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실은 그 사람 사랑했나봐.
그렇게 중얼거려 놓고서, 나는 삼일 밤낮을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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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7942년 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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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너 답지 않아.-
그 말을 들었을 때부터 였나보다. 입 안에 비닐 조각을 문 듯 바딱바딱거리는 이물감
이 느껴진 것은. 나는 그 말을 찍어보낸 친구의 아이디를 주문 외우듯이 웅얼대다가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내 방.
여긴 내 방이다. 나의 세계.
저장.
나는 화상 구석진 곳의 버튼을 클릭하고는 영상을 접어 꺼 버렸다.
투명한 막처럼 반짝이던 영상 화면이 티익 소리도 없이 내 손목 쪽으로 사라졌다.
손목에 차고있는 빨강색 컴퓨터를 볼 때마다 나는 묘한 느낌에 작은 가슴을 발딱거렸
다. 컴퓨터 영상이 진공청소기 속으로 쏠려드는 먼지처럼 산산이 전자 부호로 일그러
지며 손목 쪽으로 사라직 적이면, 무엇인가를 잊어버리는 기분에 빠지곤 했던 것이다.
잊는다는 것은 좋다. 완전히 잊어버리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가 된다. 백지에 썼던
희미한 연필 자국 같이, 완전히 잊어버리면 다시 백지로 돌아갈 수 있다.
가슴이 아픈 것은..
너무 힘들여 쓴 글씨가 지우개질 아래에 오목한 흔적으로 남듯, 완전히 잊혀지지 않
았기 때문일 뿐이다.
흔적.
감정상의 흔적은 상처라는 이름으로 일기장 파일을 차지하기도 했다.
-그 사람을 일기장에서 지워버려.-
친구가 그렇게 이야기했었다.
아직 그러고 싶지 않아.
채팅방의 커서가 다음 말을 재촉하며 반짝거렸다.
아직 그러고 싶지 않아. 아직 그러고 싶지 않아. 아직 그러고 싶지 않아. 아직 그러
고 싶지 않아. 아직.......
나는 엔터 키 위에 지그시 올린 손가락을 떼지 않았다. 같은 문장이 수없이 화면 위
에 찍히고 커서가 쉴새 없이 반짝반짝반짝 거리며 내 그 반복된 문장을 넙죽 받아 삼
켰다. 친구가 무어라 한 것도 같다. 그러나 알 수 없다. 아직 그러고 싶지 않아, 가
물결이 되어 화면을 열 댓번이나 핥고 지나갔기 때문에 친구의 짧은 목소리 따위는 내
눈에 뜨이기도 전에 화면 위로 밀려나 버렸다.
#FRIENDIA(현숙)님이 퇴장하셨습니다!!#
아직 그러고 싶지 않아
아직 그러고 싶지 않아
아직 그러고 싶지 않아
아직 그러고 싶지 않아
나는 자판 위에 엎드렸다. 화면은 계속 번뜩이며 같은 문장을 쏟아놓고 있었다. 괜찮
아, 이건 저장방이 아니니까 괜찮아 나 혼자 있을 뿐이니까 괜찮아 내가 나와 버리면
흔적도 없이 지워지는 거야 흔적도 없이 흔적도 없이 흔적도 없이 흔적도..
-그 사람을 일기장에서 지워버려.-
아직 그러고 싶지 않아
아직 그러고 싶지 않아
아직............
한참을 그런 자세로 엎드려 있었다. 고개를 문득 들었을 때는 아마도 아침. 엉거주춤
눈 가를 비비는데 손에 쥐가 났는지 어깨까지 파르르 했다. 왼 손을 움작대며 내 흐트
러진 머리를 정리하는 동안 내 오른 손은 밤새도록 누르고 있던 엔터 키에서 벗어나
컴퓨터의 전원을 향했다.
그날 나는 그 컴퓨터를 버렸다.
2.
[판타스틱 어드벤쳐]
누군가의 상상 속으로 들어가고 싶은 그대에게...
나는 너절해진 광고 문안을 입 속에서 뇌까렸다. 거리를 '걷는' 것은 정말로 오래간
만이다. '그'는. '에스'는 걷는 것을 싫어 했으니까. 그래서 언제나 캡슐 자동차 따위
의 속에서만 이야기를 나누고 손을 보듬고 살아 있음을 표시하며 웃어대곤 했으니까.
그는 마치 다리가 없는 사람만 같았지, 걷는 것은 짐승같다는 느낌이 들곤 해. 그랬으
니까....
거리를 걷다가, 만났는데.
.....걷다가.
"어서 오십시오."
매장은 넓다. 하지만 쇼핑 같은걸 즐길 기분은 별로 없어서 눈에 뜨이는 대로 장난감
모래시계를 하나 사서 걸음을 돌렸다.
모래시계.
엉뚱하기도 하지.
-너답지 않아.-
스스로에게 중얼댄다.
그리고는 서슴없이 캡슐 택시를 불러세워 [어드벤쳐 웍스] 부탁해요, 한다. 등을 푹
신한 쿠션이 박힌 소파에 기대이자 택시가 안마기같이 덜컹대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는 잠이 든 것처럼 눈을 감았다.
[판타스틱 어드벤쳐]
탑승객들의 상상을 조합해 모든 상상에 자동 반응하여 색다른 신세계를 창조해내는
새로운 형식의 가상현실 체험기로서, 탑승객들의........
광고의 끄트머리가 화면 끄트머리에서 깔짝댄다. 나는 버튼을 대충 눌러 끄며 대기실
소파에서 몸을 일으켜 주위를 둘러보았다. 긴 머리의 여자 하나가 지친 표정으로 내
곁을 스쳐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저여자도 판타스틱 어드벤쳐를 탔을까. 내가 지금부터 탈 상상 속에는 저 여자의 것
도 섞여 있을까.
"주 아신 손님, 79번 입니다."
열쇠.
나는 디스켓을 닮은 길다란 것을 내려다 보았다.
-너답지 않아.-
-그 사람을 일기장에서 지워.-
취익....
[판타스틱 어드벤쳐]의 문이 닫힌다. 나는 몽롱한 기운에 빠져든다. 눈을 감는다. 마
치...
-아직 잊고 싶지 않아, 그러고 싶지 않아-
.....그 날처럼.
3.
온통 연둣빛에 둘러싸인 언덕빼기. 숨을 쉬는 것조차 죄를 짓는 것 같아서 나는 잠시
고민에 빠져 있었다. 오른 쪽을 바라보니 저만치 산등성이 너머에 빽빽한 숲이 보이고
해가 그쪽 나무 꼭대기에 아름아름 걸려 있는 것이 보였다. 햇빛 끝이 송곳처럼, 짙은
나무 곁을 비껴 바닥 쪽으로 화살표를 그리고 있었다.
숲의 일족에 관한 이상한 소문이 있었다.
뾰족한 귀에 아름다운 금발을 가진 숲의 아이 하나가 도망쳐 버렸다고. 그래서 숲은
화가 나서 그 아이를 죽여달라고 부탁했다고.
인간의 마을 지저분한 펍에서 왁자하니 입방아 찧으며 회자되던 소문일 뿐이다. 그러
나 믿을만한 이야기. 믿어도 돼, 이번에 여관에 가득찬 그 사람들 죄 길드에서 나온
이들이라구, 현상금 사냥꾼 들이지, 모험가 들이야, 그들에게 나뭇가지 하나는 아무것
도 아니거든, 그들이 숲의 청원을 들어 숲의 아이를 없애러 온거야, 그러니 그건 진
짜, 진짜란 말이지.
수염이 지저분한 사내가 맥주 거품이 묻은 수염으로 호기롭게 외쳐댔다.
숲의 어머니가 이야기했다고 한다.
그 괘씸한 아이, 숲의 일부분인 주제에 돌아오기를 거부하는 그 아이를 잡아 달라고.
잡아서 죽여 없애 버리라고, 이야기 했다고 한다.
"왜 돌아가고 싶지 않을까?"
나는 내 스스로의 목소리에 놀라 입가에 손을 가져다 댔다.
지금 '나'는 '내'가 아니다. 거울에 비추면 뽀얀 얼굴 위로 보석같이 도드라져 보이
는 푸른 코발트의 눈동자 홍시색에 가까운 분홍빛 입술. 사슴처럼 긴 목의 곁으로 바
싹 쓸리운 채 가슴팍을 가리키는 웨이브 진 갈색의 머리칼이 햇빛 그슬린 갈대들처럼
반짝이고 있다.
낯선 나. 낯선 얼굴. 낯선 기억의 간직. 낯선 목소리의 울림.
전혀 다른 존재를 스스로라 칭하는 일의 껄끄러움을 비웃기 시작한다. 한참 웃고 나
면 눈가에 견디다 못해 기어나온 눈물 몇방울이 닦아 달라고 송알거리다 주르륵 뺨을
타고 기어 흘러내린다.
"아가씨."
나직한 목소리로 손나팔을 만드는 검은 머리의 남자. 나는 몸을 일으켜 그를 따라 펍
을 나섰다.
"주목 받는 것은 아무튼 곤란합니다. 잘 아시면서 계속 그러시다뇨, 아가씨."
몇번인가 같은 말을 반복하는 그. 나는 그의 뒤를 따라 뒷길로 비잉 에둘러 집으로
향한다. 그리고 숲에서. 우습게도 '숲' 속에서 숲의 어머니 태초의 나무가 애타게 찾
고 있는 숲의 아이를 만났다.
우습다.
4.
'에스'의 꿈을 꾸고 나서 아침 나절 내내 이마를 짚고 있었다. 메슥메슥한 게 울컥해
서, 시종 아이도 거느리지 않고 집을 빠져나왔다. 뒷골목 따위를 될대로 되라는 식으
로 걸어다니다가 역시 될대로 되라는 식으로 아무데나 주저앉았다.
"이런 데 있으면 위험해."
"그렇게 이야기하는 당신이야말로 위험한 사람 아니야?"
내 말에, 손을 내밀었던 그가 껄껄 웃었다. 갑자기 탄산음료를 마신 몇분 후 처럼 톡
쏘는게 콧 속을 후딱 지나가는 바람에 눈물이 찔끔 했다.
눈물.
지조도 뭣도 없는 녀석.
웃어도. 속이 아파도. 신지오는 화가 나도 흐르는 한없는 녀석.
'그'가 헤어지자는 말을 남겼을 때 Del 키를 누르며 눈물이 흐르는 것을 느꼈던 것도
같다. Snail Mail 이라면 발기발기 찢으며 분이라도 풀을걸 말야.
[머릿 속에서 되는대로 조합했어.]
-뭘?-
[그의 이별 편지 말야..
맘대로 조합해서 직접 써서 출력해선, 마구 찢었어.]
-...바보. 바보 같이.-
[울고 싶었는걸, 실컷, 울고 싶었는걸. 눈물에 뭣이라도 같이 섞여 나와줄 줄로만
알았는걸. 추억이든 감정이든 내 하잘것 없는 기억이라도 같이...]
-..... 바보...같...이.....-
"남자에게 버림받았어? 왜 그리도 초탈한 표정이야?"
"버림받아야 초탈해 진다는 뜻 같군요, 그건."
"퉁명스럽군."
"초면부터 그런 소리를 하니까 이쪽도 친절할 마음 따위 안생기는 거지요."
불퉁거리며 그를 빤히 쏘아보았다. 사람 좋은 미소를 걸고 있는, 웃는 눈이 어울리는
남자. 바다색 머리칼 녹색의 눈. 나무색의, 잔디색의, 에메랄드 그린의 깊어보이는 눈.
"이런데 있으면 헤퍼 보이니까."
"..그게 남의 손을 함부로 잡아끄는 이유로 충분하다고 보시는 건가요?"
"허어, 딸려오고 있는 것은 그쪽이지."
"꼭 제가 댁에게 관심있는 거라는 소리 같네요?"
"그럼 아니라는 말인가, 아가씨?"
"뭐, 뭐예요? 무례한 사람!"
나는 손을 앙칼지게 탁 뿌리쳤다. 걸음이 빠르기도 하지, 어느새 할딱할딱 숨이 턱에
와 붙었다. 그는 땀에 젖은 내 머리칼을 장난스레 바라보고 다시 웃는다. 나는 내 몰
골이 퍽으나 우스운가 싶어 어쩐지 창피해 진다.
'내가 아니잖아, 아무려면 어때? 응?'
반항기 어린 꼬맹이 같이 그런 생각이 들어 두 눈을 반짝 치켜 들었다. 그가 문득 이
야기했다.
"다른 세계의 아가씨."
".....에?"
나는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거, 거짓말.
"너같은 여자애들이 가끔 여기로 와. 너에겐 '꿈'일 뿐이겠지만 나에겐 현실이란 말
이지."
거........짓말......
'판타스틱 어드벤쳐'는 프로그램이야. 모든 사용자의 상상들을 모았다가 사용자에 따
라 다르게 반응하는 색다른 가상현실. 사람이 바뀌면 모든게 새로 부팅돼. 캐릭터도
배경도. 그러니까....
"넌 뭘 찾아 여기에 왔지? 뭘 피해서?"
..'그'의 이야긴 지금껏 이곳을 거쳐갔던 누군가의 '새로운' 상상력의 하나.
그 뿐이야.
"그렇게 둥그런 눈을 할 필욘 없어, 아가씨.
그래, 여기 아가씨의 이름은 무엇이던가?"
나는 언젠가 단어 맞추기 게임의 마지막 단계를 지나던 때처럼 미간을 좁히고 골몰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타인'의 입술에서 '타인'의 목소리로 울리는 '내' 목소리를
천천히 즐기며 입을 열었다.
"에...리...카"
마지막 말이 끝났을 때 저쪽 골목에서부터 이 쪽으로 뛰어오는 사람이 보였다.
금발, 초목을 닮은 초록색 눈.
"저쪽으로 갈까."
나는 숲의 아이가 헐떡이면서 내 앞을 가로지르는 것을 바라보며 그를 따라갔다. 우
격다짐하듯 악을 쓰며 숲의 아이를 뒤쫓는 한 떼의 사람들.
햇살이 눈부시다. 나무들은 햇살이 아프지 않을까? 사실은 너무 아파서 나뭇잎들을
기르는 게 아닐까. 너무 아파서 그래서 파아랗게 멍이 들어서 아스스 떨고만 있는 건
아닐까.
-그를 일기장에서 지워
...그러면 아프지 않게 될거야 수면제를 먹으며 잠들지 않아도 돼.
그의 꿈을 꾸지도 않게 될거야...-
['에스'에게 편지를 썼어.]
-...그를 잊고 싶지 않은 거야? 그의 기억이 좋아?-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잊고 싶어 잊어버리고 싶어 그런데...]
-그런데? 억울하거나 분하거나 하지는 않니? 괴롭지 않니? 기억이란 괴로운 것,
아프지 않아? '에스'는 벌써 너를 잊었을거야 잊는 것은 쉬워 너무나 쉬워
칠천구백사십이년의 서울에서 사람을 잊는 것은 약 한 알의 가격이면 되는걸.-
[...에스에게.. 편지를 썼다가 지워버렸어..]
-그를 지워. 그만, 됐어, 잊어... 잊어... 잊어버려...-
잊고 싶지 않아 아직은 잊고 싶지 않아 아직은 잊고 싶지 않아
"그 사람하고 길에서 만났어. 다들 특이하다고 말해 주었어요. 햇볕을 같이 받았어,
함께 한 자리에 서 있었다는 얘기지, 정말 특이해 정말 신기해, 그렇게..."
나는 드문드문 중얼댔다. 푸른 머리의, 조금 아까 나를 만난 상상이 만든 그 사람은
여전히 사람 좋은 웃음만 짓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아카라.
아.카.라.
옛날 이곳을 다녀간 메이라는 소녀가 지어준 이름이라고 했다.
메.이.
낯이 선 이름이 두 개. 나는 가만히 두 개의 이름을 읊조렸다.
"에스는 다리가 없는 것 같았죠. 걷는 것을 싫어했으니까..."
아카라는 느린 내 걸음에 맞추어 숲을 걸었다.
[왜 헤어져야만 했을까? 기억이 나지를 않아.]
-지웠을거야. 이별의 말은 아프니까 지워버린 걸거야.-
[그럴리가.. 그럴리가 없어.. 왜 그 부분의 기억만 없을까?]
-많은 연인들이 괴로움을 못이겨 이별을 지워.-
"이름이 뭐야?"
"..이......름...?"
숲의 아이는 이질감이 느껴지는지 내 말을 따라했다. 그러다가 고개를 갸웃 숙이며
싱긋이 웃었다.
"은..림. 은빛의 숲."
"그건 숲의 어머니의 이름?"
"응! 내가 속한, 내가 떠나서는 안되었던 나무의 이름. 은빛의 숲. 달이 걸릴 수 있는, 달이 걸릴
때면 노랫소리처럼 빛이 산산이 흩어지는 나무의 이름."
나는 아이의 눈에 눈을 맞추었다.
"그럼, '너'의 이름은 뭐니?"
갑자기 숲의 아이는 슬픈 표정을 지었다.
[다른 모습의 내가 되고 싶어요.]
[어떤 모습을 원해?]
[혼자서도 강인한, 기억 따위에 휘청이지 않는 나, 나약하지 않은 나.]
아카라를 똑바로 바라보았을 때 그의 눈이 숲의 아이를 닮은 것에 놀랐다.
[그냥, 그냥 달라지고 싶은 거겠죠. 바뀌고 싶은 거겠죠.
기억하고 싶지 않은..거겠죠..?
다른 모습의 나, 기억하고 있지 않은 내가 나와는 다른 노래를 부르죠.
언제건 떨어져 나가 자유롭게 춤을 추려고 하죠...]
네 이름이 뭐지? 숲의 아이.
"난 이름이 없어요....."
한 개의 나뭇가지, 나뭇가지일 뿐예요...
5.
이 곳에서의 '나'는 친절하고 활발하다. 책임져야 할 '나'의 모습이 흐릿해서, 천천
히 천천히 마음에 드는 기억들만 주워 모아 그려나가면 된다. 착하고 착한, 친절한 에
리카 아가씨...로.
'태초의 어머니' 은림을 보러 달빛 밤에 나들이를 나섰다.
숲의 아이 말대로 덩그런 달이 나무 꼭대기에 매달려 자맥질을 뛰고 있었다. 오르락
내리락 은빛 가루들이 빛이 되어 산산이 흩어지는데 슬픈 사람이 은림의 앞에서 울면
슬픔이 별이 되어 사라진다고 했다.
"정말? 어떻게 슬픔이 사라져요? 기억이 그대론데..."
"이곳에는 에리카의 원래 세계같이 기억 삭제 장치 따윈 없으니까, 별로 지어내는 것
이 최선인걸."
아카라가 하늘을 올려다 보며 답했다. 별이 많다. 별이 아주 많다. 쏟아질 것 같아
위태위태 겁이 난다.
"이따금 다시 쏟아지기도 하나요?"
"응."
"..그럼 이곳에서는 가끔씩은 '다시' 슬퍼지겠군요?"
아카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유도 없이 슬퍼지려는데 별 하나가 하늘을 질러 저편
끝으로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산 너머로.
"이곳에선 슬픔이 화려한가요?"
"어디에서건 아름다운 건 아니지..슬픔은."
나는 하늘을 가리켰다. 손등을 타고 팔목을 타고 흘러내리는 것은 달빛일까 별빛일까
아니면 어둠의 그림자로서의 빛 같은 것일까.
"하지만. 빛이 나고 있는데."
아카라가 천천히 사탕을 아깝게 내보이는 꼬마처럼 작게 이야기했다.
"별은. 멀리서. 볼. 때에만. 빛이. 나."
하늘엔 별이 수도 없이 끝도 없이 들판처럼 펼쳐져 있다.
되돌아 오는 길, 숲의 아이가 숨어든 벌판 위로 인간들이 켜둔 등불이 날벌레들을 모
으고 있었다.
벌레들은 빛을 탐내다가 죽는다.
벌레들은 인간들의 슬픔이 아름다워 보여서 탐을 내다가...
슬픔의 아픔을 견디지 못해 타죽는다.
새벽녘에 마지막 별 하나마저 태양에 녹아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 아카라가 내민 채
집그물 속에서 여린 날개를 옴작거리는 반딧불이들처럼 별은 여리고 미약하다.
"빛이 나는 것은.. 쉽게 상처입는 것들일까. 그런 작은 것들 뿐일까..?"
.......사실 별은 가까이에 가 보면 아주아주 커다란 돌덩이.
6.
아카라와 함께 산에 올랐다. 바위산은 우락부락한 사내 같아보였는데 정작 등성이를
타 보니 새악시처럼 뺨이 붉었다. 도도록하니 무늬 새긴 청자병처럼 싸안은 숲이, 정
상에서 바라보니 신선한 바람 맛이다. 해수의 짭쪼름한 짠맛 대신 바람 결결이 나뭇
잎... 쓴 맛.
아주 어릴 땐데, 나뭇잎을 씹었었어.
쓰더라.
초록빛 진물이 눈물같이 쓰더라.
햇볕이 내려쬐는데...
혓바닥을 늘어뜨리고 개처럼 헐떡거리며 집으로 뛰어왔어...
'에스'와 나란히 조각 이불을 덮고 누워 있었다. 그는 천장을 향해 눈을 부릅뜨고 있
다가 그러다가...
"사.랑.해."
틀림없이 나는 그렇게 이야기했다. 연극 대사같이 어색한 말이 입술을 비집고 비실비
실 걸어 나와 아무렇게나 쓰러졌다.
[바보같군.]
그는 몸을 일으켜 널부러져 있던 옷을 천천히 꿰어 입었다. 나는 말을 실수한 사람같
이 고개를 깊이 파묻으며 그의 허리띠가 제자리를 찾아 철커덕거리는 것을 보았다. 창
밖으로 내닫는 빗소리에 억지로 귀를 가져갔다. 나뭇잎을 때리는 소리 같은것을 들었
어야 했는지도 몰라, 빗물들이 몰려다니며 울듯이 웃듯이 마구 투닥거리는 소리. 그런
데 나는...
그의 검은 양말이 그의 흰 발목을 감싸는 것을 고개를 숙인 채로 들.었.다.
[네가 그런 말을 할 줄 몰랐는데. 하도 읊어대서 이젠 약효도 없는 천박해진 말.]
그의 목소리가 멀어지는 것을 본.다. 문닫히는 소리가 찰캉, 하고 보.인.다. 나의 눈
물이 들.린.다. 너무 멀어, 하고 웅얼댄 것은 아무래도 나겠지.
..........나였을테지.
"무슨 생각해?"
아카라의 녹색 눈이 미묘하게 초목을 빗겨 있었다. 나는 구름이 몽실대는 하늘 저쪽
이 평야로 비끌어지는 것을 몸을 떨며 바라보다가 선뜩 고개를 저었다.
날렵한 하늘. 날렵한 산. 날렵한 강.
다들 너무 빨라.
금새 잠이 들면 봄.여름.가을.그리고는 겨울. 별이 태어나 한없이 깊은 바다로 뛰어
들고 그리고는 다시 봄.
"숲의 아이다."
숲의 아이의 녹색 눈을 보고 있었다.
"이쪽으로 숨어."
나는 몸을 비켜 숲의 아이 앞에 길을 내 주었다. 길게 어깨에 두른 벨벳 망토를 풀잎
더미 위로 슬쩍 덮었다. 내 갈색 머리털이 그 반동으로 움직거렸다.
"에리카 아씨. 뭔가 지나는 걸 보셨습니까요?"
"으응? 무얼? 예쁘장한 여자앨 말하는 거야?"
"네에! 금발을 기른 하얀 여자애요!"
구릿빛 주먹을 들어 보이며 머리띠를 한 술집 사내가 소리쳐 답했다. 제법 칼을 든
채 슴펑슴펑 털 기른 사내들이 내가 손가락질 하는 길로 내달았다. 먼지가 일었다.
"이제, 나와도 돼."
나는 망토 끝을 걷으며 상냥한 목소리를 냈다. 겁에 질린 표정으로 슬금 눈치를 살피
는 눈부신 숲의 아이. 나는 그녀를 향해 환하게 웃었다.
".......왜 돌아가지 않아?"
아이의 금발이 바람을 먹고 풍성하게 흩날렸다. 올올이 셀 수 있을 것 같이 반짝반짝
거리는 황금의 현. 나는 나도 모르게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칼을 쓸어볼 뻔 했다. 한
줌 가득 쥐면 보드라운 느낌이 슬픔처럼 감겨들 것 같았다. 고개를 묻고 있으면 잠처
럼 눈물이 몰려올테지 싶어서.
그러나 그러기 전에 숲의 아이가 먼저 말을 꺼냈다. 다행이다. 착하고 밝고 친절한
에리카 아가씨로 남을수 있어서. 아이가 말을 하지 않았다면, 그랬다면 정말로 난 그
녀의 머리칼에 뺨을 묻고 하염없이 울었을테니까. '에스'를 부르는 바보같은 '아신'으
로 돌아갔을 테니까.
.....다행이다.
"돌아가지 않아. 잊게 되는걸. 잊어버리게 되는 걸."
아이는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간절한 눈빛이 일그러져 있었다.
"나, 나아.. 돌아가고 싶지 않아, 싫어. 나 계속 이렇게 이곳에 있을 수 있게 해 줘,
응? 나 돌아가면.. 은림으로 돌아가면.. 그러면 다시 나뭇가지가 되는걸? 감각도 기억
도 완전히 잃어버리고 새 것이 되어버리는 걸? 나, 나아..
.........돌아가고 싶지 않아, 나....."
나는 눈을 감아 버렸다. 격정을 타기 시작한 아이의 목소리가 울음으로 흔들거린다.
내 귓속으로 빗줄기같이 쏟아진다.
".............잊어버리는 거..... 싫어....."
7.
숲의 아이가 사람의 모습을 띄고 인간들의 도시에 내려왔을 때, 그때 무슨 일이 있었
던 걸까?
아니, 무슨 일이 '있었다고 프로그램되어' 있는 것일까?
나는 친절한 에리카 아가씨.
나는 친절하고 착한 에리카 아가씨.
나는 숲의 아이를 안아준다. 숨겨준다. 숲의 아이에게 웃어준다.
나는 친절하고 착한 에리카 아가씨.
..........'내'가 아니다.
8.
타다다다다다다다다다다...
"도망쳐! 도망쳐! 도망쳐! 도.망.쳐.도.망.쳐.도.망.쳐.!!!"
타다다다다다다다다다다...
정신없는 발길에 초목이 흔들린다.
나뭇잎 조각 길게 자란 풀들이 바람에 찢겨진다.
"도망가! 빨리가! 멀리 멀리 멀리 가!"
내 애타는 목소리에 밀려 숲의 아이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뛴다. 하지만 가슴이 바짝
바짝 탄다. 잡힐거야. 잡히게 돼. 잡히면 죽게 돼.
"숲으로! 돌아가! 숲으로 돌아가! 제발! 제발 돌아가!"
........그러면 살 수 있어. 아프지 않게 돼.
- 그 사람을 일기장에서 지워...
그러면 아프지 않게 돼....... -
흠칫.
나는 눈을 크게 뜬다. 크게 도리질을 친다.
나는 친절하고 착한 에리카 아가씨. 나는 친절하고 착한 에리카 아가씨. 나는..
콰악-
"꺄아아아아아아"
피가 솟는다. 한 무더기의 사람들이 엎어지고 메쳐지고 겹겹이 쓰러지고 투닥투닥 먼
지가 일고 화악.. 칼의 은빛 달무리가 핏자국으로 녹이 슨다.
"-숲으로! 숲으로 돌아가!! 은림으로 돌아가! 나뭇가지로 돌아가 버려!
잊어 잊어 잊어 잊어 잊어 잊어 잊어버려! 잊.어.버.려!"
나는 그렁그렁 소리친다.
나는 눈물 그렁그렁 소리친다.
나는 눈물 그렁그렁 악을 쓰며 뛰어간다.
나는 눈물 그렁그렁 악을 쓰며 뛰어간다.
나는 눈물 그렁그렁 악을 쓰며 뛰어.....
사내들의 우왁스런 손길 사이로 피를 토하며 쓰러져가는 이슬같은 숲의 아이를 향해
서 나는 눈물 그렁그렁 악을 쓰며 뛰어간다.
장마비에 찢어진 나뭇잎. 차마 밟을 수 없는 애련한 나뭇잎.
"...싫어... 잊...고 싶..지..않아..... 잊어버..리..고.. 다...잊고...
다 잊어..버...리고.. 아무렇..지도.. 않..은.. 내가 되..는...거......
그런..거..그..런거... 나..나..나는...시..시..싫..어..싫........어..
나..싫......어어.....큭..."
피.
빨간..빠알간 색 피.
"잊어버려! 잊어! 다 잊어버려! 잊는 게
어때! 잊는 것 따위 어때! 다른 내가 되는
것 따위 상관 없잖아! 또다른 나의 모습 잠시
입고 있으면 그게 뭐 어때서 그래! 값싼 기억따위
개나 주라지! 상처 받으면서 싸안고 있는 바보같은 나
따위는 개나 줘 버리라지! 뭐가 어때서! 잊는 게 어때서!
바뀌어버리는 것 따위 대체 뭐가 어떻냔 말야! 뭐가 어때! 뭐가
어때! 대체 그딴 것 뭐가 그리 아쉬워서 그래!! 왜 상처 입으면서
뻔히 다 알고 있으면서 상처만 바라보며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거야!!"
- 그 사람을 지워 지워버려 그 사람을 일기장에서 지워버려
아프지 않게 아무것도 아프지 않게 더이상 울지 않게 지워버려
........그 사람을.... -
[ ...나, 아직, 잊고, 싶지, 않아.... ]
그거, 왜 였을까?
왜, 상처입으면서도 버리지 않았을까?
그런걸 기억하고 있는 나 자신, 왜 버릴 수 없었을까?
또다른 나, 라는 건 실은 죄 거짓말.
같은 실수 같은 상처를 다른 껍질을 쓰고 다시 반복하고 있어.
같은 방애물에 똑같이 속아서 넘어지기나 하는 걸. 계속 그런 걸.
9.
사람이란 그래, 그런거야.
[ 아직 잊고 싶지 않아. ]
- 이제 .. 엔터키에서 손을 떼. 컴퓨터를 버려. -
[아직..아직..아직.. 잊고 싶지 않아.]
.....................................
[또다른 나가 되고 싶어.]
.....................................
[나약하지 않은 나 당당한 나 외로움 따위 웃어버리는 나 다른 내가 되고
싶어 다른 나로 만들어 줘 만들어 지고 싶어 달라지고 싶어 그저 껍질만
바뀌어 또 상처입고 내버려져도 그래도 좋아 상관하지 않아 상처입어도 돼
스스로에게 그냥 잠시잠깐 거짓말 할 수 있으면 그거면 돼 그걸로 좋아...]
.....................................
[.아.직.잊.고.싶.지.않.아.]
10.
모래 시계야. 아카라에게 줄게. 가지고 있어요.
그가 웃었다.
고마워, 예쁜 모래 시계. 고마워.
그렇게 그가 웃었다.
.....................................
금빛 모래들이 열을 지어 쏟아진다. 가느다란 모래 시계의 목을 지나 사막같은 병 속
으로 산산이 산산이 쏟아진다.
뒤집고 뒤집고 뒤집을 수 있는 모래시계.
항상 똑같은 모습일거야. 뒤집으면서 한 번씩 스스로에게 거짓말을 해.
자, 또다른 나야. 다른 모습의 나야. 그렇게 자신을 속여 계속 속여나가 실은
.......아 무 것 도 아 무 것 도 아 무 것 도 아 무 것 도.......
달라진 것이 없이 그저 똑같더라도
11.
"..죽는게..죽는게 나아! 잊고 싶지 않단말야! 아무것도 잊고 싶지 않아!
진심이었으니까! 정말로 진심이었으니까!
진심으로 진심으로 진심으로 진심으로 사랑했으니까! 좋아했으니까!
...그러니..까..나..나아.. 절..대로..절대....로...
.....잊지 않..을..거야....
아무렇지도..안..게....된다..니.. 그런..거...싫어....싫어...싫어..."
숲의 아이의 입가에 붉은 피. 불타오르는 불꽃같은 붉고 붉은 산유수 색의 피.
핏방울이 튄다. 풀잎 새로 떨어져내린다. 무거운 이슬을 맞은 듯 풀잎이 파르르르 떤
다. 눈물 흘리듯 흘러내려 땅 속으로 스민다. 그늘이 지고 돌들의 빛이 붉게 바랜다.
숲의 아이는 바스라져 간다. 나는....
안돼 안돼 안돼 안돼 안돼 안돼 죽지마 죽이지마 죽으면 안돼 죽지마 죽이지 마
안돼 죽으면 정말로 절대로 안돼 죽이면 안돼 절대로 절대로 안돼 죽지마 죽이지
말아줘 정말로 죽지 말아줘 죽는 것 나는 싫어 제발 제발 제발 죽지마 죽이지마
죽으면 안돼 싫어 싫어 죽지마 죽이지마 죽으면 안돼 죽지 말아줘 죽는 것 싫어
그리고는 팽개쳐 지듯이 정신을 잃는다. 아카라의 모습을 얼핏 본 것도 같다.
그가 뛰어와 나를 안는다.
"..........죽었어. 어떡해?"
나는 그에게 답을 구한다.
12.
[화가 났어? 내가 싫어진거야? 그런거야?
사랑..하면 안되는 거였어? 그런 거였어? 그래? 응? 그런거냐고!]
나는 화상 전화기를 안고 절규하듯 외치고 있었다.
SOUND ONLY
하얀 불이 화면에 껌벅이고 있었다.
[...아니야.]
[나아.. '에스'를...]
[아냐. 아니야. 화가 난 게 아냐.]
[.......사랑해..정말로.]
잡음 한 점 섞이지 않은 전화 수화기가 공허를 소리로 지어 귓가에 속삭인다.
텅 빈 소리. 침묵의 소리. 터져버릴 것 같은 무거운 그 소리를 이겨보려고 나는 한없
이 운다. 그러나 어느새 울음소리마저 잠식당해 버리고 그리고 나는 격정을 고르며 깨닫
는다. 이 공허함이 '에스'의 나를 사랑하는 법임을.
텅 빈 서로간을 지켜보며 우리는 상처입으며 부딪쳐 왔다. 언제까지고 이러고 있지
않으면 안돼. 계속 이렇게 비어 있는 채 불안해 하지 않으면 안돼.
...'에스'의 위로.
침묵
침묵에 위로받으며 나는 침묵을 사랑하는 법을 배운다. '에스'를 사랑하는 것처럼
침묵에 다가사 차가워지는 법을 배운다.
함께 식어버리는 법.
그리고 언젠가 함께 타오르자고, 그 언젠가가 결코 오지 않을 것임을 알면서도 서슴
없이 손가락을 거는 법을 아주 천천히 배운다.
[사랑해]
그건 누구의 목소리 였던가?
나였나 아니면 '에스' 였나?
...................................
['에스'가 죽었어.]
...기억나지 않던..거.. 그거였나...
[나빠 괴로워 아파 싫어 무서워 이런건 정말로 견딜 수가 없어 죽을 것 같아]
죽.고.싶.어.무.서.워.미.칠.것.같.아.미.쳐.버.리.고.싶.어.죽.어.버.리.고.싶.어.
- 삐익 -
십분 후.
컴퓨터 자판 위에 맥주 범벅이 되어 널부러져 있는 나를 붉은 등을 켠 캡슐이 데려
갔다. 그들은 나를 응급실로 옮기고 메스 대신 약을 들이 밀었다. 술에 곤죽이 된 나
는 붉은 시럽을 달게 받아 마시고 잠이 들었다.
- 칠천구백사십이년의 서울에서 아픔 같은건 존재하지 않아.
아파 하는 것은 자유. 그러나 어느 바보가 아파해?
약 한 알이면 돼. 그럼 기분이 좋아지지. 아무래도 해결이 되지 않으면
잊어버리는 데에 돈을 써. 망각이라는 축복. 레테의 강. 약 한 알이면 레테의
강에 몸을 적실 수 있지. 잊어버린다는 것은 인간의 축복.
이곳에서 허락되지 않는 것은 살인과 범죄와 자살 뿐이지. 그 나머지는 자유.
모든 것은 자유. 완벽한 세계. 레테의 강이 흐르는 완벽한 나라야. -
죽고 싶다고 글자를 박았을 때 [현숙]은 캡슐을 불러 내 기억 속에서 '에스'의 죽음
을 지웠다. 나는 반쯤 줄어든 아픔을 견디며 으스스 방 구석에 쳐박혔다.
'에스'와 왜 헤어져야 했더라? 으응.. 기억이 나질 않아.
[현숙]아 너는 아니? 나 왜 '에스'와 헤어졌지? 왜지?
그의 이별 편지도 기억이 나지를 않아. 분명 울었는데. Del 키를 누르며 울었는데.
멋대로 만들어 프린트 해서는 찢으며 울었는데. 이상해 그 모든 행위들 너머가 너무
나 희미하고..그냥 달 한 덩이 져버린 후의 하늘 같이 훤해서.. 그래서...
- 지웠을거야 -
현숙은 천연덕스럽게 이야기하고 있지만 나는.......
위로받지 못하고 있었다.
13.
숲의 아이의 죽음때문에 기억이 나버린 '에스'의 죽음은 망치로 얻어맞은 것만 같아 정수리가
아팠다. 가슴팍에 찢어진 상처가 있을 것만 같다. 구멍이라도 뚫렸나 해서 더 듬어보니 아무것도 없이 팍팍하다.
나는 손목에 찬 빨간 컴퓨터를 켰다. 희미한 막이 시야에 켜지고 버튼들이 고르게 난
이처럼 열을 지어 있다.
일기장.
달칵 달칵
달칵
...
칠천구백사십이년 이월 칠일
[ ............ '에스'가 죽었다 ............ ]
나는 눈을 감았다.
"괜찮은..거야?"
"............................응."
아카라의 눈을 들여다보며 나는 다시 거짓말을 한다.
14.
쫓기고 있다.
하늘이 빙글 돈다. 까마귀의 선회를 닮은 불투명하고 탁한 동그라미. 나뭇잎들이 칼
락거리며 기침하듯 떨린다. 나는 긴 옷자락을 다급하게 일며 뛰어 가고 있었다.
[숲의 아이를 숨겨준 일을 들켜버렸어.]
아카라가 쪽문을 열어주며 내 등을 밀었다.
[가. 도망쳐. 내가 여기서 얼마간 시간을 벌게.]
나는 아카라를 향해 겁먹은 눈을 한다. 그는 긴장한 것인지 불편한 표정을 지으며 그
래도 억지로 미소를 짓는다.
안심해. 나는 강해. 너에게 상처를 주지 않을 만큼은 강해. 너의 추억을 아픔으로 바
꾸지 않을 만큼은 강해. 충분히 강해. 다시 만날 수 있을거야. 꼭. 그러니까 기다려.
기다리고 있어. 자, 어서 가.
[...기다..릴게...응? 알았지? 기다릴게..]
나는 뒤를 돌아보며 외친다.
뛴다.
또다른 내가 되고싶어. 거짓말을 한다고 해도 좋아. 속이는 거라도 좋아. 상관없어.
착하고 친절한 에리카 아가씨. 계속 그렇게 남아 있으면 좋겠어. 가면을 쓰고 '다른
나' 로 있고싶어. 모든 사람들에게 위선자인 채 있으면 그럼 상처 받지 않을 테니까.
아카라를 좋아하는 건 '에리카 아가씨'야. 진짜 나는 저만치에 구경이나 하고 있지.
이건 게임이야. 그는 프로그램. 연애 시뮬레이션의 주인공을 좋아해?
..그건 프로그램이야. 프로그램 속의 여자 아이의 대사야. 그 계집아이의 '진심'인
거야. 완전히 다른 '나' 인거야. 아카라가 좋아하는 것도 에리카 아가씨 인걸..
그러니까......
이걸로 좋아. 이걸로 된거야. 계속 위선자로 있으면 돼.
계속 계속 거짓말을 하고 스스로를 속여.
[눈물은.. 마취제야.. 현숙아.]
- 내가 있잖아. -
[현숙아, 넌 나의 뭐지?]
-소꿉친구잖아. 새삼스럽게 얘는... -
'현숙'이 샐쭉해서 까르르 거린다.
- 같은 여고를 나와서 같이 대학엘 갔지. 다른 친구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져
버렸지, 화상 대학이니 만날 일도 없었어. 물론 너를 피했던 건 아니야
절대로 나와 친구들 모두 너를 피.했.던.건.아.냐.만.나.고.싶.어.했.어.
그러나 모두들 바빴어...........
..하지만 너와 난 계속 만났지. 계속 만나고 계속 연락한거야.
너 잊은..거니? 주 아신? -
[ ..내 여고 동창생 목록에 '너'는 없어. 너의 이름은 없어.
'유현숙'이란 건 초등학교 때 잠시 내 짝이 되었던 하얀 아이의 이름일
뿐이야. 스스로 자기 목숨을 끊어버린 하얀 아이의 이름.
............ 네 이름이 아냐. ]
- 삐익 -
하얀 글씨가 좌르르륵 올라갔다.
- 시스템 에러로 잠시 중지합니다 -
오랜만에 보는 글자다. 저 글자가 나올까봐 조심조심 숨을 졸이며 컴퓨터를 만져 댔
었거든. 항상 그래. 어느 쪽이 주인인지도 참 알 수 없지. 숨을 죽이고 죽이고..
..........................
왜 그래? 주아신. 왜 그러는 거니?
..........................
흔한 일이야.
나는 턱을 괴고 화면을 응시한다.
바보. 채팅 프로그램으로 외로움을 삭이는 일 따위 7942년의 사람들에겐 일상일 뿐인
거야. 별거 아닌 일이잖아. 뭐니 무슨 얘길 하고 싶은 거니? 너 자신 같은건 그냥 껍
질 속에 깊숙히 들어 박혀 있으렴.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고 숨 죽여 잠을 청하듯이
까맣게.. 그냥 가만히 있으렴. 무슨 얘길 하고 싶은 거니? 무슨 얘기를 원하니? 뭘 원
하니? 무엇을 대체 무엇을 무엇 때문에 왜 원하는 거니?
.. 아주 오래전에 만들어진 필름들과 소설들과 그림들처럼 말하고 싶니?
외 로 워 어 쩐 지 자 꾸 외 로 워 져 외 로 워 사 람 이 그 리 워 그 리 워 져
.. 얼굴을 맞대지 않으니 외로워 지는 거란 건, 아주 케케묵은 얘기야.
이미 이런 것 뿐인걸.
........................
다 분 히 구 시 대 적
...............................................
그리고 컴퓨터는 철겅철겅 프로그램을 고치고 고치고 고치고 돌아가고 불이 번뜩이면
서... '프로그램'에 등록되어 있지 않은 내 말에 최대한 알맞을 것으로 계산된 '반응'
을 한다. 나는 기다린다.
...............................................
검은 화면에 별 대신 글자들이 쏟아져 박힌다.
...............................................
15.
자남빛 하늘에 별들이 멀다. 이 곳에서는 상처가 별이 된다지, 그렇게 믿어 슬픔을
삭혀 간다지. 별들은 시간이 갈수록 빛을 더해가고 그 따끔한 반짝임이 마취제 주사바
늘 같이 가슴을 찌른다지..
여기서도 다를 것이 없어. 스스로를 속여. 지금부터는 내 슬픔이 별이 된 거라고 스
스로를 속여. 계속 속여대.
나는 다리를 오무리고 나무 아래에 숨어 있었다.
열 아름은 한참 넘을 '은림'이 별들을 낳고 달을 낳고 은하수를 토해 놓았다.
나는 고개를 들어 밀림같이 빼곡한 은림의 나뭇잎들 작은 틈 사이로 이따금
아사사하게 별이 스쳐가는 것을 본다.
잠시 스치는 것들은 슬프구나
나는 숲의 아이를 생각했다. 나를 닮은 아이. 나를 닮지 않은 아이.
나는 잊었는데 그 아이는 잊고 싶지 않아서. 죽어가는 그 순간까지도 계속 되새김질
을 하고 있었지.
나는 달라지고 싶은데 나는 '또다른 나'를 찾고 싶은데 그 아이는 그깟 하잘것 없는
사랑의 기억을 잃은 아무렇지도 않은 자신은 자신이 아니라고. 그건 싫다고.
절규했지.
.....
기억따위.
................
믿을 수 있는 것도 아냐.
............................
사실은 다 조작된 것일지도 몰라.
.........................................
'에스'의 존재조차 내가 지어낸 가상 현실일지도 몰라.
..........................................................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해 보는 거다.
아니, 실은 진짜일까?
자남빛 하늘에 별들이 밝기도 하다. 은하수의 흐르지 않는 흐름이 유유하기도 하다.
뿌윰한 우윳빛이 포근하게 부풀어 목마른 사람들 오늘 밤 꿈엔 달콤하기도 하겠다. 발
목 깊이 적시고 어린애같이 젖어들어도 춥지 않겠다.
자남빛 멀고 먼 하늘에 별들은...
슬퍼도 행복하겠다.
.............................
"... 아.. 아카라!!"
울음 섞인 목소리 '에리카' 아가씨의 목소리 '내'가 아니야 아니야
"괘....괜찮..아? 괜찮아? 다쳤잖아!"
나는 피투성이가 된 그를 껴안았다. 쓰러지듯 무릎을 꺾는 그의 호흡이 거칠었다. 찌
를 듯이 높이 솟았다간 탁 쏟아붓는, 폐부에 뼈가 박힌 양 질척하게 긴 호흡.
그리고 다시 짧은 호흡.
헐떡임같은 목소리가 신음에 섞여 드문드문 들려왔다. 그는 속삭이고 싶은 걸까. 귀
를 가져가면서도 손은 그의 상처들을 매만지며 마음만 천리만리 허둥거린다.
"..아카라! 아카라 괜찮아? 나 때문에 아카라가...!"
"...주아신."
나는 흠칫, 손을 놓는다. 싸늘하게 도는 냉기가 내 속에서 솟는 감각임을 깨닫자 아
찔하기 까지 하다.
"..아..신.."
아카라의 녹색 눈에 은림의 흑갈색이 섞여 들어 있다. 물에 젖은 청록색. 청동같은.
".....사랑..해.."
".......안돼!"
나는 나도 모르게 고개를 젖고 있었다. 넌 프로그램이잖아! 바보, 넌 등장인물이야!
넌 등장인물 캐릭터일 뿐이라고! 사용자를 사랑해? 바보, 넌.. 바보! 이 바보야! 넌
사용자의 캐릭터를 사랑해야지! 주인공 여자애를 좋아하는 거란 말야! 사용자를 아는
것도 인식하는 것도 자신이 프로그램임을 깨달아 버리는 것도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조
차 모두 그 누군가의 상상력일 뿐이야! 난 속지않아!
난 속지 않아!
난 속지.. 않아!
"...이렇게 절실해도 안돼? 프로그램일 뿐이야? 난?
너에게 이건 그저 게임일 뿐이야? 절실한데! 진심인데 전부 조작된 것에 불과해?
뭐가 진실이지?
뭐가 진짜냐! 대체 뭐가! '진짜 자신' 이란 것도 모두 껍질을 뒤집어 쓴 피와 근육에
불과해! 뭐가 진심이며 사실이란 말이냐! 이 마음조차, 여기 이 한 뼘도 안되는 가슴
의 두근거림도 흔들림도 떨림도 모두 믿을 수 없다면 대체 그 잘난 '진실'이란 뭐냐!
네가 알고 있는 것들을 잊어! 넌 여기에 있고 난 너를 사랑한단 말이다!
..네 손에 닿는 나를 봐! '진짜' 나다! 너처럼 껍질을 뒤집어쓰고 시간을 보내는 것
아닌 그대로의 나! 너처럼 다른 말을 해대지도 않는 진짜 나!
......너를 사랑하고 있는 나를, 이 나를 그대로 봐! 제발!"
아카라의 피묻은 손이 내 어깨에서 떨어진다, 천천히.
휘둘리고 있던 나는 어깨춤의 얼얼함도 느끼지 못한 채 주르르 미끄러진다 팽개쳐진
다 구겨진다 버려진다 지쳐간다
'나'를 지키기 위해 상처입은 그가 훠이훠이 비칠비칠 핏자국을 달빛 아래 흘리며 걸
어간다. 숲 저편으로 난 길을 따라 덜 자란 풀잎들에 바지를 버리며 걸어간다.
그가 돌아본 눈가에서 별이 부풀어 오르는 것을 본다.
은림의 한 가지 끝으로 별이 새로 돋았다.
바람이 분다. 불어온다. 어디에서. 어딘가에서.
"........아카라..."
나는 나도 모르게 벌떡 일어서 그를 따라 뛰었다.
뺨이 화끈거리기 시작했다 스쳐가는 바람은 찬데 찬 이슬인데 그런데 뺨은 신열에 달
뜬 것처럼 화끈대기 시작한다.
"...나는.. 아카라, 나는..사실은.."
따라가야지. 쫓아가야지. 후회 같은 거 남기지 말고. 잊고 싶은 일 같은 거 만들지 말
고. '에스'처럼 머리를 침대에 부딪히며 울부짖게 된다 해도 그래도.
"........나는.."
프로그램이어도 그래도 좋다고. 그래도 나는.. 진심인 거라고.
말해야지. 후회 같은 거..후회 같은 거..그런 거..
"사실은 말예요, 아카라 나는... 사.."
털썩.
발이 엇갈렸다. 넘어진다. 탁, 철컥.
소리가 들렸어, 어디지?
나는 고개를 들었다가 그대로 멍해진다. 손목의 빨간 컴퓨터. 버튼이 눌렸나봐, 화면
이 멀뚱멀뚱 비맞았을 때의 나처럼 나를 내려다보고 있네.
말간 밤하늘 같은 자남색 영상에 '현숙'이라고 내가 이름지은 채팅 프로그램이 내 돌
발 메세지에 반응했던 말. 내 손목 컴퓨터로 보내왔던 말. 넌 내 '진짜' 친구가 아니
라는 말에 컴퓨터가 계산해 준 말. 그래서 읽게 된 말.
말간 밤하늘 같은 자남색 영상에.
- 너 답지 않아. -
나는 크게 뜬 동그란 눈에 쉼없이 그 말을 주워 담는다. 몸을 일으킨다. 흙탕에 몸을
굴린 듯이 피곤하고 무겁다. 나는 아카라를 쫓기를 단념한다.
- 너 답지 않아. -
자남빛 하늘에 별들이 빼곡하다. 아아 한이 없이 겹겹이 별들이 별들이 은하수를 따
라 영원을 흐른다. 인간은 별과 함께 영원히 슬프다. 이 곳에서는 이따금씩 '슬픔'의
꼬리표를 달고 별들이 주인을 찾아 떨어져 내린다. 눈물처럼 하늘을 핥으며.
자남빛 말간 하느레 별들이.
자남빛 말간 하늘에 별들이.
'아직 잊고 싶지 않아' 하고 소리치는 내 슬픔을 곱게 싸서 안고 간다. 대신 슬퍼해
주는 착하고 착한 별들.
-너 답지 않아. -
16.
나는 '판타스틱 어드벤쳐'를 끝낸다.
17.
캡슐 뚜껑이 열리기를 기다려 몸을 일으키고 머리를 정리한다.
기지개를 길게 편다.
또박또박 걷는다.
카운터에서 알약을 사 삼키고 비치된 전기 충격기의 타이머를 돌린다.
목을 죄이는 약간의 통증.
무의식의 반영이라는 꿈을 빼고는 다른 모든 일상의 영역을 지배하는 '이성'
그것이 있는 한 괜찮아. 괜찮을거야.
나는 기억을 지운다.
일기장 파일을 먼저 지워 버린다.
빨간 컴퓨터가 EMPTY라고 쓰인 녹색 글자 위에서 번쩍거린다.
나는 기억을 지운다.
나는 기억을 지운다.
오늘을 지우고 '에스'를 지운다 '아카라'를 지우고 '숲의 아이'를 지운다 '은림'을
지우고 그리고.......
'에스'와 걸었던 햇살 아래의 길들 '에스'와 울었던 위로 받았던 까만 공허와 침묵들
'에스'와 함께 누워 있던 작은 방 ...
'아카라'와 올랐던 가상 세계의 산들 걸었던 길들 먹었던 과일들 웃었던 숲속 스쳐가
는 별들 떨어져내리는 낯선 슬픔들 익숙한 슬픔들 두려운 어두움과 떨림 그리고..
.......
이따금 아침녁에 몸을 일으키면 나 모르게 눈물이 흘러 있겠지.
기억나지 않는 꿈.
그럼 과거 어느 때인가 슬픈 일이 있었다는 뜻인 걸 알테지. 지워 버려서. 아프지 않
아서 참 다행이라고 스스로에게 속삭일테지. 스스로에게 거짓말을 할테지. 스스로를
속일테지.
나는 발치에 깨어져 있는 모래시계를 보았다.
알약을 삼키고 전기 충격기의 버튼을 누르고 그리고 원래의 나로 돌아온다.
이젠 뒤집으며 속일 수 없는 모래시계. 하지만 나는.. 아직은......
이상하다. 가슴이 아프다. 아주 잠깐 아픈 거니까 괜찮아.
꿈을 꾼 걸거야...
7942년의 서울에서 슬픈 사람들은 꿈을 꾸는 사람들 뿐이다 슬픈 것을 꿈 속 뿐이다
기억도 할 수 없는, 스쳐가는 꿈을 짧아서 슬픈 걸 거라고 생각해 버린다 하늘에 별들
이 젖어서 흘러간다 이슬처럼 젖어서 눈물처럼 젖어서 흘러간다
가짜 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