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 기도)
주님,
새날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날마다 십자가로 인도하심을 감사드립니다.
말씀 앞에 나아갑니다.
저의 간사한 마음을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주님의 보혈로 덮어 주옵소서.
정직한 영을 회복시켜 주옵소서.
성령님, 인도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본문)
1. 하나님이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사람이 나를 삼키려고 종일 치며 압제하나이다
2. 내 원수가 종일 나를 삼키려 하며 나를 교만하게 치는 자들이 많사오니
3. 내가 두려워하는 날에는 내가 주를 의지하리이다
4.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말씀을 찬송하올지라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즉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혈육을 가진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이까
5. 그들이 종일 내 말을 곡해하며 나를 치는 그들의 모든 생각은 사악이라
6. 그들이 내 생명을 엿보았던 것과 같이 또 모여 숨어 내 발자취를 지켜보나이다
7. 그들이 악을 행하고야 안전하오리이까 하나님이여 분노하사 뭇 백성을 낮추소서
8. 나의 유리함을 주께서 계수하셨사오니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이것이 주의 책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나이까
9. 내가 아뢰는 날에 내 원수들이 물러가리니 이것으로 하나님이 내 편이심을 내가 아나이다
10.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여 그의 말씀을 찬송하며 여호와를 의지하여 그의 말씀을 찬송하리이다
11.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즉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이까
12.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서원함이 있사온즉 내가 감사제를 주께 드리리니
13. 주께서 내 생명을 사망에서 건지셨음이라 주께서 나로 하나님 앞, 생명의 빛에 다니게 하시려고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지 아니하셨나이까
(본문 주해)
시편 56편의 표제어는 ‘다윗의 믹담 시, 인도자를 따라 요낫 엘렘 르호김에 맞춘 노래, 다윗이 가드에서 블레셋인에게 잡힌 때에’이다.
‘믹담’은 의미가 불확실하고, ‘요낫 엘렘 르호김’은 ‘먼 상수리나무에 앉은 비둘기’란 뜻으로 추정되며, 이는 이방 땅 블레셋에 도망하여 처량하게 지내던 당시 다윗의 처지를 반영하고 있다.
‘다윗이 가드에서 블레셋인에게 잡힌 때’라는 것은 다윗이 사울을 두려워하여 가드 왕 아기스에게로 피신하여 가서, 그를 두려워하여 미친 척 했던 것(삼상21장)과 모든 일에 블레셋인들의 눈치를 보며 지내야 했던 상황(삼상27, 29장)을 ‘붙잡혔다’라고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1~2절 : “하느님, 이 몸을 불쌍히 여기소서. 사람들이 들볶습니다. 진종일 몰아대며 괴롭힙니다.
원수들이 온종일 들볶고 나를 몰아대는 자들 또한 이다지도 많사옵니다.”(공동번역)
이스라엘 나라 안에서도 나라 밖에서도 종일 다윗을 엿보며 압박하고 죽이려는 원수들에 대한 탄식의 표현이다.
3~4절 : “높이 계시는 하느님, 이렇게 무서울 때, 나는 당신만을 믿사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찬양하오며 하느님을 믿어 두려운 것 없사오니 인간이 감히 이 몸을 어찌 하리이까?”
두려움에 휩싸인 다윗은 하나님을 의지하며 그의 말씀을 찬양하며 두려움에서 벗어난다.
사람(에노쉬)이 허약한 인간임을 알았기에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주를 의지하는 것이다.
5~7절 : “저들은 온종일 나를 헐뜯고 해칠 생각에만 골똘합니다.
그들은 몰려들어 몸을 숨기고 나를 지켜보며, 이 목숨을 노리고 있사옵니다.
저토록 악한 자들을 그냥 두시렵니까? 하느님, 분노하시어 저 민족들을 멸하소서.”(공동번역)
시인은 다시 탄식에 빠져든다.
5절에서 ‘곡해한다’는 것은, 대적자들이 시인을 중상모략, 비방, 정죄, 조롱, 위협 등의 다양한 방법으로 무슨 말 만하면 꼬투리를 잡아 공격하는 것을 가리킨다. 더 나아가 대적들은 사냥꾼이 동물을 쫓듯이 다윗을 쫓는 것이다. 아무도 다윗을 도와주지 못하고 다윗은 홀로 위협을 느끼고 있다.
정신적, 육체적인 고통 가운데 신음하며 대적들의 계속되는 공격과 위협 속에 다윗은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구하며 그들이 멸망하기를 구한다.
8~11절 : “나의 방황을 주님께서 헤아리시고, 내가 흘린 눈물을 주님의 가죽부대에 담아 두십시오. 이 사정이 주님의 책에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까?
내가 주님을 부르면, 원수들이 뒷걸음쳐 물러갈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의 편이심을 나는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며 나는 하나님의 말씀만 찬양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며 나는 주님의 말씀만을 찬양합니다.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니, 내게 두려움이 없습니다. 사람이 나에게 감히 어찌하겠습니까?”(새번역)
시인은 그가 유리방황하던 고통의 눈물이 유리병에 담겨 하나님에 의하여 계수되고, 하나님의 책에 기록되지 않았는지 묻는다. ‘눈물 담은 유리병’은 하나님이 경건한 성도의 고난을 하나하나 기억하시고 축적하신다는 은유적 표현이다. 대적들로 인한 그의 모든 방황의 흔적과 모든 눈물의 기록이 하나님의 책에 기록되어 있지 않으냐는 말로 강화한다.
시인은 자신의 고난을 계수하신 하나님께서 구원하실 것을 확신한다. 그가 부르짖는 날, 그의 원수들을 물러갈 것이다. 시인은 이것으로 ‘하나님이 나의 편’임을 알게 된다.
그리고 다시 그가 하나님을 신뢰했던 말씀으로 돌아가 하나님을 의지하며 그의 말씀을 찬송한다.
12~13절 : “하나님, 내가 주님께 서원한 그대로, 주님께 감사의 제사를 드리겠습니다.
주님께서 내 생명을 죽음에서 건져 주시고, 내가 생명의 빛을 받으면서, 하나님 앞에서 거닐 수 있게, 내 발을 지켜 주셨기 때문입니다.”(새번역)
하나님이 내 편임을 알게 된 시인은 그가 서원한 대로 주께 감사제를 드리겠다고 맹세한다. 이는 주께서 그를 사망에서 건져주시고 생명의 빛에 다니게 하셨기 때문이다. 그가 하나님 앞에서 걸을 수 있도록 그의 발을 지켜 주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를 의지하는 자를 사망에서 건져 생명의 빛으로 인도하신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운 자,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며 모든 두려움에서 해방되어 감사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
(나의 묵상)
이스라엘 나라 안에서는 사울에게 쫓기고, 나라 밖에서도 이방인 원수들이 목숨을 위협하는 상황에서 다윗이 두려움에 휩싸이지만 결국 하나님을 힘있게 의지한다.
그에게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사람’이란 존재는 아무것도 아님을 알게 되고, 하나님만을 신뢰하고 의지한다.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즉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혈육을 가진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이까”(4, 11절)
혈육을 가진 사람 즉 인간에 대해서 다른 시편에서는 입김보다 가벼운 존재라고 표현한다.
“아, 슬프도다 사람은 입김이며 인생도 속임수이니 저울에 달면 그들은 입김보다 가벼우리로다”(시62:9)
다윗이, 참으로 헛것과도 같은 인생, 먼지와도 같은 것, 아무것도 아닌 인생들에게 부대낌을 당하는 상황을 넘어서서 자신을 구원하시고 생명의 빛에 다니게 하시는 하나님이심을 고백하게 된 것은 그에게 그리스도의 영이 임했기 때문이다.
다윗이 자신의 모든 눈물과 지나온 세월의 사연을 하나님께서 다 아시므로 그 눈물을 주님의 병에 담고, 그 사연을 주님의 책에 기록해 달라고 한다. 뿐만 아니라 그는 ‘하나님이 내 편’이라고 서슴지 않고 외친다.
다윗의 이런 고백을 보고, ‘자존감이 쩐다!’고 말한 것을 들은 적이 있다.
다윗의 이런 자존감은 도대체 무엇에 기인할까?
나는 이것을 그리스도의 영이 임한 자의 고백이라고 생각한다.
과거에 나도 다윗처럼 ‘하나님은 내 편’이라 했다.
교회 중심의 종교생활에 그 누구 못지않게 열심을 내던 나였으므로 하나님이 내 편이 아니면 누구 편이겠냐고 기세등등했던 때였다.
그때는 나를 대적하는 사람도 없었던 것 같다. 복음 없이 종교생활하는 나를 사탄이 건드릴 이유가 없는 것이다. ‘오냐, 내 새끼!’ 하면서 잘하고 있다고 적당히 토닥여 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복음을 알고 생명의 삶을 살아가는 이즈음 그때를 생각하면 참으로 부끄럽다.(무식한 것이 용감하다 말이 딱 들어 맞는 경우다.)
그런데 나는 지금도 변함없이 ‘하나님은 내 편’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 이유가 달라졌다.
전에는 자기의가 가득하여 스스로 도취되어 ‘하나님이 내 편이 아니면 누구 편?’ 했다면, 지금은 새카만 죄인이지만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을 힘입었으니 하나님이 내 편임을 의심치 않는 것이다. 그러니 전과는 달리 사탄의 정죄와 협박이 대단하다.
그러나 이렇게 하나님이 자기편이 된 자는 스스로 흘리는 눈물에 대해서도 그것이 자신에 대한 연민 때문에 흘리는 것인지, 진정 주님을 위한 눈물인지를 알게 된다.
그것은 성령께서 정직한 영을 부어주시니 알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때, 그렇게 큰소리치던 제자들은 죽음이 두려워 하나같이 도망치고 말았다. 그런데 주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 성령을 보내주시니 이 제자들이 사도가 되어 죽음 앞에서도 복음을 전하는 자가 된다.
몸을 죽이는 자들이 두려운 자가 아님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눅12:4~5)
성령이 임하면 사람과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
“오 하나님, 주께 한 서약을 기억합니다. 내가 주께 감사의 제물을 드리겠습니다.
왜냐하면 주께서 나를 죽음에서 건지셨고 넘어지지 않도록 나를 붙드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나는 빛 가운데서, 하나님이 보는 앞에서 걸어가겠습니다.”(12~13절, 쉬운 성경)
그리스도의 영이 임한 다윗의 고백이 또한 나의 고백이다.
주님은 아무 자격도 없는 나를 죽음에서 건져내어 구원하여 주셨을 뿐만 아니라, 성령을 보내셔서 생명의 빛인 말씀의 빛 속을 날마다 걷도록 인도하여 주셨기 때문이다.
성령께서 생명의 빛, 말씀의 빛 속을 걷는 자 되게 하셔서 상황과 사람에 대한 두려움을 이기게 하신다.
(묵상 기도)
주님,
‘하나님은 내 편’이라는 하는 저를 보고
누군가는 못마땅해 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보혈을 힘입은 자들은
다 무슨 말인지 이해할 뿐 아니라, 저들도 똑같이 외칠 것입니다.
성령이 임한 주님의 백성들의 즐거운 고백임을 확신합니다.
저로 날마다 말씀으로 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제 생이 다하는 그날까지,
주님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이 생명의 빛 속을 걷게 하옵소서.
성령님, 의지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