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학적 관점
뉴욕 타임즈의 옥스퍼드 지역 선술집(pubs) 탐방 기사에서 “좋은 선술집은 잘 준비된 파티와 같고, 이국땅에서 경험하는 자기 집과 같고, 누구나 가입할 수 있는 클럽과 같다”라는 평을 한 적이 있다. 누가복음 15장의 본문을 읽으면서 우리는 예수가 그런 선술집에서 별 볼 일 없는 사람들과 먹고 마시면서 소위 정상적이고 순수한 사람들에 대해 투정을 하고 있다고 상상할 수 있다. 더 정확하게는, 예수가 “세리들과 죄인들”과 먹고 마시고 있었고, 그때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예수가 어울리는 사람들에 대해 투덜거리고 있었다. 이들에게 예수는 “잃었다 찾음”의 비유 시리즈를 들려준다. 본문과 관련된 신학적 주제는 속죄론과 교회론으로 다음과 같은 구체적인 질문들을 포함하고 있다: 누가 안에 있고, 누가 밖에 있는가? 누가 잃었고, 누가 찾아졌는가? 예수에 의해 구원받는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오늘날 예수의 공동체가 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눅 11:9에서 예수가 “찾아라, 그리하면 찾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을 근거로, 오늘 비유가 구원은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을 찾는 것과 같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라고 해석하려는 유혹을 받을 수 있다. 우리가 잃은 양을 찾는 목자이고, 잃은 동전을 찾는 여자라고 상상하기 쉽니다. 이 비유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우리에게 계속 열심히 찾을 것을 가르친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사실은 이 비유는 다른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이 비유에서 우리는 죄인이다. 찾는 사람이 아니고 잃어버린 대상이다.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는 주관적 의미에서가 아니라 - 물론 이 측면도 포함되겠지만 - 우리가 다른 사람이 찾는 대상이 되었다는 객관적 의미에서 그렇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우리를 간절히 찾는 누군가가 분실한 존재이다. Lancelot Andrewes는 1620년 부활절 설교에서 “그리스도는 그를 열심히 찾는 사람이 만나지 못하고, 그를 전혀 찾지 않는 사람이 만난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역설적으로 들리는 이 말을 듣고 우리는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하게 된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열심히 찾는 사람”이 당연히 그리스도를 만날 것이라는 기대를 하는데 - 눅 11:9처럼 - “못하고”라는 구절에 당황하게 된다. 대부분의 비유가 그런 것처럼, 우리는 기대하지 않은 결론에 - 그리스도를 열심히 찾아다니면 그 결과 그를 만나게 될 것이라는 기대가 잘못되었다는 -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된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예상과는 반대로 그를 찾지 않는 사람들이 만난다. 우리는 양이나 동전과 같이 찾아지는 존재이다. 찾아지는 것은 우리의 발견되려는 노력이 아니고 우리가 찾아지고 있다는 사실과 관련 있다. 복음의 핵심은 우리가 찾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선물과 상을 구별하기 위해서 다음과 같이 말할 수도 있다: 우리는 이미 찾아졌다. 이 드라마에서 인간에게 주어진 역할은 잃어버려지는 것이다. 이것을 수동적인 상태라고 해석하기 쉬운데, 사실 이것은 수동도, 능동도 아니다. 여기에는 “중간태”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작용하는데, 이것은 “개방적이고 능동적인 수용성 (open and active receptivity)”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10절의 “회개”라는 행위와 관련된다. 이것은 내가 스스로 구원을 이루겠다는 생각을 접고 나를 찾는 목소리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 속에서 일하시기 때문에 (빌 2:12) 우리가 그리스도를 찾기 위해서 우리가 취할 수 있는 가장 적극적인 행동은 우리가 찾아지기를 기꺼이 바라는 것이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 믿음 자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는 종종 무엇인가 찾으려고 추구하는데, 그 대상이 하나님이 아니고 믿음인 경우가 있지 않은가? 믿음을 잃어버렸다는 것은 내가 찾아졌다는 확신을 잃은 것이고, 도대체 누군가가 나를 찾고 있는지 회의하는 것이고, 나를 찾기 위해 샅샅이 뒤지는 목자나 여자가 있는 것인지 의심하는 것이다. 믿음을 잃어버린 사람은 - 바리새파 사람이나 율법학자보다는 세리와 죄인과 가까운 사람인데 - 찾아질 수 있는 가능성에 열려진 채 방황하고 있는 사람이다. 세리와 죄인들, 회의론자 비판론자들에게 이 비유가 “찾아짐”에 관한 것이라면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에게는 “기뻐하는 법을 배움(learning to rejoice)”에 관한 것이다. 잃은 양과 동전의 비유는 모두 친구와 이웃을 불러 잔치하는 장면으로 끝난다. 진정, 기쁨의 전이가 한 사람에게 많은 사람에게로, 지상에서 하늘로 이루어진다. 잔치는 우주적 규모로 이루어진다. 기쁨은 이 모든 이야기의 최종 결론이자 목표이다. 이것은 찾은 순간의 기쁨을 초월한다. 따라서 구원은 단지 구출(rescue)이 아니고, 영원한 축하(celebration)의 상태로 옮겨가는 것이다.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 그리고 오늘날 교회 내에서 비판적이고 부정적인 목소리만 내는 교인들에게 - 도전적인 질문은 이것이다: 어떤 사람들과 잔치를 벌이겠는가 그 답이 “우리는 잔치를 안 좋아한다.” 혹은 “우리는 그런 사람들과는 잔치를 안 한다.”라면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의 선술집을 포기하는 사람들이다.
주석적 관점
- 눅9:51을 보면 예수는 예루살렘으로 가기로 마음을 굳히신다. 북쪽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남쪽 예루살렘으로 가는 여정 속에서 예수는 제자들에게 제자됨의 의미를 가르치셨다. 그들 중에 70명이 특별한 사명을 지니고 보내심을 받았는데, 그들은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이 갔다. 그들은 “이리 가운데 가는 양”(10:3)과 같이 갔지만, 기쁨으로 돌아왔는데, 왜냐하면 심지어 마귀까지도 그들에게 복종했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서 반복해서 예수는 돈과 그의 위험성, 회개의 요구, 예수는 따르는 댓가에 대해 말씀하신다. 자주 예수는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과 식사했는데, 한번은 그곳의 손님들과 주인에게 특별히 마을의 소외되고 약한 사람들에게 대해(14:7-14) 겸손과 환대의 필요성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다. 한번은 예수는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했다.
- 오늘 본문에서 예수가 세리들과 죄인들과 함께 한 것이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을 불편하게 했는데, 왜냐하면 죄인들이 예수의 말을 들으려고 가까이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듣는다”는 것은 누가에게 있어 회개와 개종의 표시이다(5:1,15;6:17-18,27,47,49을 보라). 히브리성서의 요나선지자처럼(욘4:1-5),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은 자신들이 회개할 수 있는 선을 정해놓은 외부에 있는 사람들의 회개 가능성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은 투덜거렸는데,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유랑할 때 모세와 아론에 대해 투덜거리고 불평했던 것을 연상시킨다.
- 15장에서 끊임없이 불평하는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에 대해서 불친절한 유대인들을 비판하는 데 사용되는 세 가지 이야기들을 말한다. 이 셋 중 두 가지 이야기가 오늘 성서정과이다(세 번째 이야기인 15:11-32절의 돌아온 탕자이야기는 사순절 넷째 주 성서정과이다). 첫 번째 이야기는 마태복음의 비슷한 이야기(18:12-14)와 병행구를 이루는데, 그 본문은 교회 안에서의 정착 논쟁의 맥락이다.
- 두 이야기들은 같은 윤곽으로 겹쳐놓을 수 있다.
“어떤 남자/여자...100마리 양/10드라크마, 만약 그/그녀가 하나를 잃었다면 양을 찾아다님/온 집안을 쓸며 찾음... 그/그녀가 찾을 때까지? 그/그녀가 찾았다면 그/그녀가 친구와 이웃을 불러, “나와 함께 기뻐해주십시오. 내가 잃어버린 양/동전을 찾았습니다.” 하늘에서 기뻐한다/천사들이 기뻐한다.1)
- 처음 이야기는 질문으로 시작한다. “너희 가운데서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를 가지고 있는데, 그 가운데서 한 마리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양을 찾을 때까지 찾아 다니지 않겠느냐?” 이 질문은 방향을 잃는 것으로 방향 짓는다. 광야에 남아있는 99마리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그들은 돌보지 않은 채 남겨둘 것인가? 그들을 돌보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없다. 이야기의 화자는 오로지 잃어버린 한 마리 양과 그 양을 찾을 때 까지 찾아서 어깨에 매고 기뻐하며 집으로 돌아와 이웃을 불러 잔치를 베푸는 목자에게만 초점을 맞추고 있다.
- 두 번째 이야기는 드라크마 한 닢을 잃어버리고 등불을 켜서, 온 집안을 쓸며, 그것을 찾을 때까지 샅샅이 뒤지는 한 여인에 대해 묘사하고 있다. 그래서 찾으면, 기쁜 나머지 벗과 이웃 사람을 불러 모으고 말하기를 잃었던 드라크마 찾을 것을 함께 기뻐해달라고 말한다. 한 드라크마는 양 한 마리나 암소 1/5을 살 수 있는 돈이다. 그런데 그 여인은 친구들을 위해 더 많은 돈을 잔치에 쓰고 있다. 신약에서 어느 비유도 여인으로 하나님을 상징하거나 비유하지 않는다. 이 비유는 청중들에게 놀라움을 주었을 것인데 왜냐하면 하나님을 잃어버린 동전을 찾고 기뻐하는 여인으로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 예수는 바리새인과 율법학자들과 같이 세리와 죄인들을 대하는데, 말하자면 세리와 죄인들은 잃어버린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비유들은 한편으로는 예수와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을,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찾아다님과 잃어버린 것을 찾음 사이에 날카로운 차이를 지적한다. 이 이야기의 포인트는 두 가지인데, 하나는 찾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관심을 강조하는 것이고, 하늘에서 죄인들이나 세리 또는 바리새인이 믿음을 가지는 이 발견에 대해 기뻐하신다.
- 사실상, 기쁨과 축하의 주제는 두 이야기 모두에서 두드러진다. 두 이야기 모두 하늘에서 회개하는 죄인에 대해 기뻐하신다고 끝을 맺는다(7,10). 양이나 동전이 회개할 수는 없다. 그러기에 두 비유의 이슈는 죄인들을 회개하라고 부르는 것이 아니라, 의인들을 축하의 자리로 모아내는 것이다. 사람에게 있어 축하에 참여하는 것이 전적으로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한 사람의 관계가 공적에 기초하는가 자비에 기초하는 가를 밝혀주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자비를 공격적으로 보는 사람은 죄인이 회개할 때 천사들과 같이 기뻐할 수 없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을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배제시킨다.2) 바리새인들이나 율법학자들은 예수가 세리들과 죄인들과 함께하는 것에 대해 불평함으로써 자신들을 하나님의 은혜의 원 밖으로 내몬다.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에게는 기쁨이나 축하도, 잔치나 즐거움도 없다. 비록 그들은 기쁜 목자나 여인들을 위하여 주어진 잔치에 초대받았지만, 그들 자신이 스스로 가는 것을 막았다. 그래서 탕자의 형과 같이(15:25-32), 그들은 바깥으로 내몰린다.
목회적 관점
이 한 쌍의 비유는 하나님의 성품에 관한, 특히 사람들을 용서하시고 회복하시는 하나님의 성품에 관한 예수의 가르침을 소개한다. 비유들은 되풀이해서 용서란 잃어버린 것을 찾는 것이라고 한다. 예수는 청중들에게 공동체가 된다는 것이 무엇이고, 공동체가 가지는 범위가 어떤 것인지 생각해보라고 도전한다. 그렇게 하면서 예수는 우리 자신의 경험으로 알게 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생각하게 한다. 이것이 비유의 힘이다.
무리가 예수의 가르침을 들으려고 주위에 몰려들고 있다. 온갖 사람들이 이 공동체를 구성한다. 그들은 다양한 이유로 예수 주위에 모였다: 제자들은 가르침을 받기 위하여; 바리새파 사람들과 사두개파 사람들은 예수의 급진적인 가르침을 확인하기 위하여; 그리고 인생 대부분을 주변부에서 살아와서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사람들. 그들은 세리와 죄인들이라고 표현되었는데, 그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평판을 얻기 원하는 사람들이, 사람들에게 비난받을까봐 두려워서, 아무도 그들과 시간을 보내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쨌든 이런 아웃사이더들 역시 공동체로 모여들었다. 이것은 이상한 친구들의 모임이고, 저녁식사를 함께 할 일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여기서 그들은 예수와 함께 식사를 한다.
대화가 즉시 시작되면서 예수의 공동체는 균열되기 시작한다. 사람들은 수군대기 시작한다. “누가 이 사람들을 초대했어? 왜 예수는 이런 여자와 남자를 받아들이는 거야? 예수는 저 사람들이 누군지 모른단 말이야? 예수는 도대체 누구야?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일을 말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이런 사람들하고 같이 먹다니.”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를 알아차리고, 예수는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말로 하나님의 성품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군중들 사이에 분열이 커지는 것에 대해 응답하기 시작한다. 예수는 경제에 관한 말로 접근해서, 그들이 가치 있게 여기는 일에 관해 말한다. 예수는 그들에게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에 관해 생각하기를 원했다. 예를 들어, 목자는 그의 소득의 원천인 양떼가 건강하고 안전한 것을 중요하게 여긴다; 여자는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어렵게 모은 돈을 중요하게 여긴다; 부모는 자녀들의 행복과 복지를 중요하게 여긴다. 당신의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라. 그리고 부주의하거나, 일부러 그랬거나 혹은 도둑맞았거나, 그것을 잃어버렸다고 해보자. 당신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사라졌다. 당신은 큰 타격을 받을 것이다. 당신이 계속할 수 없는 것은 없다; 당신은 할 수 있다. 사람들은 적응한다. 그러나 삶은 불완전하다. 전체의 일부가 사라졌다.
하나님은 양떼 안의 양 하나하나를 가치 있게 여기는 목자와 같고, 지갑 안에 있는 모든 은화를 세고 있는 여인과 같다. 하나님은 가정의 모든 아이들을 보물로 여긴다. 만약 하나가 사라진다면, 하나님은 찾기 시작한다. 하나님의 성품은 사랑이고, 사랑은 지칠 줄 모르고 찾는 것이다. 왜냐하면 실종된 사람은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무엇을 잃어버린 사람의 성품은 하나님의 성품과 엮여 있다. 길 잃은 양은 걱정스럽게 울 수도 있지만, 겁이 나서 울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는 대신 야생 관목 사이에서 몸을 웅크리고 누워서 포식자에게서 숨을 것이다. 양은 스스로 자신을 구할 수 없다는 것 때문에 혼자 고립되어 있는 것이 너무나 두렵다. 양은 움직일 수 없고, 그래서 목자가 양의 중량을 다 감당해서 집으로 데리고 와야 한다. 마찬가지로, 잃어버린 동전은 스스로 움직일 수 없는 물질이어서, 그 자신에게 관심을 가지도록 소리를 치거나 밝게 빛날 수 없다. 동전의 구출은 전적으로 여자의 주의력에 달려 있다.
예수는 두 아들을 가진 아버지에 관한 또 다른 비유로 이 점을 명료하게 한다(15:11-32). 둘째 아들은 그의 인생을 허비하고 그가 갈 수 있는 가장 낮은 곳으로 전락한 후, 그의 아버지에게도 돌아가기로 결심한다. 그는 용서를 비는 연습까지 했지만, 실제로 해보지는 못한다. 그의 아버지가 그보다 앞섰기 때문이다. 그의 아버지는 그가 떠난 후 계속 그가 오는지 살펴보고 있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얼마나 쉽게 훌쩍 떠나서 길을 잃어버리는지, 그리고 그들의 실수를 돌이킬 수 없어서 후회로 가득 차 있는지. 화해에 대한 어떤 가능한 희망도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왔던 길을 되돌아가거나 혹은 바로 잡을 수 없다. 예수는 하나님이 그 다음 단계라는 것을 보증한다. 가정은 이미 기다리고 있다. 사랑의 문은 열려 있다.
Joan Osbourne은 잃어버린 사람이 발견되기를 갈망하는 마음을 표현한 가사의 노래를 불렀다[Joan Osbourne, “One of Us,” 1996, from the album Relish.]: “만약 하나님이…집에 가고 싶어 하는…우리들 가운데 하나라면.”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의 투덜거리는 소리는, 죄인을 환대하는 사람 자신이 죄인이라고 암시하면서, 예수가 교제하는 친구들로 예수를 판단한다. 죄인은 사물을 다르게 볼 것이다. 예수는 잃어버리는 것과의 투쟁, 분리되는 공허, 돌아오려는 투쟁을 이해한다. 예수는 죄인들을 거부하지 않고, 오히려 잃어버린 사람들을 향하고, 그들을 위해 머물 곳을 만들고, 그들을 환영한다.
예수는 공동체의 변두리에 있는 사람들이 공동체가 온전해지기 위해서 필수적이라는 것을 이해했다. 그들이 돌아올 때가지, 공동체는 불완전하다. 비유들은 용서와 회복하려고 노력하는 환대에 관한 것이다.
이 비유들은 공동체에게 문을 열고 기뻐하라고 부른다. 이 부르심은 계속 반복된다. 죄인들과 세리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식탁에 앉을까? 기뻐하라! 웃어라! 즐거워하라! 그들은 집으로 돌아와서 지금 하나님의 현존 앞에 앉아 있다. 덤불에서 길을 잃어, 양떼에서 떨어져 나와서 헤매던 양은 이제 안전하고 건강하다! 할렐루야! 더 이상 걱정하지 말라! 바닥의 틈 사이로 떨어진 동전은 쉽게 잊히지만 복되게도 되찾았다. 우리는 마음껏 즐길 수 있다! 소망은 회복되었다.
우리의 공동체 안에서 누군가가 사라지면, 우리는 모두 영향을 받는다. 한 사람이 회복되면, 우리는 모두 그로 인해 더 좋아진다. 하나님의 가정이 그렇다.
설교적 관점
[설교적 관점은 내부자의 입장에서 비유를 접근하고 있다]
-널리 알려진 성서이야기가 때로는 설교하는 데 힘이 들 수도 있다. 잘 알려진 비유로부터 새로운 관점, 신선한 접근 그리고 연관된 메시지를 찾아내려는 요구는 늘 말씀을 성실하게 해석하려는 사람들 앞에 늘 놓여져 있다. 이 비유들에 대해 누가가 보여주는 것을 주의깊게 관찰하는 것이 이 과제에 도움이 될 수도 있다. 이 두 이야기는 예수 주변의 종교적 내부자들 (religious insiders)로부터의 비난에 대한 직접적인 응답이었다. 그들의 불만은 자신들이 목격한 급진적 환대(hospitality)에서 비롯되었다. 예수가 함께 나눈 규례를 어긴 식사가 그들의 심기를 건드렸다. 그들은 그 규례를 아주 잘 알고 있었고 경계선을 정하고 정결과 불결이라는 정결코드를 강요했던 사람들이었다.
이 비유들은 이런 당시 종교적 내부자들에게 또 우리들에게 들려주는 것이다. 우리도 하는 일의 속성상 그들과 같은 부류에 속한다. 설교자들로서 우리는 종교적 내부자들이다. 때로 이 비유는 “잃어버린 자”의 구원을 강조한다. 하지만 정작 이 비유가 회개에 이르기를 바라는 것은 “이미 찾아진 자”(already found, 내부자들)이다.
“가까이 다가오는 것에 대한 두려움”
세리들과 죄인들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1절). 이 때 두려움이 시작된다. 이들은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고 종교적 내부자들의 자리를 차지하려고 한다. 우리는 쉽게 이런 “다가옴” (nearness)으로 인해 우리의 자리가 위태롭게 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우리의 지위가 약해지고 안전이 위협받는다. 하지만 예수는 내부자들에게 예수가 찾는 이들이 이미 가까이 있다고 말한다. 그들은 네 손에 쥐고있는 동전처럼 집 안에 있다. 나사렛에서 온 우리 친구 [예수]는 그들이 이미 가까이 있으며, 예수가 우리와 음식을 함께 나누듯 그들과도 함께 먹으니 두려워하지 말라고 한다. 빵을 떼어 나누는 친밀함은 이런 가까움을 보여주는 것이다.
종교적 내부자들은 여전히 음식을 나눔에 있어 쉽게 두려움을 느낄 수 있다. 많은 교회들은 성찬에 제약을 두고 있다. 사실 어느 교회에서는 무지개 띠를 차고있는 사람 곧 LGBT(Lesbian, Gay, Bisexual, Transgender)와의 연대를 드러내는 사람들에게는 성찬 시행을 거부한다. 그런 교회에서 성찬을 받은 한 사람이 자기가 받은 빵을 성찬이 거부된 사람들과 나누었다. 그러자 종교적 내부자들인 교회 직원들이 경찰을 불렀다. (내부자들인) 우리는 이럴 때 어떻게 대응하여야 할까?
“환영함과(welcoming) 구해냄의 (saving) 차이”
이 각각의 비유의 핵심은 찾고 발견하는 것에 있다는 것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다. 하지만 무엇을 찾는다는 것인가? 각각의 비유가 무언가 특별한 것을 찾고있다: 방황하는 양, 잃어버린 동전. 방황하는 양을 찾은 즐거움은 멀리서 방황했던 사람들이나 돌봄을 받지 못했다고 (심지어 하나님으로부터도) 느끼는 사람들에게 안정을 주는 메시지가 될 수 있다. 이 비유는 지속적으로 사랑하는 하나님의 손길을 설교할 때 완벽하게 사용할 수 있다: 가시덤불 속에서 당신을 끌어내기 위하여 먼 길을 떠나시는 하나님, 당신이 스스로 팠던 그 구덩이에서 당신을 건져내기 위하여 그 구멍으로 기어들어가서 결국 당신을 들어올리신 하나님. 이 일은 구하기 위해 찾는 것인가 환영하기 위해 찾는 것인가? “구하는 것”(saving)과 “환영”(welcome)은 다르다.
종교적 내부자들은 종종 자신들이 생각할 때 잃어버렸던 자들을[외부자] 환영하는 일보다는 잃어버린 자를[내부자] 구하는데 편안함을 느낀다. 구하는 일은 개인적인 것에 초점을 두지만 환영함은 공동체에 초점을 둔다.
“부지런히 찾고 그 찾은 것을 기뻐함”
찾는 자들에게 요청되는 부지런함에 강조점을 둘 수도 있다: 몇 킬로미터를 더 가는 부지런함, 어두운 곳으로 가서 깨끗이 청소하는 부지런함 그리고 인간됨, 가치, 올바른 것에 대한 옛 생각을 벗어버리는 부지런함등. 이런 종류의 찾음과 깨끗이 청소하는 일은 진실로 위대한 회개라고 볼 수 있는데 그 이유는 진정한 회개는 잘못된 것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을 바꾸는 것이기 때문이다. 외부에 남겨져 있던 사람들에 관한 사려깊은 연구는 누가 환영을 받고 누가 거부되는가에 대한 중대한 패러다임변화를 만들어 낼 것이다. 이러한 부지런함과 노력은 기쁘게 진행되어야지 불평을 하면서 해서는 안된다. 이 이야기는 모든 면에서 기쁨으로 점철되어있다 예수께서 이 이야기를 말할 때 그는 분명히 기쁨에 차서 전달했을 것이고 그가 청중들을 불러 모았을 때도 기뻐서 했을 것이다. 예수는 단지 기쁨을 강조했을 뿐만 아니라 듣는 모든 이가 함께 진정으로 기쁨을 표현하기를 기대하였다.
“누가 죄인인가?”
누가 죄인인가? 이 비유들의 끝 마지막 구절에서 최종적 문제를 제기한다. 이 이야기에서 죄인들은 회개가 필요한 사람들, 그들의 마음이 변화되어야 할 사람들이다. 하나님께서는 종교적 내부자들 (우리들 모두)이 내부자와 외부자에 관한 그 마음을 바꿀 때 기뻐하신다. 그 기뻐하심은 공동체가 온전해져서 “하나”와 “아흔 아홉”이라는 그러한 구분이 없어졌을 때 일어나게 된다. 진정한 회개는 우리 마음이 변화되어서 모두가 안에 있고 “잃어버린 자”가 없을 때에야 비로소 온전한 공동체가 된다는 것을 알게 될 때 일어난다.
-현명한 교사인 예수는 하나님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까지도 바꾸려고 하였다. 그는 목자를 통하여 남성으로서의 하나님 이미지를, 집을 청소하는 여성을 통하여 여성으로서의 하나님 이미지를 보여주었다. 두가지 다른 비유를 이용하여 그는 어느 하나도 버려지지 않도록 심지어는 여성 하나님 이미지도 그렇게 되지 않도록 하고 있다.
우리들 자신도 스토리 텔러로서 이 비유를 잘 해석하여 사람들이 그 안으로 들어오도록 하기 위해 그 미묘한 차이점에 관심을 똑같이 기울여야 한다. 여전히 몇 가지 진리들은 감추어져있을 것이고 사려깊은 탐구를 통하여만 발견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