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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조님께 이미 말씀 드린 것이지만, 원래 이 글은 작년 말에 올리려고 지난 달 중순쯤 써두었던 내용에 기반한 것이다. 하지만 글이 다루고 있는 내용이 대통령의 신년국정발표를 통해 구체적으로 형상화되고, 생각했던 것보다 빠른 속도로 ‘속도전’이 시행되면서 느낀 놀라움과 불안감이 덧붙여졌고 그 결과 다루어야 할 내용의 골격이 커지면서 글이 늦어졌다. 이 점 사과 드린다. 지면과 시간의 제한 상 건너뛸 수 밖에 없었던 부분들에 대한 보다 상세한 각론들은 조만간 보충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인용되는 책의 쪽수는 명기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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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대통령이 ‘벙커’에 들어갔다.
이것은 은유가 아니다. 이번 주 첫모임에 이어 앞으로 일주일에 한 번씩 그가 직접 주재할 비상경제상황회의는 청와대 지하의 실제 벙커에서 열린다. 차관보급 인사를 실장으로, 하루하루 긴박하게 움직이는 여러 분야의 상황을 체크, 점검할 이 기구는 ‘워 룸(War Room)’ 즉 전시작전상황실을 모델로 삼고 있는데 이는 현재의 경제 위기가 “전시에 준하는 상황”(1월 2일 이동관 대변인의 정례브리핑)이라는 청와대의 규정에 정확하게 조응한다.
‘벙커’ ‘워룸’ ‘비상’ ‘전시’. 극도로 예외적인 상황을 구체적으로 지칭하는 이 일군의 단어들은 서로 다른 조합을 이루어 빠른 속도로 확대 재생산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일련의 소식들을 접하는 많은 사람들의 반응은-
1. 벙커의 고고학
‘MB 벙커’에 대해 치밀한 준비작업 없이 급하게 만든 작품이라는 비판이 많지만 내가 보기엔 오히려 그러한 대응들이야말로 즉흥적인 것이라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어 보인다. 경제위기를 국가안보라는 차원에서 전시에 등치 시키려는 이러한 일련의 움직임은 생각보다 오랜 물밑 작업과 언론을 이용한 꾸준한 입질을 통해 그 수위와 시기를 조절해온 것이기 때문이다. 최초의 문제제기는 작년 10월 9일, 국정감사가 한창이던 시절 한나라당의 수뇌부인
하지만 10월 중순, 부동산 거품이 터지면서 한국판 서브프라임 위기가 올지 모른다는 기사들이 여기저기서 뜨고, 그 결과 위기를 보다 실체적인 것으로 느끼기 시작하면서 정부는 위기를 오히려 전면에 내세우는 입장을 고려하기 시작한다. 10월 26일 이명박 대통령은 지금은 “비상시기”이므로 “청와대와 정부도 비상청와대, 비상정부”라는 각오로 임해야 한다고 발언했는데 여기에 한 보수 인터넷 신문은 “사실상 경제비상계엄령 발동” (10월 26일자 프런티어 타임즈)이라는, 한 발 앞서는 제목을 붙여 날개를 달아주었다. 이어 11월 대통령 당선수락선언 중 미국이 전대미문의 위기에 처했다고 오바마가 공개적으로 인정하고 곧이어 전세계가 제2의 공황에 버금가는 나락으로 떨어졌다가 가까스로 살아나오자 매일 경제 신문은 “총대 메는 장관이 없다…전시 경제내각을 짜라”(11월 26일자)는 노골적인 제목으로 특집 기사를 냈다. 같은 날 한국 CEO포럼은 “'비상경제상황실(War Room 또는 Situation Room)'을 신속히 구성하자”고 공개적으로 제의했다. 12월 5일자 사설에서 중앙일보는 “전쟁과 같은 위기 때는 지도자의 각오와 행동이 국민의 마음을 움직인다”며 “지금의 경제위기를 일종의 국가비상사태로 인식, 본인이 직접 워룸을 지휘하고 국난극복대책을 이끌어야 한다”고 이를 다시 반복했고, 3일 후 청와대는 현 상황이 “전대미문의 위기”이며 이를 돌파하기 위해서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염두에 둔 비상체제를 가동할 필요가 있다”고 화답했다. “현실성은 없지만”이라는 단서를 달았지만 “최악의 경우 야간통금을 불사할 수도 있다”, “경제비상사태”를 선포해야 한다는 경악할만한 언급이 흘러나온 것 역시 같은 시점이다. 다시 3일 후인 12월 11일,
2. 예외상태
“위기”라는 단어가 무려 스물 아홉 번이나 반복된 대통령의 신년 연설은 이렇게 지난한 작업 위에 세워진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처한 경제적 상황뿐만 아니라 위기라는 개념이 맞닥뜨린 위기에 대해서도 많은 것을 얘기해준다. 연설문 전체를 뒤덮은 단어의 형상을 빌어 위기는 보편적인 것, 전 세계적인 것으로 제시되었고, 더 나아가 일상적인 것, 혹은 언제 해제될 지 알 수 없는, 따라서 당분간 정상적인 것으로 여겨야만 할 예외적 상황으로 규정되었기 때문이다. (“지금의 경제 위기는 어느 누구도 정확히 예측하지 못했던 것처럼 어느 누구도 그 끝을 장담할 수 없다”) 기대하던 새해 덕담대신 난데 없이 전쟁이 선포되고, 대통령은 벙커에 정기적으로 들어가나 그 끝은 언제인지 알 수 없다는 일방적인 통보를 받은 국민들이 망연자실, 흰 웃음만 짓는 건 그러고 보면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는 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국을 넘어 전세계적인 제2의 공황이 언급되고, 그것이 단지 유예되고 있을 뿐이라는 논의들이 우후죽순으로 창궐하고 있는 시점에서 상기해야 할 것은 이렇게 경제위기를 군사적 위기와 등치 시켜 비상, 혹은 예외상태(state of exception)를 선포하고 이를 통해 행정부가 의회보다 우위에 서는 역사적 전례가 적지 않다는 사실이다. 이런 맥락에서, 근래 들어 몇몇 저작이 번역되며 한국에서도 주목받고 있지만 여전히 논지의 요약이나 추상적인 논의에 그치고 있는 이탈리아 철학자 조르지오 아감벤의 작업들 중 특히 지금 시점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예외 상태 Stato di eccezione>(2003)이다. 이 책은 특히 911 이후의 국제정세를 배경으로 대개 전쟁과 내전, 폭동, 봉기 혹은 시민들의 저항과 같은 군사적 차원에 국한되어 읽히고 있지만, 경제위기가 전쟁의 수준으로 격상되어 개별 국가 내부에서 정치적으로 전유되는 역사적 계기에 대한 성찰의 중요한 단초 또한 제공하고 있다는 점은 한국은 물론 아직까지 서구에서도 올바로 음미되지 않고 있다. (서두에서 지적했던, 작금의 사태에 대한 많은 이들의 '비판적' 냉소가 가리고 있는 것은 한 마디로 이러한 무지, 혹은 어리둥절함일 뿐이다. 물론 이러한 계기를 명시적으로 지적하는 부분이 책 전체에서 두 군데에 지나지 않고 그 길이도 몇 줄을 넘지 않는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 이 부분에 대해서는 아감벤 자신도- 적어도 책을 쓴 시점에서는- 크게 주목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2007년 이태리에서, 그리고 작년 말 불어로 역간 되었고 영국 켄트 대학의 로렌쪼 키아사가 영어로 번역 중인 아감벤의 최근작 <통치와 영광 Il Regno e la Gloria: Per una genealogia teologica dell’economia e del governo>(2007)은 이 문제의식을 더 밀고 나가 ‘살림살이(housekeeping)’로서의 경제(oikonomia)를 인류학적 차원으로 확대함으로써 삶-정치(bio-political) 일반의 관리/경영(management) 양식으로 파악한다)
예를 들어 1924년 1월, 프랑화의 안정성이 위협받자 프랑스의 쁘왕카레 정부는 재정적 문제에 관한 전권을 의회에 요구해 두 달 후인 3월 22일 넉 달 기한의 특별권을 부여 받았고, 1935년 라발 정부는 프랑화의 가치절하를 막기 위해 법적 효력을 갖는 행정령(decree)을 무려 500개나 넘게 포고했다. 1923년 10월, 독일의 바이마르 공화국 정부 역시 마르크화의 가치절하에 대처하는 과정에서 헌법 48조에 의거해 비슷한 조치를 취했는데, 1925년에서 1929년 사이 250개가 넘는 사안에 대응해 적용된 동일한 법령에 의해 수천 명의 공산주의자들이 투옥되었고 특별재판소가 설치되어 법정최고형 선고가 내려졌다. 아감벤이 지적하듯 바이마르 헌법 48조는 히틀러의 통치와 땔래야 뗄 수 없는 본질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조항인데 그 전문은 다음과 같다. “독일 제국(Reich)의 안보와 공적 질서가 심각하게 방해 혹은 위협 받을 경우, 제국의 대통령(president)은, 필요한 경우 무력의 도움을 받아, 안보와 공적 질서를 다시 확립하기 위해 필요한 조치들을 취할 수 있다. 이를 위해 그는 114, 115, 117, 118, 124 그리고 153조의 기본권을 완전히 혹은 부분적으로 유예(suspend)시킬 수 있다.” 칼 슈미트가 1931년에 쓴 글의 제목을 빌자면 이러한 법의 유예, 혹은 예외 상황 속에서 히틀러는 “헌법의 수호자”로 등장해 헌법을 안에서부터 실질적으로 내파(implode)시켰던 것이다.
여기서 ‘이명박= 히틀러’라는 등식으로 도발적으로 비약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하지만 유사한 상황이 재연되고 있다는 기시감에 딸려오는 불안감까지 부인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여러 가지 제약상 한가지 예만 들어보자. 지난 1월 7일자 뉴스에서 정부는 물경 50조원의 혈세가 쓰여질 거대한 사업임에도 불구하고 ‘녹색뉴딜’이라 이름 붙여진 토목공사 계획에는 국가 재정지원 규모 300억 원 이상의 사업에 대해 반드시 실시하도록 국가재정법이 규정하고 있는 예비타당성 조사를 생략하겠다고 밝혔다. 여기서 강조되어야 할 것은 이것이 불법행위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지난 4일, “국가 정책적 필요에 따라 추진되는 대규모 사업”에 대해서는 다음 달인 2월부터 예비타당성 조사를 실시하지 않는다는 내용을 골자로 한 국가재정법 시행령이 이미 발표되었기 때문이다. (“50조 투입하는 녹색뉴딜, "타당성 평가 없이 추진",” 1월 7일 뉴시스 기사)
여기서 방점은 두 군데, 즉 “국가 정책적 필요”와 “시행령”에 찍어야 한다. 먼저 전자의 경우, 아감벤이 지적하듯 이전까지 규범과 법의 엄격한 축자적(literal) 적용으로부터 개별사안을 풀어주는(release), 소극적 차원에서 이해되던 필요(necessity)의 개념은 근대 이후 법적인 질서, 특히 개별 국가의 실정법의 내부로 포섭되는데 이를 통해 필요는 특정 법이 적용되는 과정에서의 예외라는 주변적 지위에서 법 자체의 “진정한 기원이자 원천”으로 격상된다. 모든 법은 그것이 인간의 “공통적인 안녕(salus hominum/common well-being)”을 위한 것인 한 효력과 명분을 지니며 그렇지 못할 경우 구속력이 없다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법에 대한 이해는 양차 대전 사이 유럽의 법사상에 엄청난 영향을 끼친 산티 로마노에 이르면 “필요 그 자체야말로 진정하고 적절한 법의 원천”이며 “가장 탁월한 법제도인 국가의 기원과 정당화는…반드시 필요에서 찾아져야만 한다”는 식으로 바뀌는 것이다.
한 편 후자, 즉 “시행령”은 국가재정법이 기계적으로, 쓰여진 대로 “시행” 즉 적용(application)되는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 나아가 법과 시행 사이의 간극을 통해 전자가 실질적으로 무력화될 수 있다는 것, 다시 말해 사법권보다 행정권이 우위를 점할 수 있는 예를 명확하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주목할만 한다. (하나의 규범, 혹은 법이 구체적인 매 경우마다 어떻게 적용되어야 하는지는 그 규범/법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아감벤의 지적은 물론 슈미트가 <정치 신학 Politische Theologie>(1922)에서 세공한 통찰을 반복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슈미트의 이러한 지적 역시 “’객관적’ 규범이란 하나의 공허하고 실행할 수 없는 관념”이며 “법학은 결코 [해석자인 법관의] 의지의 범주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주장해 그 때까지 주류를 이루고 있던 개념법학 Begriffsjurisprudenz의 기계적/객관적 법 이해에 지각변동을 일으켰던 헤르만 칸토로비츠의 <법학을 위한 투쟁 Der Kampf um die Rechtswissenschaft>(1906)과 그 출간을 계기로 본격화된 독일의 “자유법 운동 (freirechtliche Bewegung)”에 빚지고 있는 것이다)
3. 사실과 불법 사이에서: 김훈과 김구라, 그리고 안상태
현 정부가 “역사상 처음 불법 대선자금과 절연하고 탄생한 정권”이고 “이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며 부패와 비리에 대해 단호히 처리할 것”이라고 결연한 의지를 강조한 부분은 물론 많은 이들에게 실소를 자아냈다. 하지만 그러한 웃음은 이제 우리에겐 넘어서야 할 대상일 뿐이다. 자신의 정부가 “도덕적 약점 없이 출발한 정부”라는 그의 수사나 도덕성에 대한 그의 강조는 물론, 정치적인 수사이고 그만큼 비판해야 마땅한 것이다. 충분히 전과 14범이 될 수 있었던 현 대통령의 ‘과거’야 포탈에서만 쳐봐도 다들 알 수 있는 것 아닌가? 하지만 도덕성에 대한 논란은 청와대의 관점에서 볼 때 궁극적으로 그리 걱정할 만한 건 아니다.
그것은 당대의 도덕적인 기준으로 볼 때 털어서 먼지 안 나올 사람이 없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그 말의 정확한 의미에서 하나의 ‘시대정신’이 되었다는 것을 그들이 그 어느 누구보다 명확하고 기민하게 파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조중동,’ ‘조중동’ 하면서 조롱하고 비판하는 사람들은 물론 여전히 존재하지만 대부분의 포털 사이트에서 볼 수 있는 정치/사회 기사들에 대한 수많은 ‘알바’와 ‘초딩’과 ‘백수’들의 꼬리말들 속에서, ‘한겨레’는 ‘조선’ ‘중앙’ ‘동아’와 똑 같이 한 표를 부여 받은, 또 하나의 이데올로기적 스펙트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으로 취급된다. (이를 ‘사실’과 ‘의견’이라는 이분법을 통해 문학적 육체로 가장 잘 소화해낸 것이
아무리 대중적인 필체로 쓰여졌다고는 하나
나는 웃지 못한다. 무조건 웃어서는 안된다는 것이 아니라 정말 웃어야 할 때와 그렇지 않을 때에 대한 우리의 판단이 지난 몇년간 흐려지고 있고, 그 결과는 매우 부정적인 정치적 결과만을 우리에게 남기고 있다는 판단 때문이다. 위에서 인용한 대통령의 문장은 그의 진심(에 가까운 그 무엇)이 담겨 있다고 보아도 무방해 보인다. 물론 이를 두고 (비)웃는 것은 독자의 자유이다, 라고 생각하면서 내가 떠올렸던 것은 데카르트, 특히 그가 <방법서설>에서 썼던- 그리고 롤랑 바르트가 즐겨 암송했던- “Larvatus Prodeo”라는 표현이다. 나는 내 얼굴에 쓰여진 가면을 가리키며 [당신에게] 다가간다. 하지만, 그저 가면이라고 생각했던 그의 가면이 그의 얼굴 그 자체라면 어쩔 것인가. ‘이게 다야 (C’est tout)'라고 대답한다면? “힘있는 사람, 가진 사람, 공직자가 먼저 법을 지키고 공정하다는 인식을 줘야 한다”는 말이 사실이라면? 이 마지막 반문에 대한 우리의 순진한 불신에도 불구하고 이 말에 합당한 법은 충분히 제정될 수 있다. 혹 그렇지 못할 경우라도 우리가 위에서 본 것처럼 ‘시행령’을 통해 특정 집단만이 지킬 수 있는 것으로 그것은 시행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그 대상/범위야 어찌되었건 그들(만)이 그렇게 해석/시행된 법을 지키는 한, 그 법의 효력범위 내에서 그들은 법을 준수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김제동과
전쟁에 준하는 것으로 격상된 경제위기 속에서 행정부의 수반인 대통령과 의회의 다수당인 한나라당이 통과시킬 개별 법안들은 신속하게 법적 효력을 얻을 것이고 대한민국 사회는 이러한 형태의 ‘사실’들로 채워질 가능성이 크다. 아부 가리브 수용소에서 이라크 수용자들을 똥무더기 마냥 쌓아놓고 찍은 사진으로 전 세계적인 파문을 일으켰던, 당시 스물 한 살이었던 린디 잉글랜드 일병은 지난 주 말 영국의 가디언 지와 가진 인터뷰에서- 자신의 입장을 정당화할 여지가 농후한, 그러나 동시에 이에 대한 즉자적인 비난을 그에 못지 않게 어리석은 것으로 만들 수 있는, 비극적이고 우스꽝스러운 삶의 아이러니로 점철된 놀라운 순진함을 가지고- “전쟁이란 그 어떤 일도 일어날 수 있는 곳(What happens in war happens)”이라는 말로 자신의 행위를 요약했는데[1] 그렇게 순진한, 그리고 복잡하고 냉정한 의미에서 우리가 맞게 될 한 해, 혹은 그 이후의 지옥과 같은 몇 년은 법적인 한계가 없는 법안의 무한한 상정과 통과, 그리고 신속한 적용으로 점철될 지 모른다.
정부의 쇠고기 고시는 합헌도 위헌도 아니지만, 이와는 별개로 종부세는 위헌이라는 의견을 낸 헌법재판소의 판사들은 모두 종부세 부과대상자였다는 기사들이 전해주는 정보, 아니 '사실'은- 김구라에 이어 한국의 어떤 지식인들보다 예민하게 시대의 핵심을 꿰뚫은
01.08.2009
To be continued.
첫댓글 늘, 감지하지 못하고 있던 어떤 팽팽한 긴장감을 감지할 수 있게 해주는 아쟈비님의 글, 매우 오래간만에 접합니다. 지적하신 '자유법 운동'에 빚지고 있는 건, 잘 아시겠지만, 칼 슈미트 뿐만 아니라, "법의 힘"에서의 데리다 이기도 합니다. 법관이란 주어져 있는 법을 그대로 적용하기만 해야 한다는 당시의 지배적인 견해로부터 그 법의 적용에 있어서 법관의 '해석'의 (자유) 가능성을 주장했던 자유법 운동은, 님께서 지적하셨듯, 그로부터 오늘날엔 존재하는 법을 '넘어서는', 심지어 그 법을 유예시키는 칼 슈미트에게서의 '주권자'를, 또한 법 위에 자신을 위치시키는 행정 권력을 낳는 데로 이어지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법의 힘"에서 데리다가 요청하듯, 현존하는 명목적 법 질서 자체를 그 법의 적용과 판결/결정을 통해, 바로 그 안에서 넘어설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주기도 합니다. 칼 슈미트의 주권자론, 나아가 독재자론이 우파들에게 뿐 아니라 당시, 그리고 오늘날 까지의 많은 좌파들에게까지 수용되고 있는 건 그것이 현존하는 법적 질서 그 자체에 대한 극복, 그것을 넘어서는 가능성을 제시해주고 있기 때문이지요. 행정권력이 존재하는 법을 유예시켜 그 법 위에 자신을 위치시키는 '예외상태'에 대한 아감벤의 비판은, 이러한 점에서 양 날의 칼을 지니고 있다고 여겨집니다. 행정 권력을 향해 현존하는 법과 법 질서를 '충실하게 따르라'고
, 행정권을 사법권 하에 종속시키라고 요구하는 것은 그 현존하는 법과 법 질서 자체의 정당성에 대한 인정과 승인을 전제로 합니다. 그리고 이는 '엄정한 준법'을 강조하는 권력의 요구와도 맞닿게 됩니다. 위 글에서 아쟈비님의 입장은, 제가 보기엔 '법은 개별 이해 당사자의 이해관계를 드러내는 대상일 뿐' 이라는 "사실"에 근거해 결국 '서로 다른 이해관계 당사자'들 사이의 "계급투쟁"의 필연성과 그런 이해관계를 넘어서 있는, 그리하여 그 이해 관계들을 다 포괄하는 진짜로 "정당한 법"에 대한 요청 사이에서 흔들리고 있는 듯 합니다. 문제는, 발터 벤야민이 지적했듯이, 이런 법적 틀 자체를 '파괴'하는 것 - 물론 저는 이 말이
실천보다 무척이나 쉽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 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하룻 잠을 자고 나서 어제밤 보다 좀 더 분명하게 제 생각을 이갸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제 문제제기의 핵심엔, 거대화되고 있는 행정권력에 대한 아감벤의 비판이 근거하고 있는 지향점이 어디에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가 민주주의적, 법치적 이념에 근거해서 '헌법'에 보장되어 있는 국민의 자유권을, '안보 혹은 '국익', 나아가 '위기'라고 하는 명분을 내세워, 제한하고 구속하려는 것을, 곧 헌법적 질서 하에서 움직여야 할 행정권력이 그 헌법적 질서를 '유예'시키고 '제한' 하는 것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라면, 칼 슈미트적 의미에서의 '주권자적 권력'을 지향해가는 행정 권력으로부터 예외상황을 결정할 수 있는 심급 혹은 어떤
능력을 제거하고, 주권자를 다만 헌법적 정신에 충실히 기여하고 봉사해야 하는 주체로 제한하려는 것이라면, 아감벤은 칼 슈미트가, 그리고 그를 각색해 샹탈 무페가 이야기하는 "정치적인 것의 소멸"을 지향하고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정치적 사건이나 행동에 대한 '비판'이 합법/불법의 틀 내에서만 이루어진다면, 그래서 경찰의 폭력적 시위 진압이 시위 진압과 집시법 규정을 경찰이 따랐느냐 아니냐는 논의로만, 미네르바를 구속한 검찰에게 법적 근거가 있느냐 없느냐로만, 국회 진입을 시도한 야당 의원들의 행동이 불법이냐 아니냐로만 국한된다면, 거기서 '정치적인 것'은 좀처럼 찾기 힘들어 질 것이라는 것입니다. 헌법을
'유예'시키는 행정권력에 대한 비판이, 한편으로는, 최소한 공공적 명시적 차원에서는 저 '민주주의적 법치'의 이념에 근거하는 것이 필요하겠지만 여기에로만 제한된다면 문제가 있다는 것이지요. 푸코의 계보를 따라 아감벤 역시 근거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아나키즘적 권력관은 이 문제를 공공화시켜 이야기하는 걸 어렵게 만들고 있지 않는가 생각합니다.
김남시 님의 리플을 읽고 나니 지젝이 강조한 레닌의 '사형'제도에 대한 입장이 떠오릅니다. "사형 반대가 옳은 경우는 사형이 착취를 유지할 목적으로 착취자들이 근로 인민 대중에게 적용할 때뿐이다……. 혁명 정부라면 착취자들(즉 지주와 자본가들)에게 사형을 적용하지 않고 버티는 것이 가능할 것 같지 않다(『지젝이 만난 레닌』, 358쪽)." 지젝은 합법/불법의 "부르주아적" 문제제기에 얽매이지 않고 "성공을 두려워하지 않았"다는 데에서 레닌의 "위대"함을 찾을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주권자적 권력'을 떠맡고 "계급혁명"의 필연성을 주장하는 형상으로서의 '레닌'이 제시되고 있습니다.
두 분의 논의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듯 싶으나 '지젝'과 '레닌'이라는 이름을 기억해 두고 싶다는 생각에서 리플달아봤습니다. 아쟈비 님의 글도 김남시 님의 리플도 정신이 번쩍 들게 만들어 주시는군요. 저 자신의 공부가 상실하고 있었던 어떤 긴급성을 느끼고 결국 저 역시 웹에 널린 '좌파'지망-인문학소비층이 아니었는지 되돌아보는 계기를 가집니다.
안녕하세요 김남시님. 말씀대로 참 오래간만이네요. 너무 반갑습니다. 잘 지내시지요? ^^ 달아주신 리플은, 제가 써놓고 잘라낸 부분들에 대해 제가 가지고 있던 일말의 의구심을 말끔히 제거해 준, 가뭄에 단비같은 것이었다, 고 말씀드리면 일단 화답이 될런지요? ^^ 사안이 사안이고, 또 지적하신 문제는 제가 생각하기에도 핵심적인 것인지라 당장이라도 답변을 달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지만, 제가 지금 발등에 불이 떨어진 관계로 그건 다음주 말이나 그 다음 주 초나 되어야 가능할 듯 합니다. 하지만 이 글에서 제가 얘기하려던 것들 중 하나는 '합법/불법' 중 하나를 양자택일(alternative) 해야한다는 것이 아니라
'준'전시 선언으로 이제서야 가시화된 지난 몇 년간의 한국정세의 추이 속에서 '합법/불법'이라는 구별 자체가 무의미해졌다는 것, 제가 수정/가필한 부분의 표현을 빌면 법이 "내파"되었다는 것이라는 것만큼은 급한대로 지적하고 싶습니다. 큰 외상 없이, 장파열과 내출혈로 죽어가는 사람처럼 말이지요. 군생활을 일종의 야전병원 행정병으로 했는데 그 훈련의 핵심 중 하나는 겉으로 아무리 피칠갑을 했더라도 당장 죽지는 않을 저같은 '2급' 환자와 겉보기엔 멀쩡하나 먼저 데려가지 않으면 반드시 죽는 '1급' 환자를 구별해(triage라고 하죠) 조치하는 것이었습니다. (크로이체르님의 몇몇 글에 대한 저의 매혹은 이런 연원을 갖지요 ^^)
이는 작년 하반기에 제가 이곳에 올렸던 '통찰이란 무엇인가'란 글에서 얘기했던 것과도 조응하는 것인데, 그 핵심은 겉보기에 멀쩡해 지금까지 알고 있던 것과 별로 달라보이지 않는, 따라서 기존의 독해/분석/이론의 틀로 재단해도 무리없어 보이는 현상을 다른 시간축/시좌에서 파악해, 그냥 놔두었을 경우, 다시 말해 기존의 방법으로 조치를 취할 때 수반될 그것의 악화 혹은 궁극적인 파국을 미리 막는 것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예를 들어 말하자면, 황소개구리는 개구리가 아닙니다. 개구리랑 닮았다고, 개구리인줄 알고 덤볐다가 도리어 잡아 먹히는 뱀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말입니다. ^^
일단 아쉬운대로 이런 맥락에서 몇몇 부분을 수정/가필했는데 논의가 잘 전달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 게슴츠레님/ 처음 뵙습니다. 인용해주신 지젝의 언급은 김남시님께서 지적하신 문제와도 직결되는 적절한 구절로 보입니다. <우연성, 헤게모니, 보편성>에서, '피값을 치러야 진짜 혁명이다,' 뭐 그런 논지를 가지고 라끌라우가 그럼 자네 파시스트 아닌가 했더니 "[그래 나 파시스트다]. 어쩔래!(So be it!)"라고 일갈하던 것과 일맥상통하지요. ^^ 김남시님께 말씀드린 것과 같은 이유에서 지금 드릴 수 있는- 나름 유혹적이길 원하는- 제 짧은 대답은, 여기서 드러나는 지젝은 '반자본주의적 낭만주의자'이자 '키에르케고르주의자
'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젝을 <역사와 계급의식>의 저자이자 열렬한 키에르케고르 숭배자였던 루카치와 칼 슈미트에게로 이끄는 동력이지요. 문제는 그렇다면, 루카치와 슈미트를 어떻게 구분하느냐는 것입니다. ^^ 지젝에 대한 대부분의 입문서와 국내외의 논평들이 명확하게 정식화하지 못하는 핵심적인 질문은 바로 이것인데 제가 보기엔 이것이야말로 지젝에 대한 호와 불호가 나뉘고 그에 대한 정치/철학적 판단의 문제가 제기되는- 그의 표현을 되돌려주자면- 그의 "외설적인 중핵(obscene hard kernel)"이 놓여있는 지점입니다...
뒤늦게나마 정성스러운 답리플에 감사드립니다. "반자본주의적 낭만주의자" 혹은 "키에르케고르주의자"라는 아쟈비님의 지젝 평가의 세부적인 내용이 몹시 궁금합니다. 이후 지젝을 읽을 때, 항상 님의 이 평가를 염두에 두고 읽게 되더군요. 혹시나 기회가 되어 아쟈비 님의 '지젝론'을 볼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