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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정읍통문 원문보기 글쓴이: 들길(이진우)
古阜郡의 역사와 문화
곽 형 주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3권 전라도 全羅道 [1]
■古阜郡
동으로 태인현(泰仁縣) 경계까지 37리. 남으로 흥덕현(興德縣) 경계까지 18리. 서로 해안(海岸)까지 39리. 북으로 부안현(扶安縣)까지 17리. 서울까지는 5백 96리 거리이다.
건치연혁
본래는 백제의 고사부리군(古沙夫里郡)인데, 신라 시대(경덕왕16년 757년)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고려 태조 19년(936년)에는 영주(瀛州)라 하여 관찰사(觀察使)를 두었다.
광종(光宗) 2년(951년)에는 안남도호부(安南都護府)로 고쳤다가 현종(顯宗) 10년(1019년) 고부군(古阜郡)으로 회복하였다.
충렬왕(忠烈王) 때에 영광군(靈光郡)에 병합되었는데, 조금 후에 다시 복구하고 本朝에서도 이에 따랐다.
〇관원 군수(郡守)ㆍ훈도(訓導) : 각 1명씩이다.
〇군명 고사부리(古沙夫里)ㆍ고부(古阜)ㆍ영주(瀛州)ㆍ안남(安南)
(전라도 4州 : 瀛州, 全州, 益州, 淳州)
〇성씨
본군 이(李)ㆍ은(殷)ㆍ배(裵)ㆍ임(林)ㆍ백(白).
수금(水金鄕) 이(李).
부안(富安鄕) 조(曹)ㆍ김(金)ㆍ진(陳).
황조(荒調鄕) 박(朴)ㆍ장(張)ㆍ김(金)ㆍ요(尿) : 혹은 강(康).
덕림(德林所) 임(林)ㆍ김(金)ㆍ윤(尹)ㆍ차(車)ㆍ백(白).
모조(毛助部曲) 백(白).
우일(雨日部曲)박(朴)ㆍ김(金)ㆍ윤(尹)ㆍ차(車)ㆍ백(白)ㆍ이(李)ㆍ은(殷)ㆍ임(林).
독변(禿邊所) 고(高)ㆍ임(林)ㆍ송(宋).
음성(音聲鄕) 정(井).
*鄕 - 부안 황조 음성 수금, 所 - 덕림 독변, 部曲 - 모조, 우일
〇산천 : 두승산(斗升山) : 군의 동쪽 5리에 있다. 일명 도순산(都順山)이라 부른다. 옛 석성[古石城]에 있는데, 둘레가 1만 8백 12자이다. 길은 골짜기를 넘어가는데 영주(瀛州) 때의 옛 성[舊城]이 아닌가 한다.
〇바다 : 부안곶에 있다. 부안곶(富安串) : 바로 부안향(富安鄕)이며 군의 서남쪽 46리에 있다. 흥덕현(興德縣)의 사진포(沙津浦)에 넘어 들어간다.
〇모천(茅川) : 근원은 정읍현(井邑縣)의 내장산(內藏山)에서 나온다. 북쪽으로 흘러 군의 동쪽 15리에 와서 서쪽으로 꺾여 태인수(泰仁水)와 합하여 부안현(扶安縣)의 동진(東津)으로 들어간다.
〇눌제천(訥堤川) : 근원은 흥덕현(興德縣)의 반등산(半登山)에서 나와서, 군의 서쪽 10리에 와서 눌제천이 되고, 북쪽으로 흘러 부안(扶安)의 동쪽에 와서 모천(茅川)과 합하여 동진(東津)이 되어 바다로 들어간다.
〇대포(大浦) : 군의 서쪽 10리에 있다.
눌제천(訥堤川) :고부천의 하류가 되는데 조수(潮水)가 드나든다.
〇죽도(竹島) : 군의 서쪽 바다 55리에 있다. 흥덕현 편에도 있다.
〇토산: 석수어(石首魚)ㆍ오징어[烏賊魚]ㆍ위어(葦魚)갈대 속에 숨어서 산다고 하여 갈대 위(葦)자를 사용하여 위어(葦魚)라고 .... 웅어 라고도 부른다.
ㆍ붕어(鯽魚)ㆍ게[蟹]ㆍ청토(靑土) : 남정(南亭)에서 난다. 사다새ㆍ 피마자기름[鶘油]ㆍ생강ㆍ차[茶]ㆍ석류(石榴)ㆍ대[죽.竹],
〇성곽 읍성(邑城) : 석축(石築)으로 둘레는 2천 3백 69자이고, 높이는 13자인데 안에 우물 셋이 있다.
〇학교 : 향교(鄕校) : 군의 동쪽 1리에 있다.
〇역ㆍ원(驛ㆍ院) : 영원역(瀛原驛) : 군의 북쪽 10리에 있다.
삼례역-내제-영원-흥덕-무장-영광-함평-무안
관리 7명, 번인 5, 奴 5, 실무婢 5, 전답 25석 14두락
송덕원(宋德院) : 군의 동쪽 20리에 있다. 정우면 우일리 낙산 (영파리)
공유원(恭惟院) : 군의 동쪽 40리에 있다.未詳 (정우 우산 원두)
가전원(加田院) : 군의 동쪽 40리에 있다. 북면 화해리 가전
율생원(栗生院) : 군의 성 밑에 있다. 未詳(城底 고부리)
생근원(生斤院) : 군의 남쪽 18리에 있다.未詳 성내면 생근리, 기린리 원두
〇교량 : 노교(蘆橋) : 대포(大浦)에 있다. 눌제교(訥堤橋) : 눌제천(訥堤川)에 있다.
〇불우 : 만일사(萬日寺)ㆍ망월사(望月寺)ㆍ등계사(燈溪寺) : 도순산(都順山)에 있다.
〇석불8: 성포불우, 성포율현, 성포연동, 우덕, 대암동, 정토산, 발립동, 매곡,
〇사묘
사직단 : 군의 서쪽에 있다. 문묘 : 향교에 있다. 성황사 : 군의 성(城) 북쪽 모퉁이에 있다. 여단 : 군의 북쪽에 있다.
〇고적 : 향 . 소 . 부곡(중간생략)
■삼국사기 百濟本記
온조왕 36년 8월條에 [원산성과 금현성을 수리하고 古沙夫里城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다.
◎백제 五方城이란?
백제말기 군 단위의 역할을 하던 고부지역이 ‘5方 37郡 200城’으로 편제된 사비시대 지방통치 체제에서 군(郡)을 아우르는 상위의 행정단위인 方 으로 승격된 것이었다.
사비시대의 五方體制는 5方(大城)ㅡ37郡(城)ㅡ200여縣(小城)으로 이어지는 郡縣制的 지배질서를 실현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가운데 상위의 행정단위인 五方을 東方득안성(은진), 西方도선성(대흥), 北方웅진성(공주), 中方고사성(古阜), 南方구지하성(광주?)으로 비정할 수 있다.
이를 통해 나타나는 五方의 특징은 왕도 이외의 전국의 중요한 거점에 위치하면서 주변의 郡 과 城을 통괄하는 군사적.행정적 거점이었다. 나아가 東方과 西方, 北方을 왕도 주변에 배치함으로써 수도방어를 강화했으며, 南方과 中方은 전국의 거점으로 6세기 후반 이래 새롭게 편입된 영산강유역에 대한 통치의 강화와 新羅세력의 견제 등을 담당하였다.(중략) 五方에는 각각 方領 1人을 두어 達率로 임명하고, 軍將은 3人으로서 德率로 삼았다. 方은 군사 1,200명 이하 700명을 통솔하였다. 城의 내외 백성들과 기타 작은 城들이 모두 여기에 예속되었다. (周書 券 49, 列傳41, 異域 上 百濟) (古阜文化圈의 再認識 최완규)
*이때의 영역은 지금의 김제 부안 정읍 고창 영광 일대로 노령 서쪽과 동진강일대와 영광을 포함한 것으로 보았다. (정읍지방 문화지표조사보고서 전영래박사)
〇백제시대 치소와 중방성의 위치, 은선리냐? 현재의 고부냐? 지금까지의 모든 기록은 은선리가 백제시대의 치소로 비정됨.
■유적으로 본 고부군
〇마을입석-자연마을
〇고인돌-봉양리, 만수리 운학리 은선리 상학리 흑암동 용계동 중광리
반곡리 오공동 화죽리 내장동 금붕동 교암동 시기동
〇고분군-마한시대의 지사리고분군, 삼국시대의 운학리, 은선리일대에 수백기의 돌방무덤 분포(장문리, 산매리, 후지리, 두지리, 산내, 소성)
〇정치.국방으로 본 유적 : 향, 소, 부곡(중략).
〇城址 : 우덕리산성(덕천면), 대산리토성(정우면), 고부 구.읍성(고부면), 금사동산성(영원면) 은선리토성(영원면) 두승산성(두승산) 앵성리산성(수성지) 태성지, 백산산성
◎산업.교통으로 본 유적
〇洑. 堤- 만석보 유지(이평면)
눌제 유지-(세종 때, 기록에 1만결의 농경지가 있었다. (자료에 는 수리안전답 360정보, 상습수해 면적 1,600정보, 상습한해 면 적 1,640 정보로 조사 됨)
〇역.원(驛.院)-영원역(瀛原驛)영원면 永元面이란 名號도 瀛原驛에서 파생됨.
관리 10명, 반인 5명, 노복 5명, 실무비 2명, 실무마 10필, 역토 35석, 7두락이다.
원-생근원 (성내면), 율원(미상),
〇석불-망제동석불(덕천), 용흥리석불좌상(고부면), 남복리미륵암석불(고부), 원통암 석불유지(두승산), 후지리탑동석불, 보화리석불입상, 망제동석불입상과 석등, 산매리미륵불상, 봉양리미륵불상이 두승산문화권에 있고, 무성리미륵불상은 칠보, 정혜사미륵불상, 상동미륵불상은 정읍시내에 있다.
〇석탑-은선리삼층석탑, 천곡사지칠층석탑, 남복리오층석탑, 용흥리해정사지석탑, 장문리오층석탑. 무성리석탑을 빼고는 모두 두승산문화권에 있다.
■교육기관
〇고부향교- 창건연대는 미상이고, 1597년(宣祖30년) 현재의 위치에 건축
〇서원-창동서원, 노양서원, 도계서원, 동죽서원, 옥산서원 外
◎사우(祠宇)-정충사, 옥산사, 서산사, 태산사, 外
◎누정(樓亭)
〇君子亭(고부)-현종 때의 건축물. 일본헌병대가 주둔하기도 했음.
〇이심정(怡心亭)- 1910년 한일병탄 직후 정읍의 우국지사들이 망국의 울분을 달래기 위해 '망국제' (亡國祭)라는 행사를 열기도 하였다고 한다. 당시 정읍시 흑암동 (현 배영중고등학교 앞쪽 마을)에 소재한 영주정사(瀛州精舍)라는 교육기관에서 동문수학하던 12명의 지사들이 이곳 이심정에 함께 모였다. 그들은 국권을 잃은 것에 통분하여 서울을 향하여 대성통곡하고 국권회복을 위한 독립운동의 의열을 굳게 다짐하였던 것이다. 우리고장 독립운동가 구파 백정기 의사가 15살 나이에 참여했던 행사였다. 이때 함께 참여한 분들의 명단을 기록해본다.
고인주(38세, 당시 영주정사 학감), 고응중(36세), 백관수(22세), 김성수(20세), 박봉규(20세), 박승규(17세), 김기홍(17세), 한성수(17세), 김연수(15세), 백정기(15세), 최동규(14세), 박방원(13세) 이상 모두 12명이다. [참고문헌 : (사)구파백정기의사기념사업회에서 발간한 '항일혁명투사 구파 백정기']
초산율계는 한국전쟁이 끝난 1954년 갑오년 9월 18일에 조직되었으며, 초산(楚山)의 명칭은 정읍의 옛 지명에서 따온 것이다. 초산율계는 나용주가 주동하여 만든 것으로, 초산율계라 이름을 지은 것도 나용주다. 주로 나용주의 대청이나 이심정(怡心亭)에 모여 율회를 하였다.
■세시풍속
〇시암실약수, 덕천 천곡의 약천암에 있는 약수인데, 5월 단오에는 수많은 인파가 몰려들어 인사인해를 이룬다고 했다.
〇대산(垈山)메밟기- 조선시대부터 정우면 대산리 유대(有垈)마을에는 메밟기를 해왔다. 대산마을 뒷산에 대산리토성이 있는데, 성이 붕괴된 후 음력으로 윤달이 들어있을 때에는 하루의 날을 잡아 동네의 노인들이 성지(城址)를 밟아오는 풍속이 있었다. 윤달에 성지를 밟음으로서 노인들이 극락으로 간다고 믿었다. 오랜 세월 전통이 내려오는 동안 ‘터메밟기’로 변했다. 전승되지 않음.
■명승
두승산 - 만일사(토가산), 원통암(약사전,불공지소), 선전암, 동운암(정충사), 망월사, 등계사 등이 영주읍지에 보인다. 유선사 제외
*암각서: 水斗木升(동초 김석곤). 望仙坮, 祝天坮가 있고, 望華臺와 하도낙서는 전간재선생이 ‘대자연의 우주세계 즉 신선세계를 동경한 나머지 정역팔괘(正易八卦)를 기호화한 「하도낙서」(河圖洛書)를 암벽에 남겼다’. 그가 망화대에 하도낙서를 조각해 놓은 것은 정역이 구현되는 개벽세상을 동경했다는 근거가 된다고 했다.(송화섭)「전라문화 바로보기」
정토산 - 산 중턱에는 1299년 (高麗 충렬왕 25년) 담운선사(曇雲禪師)가 창건했다는 정토사가 있다.
기타
*白髮會와 이광, 택탕 이식, 유성룡과 이순신의 관계(우일리 모현재가 우일서당으로 유명하다고 기록.
정읍최초의 초등학교는 1906년 고부군수 정용기가 사립학교 광화학교 설립했고, 군수가 교장. 1908년 고부공립보통학교로 개칭 [井邑郡史]
※조선왕조실록에 지금의 정읍시 관내에 지진 기록이 17번 기록됨.
※『輿地圖書』古阜條에 고부의 선비들은 학문과 덕행에 힘쓰고 백성들은 농사짓기에 힘쓰며 여염에서는 기도하기를 즐겨하고 검소하고 질박한 것을 좋아한다고 적어놓았다.
※조선 숙종 때, 종이 그의 주인을 죽여 잠시 郡에서 현으로 강등 된 적도 있었다.
※조선시대에 35명의 文科 급제자를 배출했다. 전북 4위이다.
※사발통문에는 亂亡歌도 있다.
‘右와 같이 檄文을 사방에 전하니 여론이 물 끓듯 하였다. 매일 같이 亂亡을 부르던 민중들은 곳곳에 모여서 말하되 ‘났네 났어 난리가 났어 에이 참 잘 되었지’
당시 조선사람들은 ‘ 이 나라는 망한다. 꼭 망해야 옳다. 어찌 얼른 망하지 않는가?’하는 亂亡歌와 ‘어떤 좋은 운수라야 난리를 만날 수 있는가?’하는 탄식이 나오고 있다. 이것은 조선 민중의 바램이다.
■한일병탄과 고부- 1905년 국치(國恥)의 을사늑약 후 고부에 첫발을 밟은 일본인은 1906년 6월 “能本懸人 島村天瑞” 사립(匡和) 학교의 일본어 교원이다. 10월에 한국 경무고문(警務顧問) 전주지부 고부분견소가 설립되었다. 1907년 “소곡정치”(小谷政治)가 처음으로 상점을 열었으며 10월 재무서(財務署)를 개설하였다.
1908년 5월 25일 공립고부보통학교를 설립했고, 1909년 5월 일본군 고부헌병분견소를 개설했다.
1909년 4.1일 고부농공은행 지점이 개업했고, 1910년 7월 10일 일본인 소학교를 개교했다. 그러나 1910년 7월 일본군 수비대 철수와 경찰서가 줄포로 이전되었다. 1914년 2월에는 고부 헌병분대를 정읍으로 이전시키게 되었다.
1914년 3월 1일 행정구역을 개편 때, 고부군청을 폐청시키고 고부군을 3개 군으로 나눴으며, 고부면으로 축소 개편했다. 그들은 의도적으로 동학혁명의 발상지로서 민심 집결이 두려워 계획된 것임을 알 수 있다. 7월에는 고부군 재판소도 정읍으로 이전했고 11월에는 농공은행지점도 정읍으로 이전했다. 차츰 고부는 쇠퇴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다.
결정적으로 남선철도(南鮮鐵道:현재 호남선)가 개통(1914. 1월) 되고 그해 3. 1일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발전의 축은 정읍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일제 강점기의 농업- 1910년 한일병탄 이후. 한국농업은 사전에 조사하고 계획한 수탈농정의 방향으로 수행되어 갔다. 1910~1918년까지 토지조사사업을 실시 지목(地目) 지번(地番)의 확정 지적도(地籍圖)작성 토지등기제도 및 지세제도의 제정 등을 서둘렀다. 이러한 근대화가 식량증산 수입농산물의 자급화 산미증산(産米增産) 면작장려 누에증수 축우증식 등의 계획을 책정 실시했다.
일본은 자국의 식량난(1916년 쌀부족 심각)을 타개하기 위해 산미증산계획을 통해 그들의 수탈농정계획을 강화했다.
그로인해 일본인 지주.자본가 계급의 한반도에 대한 투자가 조수처럼 밀려왔다. 토지 매점자는 10만명이 넘었다. 그 결과 한국인 중소토지소유자 농민들은 열세토지소유자가 되거나 무전농민(無田農民)이 되어 일본인과 한국인 지주층의 소작농민이 되었다. 소작농민은 그래도 다행이고 수십만 수백만의 농민은 농지에서 배제되어 만주나 일본으로 떠나게 되었다. 견디다 못한 소작농민은 지주.자본계급에 대해 생존을 위한 투쟁을 전개했다. 1920년대~1930년대는 바로 이런 투쟁의 시기. 소작쟁의. 농민운동의 시기였다.
◎일제 강점기의 고부지방의 농업- 관청리에 동양척식회사 농장의 창고(현. 고부중학교)가 들어서고 논을 매입하니 농민들은 소작농으로 전락하여 수탈당했다. 그 옆에 일본에 본사를 둔 다목농장(多木) 창고가 있어 가을이면 송곡(쇠정이)는 농민들이 붐비고 한을 술로 푸는 술집만 번성했다. 논을 매수한 이들은 경지정리로 수리안전답을 만들고, 마을을 조성(풍월리2구 다목촌)하고 소작농을 이주시켜 지배했다.
농지를 얻지 못해 소작농조차 못한 농민들은 ‘머슴살이’를 했다.
관청, 신흥, 강고, 신중리는 대농이 많았기에 경상도에서 봄에 머슴살이를 이곳으로 왔다. 이것도 못하면 만주나 일본으로 떠났다.
1940년대 전시체제가 되면서 전시동원으로 탄광 또는 만주나 남양군도로 징용을 의무화 시켜 강제로 동원했다.
가을이면 농감이 작황에 따라 소작료를 고지했고, 소작료를 받치고도 전시공출(戰時供出)이라 하여 할당료를 정부에 납부케 했다. 곡식은 모두 수탈당하고 콩깨묵을 나눠줬다. 농민들은 굶어죽지 않으려 곡식을 숨겨 공출 할당량을 내지 않아 주재소에 끌려가 매를 맞았다. 공출 독려 명목으로 집집마다 뒤지고 발각되면 짐승 다루듯 했다. 굶어죽는 것보다 가족을 위해 매를 선택하는 가장들의 최선의 선택일 것이다.
농한기에는 가마니를 짜서 매상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술과 놀음, 마약으로 한을 풀었다. 어느 마을은 어른 대부분이 마약중독자로 소문나기도 했다고 한다.
8.15해방은 한민족의 국권회복 뿐만 아니라 농민인권의 해방이었고 민족의 한을 풀어주는 해방이었다.
※일제의 토지수탈의 처리 - 1945년 당시 전국에는 55만 호의 소작농가가 있었다. 1년 소작료는 미군정부직속의 [新韓公社]에서 수확고의 3할을 소작료로 징수했다. 이에, 일본 수탈정책의 연장이라는 국민의 여론이 있어 1948년 신한공사를 중앙토지행정처로 개칭하고 토지불하처분령을 공포하여 일본인 소유의 토지(귀속토지. 귀속농지라 했음)를 점유자에게 拂下키로 하였다.
불하의 농지대는 年生産高의 3년분을 15년간 分割償還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형식에 있어서는 토지의 農民所有를 인정하는 것 같지만 실제는 地稅, 水稅, 戶稅 등의 공과금을 농민이 새로 부담하게 되어 농민의 생활향상은 미미했다.
지금의 소작료는 어느 정도인가?
■平地突出의 땅과 사람
두승산은 풍수학에서는 平地突出의 대표적 명산이다.
후덕한 어머니의 느낌을 주는 산, 넓은들, 개방적 물길, 이러한 전라도의 풍토에 없는 것 없이, 당하는 데서는 둘째가라면 억울하고, 원통한 역사, 왜곡과 멸시를 수없이 당해왔다. 이것에 저항하는 민란이 꼬리를 물었고, 급기야는 혁명의 도화선을 긋는 등, 민중들이 삶을 회복하려는 사상이 응어리진 땅. 이러한 조건 속에서 한없이 끌어당기는 느낌이 좋은 산. 그러니 모여든 것이다.
달리 무슨 설명을 더 붙이겠는가?
귀인봉(선인봉)아래가 천하명당이라 하였다. 이 소문으로 한때는 많은 부자들이 이곳에 자리를 잡으려고 모이기도 했다 한다(예. 만수동. 입석리).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영산의 지기를 받은 고부가 왜 지금까지 큰 인물이 나오지 않았는가?’라고 반문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 영산은 늘 큰 잠재적 가능성을 지닌 인물들을 다양한 분야에서 배출하였다.
예부터 인걸은 지령이라 했듯이 이처럼 산 좋고 물 좋고 들 좋은 곳에서 어찌 인물이 나오지 않겠는가?
과거에 장원급제하고 전라 경기 충청감사를 지낸 이희맹. 임진왜란 때, 4부자가 의병을 일으켜 왜군을 섬멸한 의병장 김제민. 죽음으로 나라를 지킨 충절의 魂 송상현 등은 고부에서 낳고 자란 자랑스러운 인물들이다.
*여진족을 물리친 이경조(고부이씨 시조). 덕촌 최희정. *택당 이식. *정묘호란 때 공신인 장무공 김 준. *광해군 때 유학자 청하 권극중. *단학의 비조라 할 수 있는 남궁 두. *정유재란 때 공신 신 호. *인조 때의 명신 김지수. 종교와 사상으로 결부된 쪽만 보더라도 죽창 하나 들고 보국안민의 기치를 들었던 전봉준. 천지공사로 후천개벽을 꿈꾸었던 강증산. 한때 차천자(車天子)로 불렸던 차경석. 아나키스트 독립운동가 구파 백정기의사 등이 이곳을 근거로 활동하였다. 이들은 단지 남에서만 주목받았던 인물들이 아니라, 당시 조선뿐만 아니라 주변 국가까지 관심의 대상이 될 정도로 욱일승천(旭日昇天)하는 기세를 보였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좌절하였다. 땅의 기운 탓이 아니라 운이 불리하였거나, 시대의 흐름을 제대로 읽지 못한 탓이다.
설화는 있어 사람에게 희망을 주고, 그것을 믿고 준비하는 사람에게는 자신의 그릇에 맞는 역할이 주어진다. 선지자들은 유토피아를 꿈꾸며 평지돌출의 명산에 기대어 웅지를 키웠고, 그 뜻을 펼치고자 했다.
성패를 떠나 그들이 꿈꾸고 실행과정의 역정을 보면서, 후세들은 무엇을 어떻게 더 노력하는가? 결과는 그들에게 달려 있는 것이다.
※ 동학농민혁명이 성공했었더라면?
■맺음말
마을과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연구한다는 것은, 그 지역에 대한 특수한 가치관과 생명력을 재확인하는 작업이다. 지난날의 문화와 전통은 어떤 형태로든 현재의 마을문화와 의식에 영향을 미치며, 이는 그 마을사람들이 느끼는 동질성과 공감대의 기반이 된다. 따라서 자기마을에 대한 믿음과 정체성의 확인으로부터 나오는 자긍심과 자부심은 결국 내 고장과 마을의 사랑으로 귀결되며, 이는 다시 나아가 지역공동체 주민들의 생활과 삶의 질을 높이는 계기가 된다.
한 지역의 문화적 정체성은 자연환경이라는 변수 하나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많다. 특히, 구성원이 공유하는 이념은 보다 더 강력하고 근본적인 정체성형성의 요인이 아닌가 한다. 고부의 ‘반골’기질이 고부, 고부지역, 고부문화권 형성의 원동력의 하나라고 믿고 있다. 고부의 저항정신이란 선사 이래 수많은 왕조의 통치를 거치면서도 수 천년 동안 잃지 않고 다져온 지역중심지로서의 자부심, 강한 토착성, 외부세력과 불의에 대한 신랄한 비판의식에서 비롯된 것으로 본다.
바로 이것이 고부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