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세파에 뜬 조각배
“아빠. 우리도 테레비 사.”
“응.......?”
화장실에서 나오던 이상재는 아들의 쨍한 목소리에 엉거주춤했다. 다섯 살인 녀석은 늦잠 찌
꺼기를 털어내는 듯 눈을 비벼댔다.
“우리도 테레비 사자니까.”
아들의 목소리가 더 강한 쇳소리로 울렸다.
“테레비는 무슨 테레비?”
녀석이 또 엉뚱한 소리를 한다 싶어 이상재는 건성으로 대꾸하며 고개를 돌렸다.
“아빤 테레비도 몰라? 내 친구 상규네도 샀단 말야. 우리도 빨랑 사.”
아들의 목소리는 더욱 카랑카랑하게 솟고 있었다.
“얘 주혁아. 아침부터 아바한테 그러면 못 써. 아빠 회사에 나가셔야 하는데.”
그의 아내가 부엌에서 뛰쳐나오며 아이를 나무랐다.
“싫여. 싫여. 우리도 테레비 사. 테레비 없는 집은 이젠 우리 집뿐이라니까. 상규새끼가
막 폼 잡고 놀리니까 난 챙피하단 말야.”
아들은 제 엄마의 앞치마를 잡고 마구 흔들며 울음 섞어 외치고 있었다.
“알았어. 알았어. 울긴 왜 울어. 우리도 아빠가 돈 벌면 곧 살 거야. 우리 주혁이 착하지.
조금만 기다려 응?”
아내가 아들을 안아 올리며 등을 토닥거렸다.
“싫여. 싫여. 나 챙피하다니까.”
아들은 제 엄마를 떠밀며 떼를 썼다.
“너 이러면 엄마가 맴매할 거야. 매 맞아도 좋아?”
아내의 목소리가 차가워지며 눈을 부라렸다. 아들은 그 서슬에 기가 꺾였다.
“갑자기 왜 테레비 성화야.”
이상재는 손에 들고 있던 신문을 접으며 뚱하게 말했다.
“당신은 이 나라 사람 아니에요? 무허가 판잣집에서도 월부로 테레비 들여놓고 있는데. 애
비 노릇 제대로 못하는 것 창피한 줄이나 아세요.”
그의 아내가 눈을 흘기며 퉁을 놓았다.
“그거 아동 교육에 백해무익이라니까.”
“맙소사. 끝까지 무능하단 말은 안 하고.”
이상재는 애를 안고 돌아서는 아내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아이를 갓 낳았을 때는
신문의 마력에 휘말려 텔레비전은 안중에 없었고. 아이가 커서 텔레비전을 원하니까 생활은
궁기에 절어 있었다. 아내의 말마따나 신문 없이는 못 살 정도로 매일 아침 눈을 뜨자마자
신문부터 집어 들었다. 그러나 유심히 보는 것은 정치면이고 그 다음은 문화면이었다. 문화
면에 신경을 쓰는 것은 출판사를 한 다음부터였다. 날이 갈수록 볼 만한 것이라고는 없이 닮
은꼴이 되어가고 있는 신문들인데도 눈에 보이기만 하면 펼쳐들게 되었다. 정치적 불안이 심
해질수록 통제가 강화되고 있으니 신문들은 특종도 없고 특색도 없이 시들시들해지고 있었
다. 그런데도 신문을 외면하지 못하는 것은 오래 습관된 신문 중독증인지, 아직도 끊지 못하
고 있는 신문에 대한 향수 때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이상재는 밥상을 받고 앉아서도 밥맛이 하나도 없었다. 또 애비로서 체면이 구겨진 게 영 언
짢았다. 그동안에도 애비의 체면이 안 서는 일을 당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아들이 이
웃에 친구를 갖게 되면서부터 그런 일은 빈번하게 일어났다. 세발자전거에서부터 가지가지
장난감까지 아들이 사내라는 것은 많기도 했다. 그런데 장난감이라는 것들이 옛날하고는 달
리 정교하게 상품화되어 있어서 턱없이 비쌌다. 특히 아들이 좋아하는 앙증맞은 미니카들은
전부 외제라 비싸서 애비 체면 깎기에 딱 알맞았다.
그뿐이 아니었다. 남편으로서 체면을 세울 수 없는 일이 그 위에 겹쳐지고 있었다. 가까스
로 생활비 갖다 주기도 벅찬 형편에 남편 노릇이란 엄두를 낼 수가 없었다. 해묵은 옷은 고
사하고 헌 구두마저 새로 사주기가 어려웠다. 신문사 기자에게 시집온 아내는 그 혜택을 얼
마 누려보지도 못하고 고생길로 들어선 것이었다. 기자들의 월급이 자꾸 올라가고 있으니 아
내의 심정은 어떨 것인가. 그러나 아내에게 면목 없고 미안한 것은 그래도 사리분별을 할
줄 아는 아내가 남편의 사회적 행동을 이해하리라는 믿음으로 어물어물 넘길 수가 있었다.
그렇지만 철없는 아들에게 애비노릇을 못하는 것은 그때마다 가슴 아리고 마음을 그늘지게
했다. 특히 유치원에 보내지 못했을 때는 그 괴로움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때 불현듯 언
론 투쟁에 나섰던 것이 후회되기도 했었다. 세상은 달라진 것 없이 독재는 건재하고 있었
고, 신문사에서는 딴사람들을 받아들여 보란 듯이 신문을 찍어내고 있었다. 그런 철벽의 현
실 앞에서 자유언론의 깃발을 들었다는 것은 정말 갈 데 없는 돈키호테들이었는지도 몰랐다.
그러나 세끼 밥 굶지 않으며 어렵사리 출판사를 꾸려가고 있는 자신은 그나마 나은 편이었
다. 취직도 마음대로 할 수 없이 감시당하고 방해 받아 이런저런 장사로 나선 기자들은 그동
안 과로로 쓰러져 세상을 떠나기도 했고, 병들어 눕기도 했고, 망해서 맨주먹이 되기도 했
다. 자식들의 입에 밥을 넣어줄 수 없는 애비의 처절함....... 그런 막다른 길에 몰려 있는
동료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들에 비하면 자신은 가장 노릇을 너무나 잘하고 있는 셈이었
다. 그리고 철없는 아들의 텔레비전 투정에 의기소침해지는 것은 사치였다. 아직 텔레비전
도 없는 사람들이 수두룩한 것이 현실이었다.
“당신이 주혁이 좀 잘 달래. 녀석이 일곱 살만 됐어도 말귀를 알아들을 텐데 말야.”
이상재는 아내한테 이르고 집을 나섰다. 아내가 아무 대꾸도 하지 않는 것이 신경에 거슬렸
다. 당연히 ‘알았어요’ 하는 답이 나와야 하는데 어찌 된 일일까. 그럼 아내도 텔레비전
사기를 바란다는 것인가? 그는 울컥 부아가 치밀다가 괜한 일에까지 소심해지고 있는 자신
을 발견했다. 아내는 그렇게 소갈머리 없는 여자가 아니었다. 어린 것을 기죽게 키우기는 싫
고, 뜻을 들어줄 수는 없고, 아내도 이래저래 속이 상해 그러리라 싶었다.
이상재는 애써 다스리고 단순화시켜 온 감정이 또다시 헝클어지고 복잡해지는 것을 느꼈다.
사회와 정의와 명분과....... 현실과 가정과 궁핍과....... 그 갈등은 끊임없이 되풀이되고
있었다. 의지를 꿋꿋이 세우려고 하면서도 생활의 어려움에 부딪힐 때마다 마음은 흔들리고
허물어지려고 했다.
내가 정말 다혈질이고 돈키호테였던가? 우리가 언론자유를 위해 나섰지만 이루어진 것은 무
엇인가? 이루어진 것은 아무것도 없고, 신문사에서 내쫓겼을 뿐 독재는 오히려 기승을 부리
고 있었다. 어이없고 비참하게도 자신들의 행동은 독재자들에게 독재를 강화하도록 자극하
고 깨닫게 해준 역할을 한 셈이었다. 더 어처구니없는 것은 자신들이 내쫓긴 자리를 마치 기
다리기라도 했다는 듯이 며칠이 못 가 이런저런 사람들이 메우고 만 일이었다. 그들도 다 배
울 만큼 배우고 사리분별을 할 능력을 갖춘 지식인들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처음 얼마 동안은 슬슬 피하고 몸을 사리는 눈치더니 차츰 해가 바뀌어가자 기를 세
우기 시작했다. 당당하게 맞대면하기를 어려워하지 않았고, 술 한잔하자는 말을 서슴없이 내
놓기도 했다. 그러다가 마침내는 ‘어차피 누군가는 채워야 할 자린데 그나마 저 같은 사람
이 들어가 선배님들 뜻 지키는 것이 낫지 않습니까?’ 하는 말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 희한
한 논리에 말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이봐. 어디서 그따위 논리 변조야! 그게 바로 친일파 민족반역자들이 써먹었던 뻔뻔스럽
고 파렴치한 괴변이야. 얻어터지기 전에 당장 꺼져!”
술 취한 원병균 선배가 빈 막걸리 잔을 치켜들며 외친 소리였다.
그런 얍삽한 논리 변조는 소위 지식인들의 전유물이었다. 또, 그런 괴변이 어물어물 통해가
는 것이 세상이었다. 그런데 원병균 선배는 그 합리화를 전혀 용납하지 않았다. 그가 허둥지
둥 술자리를 떴기에 망정이지 만약 무슨 말대꾸를 했더라면 원 선배는 막걸리 잔으로 그의
면상을 후려쳤을지도 몰랐다. 원 선배의 그 단호함 앞에서 술자리의 후배들은 또다시 마음
을 가다듬지 않을 수 없었다.
“난들 왜 갈등이나 회의가 없겠어. 성인이나 군자가 아니라 평범한 인간일 뿐인데, 허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자기 진실을 스스로 더럽혀서는 안 된다는 점이야. 자기 진실을 더럽
히는 것은 자기 부정이고, 자기 부정은 인간이기를 포기해 버리는 마지막 행위니까. 우리가
권력의 억압에 고립되어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우리의 존재가 없어진 것은 아니야. 그리고
우리가 했던 저항도 어디로 증발하거나 사라진 게 아니야. 우리가 이렇게 존재하는 것으로
그 저항도 이어지고 퍼져나가고 있다 그 말이지. 대학생들의 저항이 갈수록 격렬해지고 있는
데, 그 힘에는 우리의 성명서 한 장. 한 장도 어떤 힘으로 작용하고 있거든. 모든 사회운동
은 직접 간접으로 상호작용을 일으키고, 서로서로 자극하고 의지하면서 그 힘이 배가 되는
거니까. 그리고, 생활이 고달프다고 괴로워하거나 의기소침해선 안돼. 지금 고문을 당하거
나 감옥살이를 하고 있는 대학생들을 생각해 봐. 그들에 비하면 우린 얼마나 편하고 고통 없
이 지내는지, 조금만 더 참고 기다려. 망하지 않는 독재는 없으니까.”
원병균 선배는 오갈 데 없는 실직자 동료들에게 자장면이며 싸구려 백반을 지치지 않고 사주
는 것처럼 그런 굳은 의지도 줄기차게 지키고 있었다.
원 선배야말로 그런 의지가 흔들리거나 허물어지기 딱 좋은 여건 속에 놓여 있었다. 재벌로
굳건하게 자리 잡은 처가에서는 ‘문어발식 경영’이라는 새 유행어에 어울리도록 해마다 족
벌회사들을 늘려 이제 마흔 개가 넘게 거느리고 있었다. 그런 회사가 생길 때마다 원 선배
는 고위간부로 자리를 옮기라는 압력을 받고는 했다. 그러나 원 선배는 끄떡도 하지 않았
다. 장인의 압력에 못지않게 부부 싸움도 숱하게 많이 한 눈치였는데, 결국 지치고 만 것은
원 선배의 아내 쪽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신문사에서는 은밀하게 원 선배에게 접근해 온 일이 두어 번 있었다. 직
책을 올려 우대할 테니 신문사로 돌아오라는 것이었다. 이미 서너 명이 어물쩍 뒷손을 써 신
문사로 다시 들어간 것에 비하면 그런 제의는 이쪽 입장이 당당해지고 자존심이 서는 것이기
도 했다. 그런데 원 선배는 “너희 신문사가 망하기를 바란다”는 한마디를 던지고 돌아서
버렸다.
그 이야기는 원 선배가 한 것이 아니었다. 신문사 쪽에서 흘러나와 퇴직기자들은 뒤늦게 알
게 되었다. 그들은 놀람과 통쾌함으로 그 사실을 원 선배에게 확인하려고 들었다. “그거
뭐....... 어차피 전원 복직이 안 될 바에야 무슨 소리를 못 해.” 원 선배는 이렇게 말하
며 쓰디쓰게 웃고 말았다. 원 선배의 그런 태도는 언제나 그들 모두를 격려하는 힘이었고 뒤
를 받치는 버팀목이었다.
원 선배처럼 꿋꿋하게 버티자. 내 스스로 선택한 길이니까.......
이상재는 다시금 마음을 다잡으며 버스에서 내렸다. 세종문화회관을 지나 샛길로 꺾어 도는
데 문득 가전제품 판매점이 눈에 들어왔다. 그 길을 날마다 자주 오가면서도 눈길이 가지 않
았던 곳이었다. 모든 가전제품 상점들이 그렇듯이 그곳의 쇼윈도도 눈길 끌리게 화려했다.
그런데 번들거리는 큰 유리창에 나붙은 붉은 글씨가 사람들을 향해 나 좀 보라고 소리치는
듯 유난히 크게 돋보였다.
“텔레비전 특별 할부판매 실시!”
그 선전문과 아들의 얼굴이 겹쳐지는 것을 느끼며 이상재는 고개를 돌렸다. 아무리 할부라
해도 그것을 사줘 애비의 체면을 세울 여력은 없었다. 남편 노릇이 부실한 것보다 애비 노릇
을 제대로 못하는 것이 더 속상하다는 것을 그는 또 느끼고 있었다. 철모르는 자식에게 번번
이 ‘시시한 아빠’가 되어야 하는 것은 혼자만 알아야 하는 속 쓰린 괴로움이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이 어찌할 수 없는 본능이듯 애비가 자식 앞에서 당당하고 싶은 것도 막
을 길 없는 욕구였다.
그러나 난 배를 곯리진 않으니까.
이상재는 다른 동료들을 생각하며 그런 감상을 털어냈다. 나날이 끼니 걱정을 하고 있는 동
료들에 비하면 그런 감정은 너무 호사스러운 것이었다.
“아니, 어쩐 일이세요? 이렇게 일찍.”
이상재는 사무실로 들어서며 먼저 와 있는 원병균을 의아하게 쳐다보았다. 으레 자신이 먼
저 출근하는 입장이라 그의 손에는 열쇠가 들려 있었다.
“이거 탈났소.”
원병균이 보고 있던 책을 뒤집어놓으며 쓴 입맛을 다셨다.
“뭐가 잘못됐습니까?”
이상재는 뒤집어진 책과 원병균에게 눈길을 빨리 돌렸다.
“책이 좀 팔린다 싶더니 결국 베껴먹기 하는 놈이 나타났소.”
“우리 번역소설 말입니까?”
“어제 내가 퇴근하기 직전에 도매상에서 전화가 왔었소. 그 소설이 막 베스트셀러가 될 판
인데 똑 같은 책이 나왔다고, 자기가 얼핏 보기엔 베껴먹기 한 것 같은데, 빨리 구해서 대조
해 보고 베껴 먹은 것이 사실이면 즉각 조처하라고 말이오.”
“빌어먹을. 대조해 보셨습니까?”
이상재는 책상 위에 뒤집어져 있는 책을 다급하게 집어들었다. 그 책의 표지는 자기들이 낸
책의 표지와 구분이 안 되게 똑 같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 표지는 원작의 표지였던
것이다.
“100페이지 정도까지 대조를 해봤는데 베껴먹은 건 더 말할 것도 없소. 번역이 좀 어색해
서 내가 손질한 몇 군데까지 그대로 똑 같으니까.”
“100페이지까지요? 그럼 어젯밤 꼬박 세우셨군요?”
이상재는 어제 인쇄소에서 바로 퇴근했던 것이 미안해 이 말부터 했다.
“그건 마음 쓸 것 없고, 더 대조할 필요 없으니까 빨리 대책을 강구해야 되겠소.”
원병균이 소파로 옮겨 앉으며 담배를 빼물었다.
“어떤 빌어먹을 자식이 베껴먹을 책이 없어서 하필 우리 책을....... ”
이를 갈아붙이듯 하며 이상재도 담배에 불을 붙였다.
“내가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수습책은 세 가지 단계가 있지 않을까 싶소. 첫째. 저쪽 사장
에게 책을 전량 수거하게 하는 것, 둘째. 신문을 총동원해 기사화시키는 것, 셋째. 법적 조
처를 취하는 것, 근데, 베껴먹기 하고 나선 자가 책을 순순히 수거할 리가 없을 것이오. 그
러니까 기사화와 법적조처를 동시에 하겠다고 압력을 가할 필요가 있소. 내 생각은 이런데
더 좋은 무슨 방법이 없겠소?”
“글쎄요. 더 좀 생각해 봐야겠지만....... 지금으로선 그 방법이 완벽한 것 같은데요. 그
럼 제가 저쪽 사장을 만나볼까요?”
이상재는 궂은일을 자신이 먼저 맡아야 된다고 생각했다.
“이 형이? 그거 언쟁이 벌어지고 감정이 상할지도 모르는데?”
“예. 그런 일은 원래 쫄병이 하는 것 아닙니까. 그거 보나마나 뻔뻔스럽고 낯짝 두꺼운 인
간일 테니까 선배님은 만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럼 그렇게 합시다. 이 형이 그자를 만나는 동안 난 신문사 쪽을 맡을 테니까. 잠시 틈
도 주지 말고 몰아붙입시다. 이거야 원. 책이 좀 팔려 어떻게 숨을 돌리나 했더니, 내
참....... ”
원병균이 꽁초를 비벼 끄며 몸을 일으켰다.
“이 책은 제가 가져가겠습니다.
“그러시오. 문장을 고치고 바꾼 데를 다 표시해 놨으니까.”
원병균은 신문사들 전화번호가 적힌 수첩을 펼치고 송수화기를 들며 대꾸했다.
사무실을 나온 이상재는 공중전화로 유일표의 아내 서경혜에게 전화를 걸었다.
“글쎄요....... 출판사 이름은 들어본 것 같은데 사장이 누군지는 잘 모르겠어요. 왜. 무
슨 일 있으세요?”
서경혜의 눈치 빠른 반응이었다.
“지난번에 낸 우리 소설을 베껴먹었어요.”
“어머나, 그게 요새 잘 나가고 있잖아요? 베스트셀러 될 거라는 말이 있던데요.”
“그러게 말입니다. 뭐가 좀 되나 싶으니까 그따위 얌체족이 나타났지 뭡니까.”
“세상에 베껴먹을 책이 따로 있지. 선생님네 출판사가 어떤 출판사라고. 그래 어떡하실 거
예요?”
“예. 복잡하게 다 말씀드릴 수는 없고, 모든 방법을 총 동원해 그 못된 버릇을 고쳐놀 작정
입니다.”
“네. 그래요. 그런 얌체족들이 더는 나타나지 못하게 이번 기회에 아주 혼쭐을 내주세요.
그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출판계 전체의 문제잖아요.”
“예. 출판계의 큰 병폐지요. 근데, 낭군님께오서는 잘 있습니까? 그 노동운동이 신바람이
나는지 어떤지 요새 통 볼 수가 없어서요.”
이상재는 이야기를 마무리 지으려고 유일표의 안부를 물었다.
“네. 노동운동으로 바쁘기도 하지만, 그이 요새 정말 신바람 나는 일이 한 가지 생겼어
요.”
“그래요? 그게 뭐지요? 생남 하긴 아직 이르고.......”
“가출한 여동생이 승려 된 건 아시죠? 그 여동생이 얼마 전에 다녀갔거든요.”
“아. 그래요? 그것 참 반갑고 잘된 일이군요. 일표가 늘 걱정하고 괴로워한 일이었는데, 일
표한테 축하한다고 전해주세요.”
“네. 감사합니다. 일 잘 처리되기 바라겠어요.”
전화를 끊은 이상재는 한동안 하늘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항시 그늘진 수심과 슬픈
우울에 잠겨 있던 유일표의 여동생 선희. 그녀가 푸른색 감도는 빡빡머리의 여승이 된 모습
을 그려낼 수가 없었다. 속세를 등지고 머리를 깎은 대신 얼굴이 밝고 명랑해졌는지 모를 일
이었다. 어쩌면 더 그늘지고 우울해졌을 수도 있었다. 유일표는 여동생이 혹시 못쓰게 되지
나 않았는지, 어디서 죽지나 않았는지, 못내 애를 태웠었다. 그나마 여승으로 다시 만나게
되었으니 그런 다행이 없었다.
이상재는 마포에 있는 그 출판사를 찾아갔다.
“이거 왜 이래요? 우리도 번역료 줄 것 다 주고 책 낸 거라구요.”
다방으로 자리를 옮긴 그 출판사 사장은 대뜸 이렇게 기를 세웠다.
“아니. 그걸 말이라고 합니까? 여기 이렇게 엄연한 증거가 있어요. 이걸 똑똑히 봐요. 이러
고도 번역을 했다고 거짓말을 할 수 있는 것인지.”
이상재는 성질이 곤두서는 것을 느끼며 책을 그 사람 앞으로 불쑥 내밀어 넘기기 시작했다.
책장마다 빨간 줄이 수없이 그어지고 잔글씨들도 공백 여기저기에 많이 적혀 있었다.
“말조심하시오. 거짓말이라니. 난 모르는 일이니까 따질 게 있으면 번역자한테 따지시오.”
“뭐요? 그런다고 발뺌이 될 것 같소?
군대의. 그것도 월남에서 썼던 욕이 터져나가려는 것을 이상재는 가까스로 참았다. 상대방
은 베껴먹기를 태연하게 자행하는 자라는 것을 다시 생각하며.
“뭐. 그쪽도 큰소리칠 건 없어요. 해적출판 해먹는 거야 다 똑같은 처진데.”
그 사람은 담배를 빼들며 입가에 비웃음을 물었다.
이상재는 그만 울화가 솟구쳤다. 그자는 악랄하게도 이쪽의 약점을 찔러 제 잘못을 상쇄하려
고 들고 있었다. 우리나라가 국제저작권협회에 가입하지 않고, 외국 저작물들을 무단으로 번
역. 출판하는 것은 분명 해적출판이었다. 그러나 그건 우리나라만이 아니라 후진국들의 일반
적인 현상이었다. 이상재는 숨을 몰아쉬며 화를 눌렀다.
“사장님께오서는 아주 유식하시군요. 그러나 하나만 알았지 둘은 모르고 있소. 무슨 말인
고 하면, 우리가 해적 출판한 것은 국제법도 어쩔 수 없지만, 당신네가 우리 것을 베껴먹은
것은 재산권 침해로 국내법에 걸려요. 여러 말할 것 없이 내 말 똑똑히 들으시오. 도매상에
나가 있는 책들을 당장 수거해서 내일까지 우리가 확인할 수 있도록 하시오. 만약 이 말을
듣지 않으면 베껴먹기 한 사실을 모든 신문에 터트려 아예 출판계에 발을 붙이지 못하게 할
것이오. 그뿐만이 아니라 법적 조처도 취할 것이오. 똑똑히 기억해 두시오.”
이상재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헹 공갈 한번 삼삼하게 치시네. 신문에 내? 신문이 뭐 즈네 안방인줄 아나? 법으로 한다
구? 그래 좋아. 법 무서웠으면 진작 이 세상살이 작파했다. 얼마든지 해보라구.”
그는 다방을 나가는 이상재의 뒤에다 대고 목청을 높이고 있었다.
이상재는 또 치솟는 울분을 애써 참아냈다. 감정대로 하자면 그 나불거리는 주둥아리를 당
장 으깨놓고 싶었지만 이건 감정을 앞세워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그는 원선배가 안 오기
잘했다고 생각하며 다방을 나섰다.
“그럴 줄 알았소. 전화 가지고는 안 되겠으니까 신문사를 나눠서 직접 뜁시다. 이 기회에
우리를 돕고 싶어 하는 눈치들이었으니까. 직접 만나 자세한 정보를 제공할 필요가 있소. 우
리가 도움을 받는 것만이 아니라 베껴먹기라는 출판계의 악습을 제거하는 계기로 삼게 해야
되겠소. 어서 서두릅시다.”
원병균은 기사가 커지게 할 수 있는 객관적 명분을 일깨우고 있었다.
“예. 알겠습니다. 그따위 짓들을 하면 어떻게 망신을 당하는지 꼭 보여줄 필요가 있습니
다. 그자가 그렇게 큰소리를 치는 것도 호되게 당해보지 않았기 때문이거든요.”
“그렇소. 그리고, 신문이 이런 사회적 병폐에 주목하지 않는 것은 일종의 직무유기고, 건전
한 독자들의 피해를 외면하는 무책임이오. 이 점도 환기시킬 필요가 있소.”
“예. 알겠습니다.”
이상재는 점심도 거르며 신문사를 돌았다. 입 안이 쓰도록 지쳐 있었지만 기분은 좋았다.
그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기자들의 반응이 적극적이었던 것이다.
다음날도 하루 종일 분주했다. 번역자까지 사무실에 나와 신문들의 취재에 응해야 했기 때문
이다. 그런데 기자들의 말로는 저쪽 출판사의 사장은 물론 편집장까지 종적을 감추어버렸다
는 거였다.
사흘째 되는 날부터 기사가 나오기 시작했다.
“허허....... 이거 인심들 한번 후하군.”
원병균은 신문들을 펼치며 흡족해 했다. 크게 다루어진 기사는 문화면 머릿기사로 올라있었
다. 그 내용들은, 출판계의 고질적인 악습을 이제 그만 청산하지 않고는 문화사회를 기대할
수 없다는 쪽으로 방향을 잡고 있었다. 그리고, 제목의 글씨체만 다른 두 권의 책 사진이 베
껴먹기의 행태를 실감나게 보여주고 있었다.
“이거 신문들이 어쩐 일이야? 아주 화끈하게 봐줬는데 그래?”
“글쎄 말야. 이러다가 초베스트셀러 탄생하게 생겼어.”
“봐주긴 뭘 봐줘. 비겁하게 웅크리고 있는 저희들 죄를 이번 기회에 속죄하느라고 그런 거
지.”
“뭐 그렇게 콕 찍어서 말할 건 없지. 우리에 대한 미안함의 표현이기도 하고, 옛 동업자들
에 대한 신의의 표현이기도 하고. 두루두루 그런 거지.”
“좋아. 그런저런 의미가 다 뭉쳐진 결과일 거야. 어쨌거나 이번 기회에 책이나 수십만 권
팔려 사무실 좀 넓게 옮기고, 짜장면이 갈비탕으로, 막걸리가 맥주로 바뀌었으면 좋겠다.”
“그거, 그거 옳은 말이야.”
신문을 보고 모여든 두위 회원들의 방담이었다.
원병균이 내놓은 화제에 따라 그들의 이야기는 법적조처로 옮겨갔다. 자기 나름으로 논리를
갖추고 있는 그들은 공동 화젯거리가 생기자 허기진 참에 입맛 도는 음식을 앞에 둔 것처럼
앞다투어 의견을 쏟아내기 바빴다. 그 의견들을 간추리면 두 가지였다. 내친김에 법적으로
몰아 그런 짓을 뿌리 뽑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쪽과, 그쪽에서도 혼이 났고 출판계 전체
에 경종을 울리는 효과도 거두었는데 그런 식으로까지 몰아서는 우리 사회의 정서상 너무 심
하다고 오히려 욕을 먹을 수 있으니 좀더 두고 보자는 쪽이었다.
“그래. 우리도 피곤하니까 좀더 두고 보는 게 좋을 것 같소. 그쪽에서 책을 더 못 찍게 하
는 게 목적이지 법정에 세우는 게 목적이 아니니까.”
원병균이 결론을 내렸다.
“속전속결로 아주 잘하셨어요. 누워서 베스트셀러 되게 생겼으니까 5천부 더 빨리 찍어주세
요. 책 끊기면 안 되니까. 급행열차로요.”
다음날 아침 도매상에서 걸려온 전화였다.
“전화위복이란 말 생각나는데요.”
이상재는 원병균을 보고 웃었고,
“이거, 저쪽 사장한테 감사장 줘야 하게 되면 어쩌나.”
원병균도 웃으며 오랜만에 농담을 했다.
이상재는 ‘급행열차’를 운전하느라고 종이집, 인쇄소, 제본소로 사흘 동안 정신없이 뛰어
다녔다. 그동안 저쪽에서는 아무 반응도 없었다.
“허진이라는 친구한테서 전화가 왔었소. 할머니가 돌아가셨다고, 빈소는 살고 계시던 집이
라 했소.”
이상재가 사무실로 들어서자 교정을 보고 있던 원병균이 일에 묻힌 표정 없는 얼굴로 말했
다.
“그래요?”
이상재는 문득 놀랐지만, 결국 가셨구나 하는 생각이 놀람을 지워냈다. 허진의 할머니는 노
환을 오래 앓아왔다. 허진보다는 허미경의 얼굴이 더 강하게 떠올랐다. 그동안 할머니를 모
신 건 허미경이었다. 오로지 할머니에게 마음을 의지해왔던 그녀의 슬픔이 얼마나 크랴 싶었
다.
이상재는 유일표에게 전화를 걸었다.
“너 허진한테서 전화 받았냐?”
“아니. 그 자식이 나한테 전화할 일이 뭐 있어. 잔뜩 유감을 품고 있는 놈인데. 왜?”
“허진 할머니께서 돌아가셨다.
“....... 가셨구나. 어디서?”
“사시던 데지 뭐.”
“그래....... 그 할머니도 참......”
이상재는 유일표가 삼키고 있는 것이 무슨 말인지 대충 짐작하고 있었다. 허미경의 작은 아
파트에 비해 허진의 집은 으리으리한 단독주택이었다. 그리고 허진은 장자였다. 친구들이 내
놓고 이야기하지는 않았지만 누구나 그 점을 의아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할머니
가 평생에 걸쳐 모진 고생을 한 것을 생각할수록.
“어떡할래?”
“어떡하긴. 가서 밤샘해야지.”
“그럼 우리 사무실로 와. 같이 가게.”
“그래 곧 갈게.”
이상재는 담배를 피워 물었다. 허미경이 더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그녀는 앞으로 어떻게 살
려는 것인가. 평생 양품점을 하면서 혼자 살아가려는가. 그렇지 않으면 달리 무슨 방법이 있
는가. 그런 과거를 지닌 여자가. 결혼을 하고서도 연애한 과거가 드러나면 이혼을 당하는 세
상에서. 단순히 처녀가 아니라는 사실도 용납이 안 되는데 애까지 낳았으니. 기껏 해봐야 후
처자리가 있을 뿐이다. 그녀는 이런 현실을 다 정리했는지도 모른다. 자신에게 입술 이상을
허락하지 않는걸 보면 혼자 살기로 단단히 작심한 것이 분명했다. 다시는 상처받을 짓을 하
지 않겠다는 단호함. 그 차가운 거부 앞에서 자신은 남자의 욕심을 지탱할 수가 없었다. 내
가 결혼하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나와 결혼했을까? 이 말을 물어보고 싶었던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거야말로 어리석고 부질없는 일이었다. 그 물음은 그녀를 더 불행하고
비참하게 만들 뿐이었다. 또. 그녀가 지금이라도 결혼을 할 수 있다고 한다면 나는 이혼을
할 수 있는가? 그럴 수 없는 바에야 그녀와의 사이에는 영영 건널 수 없는 강이 흐르고 있었
다. 그동안 한 가지 확인한 것은. 한 남자가 진정으로 두 여자를 사랑할 수 있다는 사실이었
다. 그녀가 입술을 허락하는 것은 여자도 아내 있는 남자를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었다. 그녀와의 사랑은 거기까지였다. 그래서 더 목마르고 안타까웠다.
어느 상가나 그렇듯 허미경의 아파트 문도 열려있었다. 그리고 옆벽에는 상가를 알리는 검
은 등이 낡은 만큼 두꺼운 때가 낀 채 걸려 있었다. 돈 벌기에만 눈을 밝히는 장의사의 인색
이 그 등에 끈끈하게 묻어있었다.
이상재와 유일표는 그 등 앞에서 옷깃을 여미며 안으로 들어섰다. 좁은 현관에는 구두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거실로 앞서 들어가던 이상재는 부엌에서 무엇을 들고 나오는 허미경
과 눈이 마주쳤다. 소복을 한 그녀는 주춤하더니 목례를 보이고는 걸음을 옮겼다. 이상재는
그녀의 눈에 눈물이 번지는 것을 보며 가슴이 찡 울렸다. 그녀가 너무 슬프고 외로워 보였
다.
이상재와 유일표는 허진의 할머니 영정 앞에 나란히 서서 절을 올렸다. 그리고 동생과 나란
히 선 상제 허진에게 예를 갖추었다.
“동생 미경이가 일어나보니 밤새.......”
허진이 중얼거리듯 낮게 말했다.
“주무시다 가셨으니 복 받으셨군. 참 다행이야.”
이상재가 대꾸했고, 유일표는 영정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평생 고생만 하다 가셨군요.......
유일표는 이런 속말을 하며 어머니를 생각하고 있었다. 자신의 어머니나 허진의 할머니나 기
구하기는 마찬가지의 일생이었다.
다른 문상객이 와서 이상재와 유일표는 옆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러나 집이 좁아 앉을 자
리가 마땅치 않았다.
“그냥 나갔다가 이따가 다시오지.”
유일표가 이상재의 귀에 대고 말했다.
“그게 낫겠지? 사람들 발길이 좀 뜸해진 다음에.”
이상재가 고개를 끄덕이며 발길을 돌렸다.
“벌써 가시게요?”
당황스럽게 이상재 옆으로 다가선 건 허미경이었다. 눈물로 붉게 젖어있는 그녀의 눈에 새로
운 눈물이 번지고 있었다.
“아니오. 지금 복잡하니까 좀 나가 있다가 문상객 뜸해질 시간에 맞춰 다시 올 거요.”
“네에. 죄송해요. 집이 너무 좁아서.”
허미경이 눈물을 훔쳤다.
“편히 가셨다니 다행이오.”
“아니에요. 저희들은 다 불효자식이에요. 아무도 임종을 못 지켰는데. 할머니가 얼마나 외
롭고 힘드셨.......”
허미경의 말은 북받치는 울음에 묻혀버렸다.
“괜찮아요. 할머니가 손자 손녀들 안 괴롭히려고 그렇게 혼자 가신 거니까.”
유일표가 구두를 신으며 말했다.
“예. 이 말이 맞아요. 너무 죄스럽게 생각하지 마요. 미경씨는 최선을 다했으니까.”
이상재도 구두를 찾아 신으며 위로했다. 허미경은 소리 없이 울며 연이어 눈물을 훔치고 있
었다.
“그래도 아파트가 5층짜리라 다행이다.”
이상재가 계단을 걸어 내려가며 말했다.
“글쎄 말이다. 그나저나 관이 이 계단을 무사히 돌아 내려갈 수 있을지 걱정이다.”
유일표가 계단을 돌아보며 혀를 찼다.
“힘이 좀 들겠지만 어떻게 되겠지.”
“그렇지도 않아. 얼마 전에 우리 재건대 대장 친구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엘리베이터로
관을 옮길 수 없어서 소방차를 동원해 달아 내리는데, 10층 높이에서 관이 공중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걸 보니까 끔찍스럽더라. 아파트생활 이거 문제야.”
“그것 참 아슬아슬하고 곤란한 문젠데. 허지만 어쩌겠어. 땅은 좁고 사람은 많고, 차곡차
곡 쌓아올릴 수밖에.”
“하여튼 세상이 변해가면서 별일이 다 생겨. 난 촌놈이라서 그런지 어쩐지 아파트는 딱 질
색이야.”
아파트를 나서며 유일표는 담배를 빼물었다.
“나도 촌놈이지만 아파트에 산다. 편리 내세우는 마누라 등살에 시달려봐. 싫고 좋고가 없
게 되니까.”
“못난 소리하지 마. 나처럼 양처를 얻으면 만사형통이야.”
“도둑놈. 남 마누라 괜히 악처 만드네. 너, 자식 자랑 반편이고, 마누라 자랑 뭔지 알기나
해?”
둘은 서로를 바라보며 헤식게 웃었다.
그들은 가까운 술집으로 들어갔다.
“여기서 아예 저녁이 되도록 배도 든든히 채우고 들어가자.”
이상재가 손짓으로 사람을 부르며 말했다.
“새끼. 어떻게 해서든 내연의 처 힘 덜 들게 해주려고 애쓰고 앉았네.”
“짜식. 넝마만 뒤지더니 속까지 지저분해졌네. 아무 관계도 안 맺고 있는데 내연의 처가 뭐
냐? 고상하게 연인이라고 해야지.”
“연인? 너. 정신적 간음이 더 음탕하고 무서운 죄인 줄 몰라?”
“병신. 도산에 관계하더니 예수꾼 냄새까지 풍기기냐?”
“얼씨구. 잘 걸고넘어진다.”
그들은 또 마주보며 실없는 웃음을 흘렸다.
이상재는 소주에 돼지고기볶음과 감자탕을 시켰다.
“너. 그 일 위험하지 않아?”
첫 잔을 반쯤 비운 이상재는 유일표를 쳐다보았다.
“위험.......?”
유일표는 새삼스럽게 무슨 소리냐는 눈길을 보냈다.
“난 아무래도 불안불안해. 넌 자꾸 깊이 빠지는 것 같고, 저쪽의 감시는 갈수록 심해지고
있고, 넌 입지가 남들과 다르니까 말야. 잘못하면 엉뚱한 죄 뒤집어쓸 수도 있거든.”
이상재의 얼굴은 신중하고도 진지했다.
“그래서 조심하고 있어.”
유일표의 대꾸도 무거웠다.
“그동안 망설여왔던 말인데 말야. 그만 거기서 손떼고 야학만 하는 게 어떠냐?”
“글쎄. 네 말도 일리가 있는데. 그렇지만 현실은 그렇게 한가하지가 않아. 노예가 중세에
만 있었던 게 아니야. 지금 우리나라 노동자들은 노예야. 노동노예. 죽도록 일을 하고도 최
저생활이 안돼. 의. 식. 주 생활이 해결이 안 된다구. 그러니 자식들 교육을 원하는 대로 시
킬 수 없고. 중병에 걸리면 그대로 죽을 수밖에 없어. 그런데 기업주들은 떼부자가 되고 있
는 거야. 다 똑같은 사람이 사는 세상이 이래서야 되겠어? 이런 모순을 몰랐으면 모르지만
알고서야 눈을 감을 수는 없잖아. 나도 내 여건을 많이 생각했지. 그렇지만 내가 야학에서
가르쳐 사회에 내보낸 애들이 나 자신처럼 생각되는데. 그들이 착취당하고 있는 걸 모르는
척 한다는 건 말이 안돼. 그래서 정치성을 피해가면서 몸조심하려고 애쓰고 있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정치성을 피한다고 피해지냐? 정부가 막는 일을 조직적으로 대항하고 나서는 게 바로 정치
성이지.”
“넌 역시 너무 유식해 탈이야. 그런 속에서도 얼마든지 몸조심을 할 수 있으니까 내 걱정
말고 넌 출판사나 잘해.”
“참 이놈의 세상이 문제는 문제다. 정치는 점점 더 험악해져 가고, 부익부 빈익빈의 골은
갈수록 깊어지기만 하고. 이러다가 이놈의 나라가 어찌 될지 모르겠다.”
이상재가 술을 단숨에 비웠다.
그들은 밤 9시가 넘어 다시 아파트의 계단을 밟아 올랐다.
“이것들, 아주 시절 좋네. 벌써 얼큰하게 취해서.”
두 사람을 맞이한 건 최주한이었다.
“형님들 보고 이것들이라니. 아우는 언제 온 거지?”
이상재가 최주한과 반갑게 악수하며 웃었다.
“이 형님을 좀 기다릴 것이지. 동생 놈들이 버르장머리 없기는. 내가오니까 나간 지 한 두
어 시간쯤 된다고 하는데. 어디로 간지 알아야 말이지.”
최주한이 유일표의 어깨를 툭 쳤다.
“차라리 잘됐어. 넌 술 잘못하니까.”
유일표가 최주한의 귀를 잡고 흔들었다. 악수를 대신하는 두 사람의 몸짓에는 어린 중학시절
부터 이어져온 우정이 묻어나고 있었다.
이제 문상객의 발길은 끊겨 있었다. 영정을 모신 방에는 상제들이 피곤한 모습으로 앉아 있
었고, 그 옆방에는 젊은 사람들이 빼곡하게 둘러앉아 화투판을 벌이고 있었다. 좁은 그 방에
는 더 들어앉을 틈이 없었다.
“회사 직원들인가?”
유일표가 최주한에게 눈짓하며 물었다.
“응. 오늘 밤 밤샘할 팀이래. 우린 저 방에서 허진하고 보내기로 했어.”
최주한이 어서 방으로 들어가자는 손짓을 했다.
“야. 일표야. 여기 상가인 것 알지?”
이상재가 유일표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유일표가 무슨 소리냐는 표정으로 이상재를 바라보
았다.
“허진 곤란하게 하는 얘기는 꺼내지 마. 사원들도 있는데.”
“내 참. 별걱정을 다 하네. 기대를 해야 입을 열 마음이 생기지. 그 대목은 이미 포기한
지 오래야. 내가 여기 온 것도 허진 때문이 아니야. 할머니가 우리를 언제나 따뜻하게 대해
주셨던 정 때문이지. 허진 저 새끼. 제놈이 철공소에서 그 고생했던 것을 까맣게 잊어버리
고 사장족들 편들고 나서는 걸 생각하면 얼굴을 대하고 싶지가 않아.”
“알았어. 알았어. 그렇게 해둬.”
이상재가 유일표의 등을 두들겼다.
그들이 둘러앉자 허미경이 술상을 봐왔다. 망자가 고령이라 상가는 호상이라는 분위기인데
그녀 혼자서만 슬픔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넌 어떠냐? 승진 좀 됐어?”
이상재가 최주한의 잔에 술을 따르며 물었다.
“말도 마라. 지연이 나쁘니 학연도 맥을 못 쓰는 판이라 되는 일이 하나도 없다.”
최주한이 한숨을 푹 내쉬고는 왈칵 술잔을 비웠다.
“아니. 일반 회사에서도 그게 그렇게 심해?”
“너. 화성에서 왔냐? 규모가 있는 회사일수록 관리들 상대하는 일이 많아지잖아. 그때 가
장 막강한 빽이 지연이라는 것 몰라? 그러니 나 같은 놈은 찬밥 신세가 될 수밖에. 그래서
사우디에나 한바탕 나가볼까 어쩔까 한다.”
“사우디? 거긴 공대 출신들이나 활개 치는데 아니냐?”
“상대출신도 필요하긴 해. 관리자가 없어서는 안 되니까.”
“그렇지만 너무 더워서 그거 문제 아니냐? 벌써 더위로 병을 얻어와 앓는 사람들이 적지 않
다는 소문이던데. 치료 방법도 마땅찮고.”
“그건 폭염 속에서 일한 노동자들의 경우고, 관리직은 에어컨 나오는 사무실에서 일하니까
그럴 염려는 없어. 물론 천지가 다 더우니까 여기서보다야 고생이 되겠지만, 거기 다녀오면
경제적으로도 이익이고 경력도 쌓이고, 일거양득이거든. 어떻게 생각해?”
최주한은 유일표를 쳐다보았다.
“그렇다면 빨리 가는 게 좋아. 한 살이라도 더 먹기 전에.”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유일표의 대답은 분명했다.
“그래. 그렇기는 하지. 중동 경기라는 것도 언제까지나 가는 게 아니니까.”
이상재도 고개를 끄덕였다.
“느네들 말 들으면 우리 마누라 좋아서 춤추게 생겼다. 어떻게 된 여편네가 돈이야 하면 사
죽을 못 써. 남편은 고생을 하거나말거나.”
최주한이 떫은 입맛을 다시며 쓴웃음을 지었다.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갔다 와. 그게 돌파구가 된다면 좀 좋으냐. 너라도 좀 시원시원하
게 풀려봐라.”
유일표는 최주한에게 술잔을 내밀었다.
“그래. 가긴 가야겠다. 우리가 한강 건너올 때 이렇게 비실거리려고 한 게 아니었는데.”
최주한은 술잔을 받으며 또 쓰게 웃었다.
그들은 통금이 해제되는 것을 따라 아파트를 나섰다. 밖에는 안개가 자욱하게 끼어 있었다.
“허진이 할머니를 안 모신 거냐. 할머니가 신세 망친 손녀딸 데리고 산다고 하신 거냐?”
최주한이 느닷없는 말을 꺼냈다.
아무도 대답이 없었다. 그들은 한동안 안개 속을 걸었다.
“가정사니까 그걸 알 수가 있나. 아마 둘 다일지 모르지.”
이상재가 한숨 섞여 말했다.
보름쯤 지나 이상재는 최주한의 전화를 받았다.
“너 돈 쓸 일 생겼다 이 형님 덕에.”
“돈.......?”
“빨리 송별회 차리라구.”
“송별회?”
“이새끼. 나한테 아무 관심도 없구나. 나 사우디로 떠나. 임마!”
“뭐야? 이거 번갯불에 콩 볶아먹어도 유분수지.”
“야가 정말 세상 어떻게 돌아가는 줄 모르고 산다니까. 난 고민 하다가 늦은 거야. 일반 노
동자들도 서류내고 1주일이면 사우디행 비행기 타는 것 몰라? 이젠 싸우면서 일하고 일하면
서 싸우자가 아니라 돈이면 최고다 돈을 향해 돌격이다. 하는 세상이야.”
“너도 드디어 외화 획득의 역군이 됐구나. 그래. 송별회 거창하게 해야지.”
“근데 왜 한숨은 쉬냐?”
“모르겠다. 날짜나 불러.”
“부르고 말고 할 것도 없어. 내일 당장 해치워야지. 사흘 후면 떠나.”
이상재는 최주한이 떠나는 날 공항에 나가지 못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사고가 터졌던
것이다.
“잘 나가던 책이 어째 지방에서 시들시들 풀이 죽는 감이 들더라구요. 근데 글쎄 이번에 우
리 부장이 지방 출장을 가서 보니까 저쪽에서 책을 왕창 찍어 50프로로 떰핑을 쳐버렸더라
는 것 아닙니까. 전에도 그런 일 생기면 한 2만부 찍어 40~50프로로 지방에 쫙 깔아버리면
지방에선 마진 크니까 그 책만 팔고 께임 끝나요. 이쪽에서 신문에 내자 저쪽에선, 그래 좋
다. 하고 뒷방 까고 나온 건데, 신문에만 낼 것이 아니라 그놈이 그 짓을 못하게 미리 막았
어야지요. 이거 원. 베스트셀러 되긴 그른 것 같고. 창고에 있는 책이나 재고 없이 팔아치워
야 될 텐데 골치 아프네요 이거.”
도매상에서 걸려온 전화였다.
“허. 이거 무법천지로군.”
원병균이 소파에 털썩 주저앉으며 토해낸 소리였다. 그 모습이 너무 허탈하고 절망적이어서
이상재는 저쪽을 향해 화를 낼 수도 없었고 욕을 할 수도 없었다.
원병균은 담배 한 대를 다 피울 때까지 말이 없었다. 이상재도 담배를 빨며 생각을 한 곳으
로 모았다. 그러나 울분만 부글부글 끓어오를 뿐 저쪽을 가격할 신통한 방법은 떠오르지 않
았다.
“나 변호사한테 좀 가야 되겠소. 늦을지도 모르니 기다리지 말고 시간되면 퇴근하시오.”
원병균이 자리를 차고 일어났다. 그의 얼굴은 차게 굳어져 있었다.
이상재는 말없이 원병균을 문 밖까지 따라 나갔다가 들어왔다. 그런 기막힌 일을 당하고도
분을 억누르는 원 선배가 대단하다 싶었다. 퇴근시간이 지나고 한 시간을 더 기다렸지만 원
선배는 돌아오지 않았다.
“별수가 없소. 고등 사기꾼한테 사기당한 셈 칠 수밖에. 법으로 해봤자 형사 입건이 되는
것도 아니고 천상 민사라는데. 민사 소송을 하면 시일만 질질 끌어 시간낭비에 정력낭비만
했지 얻는 건 없다는 거요. 이런 풍토에서 출판을 하다니......”
이튿날 아침에 원병균이 한 말이었다.
이상재는 원병균에게 담배를 권했다.
“....... 법으로 한다구? 그래. 좋아. 법 무서웠으면 진작 이 세상살이 작파했다. 얼마든
지 해보라구.”
그자의 외침이 쟁쟁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그자는 괜히 큰소리를 친 것이 아니었다. 이미 법
의 허점을 환히 알고 있었던 것이고, 이쪽의 신문 공세를 오히려 책 선전으로 역이용해 가
며 덤핑 판매에 열을 올린 거였다.
원병균은 2~3일이 지나도 기분이 회복되지 않고 우울했다. 이상재도 따라서 침울할 수밖에
없었다. 새 번역물의 교정지가 나와도 교정 볼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그런데 뜻밖의 일이 생겼다.
“시경에서 나왔소. 이 성명서 원병균 당신이 작성했다며?”
갑자기 들이닥친 형사 두 명은 이미 원병균의 얼굴을 알고 있었다.
“서(暑)로 좀 갑시다.”
그들은 양쪽에서 원병균의 팔짱을 끼었다.
이상재는 밖으로 끌려 나가는 원병균을 보며 허공을 잡는 듯한 빈 손짓만 했다. 그러다가 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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