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일 내가 다시 아이를 키운다면/ 다이아나 루먼스
만일 내가 다시 아이를 키운다면 먼저 아이의 자존심을 세워주고 집은 나중에 세우리라. 아이와 함께 손가락으로 그림을 더 많이 그리고 손가락으로 명령하는 일은 덜 하리라. 아이를 바로잡으려고 덜 노력하고 아이와 하나가 되려고 더 많이 노력하리라. 시계에서 눈을 떼고 눈으로 아이를 더 많이 바라보리라. 만일 내가 다시 아이를 키운다면 더 많이 아는 데 관심 갖지 않고 더 많이 관심 갖는 법을 배우리라. 자전거도 더 많이 타고 연도 더 많이 날리리라 들판을 더 많이 뛰어다니고 별들도 더 오래 바라보리라. 더 많이 껴안고 더 적게 다투리라 도토리 속의 떡갈나무를 더 자주 보리라. 덜 단호하고 더 많이 긍정하리라 힘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보이지 않고 사랑의 힘을 가진 사람으로 보이리라. - 신현림 엮음『아가야 엄마는 너를 기다리며 시를 읽는다』 .......................................................................................
누구나 살아온 생을 돌아보면 후회와 미련이 박혀있는 대목이 있기 마련이다. 내 경우 다른 무엇보다 실패한 결혼과 더불어 아이를 제대로 가르치지 못했다는 회한이 크다. 아이가 생겼다고 저절로 좋은 부모가 되고 좋은 자녀로 자라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타고난 성품과 재능이란 게 있겠으나 아이들은 백지와 같아서 어떻게 키우느냐에 따라 모든 상황이 달라질 수 있다. 고백컨대 나는 아이들에게 그리 좋은 아버지가 되지 못했다. 모범을 보여주지 못했으며, 아이 역시 썩 좋은 아들로 성장한 것 같지는 않다. 아이와 하나가 되려는 노력은 물론이거니와 아이를 바로잡으려는 노력조차 부족했다. 루먼스는 부모의 통제과잉을 경계했지만 나는 거의 방임수준이었으니 부정적 의미의 방치에 가까웠다. 더 많이 관심 갖는 법을 배우게 하지도, 더 많이 껴안지도 못했다. 그 모든 것의 시늉을 안 하지는 않았겠으나 결국 바라보는 일에 인색하여 작은 도토리 속에 큰 떡갈나무가 있다는 걸 보여주지 못했다. 모든 부모들은 아이를 잘 키우길 원하지만 나로서는 첫 단추를 잘 못 끼운 탓에 맥없이 시간을 흘려보낸 뒤 불감당이 되었다. 자녀를 가르치는 최선의 교육은 부모의 사랑과 모범인데 그러지 못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마른버짐 같은 황폐한 그 자리에 할머니란 존재가 계셨다는 사실이다.
지난 어버이날 큰놈은 화상전화를 해주었고 작은놈은 저녁에 꽃바구니와 초밥을 사들고 왔다. 각자 자기들 인생을 살고 있지만 그래도 못마땅한 것투성이다. 나 자신이 잘못 살아왔고 부모의 습관이 아이의 미래를 결정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바 아니다. 그럼에도 만약 아이를 키울 기회가 다시 주어진다면 잘 한번 키우고 싶다. 이 시처럼 자존감을 높여주는 말, 잠재력을 길러주는 말, 재능을 살릴 수 있는 말, 희망과 용기를 주고 꿈을 갖도록 하는 말을 먹고 자라도록 하겠다. 말은 생각을 지배하고 행동을 유발하며 삶을 이끌어갈 것이므로. 또 생명의 존엄을 가르치고 이웃을 생각하며 책무와 자기 자신에 엄격하도록 가르칠 것이다. 어제가 ‘입양의 날’이었다. 부모 없는 아동들에게 새로운 부모를 찾아주어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하고, 자식이 없어 웃음을 잃은 가정에 따뜻한 웃음을 찾도록 가슴으로 자식 낳기를 장려키 위해 제정한 날이다. 아직 자녀들이 다 자라지 않았다면 지금부터라도 다시 가슴으로 낳아 아이를 키운다는 마음으로 루먼스의 가르침을 실천해 보는 건 어떨까. 물론 그러자면 부모부터 그 소양과 자질이 갖춰져야 하리라. 한진 조씨 일가의 무너지는 모습을 보면서도 그렇고, 아무리 저 출산 문제가 심각한 지경에 있더라도 역시 아이는 낳기보다 키우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고 어렵다. 손녀는 촌수로 따지면 형제와 같은 2촌에 해당한다. 내게도 여섯 살 손녀 ‘지혜’가 있다. ‘힘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 ‘사랑의 힘을 가진 사람’으로 잘 자라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권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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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詩하늘 통신 원문보기 글쓴이: 제4막
첫댓글 좋은글 잘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