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인 이야기 4
율리우스 카이사르(상)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태어난 기원전 100년 당시 로마의 상황은 대충 이렇다. 마리우스와 킨나를 중심으로 한 민중파와 술라를 중심으로 한 원로원파로 양극되어 있었고, 마리우스와 킨나 사망 후에 권력은 술라 중심의 원로원파로 넘어갔고, 술라가 사망한 이후에도 계속 술라의 후예인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를 중심으로 한 술라파가 권력의 핵심이었다.
이런 상황에 민중파의 핵심 마리우스의 조카인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태어난 것이다. 마리우스는 카이사르의 고모부가 된다. 중상층의 일반적인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다른 로마시민과 별다른 차이 없는 유년기를 보낸다. 17세가 되던 해에 술라에 의해 역적으로 몰린 민중파의 숙청작업에 의해 비명횡사될 뻔했지만, 어리고,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는 이유에서 살아나게 된다.
술라파의 폼페이우스는 에스파냐 난동을 진압하고, 크라수스는 스파르타쿠스 반란을 제압하는 것에 비해, 20대의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멋을 내기 위해, 친구들을 대접하기 위해 엄청난 부채를 안고 사람으로 더 유명해진다.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는 서로 경쟁상대이기는 하지만, 서로의 집정관 자격미달을 해결하기 위해 협조하여 동시에 집정관에 오르게 된다.
한편,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공직으로는 변호사를 잠시 하다가 관두고, 에스파냐에 회계사로 파견나기도 한다. 20대 로마시민에게 특별한 것이 아니고, 일반적인 것이다. 그리고 30대 들어서면서, 고모의 장례식에서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평민의 상징인 자신의 고모부 마리우스 상을 모시게 됨으로서 민중파 재건의 선언을 하게 되는 반면에 원로파로부터 경계를 받기 시작한다. 이해에 킨나의 딸이자 카이사르의 첫번째 아내가 사망하고 만다.
그리고 당시 39세의 폼페이우스는 지중해 해적을 무찌르면서, 팍스로마나를 확립하며서, 그의 명성은 계속 올라가게 된다.
카이사르는 안찰사에 이어 호민관 라비에누스의 도움으로 기원전 63년 최고제사장에 오르게 되고, 원로원 체제에 도전장을 내민다. 이 해에는 유명한 언론가이자 변호사인 원로파 키케로가 집정관에 오르게 되고, 이 해에
'카탈리나 역모사건'이 벌어지는데, 이에 원로파의 키케로, 카토, 민중파의
카이사르가 논전을 벌이게 되고, 역모는 실패하게 된다.
한편, 개선식을 마친 폼페이우스는 야심에 비해 허영심이 가득차 자신의
명성을 이용을 하지 못하게 된다. 카이사르는 먼 에스파냐로 총독을 나갔다가 들어오면서, 그의 최대 채권자 크라수스, 폼뻬이우스와 손잡고 몰래 '삼두정치'를 시작하게 된다.
이를 이용하여 기원전 59년 집정관에 취임하게 되고, 과두정인 원로원의
그동안의 체제에 일대 개혁을 실시하게 된다. 이때부터 그의 활약이 시작되는 것이다. 20대부터 명성을 날린 다른 로마의 위인들보다 카이사르는 40대가 되어서야 명성을 쌓아가는 대기만성인 것이다. 서른밖에 안된 내가 가끔
좌절감을 느끼고, 실패한 인생을 운운하는 것에 경종을 울려주는 것 같다.
그가 집정관으로써 시작한 개혁은 원로원일보(日報)와 율리우스 판례법, 율리우스 농지법 등이다. 그리고 삼두정치를 강화하기 위해 자신의 딸 율리아를 폼뻬이우스의 후처로 주게 된다.
1년간의 집정관 기간이 끝나고, 카이사르는 남 갈리아 지방의 속주 총독이
되고, 로마를 원격조정하기 위해 삼두정치의 측근으로 집정관과 호민관을
선출시키는 데 성공한다.
이후 기원전 58년부터 기원전 52년까지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갈리아 전쟁을 하게 된다. 갈리아인들은 작은 부족까지 100여개의 부족으로 나뉘어져
있었고, 그중 몇개의 대표적인 부족들이 있었다. 8년동안 카이사르는 갈리아 지방을 종횡무진 점령을 하고, 로마 특유의 기술력을 라인강을 두번이나
건너 게르만인을 굴복시키고, 도바해협을 두번이나 건너면서, 브리트니아도
굴복시키게 된다. 7년째 따로놀던 갈리아의 부족들이 베로킨게토릭스에 의해 로마에 봉기하기도 하지만, 이를 알레시아 공방전에서 제압함으로써, 길고 긴 갈리아 전쟁에 종지부를 맺게 된다.
이 전쟁을 통해 카이사르의 명성은 최고를 구가하게 되고, 전쟁영웅 뿐만
아니라 문학가의 기질도 보여주게 된다. 그는 갈리아 전쟁 첫해부터 7년까지를 글로 남겨 <갈리아전쟁기>를 간행하게 된다. 이는 오늘날까지 로마문학사를 빛내주는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고 한다.
한편, 로마에서는 원로원은 카이사르의 이런 갑작스런 성장에 고민에 빠질
수 밖에 없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예전부터 원로원 체제에 반기를 든
인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를 함부로 대할 수 없는 것이 그는 로마 전체의 영웅이 되었기 때문이다.
한편, 갈리아 전쟁의 초기, 로마에서는 폼페이우스의 소극성, 호민관인 클로디우스의 과잉대응에 의한 키케로의 추방등에 원로원이 반격을 하게 되어
삼두정치의 세력이 많이 위축되자, 카이사르는 다시 뽐페이우스와 크라수스와 루카회담을 통해 다시 그들의 세력을 강화하기도 한다. 이를 통해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가 집정관이 되고, 카이사르의 총독임기 5년을 더욱 늘일
수 있게 된다.
하지만, 크라수스는 집정관 이후, 시리아 지역의 파르티아로 진격했다고
대패하고, 자신도 살해당하고 만다.
계속되는 삼두정치와 원로원의 대치에서 원로원은 크라수스의 죽음 이후,
폼페이우스마저 구슬려서, 원로원파로 넘어가게 됨으로써 반카이사르체제를
강화해나간다. 이때가 갈리아 전쟁 7년째 되던 해이다.
갈리아 전쟁이 끝나고, 다음 집정관을 되려고 하는 카이사르는 국경 밖에서
로마입성 시기를 타진하고 있었다. 한편, 로마에서는 카이사르를 두려워한
나머지 결국 "원로원 최종권고"를 발표함으로써 카이사르를 역적으로 선언하게 된다.
이 소식을 들은 카이사르는 고민을 하다가 결국 "주사위는 던져졌다"는 말과 함께 국경선인 루비콘강을 건너게 된다.
이로써 로마의 내전이 시작된 것이다.
여기까지가 로마인 이야기 4권에 나와 있는 카이사르의 이야기이다.
카이사르는 분명 영웅이다. 부하를 이끌어가는 리더쉽과 각 상황에 맞게 대처하는 능력이 탁월하다. 하지만, 그에게 침략을 당하는 민족의 입장에서
그는 과연 영웅인가? 반세기 외세의 침략으로부터 고생을 한 우리 민족의
입장으로서는 그리 유쾌한 영웅행적이라고 볼 수 없다.
단지 그의 영웅기라고 읽기에는 분명한 역사의 사실이다. 그것도 엄청나게
많은 희생이 뒤따르는 역사이다.
이 일이 있은지 2000년이 흐른 뒤에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읽는 나는 그로부터 무엇을 배우는가?
그의 결단력이다. 나의 단점 중에 하나가 결단력부족이라 생각하는데, 그의
결단력은 나를 더욱 열등감에 빠지게 된다.
갑자기 로마에 가고 싶다. 카이사르가 휘접던 서유럽에 가고 싶다. 대학교때 이 책을 접했더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한번 갔을 것 같은데..
이젠 회사를 때려치기 전에는 불가능할 것 같다.
그렇다고 장기휴가가 있는 것도 아니고..
로마인 이야기 5에서는 내전기와 카이사르의 이야기가 계속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