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이야기-당겨 지낸 명절
생각했다.
또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을 거듭했다.
참 많이도 거듭 생각했다.
그 끝에, 내 아내에게 이리 말을 했다.
“이번 추석 명절은 당겨 지냅시다.”
내 그 말을 듣는 아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리고 하는 말이 이랬다.
“왜 갑자기 그러세요. 얘들은 추석날에 오겠다고 하는데요.”
아내의 그 대꾸는 이미 예상했던 것이었다.
“이번 추석 명절에는 우리가 올 초부터 걷다가 중단 된 남파랑길을 다시 걷고 싶어서요. 이때 아니면 언제 걷겠어요.”
내 그렇게 1차 명분을 내놓았다.
아내는 그 명분에 수긍을 하지 않고, 이렇게 또 다른 대꾸를 하고 있었다.
“명절 제사는 어쩌고요?”
그 또한 이미 예상했던 대꾸였다.
“어차피 앞으로 모든 정보가 공유되고 세계가 하나로 엮이는 글로벌리즘의 시대가 되면 가족들이 때맞추어서 모이지를 않아요. 물론 제사 또한 제대로 지낼 수도 없어요. 핵가족의 시대에 제사를 강제할 수도 없고요. 또 일찌감치 우리 형제들 대에서부터 명절 제사를 소홀이 했었잖아요. 왜 소홀했겠어요. 마음 내켜 제사를 지내는 분위기가 아니었기 때문이잖아요. 지금까지는 어떻게라도 기제사에 명절 제사를 지내려고 애써봤지만, 집안이 모였다 하면 다툴 일만 생기고, 그래서 내 속상할 일만 생기곤 안 그러더냐하는 말입니다. 이젠 내가 싫어요. 각자 알아서 조상 챙기면 된다고 생각해요.”
내 그동안 여러 차례 했던 말을 다시 한 번 더 해서, 확실한 내 의중을 아내에게 전했다.
2차 명분이었다.
그래도 아내의 표정은 밝지 못했다.
뭔가 또 찜찜한 구석이 있는 모양이었다.
“마음에 안 들어요? 왜 답이 없어요. 답을 해야지요. 그래야 나도 일정을 잡지요. 답을 해봐요. 좋다든 안 좋다든 말이오.”
내 그렇게 답을 다그쳤다.
“이번에는 얘들이 온다고 하니 그냥 추석 명절을 같이 보내고, 제사도 지내는 것으로 해요. 그 자리에서 우리들 생각을 전하는 것이 좋겠어요. 그래서 내년부터 명절을 안 지내는 걸로 해도 될 것 같은데...”
한참을 입을 닫고 있던 아내가, 드디어 그렇게 자기 의견을 내놓고 있었다.
그러나 아내의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내 서둘러 막았다.
그리고 내 아주 단언했다.
이랬다.
“나는 제사라는 문화 자체가 마음에 안 들어요. 제사 이야기만 나오면 한 갑자 세월 전으로 거슬러, 우리 엄마가 시집에 돈 안 대준다고 시동생한테 뺨을 맞은 슬픈 사연이 떠오른단 말입니다. 그렇게 울 엄마를 불쌍하게 했던 그 집안의 어른들이 야속하기만 한데, 제사 지낼 마음이 어찌 생기겠느냔 말이오. 괜히 마음에도 없는 헛제사 지내는 거지.”
3차의 내 마지막 명분이었다.
6.25 전쟁 직후의 울 엄마는 스무 살도 채 안 된 어린 나이에 대구 칠성동 어느 붉은 벽돌로 지은 창고에서 시집식구와 같이 피난살이를 했었다.
그때 맏이인 나는 세 살이었고, 두 살 터울의 동생은 젖먹이였고, 또 한 동생은 엄마 뱃속에 있었다.
피난민으로서 돈벌이가 시원찮던 그때, 울 엄마는 입에 풀칠이라고 하겠다면서, 그 어린 아이들을 손에 잡고 걸리고 등에 업고 해서 전매청으로 달려가 담장 너머로 넘겨받은 도둑질 담배를 팔아서 겨우 연명을 했었다.
그런 삶에 지친 울 엄마가 결국 시집식구들과 떨어져 친정이 있는 문경 점촌으로 이사를 해서 살게 됐고, 문경 카도라고 하는 읍내 중심에서 빵장사를 해서 돈을 벌기 시작했었다.
그 소문을 들은 시집에서 시동생을 보내서 돈을 달라고 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방금 시작한 빵집이라, 겨우 먹고는 사는 정도였을 뿐, 모아놓은 돈은 없었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시집에서 원하는 돈을 못주게 되자, 시동생이 울 엄마한테 덤벼들어서 뺨을 때렸다는 것이었다.
내 그 당시에는 철부지로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내 나이 쉰 정도 되었을 때, 외갓집 어느 어른을 통해서 그 슬픈 이야기를 전해 들었었다.
그때부터 나는 우리 집안의 제사문화에서 멀어지기 시작했다.
울 엄마의 그 슬픈 사연이 자꾸만 상기되어서였다.
내 그렇게 마지막 명분을 밝혔는데도, 아내는 답하기를 우물쭈물 하고 있었다.
아예 내가 단안을 내리는 것이 좋겠다 싶었다.
그래서 내 말을 더 이었다.
다음은 그 이은 말이다.
“쇠뿔은 단김에 빼라고 했어요. 우물쭈물 생각만 하다가 실행을 못하는 것을 경계한 거지요. 그래서 내 나이 예순 넘어서면서 정한 인생 모토도 ‘문득 생각 곧장 실행’이라고 했던 거고요. 우리 집안에서 명절 제사 안 지내는 것은, 이번 추석 명절부터 적용하는 걸로 합니다. 두 며느리들에게 알려주세요. 시아버지인 내가 나서서 말해주는 것보다는 시어머니인 당신이 말해주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아요. 여자들 설득은 여자가 나서주는 것이 더 효과적이기도 하다 싶고요. 이제 더 이상 토 달지 마세요.”
내 그 말에 아내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거렸다.
지난 일요일인 2021년 9월 12일의 일이다.
저녁나절에 서초동 우리 원룸으로 우리 집안 온 가족이 모였다.
우리 부부 둘에, 개포동 맏이네 가족 셋에, 춘천 막내네 가족 셋해서, 모두 여덟이 그 좁은 원룸에 옹기종기 모여 앉았다.
맏며느리 지영이는 참치 회에 새우초밥을 준비했고, 막내며느리 은영이는 잡채에 갖가지 전을 부쳐왔다.
그렇게 추석 상차림을 했다.
그 상 주위로 우리 온 가족이 둘러앉아 오순도순 어울렸다.
첫 돌 지나 막 걸음마를 시작한 서율이의 온갖 재롱은, 우리 온 가족에게 큰 기쁨이었다.
그래서 우리 모두 행복했었다.
곧 당겨 지낸 명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