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18일(월)
* 시작 기도
주님...
주께서는 창세전 언약인 영생을 주시기로 약속하셨습니다(딛 1:2).
그 언약을 이루시고자 아들을 이 땅에 보내기로 작정하셨습니다(벧전 1:20).
때가 되어 그 아들을 여자의 후손으로 보내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로 인하여 아들을 믿는 우리에게 아들의 명분을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가 아들의 영을 받아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릅니다.
따라서 우리는 종이 아니라 아들이므로 하나님으로부터 유업을 받을 자요 이미 영생을 얻은 자입니다(갈 4:4-7).
하지만 아직 몸의 속량을 받지 못하였기에(롬 8:23), 순간순간 넘어지며 깨지는 질그릇으로 살고 있음을 고백합니다.
나의 연약함을 불쌍히 여기사 주의 긍휼을 베풀어 주옵소서.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빚어주시고 주의 영 곧 진리의 영으로 조명하사 말씀의 빛을 비추소서.
죽기에만 합당한 나를 위하여 주님은 그 수치와 모멸 그리고 부끄러움을 다 안고 십자가 지시며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오늘도 그 십자가의 보혈로 나를 씻어 정결한 주의 신부로 세우소서.
옛 사람은 십자가에 못 박사오니 나는 죽고 예수로 부요한 자 되게 하옵소서.
주일 이후 한 주간을 시작합니다.
나의 마음을 온전히 주님께 내어드리고 주님과 연합하여 동행하는 자 되기 원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본문 / 시 55:16-23
제목 : 나는 주를 의지하리이다.
16 나는 하나님께 부르짖으리니 여호와께서 나를 구원하시리로다.
17 저녁과 아침과 정오에 내가 근심하여 탄식하리니 여호와께서 내 소리를 들으시리로다.
18 나를 대적하는 자 많더니 나를 치는 전쟁에서 그가 내 생명을 구원하사 평안하게 하셨도다.
19 옛부터 계시는 하나님이 들으시고 그들을 낮추시리이다(셀라). 그들은 변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을 경외하지 아니함이니이다.
20 그는 손을 들어 자기와 화목한 자를 치고 그의 언약을 배반하였도다.
21 그의 입은 우유 기름보다 미끄러우나 그의 마음은 전쟁이요 그의 말은 기름보다 유하나 실상은 뽑힌 칼이로다.
22 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가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운히 허락하지 아니하시리로다.
23 하나님이여 주께서 그들로 파멸의 웅덩이에 빠지게 하시리이다. 피를 흘리게 하며 속이는 잗르은 그들의 날의 반도 살지 못할 것이나 나는 주를 의지하리이다.
* 나의 묵상
압살롬의 반역은 다윗의 친구이자 모사꾼인 아히도벨의 모략으로 더 힘을 얻는다.
압살롬과 아히도벨은 그 힘으로 아버지와 친구인 다윗을 공격한다.
그 소식을 듣지만 다윗은 곧바로 왕궁을 빠져나오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를 공격하는 이들이 다름 아닌 사랑하는 아들과 친구이기 때문이다.
정말이지 그를 치는 이들이 원수였다면 넉넉히 견딜 수 있었을 것이다.
자기를 치는 이들이 자기를 미워하는 원수였다면 그는 일찍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를 치는 이들이 사랑하는 아들이요 친구이기 때문에 발이 떨어지지 않는 것이다.
다윗이 그들의 공격으로 왕궁을 빠져나갈 때 신발도 제대로 갖춰 신지 못하고 머리도 헝클어진 채 도망가는 모습이 이를 뒷받침한다.
(삼하 15:30) 다윗이 감람 산 길로 올라갈 때에 그의 머리를 그가 가리고 맨발로 울며 가고 그와 함께 가는 모든 백성들도 각각 자기의 머리를 가리고 울며 올라가니라.
그의 마음은 하나님의 친구인 예루살렘이 반역하여 그들을 심판하시고자 그들을 떠나시려고 할 때 하나님께서 쉽게 떠나지 못하고 이곳저곳을 왔다갔다하시며 발을 동동 구르는 모습을 보여준다.
(겔 10:18-19) 여호와의 영광이 성전 문지방을 떠나서 그룹들 위에 머무르니 그룹들이 날개를 들고 내 눈 앞의 땅에서 올라가는데 그들이 나갈 때에 바퀴도 그 곁에서 함께 하더라. 그들이 여호와의 전으로 들어가는 동문에 머물고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그 위에 덮였더라.
예루살렘 성과 성전을 멸하시기 전에 하나님은 먼저 그곳을 떠나신다.
그런데 차마 하나님의 발이 떨어지지를 않는다.
그래서 성전 문지방에서 동문으로 갔다가 예루살렘 성 동쪽 산에도 갔다가 결국 떨어지지 않는 발을 떼어서 성전을 떠나신다.
(겔 11:22-24) 그 때에 그룹들이 날개를 드는데 바퀴도 그 곁에 있고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도 그 위에 덮였더니 여호와의 영광이 성읍 가운데에서부터 올라가 성읍 동쪽 산에 머무르고 주의 영이 나를 들어 하나님의 영의 환상 중에 데리고 갈대아에 있는 사로잡힌 자 중에 이르시더니 내가 본 환상이 나를 떠나 올라간지라.
이것이 오늘 본문에 나오는 다윗의 마음이요 또한 그것은 하나님의 마음이며 우리를 친구 삼으신 예수님의 마음이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신다.
고난 중에도 주님과 함께 하자고 말이다.
(롬 6: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주님은 결코 우리와 따로 국밥이 아니시다.
늘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기를 원하신다.
그런데 그 무엇보다 생명을 함께 하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생명은 무덤에서만 나올 수 있기에 주님의 무덤에 연합하자고 그토록 권하신다.
주님을 떠난 우리는 이미 죽은 자들이다.
그런데 이렇게 영적으로 죽은 우리가 이제는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죽고 또한 주님이 들어가신 그 무덤에 나도 함께 들어가 말씀으로 연합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그것이 아버지의 뜻이기에 그 자리에 아버지의 영광이 임하는 것이다.
그러면 아버지의 영광과 함께 주님과 연합된 그 무덤에서 생명이 나오는데 그 생명이 곧 새 생명이다.
이 생명은 그전에 내가 가지고 있던 자연적인 생명, 아담의 생명이 아니다.
그 생명과는 차원이 전혀 다른 아들의 생명이다.
이를 가리켜 새 생명이라고 말하며 바로 이 새 생명으로 살아가는 것이 죄로부터 구원받은 자의 삶이다.
많은 경우 사람들이 내가 구원받았나, 그렇지 않았나 하는 것에 초미의 관심을 가진다.
물론 그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구원 받았다는 것은 자녀라고 해서 무조건 천국으로 인도해주시는 것이 아니다.
물론 죄로부터 구원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로 받는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의 은혜로 받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구원이 완성된 것은 아니다.
십자가로 인하여 죄로부터 구원을 받았으며 그때부터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까지 우리에게는 남은 삶이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해 주신 목적은 다름 아니라 언약 백성 삼으시기 위함이다.
이 언약은 곧 새 언약을 말하며 새 언약을 잘 유지하기 위하여 그에 따르는 새 계명을 잘 지켜야 하는 것이다.
이 새 계명이 곧 조건의 규정으로써 이를 지킬 때 주님과의 언약 안에 머무르게 되고 주의 사랑을 덧입을 수 있다.
새 계명이란 렘 31:31-34절에 나오는 것으로 큰 자나 작은 자나 할 것 없이 날마다 주님을 아는 것이다.
안다는 것은 주님과의 교제를 말하는데 이 교제는 막연하게 관념적이고 생각으로 교제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말씀이 곧 주님의 존재 자체이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말씀 앞에 나아가지 않는 것은 곧 주님을 믿는 것이 아니다.
믿는다는 것은 주님과의 연합을 의미하며 내가 주님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주님 안으로 항상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날마다 말씀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말한다.
그럴 때 성령께서 함께하시며 깨닫게 해주셔서 주님과의 관계가 더욱 친밀해질 수 있다.
그러면 어떠한 상황에서도 넉넉히 견딜 수 있고 또한 상황과 환경에 상관없이 참 평안을 누릴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오늘 본문 18절의 다윗의 고백이다.
(18) 나를 대적하는 자 많더니 나를 치는 전쟁에서 그가 내 생명을 구원하사 평안하게 하셨도다.
그래서 다윗은 이렇게 말한다.
(22) 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가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원히 허락하지 아니하시리로다.
나는 주님의 친구라고 칭함을 받은 자이다.
(요 15:13-15)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그런데 나는 나를 친구 삼아주신 주님을 배반한 악인 중의 악인이다.
내가 바로 압살롬이자 아히도벨이 아니던가?
내가 바로 주님을 배신하였으며 내가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주님은 그런 친구의 배신을 고스란히 받으신다.
그 어떤 수모와 수치도 다 용납하신다.
내가 나의 친구이자 주님이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주었는데도 주님께서는 내게 그 어떤 비난과 손가락질도 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그런 나를 용납하시는 것이 아닌가?
이제 주님이 지신 십자가를 함께 지자고 하신다.
주님이 들어가신 무덤에 함께 들어가자고 하신다.
그것이 곧 아버지의 뜻이며 또한 기뻐하시는 일이므로 그 자리에 아버지의 영광이 임한다.
그 때 비로소 주의 생명, 곧 아들의 생명이 내게 주어지기 때문에 주님은 주님과 함께 십자가를 지고 무덤에 들어가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내 안에는 믿음이 있다.
주님께서 결단코 나를 버리지 않으실 것이라는 확신 말이다.
그런데 그 이면에는 또 다른 마음이 웅크리고 있음도 부인할 수 없다.
나는 반드시 천국에 갈 것이기 때문에 이 땅에서는 좀 내 마음대로, 육신의 소욕대로 살고 싶어하는 마음이다.
쾌락을 즐기고 육신이 하는 대로 나 자신을 내어주는 삶을 살고자 하는 그런 마음이 도사리고 있다.
이것이 나의 실상이다.
그러나 이제 오늘도 나의 눈을 빼낸다.
나의 팔을 자르고 다리를 잘라 불구자가 된다.
사실은 온 몸이 멀쩡하지만, 진리 안에서는 여기저기 잘리고 빠진 불구자이다.
그래서 내가 원하는 곳에 갈 수 없다.
내가 원하는 것을 볼 수도 없다.
내가 육신적 소욕으로 만지고자 하는 것을 만질 수 없다.
나는 거룩한 불구자이기 때문이다(막 9:43-47).
그리고 진정한 평강이 있는 주님의 품에 거한다.
그곳이 내게는 주의 날개 그늘 아래다.
그곳에 쉐키나의 영광이 임한다.
그 맛을 알기에 육신의 소욕은 말씀 앞으로 나가는 것을 거부하나, 나는 지금 그것을 끊어버리고 말씀 앞으로 나아가 주님의 품안에 거하는 것이다.
나는 죄인 중에 괴수이지만, 그런 나를 내가 인정하며 주님께 나아갈 때 주께서는 그런 나를 다시금 친구로 받아주신다.
종이 아니라 친구 말이다.
내 안에 참된 평강이 흘러넘친다.
이제 나의 친구되신 주님과 함께 살아간다.
그곳이 가장 안전한 주의 품이다.
나를 세상으로부터 지켜줄 주님의 품이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말씀 앞에 나아가는 것이 어찌 이리도 힘이 드는지요?
단 한 번도 쉽게 나아가지 못하는 것은 그만큼 육신의 소욕이 크기 때문이겠지요.
물론 육신의 피곤함도 있지만, 주님을 정말 사랑한다면 그런 육신의 피곤함 쯤이야 이겨낼 수 있을 텐데 나는 아직 멀었나봅니다.
이 종을 긍휼히 여기사 주를 사랑하는 마음이 풍성해 지도록 나를 권고하소서.
오늘도 주님이 주시는 생명의 양식을 먹고 주님의 생명으로 살게 하소서.
나는 주의 친구이기에 개밥을 먹을 수 없나이다.
주님이 주시는 생명의 양식을 먹어야 살 수 있나이다.
그 양식이 나의 존재가 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