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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MBC 월화드라마 '선덕여왕'이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다.
오늘(09.7.20) 보고 나서 생각나는 것을 몇 가지 적어두고자 한다.
-. 화랑세기: 드라마의 모태가 되었다고 하는 역사서이다. 야사에 가깝다고 할 수 있으며 그 진위가 아직 명확히 밝혀지지
않은 책으로 내용이 파격적이라 한다. 삼국사기에 일부가 인용되었다고 하는데, 그 부분들이 많이 가다듬어지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게 한다.
-. 선덕여왕: 여왕이라는 존재는 그다지 많지않다. 온 역사를 통틀어서 말이다. 과연 선덕여왕이 어떤 존재였으며 당시(삼국
시대) 생활이 어떠했는지 많은 궁금증을 불러 일으킨다.
-.이요원: 주연으로 발탁된 인물.
먼저 아래는 다음 백과사전에서 찾은 '화랑세기'에 관한 내용이다.
화랑세기 (김대문 역사서) [花郞世記]
이 글은 인물에 관한 것입니다. 텔레비전 드라마에 대해서는 선덕여왕 (드라마) 글을 참조하십시오. |
선덕여왕(善德女王, ?~647년, 재위: 632년~647년)은 신라의 제27대 여왕이다. 성은 김(金), 휘는 덕만(德曼)이다. 진평왕과 마야부인(摩耶夫人)의 장녀이며 태종무열왕과 의자왕의 큰이모이다.
진평왕이 아들이 없이 죽자 화백회의에서 그녀를 신라의 새 왕으로 추대하여 성조황고(聖祖皇姑)라는 호를 올렸다.
즉위한 해인 632년에 관원들을 전국 곳곳에 파견하여 백성들을 진휼(賑恤)하게 하고, 633년에는 조세를 면제해주는 등 일련의 시책으로 혼란스러웠던 민심을 수습하였다.
634년 연호를 인평(仁平)이라 고쳤으며, 이듬해 당으로부터 주국 낙랑군공 신라왕에 책봉되었다.
638년 고구려가 칠중성에 침입하자 이를 격퇴하였으며, 642년 백제 의자왕에게 40여 성을 빼앗기자 이듬해 당에 사신을 파견하여 동맹을 맺어 외교적 방어선을 구축하는 공격적인 외교술을 펼쳤다.
더불어 민생의 안정에 주력하여 가난한 이들을 보살피도록 하는 구휼정책을 활발히 추진하였으며, 첨성대를 건립하여 농사에 도움이 되게 하였다. 그녀가 백성들을 얼마나 인자하게 아끼고 사랑했는지는 지귀(志鬼)의 설화에서도 알 수 있다. 당시 선덕여왕을 흠모하는 백성들이 많았는데 지귀는 그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선덕여왕이 영묘사를 행차할 때 그녀를 만나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가 깜빡 잠이 들었는데, 선덕여왕이 이를 보고 그의 가슴 위에 자신의 팔찌를 놓고 떠났다. 지귀가 잠이 깨어 이를 알고는 마음에서 불이 나 영묘사(靈廟寺)를 건립하였다고 한다.
또한 불교 또한 널리 장려하여 분황사, 영묘사 등 절을 많이 건립하고 불경을 연구시켜 불교의 일대 부흥을 가져왔다. 특히 선덕여왕은 웅대한 호국의 의지가 담긴 거대한 황룡사 9층 목탑을 세웠다. 황룡사 9층 목탑은 높이 80m의 거대한 탑으로 이를 모두 9층으로 한 뜻은 이웃의 9적을 물리쳐서 복속시키기 위해 나라 이름을 새겨넣은 것이다.
647년 상대등 비담(毗曇) 등 진골 귀족들이 여왕이 정치를 잘못한다는 구실로 반란을 일으키자 김춘추와 김유신으로 하여금 진압하게 하였다. 반란이 진압된 이후 얼마 안되어 승하하였다.
선덕여왕은 평소에 자신을 도리천, 곧 낭산 남쪽에 장사지내라고 하였는데 훗날 왕릉 아래에 사천왕사가 세워지게 되었다. 불교에서는 인간 세상의 한가운데에 수미산이 있고 그 위에 6천이 있는데 중턱에는 사천왕천, 꼭대기에는 도리천이 있다고 한다. 신라가 곧 불국토라는 관념에 비추어보면 선덕여왕은 승하 후 도리천에 승천하여 곧 신과 같은 존재가 된 것이다.
한때 남편이 없는 독신자라는 설이 확산되었으나 근거는 없다. 기록에 의하면 선덕여왕은 신라의 규례에 따라 세명의 남편을 뒀다. 그러나 후사를 얻는 데는 실패하였다.[1]
다음은 이요원
결혼을 했구나..
세세한 것이나 여러가지 다른 정보들을 통해 심층적으로 알아볼 수도 있겠지만, 오늘은 여기까지만... ^^
아참. 그리고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드라마의 극본을 담당한 김영현씨가 대장금의 극본을 담당했던 사람이라는 것.
다음은 YES24를 통해서 본 독자들의 책 리뷰
아래 독자분 글솜씨와 더불어 화랑을 생각하는 마음이 갸륵하다. ^^
화랑. 아름답고 슬픈 이야기 속으로
내용 편집/디자인 | namchaehwa | 2003-08-23 | 추천5 | 댓글0
원문주소 : http://blog.yes24.com/document/282437
어린 나이에 나라를 구하겠다는 굳은 의지와 기개를 지니고 단신으로 적진에 뛰어들어 끝내는 꽃 같은 목숨을 조국에 바친 화랑 관창. 훌륭하고 용맹한 화랑이면서 동시에 미실(美室)이라는 아름다운 여인과 안타까운 사랑을 남긴 화랑 사다함. 삼국 통일의 주역으로 이름도 드높은 화랑 김유신. 우리의 감수성을 자극하는 지극히 아름다운 이야기의 주인공들이다. 이들 화랑들은이렇듯 멋있고, 용맹하고 기품 있는 모습으로 역사의 딱딱한 모습 이외의 다른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하지만 우리가 화랑에 대해 가지고 있는 동경이 그들에 대한 지식 자체일 수는 없다. 그들을 사랑하고 좀 더 잘 이해하려면 역사적으로, 사회적으로 그들이 가지고 있던 다른 면모들도 더 잘 알아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신라시대 통일의 주역으로서 무예를 숭상하는 청소년 집단이고, 귀족의 자제로 구성이 된다고 알고 있는데 그것만이 화랑에 대해 알고 있는 전부이고 또 옳게 이해하고 있는 것일까? 화랑과 신라사회를 잘 이해할 수 있는 역사적 문헌은 무엇이 있고 어떤 모습으로 그들이 나타나 있을까? 천년도 넘는 세월을 건너 그들의 진실에 제대로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물론 나는 역사학도도 아니지만 삼국사회에 관심이 많아서 이 책을 읽게 되었다. "화랑"에 대해서 이야기하려면 먼저 우리가 흔히 범하고 있는, 용어의 잘못부터 바로 잡아야 한다. "화랑徒"와 "화랑道" 구분이 그것인데, "화랑徒"는 화랑도 그를 따르는 낭도(郎徒:화랑의 무리)를 가리키는 것이고, "화랑道"는 화랑徒가 추구하는 가치관을 뜻하는 말이다.
그 다음에 화랑을 이해하려면 신라사회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할 것이다. 신라는 사회 전체가 무용의 기풍을 숭상한 나라였기에 화랑이 상무적 기풍을 가지고 신라를 주도한 것이 아니라 신라사회가 지니고 있는 상무적 분위기가 화랑의 무리에게 영향을 끼친 것이라고 보는 것이 더 올바른 이해일 것이다. 그러한 이해 없이 화랑에 대해 접근하려고 하면 여태까지 잘못 그래왔던 것처럼 다음과 같은 오해를 하기 쉽다. 화랑에게는 고결한 애국심만 있었다고 보는 것과, 화랑정신을 대표한다는 직접적인 증거가 없는데도 "세속오계"가 화랑의 지침서로 이해되는 것 말이다.
화랑에 대해 언급된 역사적 문헌으로는 《삼국유사》와 《삼국사기》가 있다. 그런데 여기에 또 하나의 책이 있다. 우리의 현전하는 가장 오래 된 사서인 김부식의 《삼국사기》보다 무려 460여 년이나 이른 시기에 그것도 당대인에 의해 쓰여진 역사책은 바로 1989년 2월 부산에서 발견된 필사본 《화랑세기》의 모본이 되는 진본 《화랑세기》이다.《화랑세기》는 신라의 김대문(金大問)에 의해 신문왕(神文王) 1년(681)에서 7년(687)사이에 저술된 책인데, 일본 궁내성(宮內省) 도서과에서 근무한 적이 있는 박창화(朴昌和)가 필사해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이다. 그것에 대해서는 10년이 넘도록 진위여부에 대해서 논쟁이 계속되어 오고 있다.
"박창화가 필사한 필사본 화랑세기는 위작이 아니다. 즉 화랑세기는 실제로 김대문이 저술한 책이고 그것은 현전하는 역사서이다" 라는 주장에 맞서 대항하고 있는 것은 "박창화 자신이 필사본을 위작했다"라는 주장이다. 화랑세기를 부정하는 사람들은 여러 가지 근거를 갖고 주장하는데 신라사회와 《화랑세기》에 나타난 신라사회의 모습이 아주 많이 다르다는 것이 첫 번째이다.또 자유분방한 성관계와 귀족사회의 심한 근친혼이 등장하는 내용을 들어 《화랑세기》가 위작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화랑세기》에 나오는 용어들이 《삼국사기》와《삼국유사》에서 찾아볼 수 없는 것들이고, 따라서 신라시대에도 사용되지 않았을 용어라는 점을 들고 있다. 이러한 주장들에 대해서 이 책은 조목조목 반론을 들어 주장을 분쇄시키고 있는 데 어느 입장을 취할 것인지는 아직은 논란의 여지가 많아서 독자들이 스스로 판단해야 할 듯 하다. 화랑에 관해서는 역사소설을 통해 많이 접해서 그런지 역사적이고 객관적인 측면보다도 아직까지도 감상적인 면에서 다가오는 것 같다.
사랑하는 여인 미실(美室)을 그리워하며 숨을 거두기 직전, 힘겨운 마지막 숨을 고르며 신라의 화랑 사다함이 남긴 한 편의 시는 여느 다른 절절한 애정시보다도 가슴을 아프게 한다. 그들이 살았던 당시 신라상황에 대해 제대로 알고, 화랑에 대해, 화랑과 낭도들에 대해 올바르게 이해하고, 우리가 외면해 오고, 잃어버렸던 역사적 문헌들을 받아들인다는 것 외에 저물어 가는 여름의 마지막에 1000년 전 그들. 조국을 위해 꽃 같이 스러져간 영웅들, 통일을 위해 고군분투하며 노심초사하던 젊은이들을 만나보는 것은 어떨까.
흥미로운 역사
내용 편집/디자인 | 플로라 | 2005-03-07 | 추천1 | 댓글0
원문주소 : http://blog.yes24.com/document/1721
예스 24에 접속하면 제1회 세계문학상 수상작으로 '미실'에 대한 책 소개가 나와있는데, 볼때마다 흐뭇함을 느낀다. 화랑세기를 접해본 사람이라면 그 소식을 볼 때마다 아마 나처럼 어떤 흐뭇함을 느끼지 않을까. 왜냐하면, 화랑세기에 그 미실에 대한 얘기가 자주 등장하니 "아, 내가 화랑세기에서 읽었던 그 미실이잖아 !" 하고 반가워할 테니까.
사실 화랑에 대한 지식은 역사 교과서에서 배운 짤막한 지식이 전부였다. 평소 신라시대의 화랑에 대한 막연한 관심이 있었는데, 몇 년 전 마침 언론에서 최초의 '화랑세기' 완역본이 나왔다길래 사기 위해 서점에 갔지만 그 책은 가격도 비싼편이고 내용도 학술적인 분위기를 풍겨 딱딱해 보였다. 그래서 대신 선택한 책이 바로 이 장락출판사의 화랑세기다.
이 책은 역사를 전공하지 않은 사람들이 이해하기 쉽게 구성되고, 편역자의 풍부하고 성실한 역사에 관한 주석으로 읽는 내내 나에게 감동과 흥미를 준, 아끼는 책 중의 하나가 되었다. 가장 감동적이고 관심있게 읽은 부분이 사다함과 미실 이야기 였는데, 바로 그 미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책이 나왔다니 어찌 반갑지 않겠는가. 이 책은 32명의 풍월주(화랑의 우두머리)를 다룬 1부와 화랑외사를 다룬 2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특히 풍월주들에 대한 이야기를 흥미롭게, 때론 눈물나게 하는 아름다운 감동으로 감상한 책이다. 화랑을 이끄는 리더라고 하여 전부 훌륭하고 고귀한 집안의 자제들이 선출되거나, 인품이 훌륭한 것은 아니었다. 이 중에는 풍월주에 있는 동안 여색과 재물에 탐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 공통점은 외모가 아름다워 왕족의 총애를 받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다함, 보리, 세종 등등의 풍월주들은 고상하고 아름다운 인품과 외모로 읽으면서 그들을 흠모하고 존경하면서 얼마나 감동을 했던가. 소설책이 아닌 역사에 그런 인물들이 실제로 존재했다는 사실에 행복하기까지 했다.
이 책은 딱딱한 역사책이 아닌, 마치 한편의 단편소설집 같은 아름다운 책이다. 근친결혼, 남녀 상관 없이 이해관계에 따라 몇번씩 하는 결혼 등 신라인들의 자유분방한 성에 대한 가치관은 도덕적 잣대에 비추어 볼 때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기도 하다. 종이에 그들의 계보를 그려보니, 거의 몇몇 사람들을 필두로 같은 계보에 속하는 사람들이니, 그들의 근친결혼이 얼마나 대단했는 지 놀라울 따름이다. 하지만, 그것은 그들의 역사니 오늘의 잣대로 평가하긴 어려운 부분인 것 같다. 여자들의 지위도 대단함을 알 수 있다. 화랑의 세속오계를 만든 원광법사(보리공의 친형), 요즘 드라마 '해신'에 등장하는 염장 등도 등장하여 감상하다보면 아는 인물들을 만나는 친근함도 느낄 것이다.
[인상깊은구절]
태후의 사사로운 아들이요, 정승의 후예로써 맑고 곧으며 높은 행실은 화랑의 모범이로다. p.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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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마구 퍼다 날라 그런지, 나의 글로 승화시키려는 노력이 2% 부족해 보인다.
오늘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이 문노가 공주의 소식을 비담으로부터 전해듣고 원상화(화랑의 스승)등극(칠숙)을 위한 자리에 나타난다. 그의 모습을 통해서 더욱 영웅적이고 멋진 모습을 많이 볼 수 있는 하루였다.
마방진이옵니다. 세필이옵니다.... 어제(9/8.화 - 32회)방영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