왕은 민심을 수습하고 새로운 나라로 나아가기 위한 제도적 기틀을 마련했다. 하지만 그는 681년 즉위 후 선왕의 장례를 채 마치기도 전에 위기를 맞았다. 장인 김흠돌이 난을 일으킨 것이다. 난을 진압한 다음 그는 개혁정치에 드라이브를 걸며 여러 업적을 남겼지만 귀족들과의 갈등이라는 숙제를 남긴 채 692년 세상을 떴다.
역사기록이 자세하지 않아 그가 몇 세에 죽음을 맞았는지 알 수 없다. 다만 큰아들 효소왕이 6세의 어린나이에 즉위한 점을 고려한다면 장수하지 못한 듯하다. 문무왕의 장례 과정에 대해서는 비교적 상세한 기록이 남아 있으나 신문왕에 대해선 사서에 ‘낭산 동쪽에 장사지냈다’는 짤막한 기록만 전한다.
그런데 이 기록과 달리 현재의 신문왕릉은 낭산 남쪽에 위치하므로 이 무덤에 신문왕이 묻혔을 것으로 여기는 학자는 매우 적다. 이 때문에 진짜 신문왕릉을 찾기 위한 발굴과 연구가 진행되고 있지만 아직 결정적 단서를 찾지 못하고 있다. 도대체 신문왕은 어디에 묻힌 것일까.
○ ‘조상묘 찾기 열풍’에 뒤바뀐 무덤 주인
935년 신라의 사직이 종언을 고한 뒤 옛 영화를 상징하는 궁궐과 역대 왕릉은 퇴락의 길을 걷게 된다. 유수와 같은 세월의 흐름 속에서 화려하던 궁궐은 황량한 빈터로, 장엄하게 관리되던 왕릉은 수풀이 뒤덮인 모습으로 변했다.
그런데 조선 후기 경주에서는 신라 왕의 후손들을 중심으로 조상묘 찾기 열풍이 불었다. 그 과정에서 일부 무덤이 왕릉으로 ‘복권’되었지만, 또 일부는 무덤 주인공이 바뀌기도 하였다. 그 시기의 왕릉 비정안이 지금까지 그대로 이어지고 있어 큰 논란을 낳고 있다. 신라 왕릉 가운데 주인공이 바뀐 대표 사례가 경주 배반동에 위치한 신문왕릉이다.
학계에선 현 신문왕릉에 묻힌 인물로 신문왕의 아들 효소왕을 지목하는 견해가 유력하다. 이 견해의 핵심 근거는 삼국사기의 기록이다. 삼국사기의 찬자 김부식은 효소왕의 장지와 관련하여 ‘망덕사 동쪽에 장사지냈다’고 기록했다. 망덕사가 신라의 호국사찰 사천왕사의 남쪽에 위치함이 역사 기록 및 발굴 결과로 증명되었고 그 동쪽에 현 신문왕릉이 위치하므로 그 무덤의 명칭을 효소왕릉으로 수정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 견해가 설득력이 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신문왕의 능을 다른 곳에서 찾아야 한다.
○ ‘황금 상자’에 새겨진 단서
황복사지 삼층석탑에서 발굴된 금동제 사리외함과 은제 사리함, 금제 사리함, 그리고 금동제 사리외함의 뚜껑을 확대한 모습(왼쪽부터). 사리외함 중앙에 은제 사리함이 있었고, 그 안에 다시 금제 사리함이 있었다. 사리외함 뚜껑 안쪽에는 신문왕과 왕비, 그리고 두 아들에 대한 이야기가 적혀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신문왕의 장지를 해명할 단서가 1942년에 드러났다. 그해 5월, 조선총독부 학무국은 무너질 위험에 처한 경주 명장리와 구황리 소재 신라 석탑 2기를 개건(改建)하기로 결정하고, 6월 1일 공사에 착수했다. 먼저 명장리 삼층석탑(용명리 삼층석탑)부터 해체했는데 맨 아래 기단부 석재를 들어올렸을 때 그곳에서 2점의 금동제 불상이 출토됐다.
이어 6월 24일부터 구황리 삼층석탑(황복사지 삼층석탑) 해체를 시작했는데, 이틀 만에 놀라운 성과가 있었다. 6월 25일 일몰시간이 가까워질 무렵 3층 탑신 아래에서 출토된 돌 뚜껑을 들어올리자, 2층 옥개석 상부에 파인 네모난 구멍 속에서 금동제 함이 발견된 것이다. 현장 책임자는 곧바로 유물을 수습하기로 하고 살짝 함 뚜껑을 열었다. 그랬더니 빗물로 보이는 탁한 물이 흥건한 가운데 황금빛 유물 여러 점이 눈에 들어왔다. 깜짝 놀란 그는 우선 들고 있던 함의 뚜껑부터 아래에서 대기하던 경주박물관장에게 건넸는데, 그것을 뒤집어본 박물관장은 또 한 번 깜짝 놀랐다. 뚜껑 안쪽에 빼곡히 글자가 새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해독한 결과 함 뚜껑에는 신문왕과 그의 왕비, 그리고 두 아들과 관련한 이야기가 적혀 있었다. 692년 신문왕이 승하하자 신목태후와 효소왕이 선왕의 명복을 빌며 탑을 세웠고, 700년과 702년에 신목태후와 효소왕이 차례로 세상을 뜨자, 706년에 이르러 그들을 추복하는 한편 성덕왕대 왕실의 번영과 태평성대를 빌면서 불사리와 순금 미타상, 무구정광대다라니경 등을 봉안한다는 내용이었다. 이 기록으로 말미암아 황복사가 신문왕의 능사 혹은 신라 왕실의 원찰이었을 공산이 커졌고, 신문왕의 능을 황복사지 주변에서 찾으려는 노력이 시작됐다.
○ 진평왕릉 주인이 신문왕?
학자들은 우선 황복사지 석탑에서 동쪽으로 135m가량 떨어진 논바닥을 주목했다. 그곳에 흩어진 석재 가운데 신라 왕릉에 쓰였음직한 것들이 다수 포함돼 있었기 때문이다. 1973년 그곳을 신문왕릉으로 보는 견해가 제기되어 학계의 지지를 받게 되면서 신문왕릉의 위치를 둘러싼 논의는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그러던 중 2017년 성림문화재연구원이 그곳에 대한 발굴 조사를 벌인 결과 반전이 일어났다. 조사단은 그곳이 신문왕의 능역이 아니며, 건축하다가 중단한 8세기대 가릉(假陵)이라고 설명했다. 석재 가운데 다수가 미완성인 점, 이곳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십이지신상이 나중에 주변 건물을 만들 때 재활용된 점, 석실 관련 석재가 보이지 않는 점 등을 근거로 들었다. 이어 742년 승하한 효성왕을 가릉의 주인공으로 추정했다.
근래에는 황복사지에서 동쪽으로 500m가량 떨어져 있는 현 진평왕릉을 신문왕의 능으로 특정하는 견해가 많아지고 있다. 낭산 동쪽에 위치하고 황복사지에서 무덤의 전모가 조망된다는 점이 입론의 근거이다. 그러나 아직 그 일대에 대한 발굴 조사가 전혀 이뤄지지 않았기에 단정하기가 쉽지 않다.
이처럼 우리가 상식처럼 알고 있는 신라 문화 관련 정보에 오류가 존재할 가능성이 있다. 물론 역사 기록이 영성함에 원인이 있지만 오래된 오류를 적극적으로 찾아내 수정하려는 노력이 부족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장차 새로운 발굴과 연구를 통해 조선시대 문중 차원에서 이름 붙인 신라 왕릉들이 원래의 이름을 되찾게 되길 바라본다.
이한상 대전대 역사문화학전공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