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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비공개 입니다
석주 이상룡 선생은 안동의 오랜 양반 가문에서 태어나신 분이시오.
조선이 일본에 굴욕적인 강제합병을 당하자 집안의 노비를 해방시키고 독립운동에 뛰어든 진정한 선비시라오.
이상룡 선생의 업적은 간략하게 국가보훈처 공식 블로그의 글로 대체하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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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여러 지역을 방문하면서 종종 그 지역에서 독립운동을 하였던 선열들의 흔적을 발견하기도 합니다. 경상북도 안동도 예외가 아닌데요. 오늘 이야기하고자 하는 인물은 바로 안동이 낳은 훌륭한 계몽운동가요, 항일독립운동가 석주 이상룡 선생입니다. 이상룡 선생은 안동에서 태어난 정통 유학자로서 근대교육기관을 설립하고 계몽활동을 펼쳐나갔는데요. 계몽운동만으로는 독립이 어렵다는 것을 깨닫고 50이 넘은 나이에 망명을 결심하였고, 독립군 양성에 큰 기여를 하였습니다. 선생은 이후에 임시정부의 초대 국무령까지 맡으면서 우리나라를 위해 헌신하였는데요. 지금부터 선생의 헌신적인 생애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상룡 선생은 1858년 11월 24일 안동시 법흥동 임청각에서 이승목의 3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선생의 가문은 19대조가 좌의정을 지낼 정도로 조선중기까지는 명문에 속하였다고 하는데요. 이를 통해 선생의 가문은 대대로 학식이 밝았으며, 선생의 외적 환경은 매우 좋은 상태였다는 것을 추측해볼 수 있습니다.
선생의 의병활동은 재정적인 도움만 행한 1894년 동학운동기와 재정적인 도움뿐만 아니라 직접 의병활동에 가담했던 1905년 을사늑약 직후의 의병활동기로 나눌 수가 있는데요. 먼저, 1894년 동학운동기에 선생은 병학에 깊은 관심을 기울여 번진영련노(한 번에 많은 화살을 쏠 수 있는 무기로 알려짐)와 같은 신무기를 만들어 실험하였고, 의병장들과 함께 전략을 논의하고 재정적인 도움을 계속 펼쳤습니다. 1905년 의병활동 때는 여러 동지들과 가야산에 근거지를 마련하여 거사를 하며 연합을 시도하였으나, 안타깝게도 선생의 의병활동은 실패하고 맙니다. 이때 의병항쟁의 실패를 경험한 이상룡 선생은 결국 사상적인 전환을 이루게 되어 자신의 의병활동을 중단하게 되었고, 그 후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게 되었습니다.
이상룡 선생의 애국계몽운동은 1907년 자신의 동지였던 류인식, 김동삼 등과 함께 협동학교를 설립하면서 시작되었는데요. 선생은 학교설립을 계기로 안동에 구국계몽운동의 근거지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또한 선생의 애국계몽운동은 1908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는데, 1909년 봄에 의병과의 관련 혐의로 안동경찰서에 일시 구속되었으나 선생을 지지하는 데모대의 압력으로 석방되는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석방 후에 선생은 여러 사람들의 권유로 대한협회 안동지회를 창립하여 회장에 취임했는데요. 이때 대한협회 안동지회는 시국강연회와 회보발간 등과 같은 홍보활동과 협동학교를 비롯한 여러 가지 사립학교를 추진하여 청소년들은 대상으로 한 신교육을 실시하였습니다. 하지만 선생의 안동지회는 일진회와의 관계, 경술국치 등의 문제로 대한협회본부와 충동을 하는 어려움을 겪기도 했습니다.
▲ 이상룡 선생의 고택인 안동 임청각
1911년 음력 1월, 이상룡 선생은 만주로 망명하였습니다. 만주에 망명한 직후 선생은 독립운동 전개를 위한 준비 작업에 착수하였는데요. 제일 먼저 시작한 것은 수전 농업의 정착이었습니다. 당시 우리 동포들은 고산에서 살고 있어서 경제력이 약화된 상태였는데, 선생은 벼농사를 정착시켜 경제력을 강화시켰습니다. 그리고 ‘한국고대 민족발달사’를 연구하여 만주를 더 이상 먼 땅이 아닌 친밀한 땅으로, 독립운동의 신흥기지로서의 관념을 갖게 하였습니다. 또한 선생은 중국 당국과의 교섭에도 기여하였는데요. 주로 산업, 교육, 권리의 문제를 다루었습니다. 위와 같은 활동으로 이상룡 선생은 장기적인 독립운동의 기지를 마련하고 또 굳건히 하는데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1911년 4월에 선생은 자신의 거주지를 봉천성 유하현으로 이동하고 산중에서 개최된 노천대회에서 항일민족독립운동의 방략과 진로를 천명하였는데요. 본격적인 활동을 위해 경학사(耕學社) 설립 취지서를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여기서 동시에 선생은 이동녕, 이시영, 이회영, 김대락 등 여러 동지들에 의해 경학 사장으로 추대되었습니다. 이때 선생은 항일민족독립운동 방략에 있어서 산업, 교육의 우선주의와 군사 중심주의를 병행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였습니다.
또한 1919년 3.1운동 뒤 한족회를 바탕으로 군정부가 조직되자 선생은 총재로 추대되었는데요. 5월에는 신흥강습소를 신흥무관학교로 개칭하여 독립운동 간부를 양성시키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곧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선생은 해외독립운동 선상에서 한 나라에는 하나의 정부만이 있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는데요. 11월에 ‘군정부’를 ‘서로군정서’로 개칭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적극적으로 지지하였습니다. 이때 서로군정서는 국내진공작전을 시도하는 등 눈부신 활동을 전개해나갔습니다. 또한 선생은 남북만주의 항일단체와 독립군단의 통합을 시도하였는데, 1921년 1월 서로군정서와 의용군 일부를 정비하여 서간도일대의 항일단체와 독립군단을 통합하여 대한통군부를 조직하기도 했습니다.
선생은 그 해 4월에 중국 북경을 중심으로 상해와 만주에서 독립군의 통합과 지휘권 문제, 앞으로의 방향과 대책을 동지들과 논의하였는데요. 1922년 8월에 남만한족통일회를 개최하여 대한통의부를 수립하였고, 그 산하에 의용군을 조직하기도 했습니다. 당시에 선생은 다양했던 외교론, 준비론, 실력양성론 등을 물리치고 일관되게 산업교육우선론과 독립전쟁론을 주장하였는데요. 선생은 조국광복운동이 결국 일제 무력과의 싸움이었고 이를 위해 독립군 조직, 즉 무장력을 갖춘 항일조직의 결집에 노력할 수밖에 없다고 호소했습니다. 선생은 이미 의병운동과 계몽활동을 통해 두 가지 독립운동 방안의 장단점을 터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의병운동의 한계였던 근대적 군사력의 미비와 계몽운동의 한계인 힘의 부족을 통감한 선생은 이 양자의 통합이 무엇보다도 긴요하다고 생각했고, 그 책무를 자기가 적임이라고 자부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선생은 1924년 10월에 한국독립운동단체 정의부가 발족되자 독판에 선출이 되었고, 1925년 9월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령에 취임까지 했는데요. 그러나 그 당시 임시정부 내의 사상적인 대립과 파쟁으로 정치적 경륜을 발휘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러한 상황 때문에 선생은 안타깝게도 국무령을 사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임 후에 선생은 다시 간도로 돌아와 1928년 5월부터 전민족유일당 결성을 위해 만주지역의 대표적 독립운동 조직인 삼부 통합에 모든 심혈을 기울였는데요. 하지만 선생은 국민부로의 부분적인 통합을 이루고 있는 도중에 병에 걸려 1932년 5월 12일 중국 서란소성자에서 “조선 땅이 해방되기 전에는 나를 데려갈 생각을 하지 마라. 조선이 독립되면 내 유골을 싸서 조상 발치에 묻어 달라. 외세 때문에 주저하지 말고 더욱 힘써 목적을 관철하라”는 유언을 남기고 서거하였습니다. 그 후 1962년에 정부에서는 이상룡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하였습니다.
▲ 서울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에 위치한 선생의 묘
지금까지 이상룡 선생의 생애에 대해서 살펴보았는데요. 이처럼 선생은 살아있는 동안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동포들과 함께 계몽에 힘썼으며, 국내에서나 국외에서나 독립운동을 위하여 많은 활동을 전개하였습니다. 선생은 마지막 순간까지 조국의 통일과 총화, 그리고 종합을 지향한 것입니다. 결국 50여년에 걸친 선생의 일관된 구국노력은 의병, 계몽운동, 독립군 등 당시 가능한 모든 독립운동 방안을 섭렵한 것이었고, 이는 선생의 평소 폭넓은 인품이 반영된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임시정부의 초대 국무령까지 맡으면서 여러 분파로 갈린 독립운동계의 통합을 위해 끝까지 최선을 다했던 이상룡 선생. 이러한 이상룡 선생의 노력 덕분에 오늘날 대한민국이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앞으로 많은 국민들이 이상룡 선생의 계몽활동과 무장독립투쟁에 대한 공로를 생각하며 우리나라를 더욱 사랑했으면 좋겠습니다!
http://mpva.tistory.com/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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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분이 안동에서 임청각이란 99칸 집에서 지내셨는데, 그곳에서 태어나고 자란 일가들도 대다수 독립 운동을 하였다고 하오. 이회영 선생과 마찬가지로 집안 모두가 독립운동을 하셨던 것이오.
임청각은 보물 182호에 지정되어 있소. 역사적인 상징적인 가치 뿐만 아니라 옛 건축을 엿볼수 있는 소중한 사료라오.
임청각이 보통 건물이 아닌게, 이상하게 임청각에서 공부하면 성공을 하고 한다더오.
임청각 앞에 큰 오래된 나무가 있었는데 임청각에서 공부하여 과거 급제한 선비들이 고맙다며 이 나무에 비단도 걸고 그랬다고 하오.
(지금은 그 나무가 없소. 해방 이후 도로 낼때도 남겨뒀었는데 2008년 누가 밤사이 베어버렸다고 하오)
어쨌든 임청각은 그 당시 안동 선비들의 독립 운동의 상징이자 저항의 상징이었소.
(이곳에서 이상룡 선생까지 총 10분의 독립운동가가 나셨다오. 모두 이상룡 선생네 문중 분들이셨소)
임청각이 그런식으로 유명해지자 일본은 임청각을 가로질러 철도를 놓소. 임청각의 기를 끊으려고 한거지라.
(원래는 허물어 버리려고 했는데 시민들의 반대로 일부만 허물었고 그래서 임청각은 현재 77칸만 남아있소)
이상룡 선생이 만주에서 독립운동 하던 당시 돈이 떨어지자 임청각을 팔려고 내놓으셨다오.
그러자 문중에서 돈을 모아 임청각을 사서 다시 선생에게 돌려주고 또 매물로 나오면 사서 돌려주고 했다오.
쇟이 보기엔 집안에서 돈을 모아 보내줄 명분을 삼으려고 그런게 아닌가 싶기도 하오.
도로 선생이게 집을 돌려준걸 보면 말이오.
위의 글을 보면 알겠지만 이분은 정말 뼈속까지 양반이셨고, 일평생 독립을 위해 애쓰셨고.
재산도 다 독립자금으로 쓰시고, 후손이 돈이 없고 갈곳이 없어 고아원까지 들어갔었다고 하오.
선생은 1962년 힘들게 진행하신 독립운동의 공을 인정받아 국민장을 받으셨소.
그런데... 그때 선생은 무국적자셨다오. 그렇소 나라가 없는거요.
나라는 독립을 했는데, 왜 독립운동하던 사람이 국적이 없지? 많은 햏들이 의아해 하실꺼라오.
이유는 단하나. 선생이 일제의 호적 시스템에 이름을 올리기 싫다고 일제 치하시절 주민등록을 안하셨기 때문이라오.
그럼 독립하면 국적 회복을 해줘야하지 않소?
그런데 대한민국은 선생의 국적을 회복시켜주지 않았소.
선생의 국적은 2009년 회복되는데... 선생의 후손이 돈을 모아 회복했다고하오.
이때 선생의 아우이신 이봉희 선생, 처남인 김대락 선생도 같이 국적이 회복되오.
(이때당시... 무국적자 독립운동가가 대략 300여명 있었다고 하오. 신채호 선생도 이때까지 무국적자였다고 본거 같소.)
물론 이후 독립운동가 후손들을 통해 국적 회복(임시정부 수립 90년되던 해)을 하긴 했지만... 이분들은 70여년을 나라없이 사셨소.
힘들게 나라 독립을 시켰지만, 대한제국 사람들은 이분들 덕에 나라를 다시 찾았지만 정작 이분들은 해방 이후에도 나라없이 사신거라오.
이 나란 독립 이후부터 바로 썩었소.
이승만이가 정말 자기 말대로 독립운동가였다면 저분들을 저리 놔두면 안됐었소.
저분들이 자기 국적 찾고 목소리 내면 가장 힘들게 자기였겠지라. 젠장 근본없는 놈.
쇟 이이제이 우당 이회영편 듣다가 이상룡선생 이야길 듣고 알아보면서
진짜 열불이 터져서 이야기가 두서가 없다오.
양해 부탁드리오.
그리고 우리라도 저분들 기억해주고 감사해합시다 ㅠㅠ (물론 쌍코 회원들이야 당연히 그러시겠지만!)
+ 추가
저 철도 아직도 있소 ㅋㅋㅋㅋ 임청각 가로지르는 철도 말이오 ㅋㅋㅋㅋㅋ 아니 왜 안없애도 보물 옆쪽으로 철도가 지나가게 냅두오 진짜 ㅋㅋㅋㅋ
첫댓글 이런 좋은 분이 계셨구나
철도 뭐냐 진짜 좆본놈들 으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