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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는 늦가을이지만 산은 초겨울이었다. 서리가 내리고 길 웅덩이마다 얼음이 얼어 있었다. 가을이 오면 늘 찾던 곳은 설악이었다. 서울에서 설악에 접근하려면 옛적엔 망우리 고개를 넘어 구리, 도농, 덕소, 능 내, 양수, 국수, 옥천, 양평, 용두, 홍천, 상남, 인제, 원통, 한계, 남교, 용대, 진부, 고성, 속초, 설악동으로 이어지는 동선을 따라야 하였다. 한계령 길이 열리면서 장수대, 한계령, 오색
등 남설악과 함께 설악에 접근하기 쉬어졌지만 진부령이 유일했던 당시에는 남교리에서 십이선녀탕을 용대리에서 백담사를 거쳐 수렴동 대피소까지 간 후 가야동 계곡이나 백운동 계곡을 거쳐 봉정암 소청, 중청, 대청을 오르거나 오세암으로 올라 마등령을 거친 후 공룡능선을 탄 후 희운각을 거쳐 중청으로 오르거나 천불동으로 곧장 내려와 설악동으로 내려섰었다. 이런 차량 동선 영향으로 내설악이라 부르는 용대리 백담계곡은 설악을 오르기 위한 전초기지였으며 베이스 캠프였다.가을이 파장을 재촉하는 11월 어느 날 설악이 참 궁금하였다. 벌써 수년째 찾지 못하고 있었다. 몇 년 전 한계령으로 올라 중청에서 일박한 후 대청에 올라 산세를 즐긴 후 오색으로 내려오곤 그 후 찾지 못했다. 늘 계획은 세우면서도 실천할 수 없었다. 7월에도 백담계곡을 거슬러 올라가는 숲길을 걸으려 하였지만, 또 기회를 놓쳤었다. 고정적으로 참여하는 일이 휴무가 별안간 생겼다. 이 기회를 이용하지 못하면 올해에도 설악을 찾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바람처럼 훌쩍 이산 저산 휩쓸고 다니는 바람이 되고 싶었다. 꼭두새벽에 일어나 길을 나섰다. 둥근 해가 떠오르는 장엄한 빛의 잔치 배웅을 받으며 남한강을 뒤로하고 북으로 달렸다. 상남을 지나 남천을 지나면서 남천 안, 숲이 궁금하였다.
유난히 기름 성분을 지니고 있는 자작나무, 불에 태우면 기름 성분 영향으로 자작자작 하고 탄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계곡 안부를 전체를 감싸고 있는 자작나무 숲을 우선 찾아 걸은 후 다시 북으로 나가기로 하였다. 옛적에는 찾는 이도 없던 원시림이 가득한 고요한 숲이었던 원대리 자작나무 숲이 지금은 관광 자원화되어 수많은 사람이 찾는 곳이 되었다.
수많은 차량을 보관할 넓은 주차장이 들어서고 임도도 무척 넓어져 있었다. 옛 모습은 사라져 버렸다. 9부 능선으로 이어지는 옛 임도를 찾아 걷기 시작하였다. 원시적 모습이 다 사라진 임도를 보면서 돌아서고 싶다는 유혹이 나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였다. 가을 단풍색은 보통 세 가지로 구분되는데 붉은색, 노란색, 갈색이 바로 단풍색이다. 이 산에는 노란빛은 자작나무가 일궈내고 나머지는 갈참나무와 낙엽송이 갈색을 이룬다. 붉은색은 자작나무 아래 단풍나무가 열정적으로 가을을 치장하는 곳이다. 그리고 한겨울에는 소나무 가지에 피는 설화가 얼마 멋진지 모른다. 마루에 오르 기 전과 오른 후 나무 수종은 급격하게 바뀐다. 갈참나무와 자작나무가 주종을 이루던 마루 오르기 전 수종이 마루를 넘어서면 한동안 소나무 아름드리가 멋진 숲을 이루다. 다시 내려서면 비로소 방대한 자작나무 숲이 나오는데, 흰 기둥으로 대변되는 자작나무 숲은 압권 그 자체다.
인적이 끊어진 고요한 자작나무 숲, 미풍조차 불지 않았다. 간혹 새 한 마리가 지저귀며 자작나무 숲을 오고 가고 다람쥐 녀석들만 분주하게 숲 사이를 오고 갔다. 상단 임도에서 간벌해 놓은 소나무에서 풍기는 송진냄새, 향이 공기의 흐름에 따라 별 저항 없이 다가와, 마음을 편안하게 이끌어 주었다. 소나무 향은 그윽하면서도 산소처럼 맑다. 소나무는 빛을 유난히 좋아하는 나무다. 그런데 참나무들이 이웃하며 군락을 이루며 자라기 시작하면 활엽의 영향으로 빛이 차단되어 생존의 위협을 받게 된다. 참나무에 쫓겨 상단으로 자리를 옮겨간 소나무는 낙락장송이 된다. 백설이 뒤덮으면 아름다운 설경을 자랑하는 소나무 군락지가 능선길 따라 배열된 길을 지나면 자작나무 숲 사이로 오솔길이 나온다. 아랫단 임도로 내려서는 갓길이 바로 자작나무 숲을 관통하는 길이다. 산림청에선 이 길을 제3의 길이라 부른다.
바람도 잦아든 화(桦)의 숲에서 자신의 요정 대원각을 법정에게 시주하여 길상사를 만든 김영환이 떠 올랐다. 함경도가 고향이었던 시인 백석은 그이의 애인이었다. 백석의 시가 떠오른 것이다. 시인은 백화(白樺)라는 詩에서 이렇게 노래를 불렀다.
산골집은 대들보도 기둥도 문살도 자작나무다
밤이면 캥캥 여우가 우는 山도 자작나무다
그 맛있는 메밀국수를 삶는 장작도 자작나무다
그리고 甘露같이 단샘이 솟는 박우물도 자작나무다
山너머는 平安道 땅이 뵈인다는 이 山골은 온통 자작나무다
자작나무는 버릴 것이 하나도 없는 寒(한)의 영혼을 끌어안고 살아가는 나무다. 자작은 생존을 위하여 새하얀 껍질을 겹겹이 싸매 보온을 유지하고 풍부한 기름 성분까지 넣어 나무가 얼지 않도록 하여 영하 20~30도의 혹한을 이겨낸다. 고작 0.2 mm의 껍질은 잘 벗겨짐으로 종이가 없던 시절 불경이나 성서를 적고 그림도 껍질 위에 사람들은 그렸다. 그래서 그런지 영어로 Birch라 하는데 어원은 글 쓰는 껍질이란 뜻이다. 우리가 흔하게 쓰는 결혼을 華婚(화혼)이나 華燭(화촉)이라 하는데 그 뜻은 전부 자작나무에서 온 것이라 생각된다. 옛사람들은 자작을 화(樺)라 하였고 껍질은 회피(樺皮)라 하였기 때문이다.
평생 서울대 교수를 지내며 나무를 연구한 농학박사 박상진 교수는 나무의 생태학적 접근을 넘어 인문학적으로 우리나라의 나무와 관련된 민족의 삶과 문화재에 대하여 향기로운 글을 많이 남겼는데 자작나무에 대하여 이렇게 정의하고 끝을 맺는다.
자작나무는 햇빛을 좋아하여 산불이나 산사태로 빈 땅이 생기면 가장 먼저 찾아가 자기 구들로 숲을 만들어 빠른 속도로 자란다. 시간이 지나면서 날라온 가문비나무나 전나무 씨앗이 밑에서 자라나 자기 키보다 더 올라오면, 새로운 주인에게 땅을 넘기고 조용히 사라져 버린다. 내 손으로 일군 땅을 자자손손 세습하겠다는 욕심을 버리고 부(富)는 당대로 끝내는 자작나무의 삶은 우리도 본받을 만하다. 수명도 100년 전후로 나무 나라의 평균수명에 훨씬 미치지 못한다. 한마디로 고상하고 단아한 외모처럼 처신이 깔끔하다. 자작나무는 키 20~30m, 줄기 둘레가 한두 아름에 이른다. 집단으로 곧바로 자라며 재질이 좋아 목재로의 쓰임도 껍질 못지않다. 황백색의 깨끗한 색깔에 무늬가 아름답고 가공하기도 좋아 가구나 조각, 실내 내장재 등으로 쓰이며 펄프로도 이용한다. 또 4월 말경의 곡우 때는 고로쇠나무처럼 물을 뽑아 마신다. 사포닌 성분이 많아 약간 쌉쌀한 맛이 나는 자작나무 물은 건강음료로 인기가 높다. 밑변이 짧은 긴 삼각형의 잎이 특징이고, 밑으로 늘어진 수꽃을 잔뜩 피워 바람에 꽃가루를 날려 보내서 수정시킨다.
자작나무 숲을 산책하다. 해의 방향을 가늠하자 정오 부근이었다. 더 머물고 싶었지만, 발길을 이어야 하기에 숲 사이를 걸어 나왔다. 물이 흐르는 습지를 몇 군데 넘으며 행복한 마음으로 걸었다. 이 계절만 지나면 숲은 깊은 정적이 깊어지고 그 위로 백설이 가득 찰 것이다. 그런 후 자작나무 껍질처럼 백설도 겹겹이 쌓여 흙을 덮어 어린 풀들이 얼지 않도록 해 줄 것이다. 그 눈이 다 녹는 날 새봄은 연둣빛으로 이 숲을 치장하겠지…. 숲을 빠져나오자 임도 너머로 갈색 무리가 나를 반겼다. 침엽수종인 낙엽송 군락이었다. 숲에 마지막까지 남는 단풍은 낙엽송이다.
시간 반을 걸으며 오름길로 선택하였던 숲의 상단을 조망하며 내려섰다. 안에서 느끼는 것과 밖에서 바라보며 느끼는 것은 결과가 참 다르다. 사람들도 자신을 밖에서 바라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에게 권고하거나 충고하는 이웃의 말이 참 중요한데도 우리는 보통 싫어한다. 고쳐야 할 부분이다. 인성은 안과 밖의 사정이 같아야 하는데.. 이런 사색을 하며 걸었다. 오늘은 하늘에 구름 한 점 볼 수 없었다. 코발트색이 하늘 전체를 감싸고 있었다. 오전에 넘어 선 동산 마루금이 생각보다 높게 다가왔다. 아무것도 들지 않고 나섰던 산책길이라 허기와 목마름이 동시에 다가왔다. 입구에 세워진 천막 구멍가게에 들러 작은 캔을 하나 들고 벌컥벌컥 들이켰다. 목마름이 가시는 순간처럼 행복한 일도 참 드물다. 갈증이 풀리는 순간은 해결 감과 청량감이 동시에 업그레이드되어 즐거운 포만감이 온몸을 감싸준다. 차에 오른 후 남 전으로 다시 나왔다. 아주 오래전부터 다녔던 집이 생각나 용대리 황태구이 할머니 집으로 내 달렸다. 찬이 정갈하고 강원도 정통 맛이 살아 있는 집이다. 볕이 잘 드는 창가 식탁으로 앉았다. 용대리를 정가 평이라 한다. 설악의 내설악이라 부르는 이곳을 내가 처음 찾았을 때 풍경은 지금 모습과 전혀 달랐다. 세월은 무엇이든 바꿔 놓는 기질이 있는 것 같다. 바뀌는 원인은 대부분 인간 중심 안에 있다. 인간의 욕구대로 자연환경도 자꾸 원시의 형태에서 문명의 형태로 바뀌어 나간다. 자연 그대로가 좋은데….
인간은 끝없는 변화를 시도한다. 용대리 큰 길가에도 집이 몇 채 없었다. 오히려 진부 황태 덕장 쪽이 가옥이 더 많았었다. 큰길은 대부분 흙길이었으며 금강운수 버스에서 내려 백담사 방향으로 들어서면 광활한 들판이 나왔다. 산세와 어울려 들판에는 계절마다 각각 다른 야생화가 산객을 맞았다. 굴피나무로 역어 만든 집 한 채가 있었는데 산에서 만나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약밥 꾼으로서 산에 기대 사는 사람이었다. 그들은 약초꾼이라 하지 않고 약밥 꾼이라 불렀다. 약초도 밥이라 한 것이다. 나는 당시 절대 수긍하였다. 우리가 매일 먹는 찬과 밥도 보면 이로운 약의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굴피 집에 사는사람은 참 순수했다. 군무에서 벗어난 나는 며칠 후 난 혼자 설악을 찾아온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 약밥 꾼 집에 이틀 머물며 고요한 산의 정취에 젖어었다. 눈이 많이 오고 추운 지역이다 보니 집은 낮고 건물 양옆과 앞으로 회랑 같은 공간이 있었다. 측면 공간에는 각종 약초로 담아둔 술 도가가 있었다. 첫날 그와 마주 앉아 밤새 폭음을 하며 그윽한 솔잎타는 향기에 도취되어 갔다.
그리고 며칠 후 설악동을 최종 목적지로 삼고 길을 떠날 때 야생화 꽃밭 사이에 서서 종일 손을 흔들 것처럼 서서 나를 배웅해 주었다. 그러나 그런 일도 오래가지 못했다. 국립공원 관리공단이 만들어지고 사업이 본격화되면서 헐리고 벌판은 주차장으로 캠프장으로 바뀌더니 다시 또 지금의 모습으로 진화하고 말았다. 당시 부지런히 반나절, 족히 걸어야지만 도착할 수 있는 곳이 백담사였다. 약 7km의 산길은 짐을 지고 걷기에 벅찼지만 길 옆 계곡에서 들리는 물 흐르는 소리와 계곡 정취에서 얻는 아름다움에 취해 힘들 겨룰이 없었다. 그러나 나이가 차기 시작하면서 꾀가 생겨 스님들이 비상 통로로 만들어 놓은 절 뒤를 넘어가는 길을 선택하곤 하였었다.
이 길이 백담사로 들어가는 원래 길이었다. 몇 개의 돌을 놓아 만든 징검다리가 유일한 선계와 속계를 구분하는 경계점이었다. 물이 불어나면 나올 수 없어 산사 뒤 언덕을 넘어가는 숨어 있는 길이 있었다. 스님과 오래 묵은 산꾼들만 아는 길이었다. 그리고 속계에서 선계를 보면 산사는 잘 보이지 않았다. 야트막한 언덕이지만 송림 사이로 난 언덕이 백담사를 감춰 놓고 있었다. 싸리 울타리와 싸리문이 참 정겨웠다. 그리고 절의 규모도 작았다. 수렴동으로 가다 만나는 영시암도 영시암도 터만 있었고 오세암이나 봉정암 또한 규모가 암자 수준이었다. 봉정암으로 가기위하여 신도들은 오세암에서 하루저녁 묵은 후 가야동 계곡 윗 길을 이용하여 봉정암을 올랐었다. 당시 백담사의 규모는 아래 사진보다 더 작았다. 지금 절의 규모와 비교하면 엄청난 변화였다.
이 비는 만해님의 시비인데 원래 자리는 징검다리 건너서 바로 앞에 서 있었다. 독립운동가였던 만해, 성북동에 집을 짓고 살면서도 집의 향을 북으로 하였다. 총독부를 마주 보기 싫다는 뜻이 그렇게 한 것이다. 그 집의 이름은 심우장이다. 나라의 광복만을 기다리며 짓어던 시는 읽는 이의 심금을 울린다. 나는 이 비문을 찾기 위하여 산사의 경내를 돌고 돌아 겨우 찾아낸 후 세월의 겁에 휘둘려 잘 보이지 않는 글씨를 더듬거리며 찾아 읽었다.
나룻배와 행인 /한용운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당신은 흙발로 나를 짓밟읍니다
나는 당신을 안고 물을 건너갑니다
나는 당신을 안으면 깊으나 옅으나 급한 여울이나 건너갑니다
만일 당신이 아니 오시면 나는 바람을 쐬고 눈비를 맞으며
밤에서 낮까지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당신은 물만 건너면 나를 돌아보지도 않고 가십니다 그려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시를 읽고 다시 경내를 살피는 중에 절을 나서는 스님 뒷 모습이 잡혔다. 습관적인 행위지만 시를 통하여 남아 있는 감성이 기묘하게 오버랩되어 여러번 셔터를 눌러 두었다.
그리고 찻집에 들어가 차를 시킨 후 들어 오고 나가는 다리가 보이는 곳에 진을 쳤다. 그리고 사람을 기다렸다. 산사를 찾는 이의 마음을 읽고 그 모습을 사진으로 남기고 싶었다. 주제를 사람으로 준비하고 주제가 자리 잡을 공간 비워두고 내내 기다렸지만 보이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여백으로 남겨 두어야 했다. 대신 약간 비틀어 자리를 옮긴 후 빛을 읽고 퇴락한 채 꽂혀 있는 꽃을 상단 좌측에 대신 넣어 두었다.
산사는 저녁으로 갈수록 고요를 더해 갔다. 노루 꼬리 만한 것이 바로 산사의 겨울 하루 빛이다. 찻집에서 나오기 위하여 자리에서 일어서서 나오다 낯이 익은 글귀가 보여 다가갔다. 산사에 머물고 싶은 이유는 청정도량이라는 매력 때문이고 사방을 둘러 보아도 자연의 풍광이나 지세를 거스르지 않고 산사 자신이 자연의 한 몫을 한다는 이유 때문이기도 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아름다운 자연의 여백 안에서 잠시 쉬며 늘 분주하게 굴며 무엇인가 채우려고만 하는 욕심을 덜어낼 수 있는 사색의 완성을 이룰 수 있는 마음을 이끌어 내기 좋은 환경이 너무 좋다. 창밖으로 보이는 어느 보살님 걸음걸이에서 조차 여유로움이 가득하였다.
늘 흠모하고 존경하였던 법정 스님의 시, 기도였다. 여러차례 마음으로 외었다. 마음이 세차게 흔들거렸다. 스스로 반성을 하고 있다는 증거다. 나는 외마디를 질렀다. 그것은 자괴 어린 탄식이기도 하다. 프란치스칸~~ 어쩌구 저쩌구 가당치도 않으면 앵무새처럼 입술만 놀리는 형색이 너무 초라하다. 기도라는 법정의 법문의 내용이 나를 사정없이 내몰고 있었다. 마음의 스승님이시니 승복해야 한다. 나는 선채 조용히 여러번 속독으로 읽은 후 스마트폰으로 찍은 후 산사 다원을 나섰다.
그리고 징검다리가 있던 길을 걸어 산사와 거리를 넓혀 나갔다. 그리고 잠시 돌아서서 산사를 조용히 쳐다보았다. 오랜 사이 백담산사는 옛모습을 잃고 너무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커져 있었다. 아~~ 변하였구나. 이토록 커질줄은..... 그래도 변하지 않은 것은 유구한 진리로서 그자리 그대로 있었다. 산사를 들어서는 길목 즉 속계에서 선계를 들어 가는 입구, 일주문 앞 또는 옆으로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이 꼭 있다. 성전을 들어가는 입구나 문 안쪽에도 성수가 준비되어 있다.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모든 것을 씻어 내라는 의미다. 다른 것들은 다 변해 있는데. 변하지 않은 것은 자비심과 씻으라 하고 무심하게 흐르는 백담계곡 물이었다.
나는 등을 돌려 옹기종기 백담계곡을 가득 메우고 있는 탑에서 눈을 돌려 보지 않고 무심하게 흐르는 물에 시선을 모았다. 무엇인들 쌓아 봐야 전부 허물지는 것을, 쌓음에 집착을 내려 놓고 오로지 산 물에 바람에 씻어라 씻어라하는 소리를 潭이 백개라 百潭 溪谷 이라 부르는 계곡 흐르는 물에 던져 놓고 발 길을 옮겼다. 그리고 추억이 깊게 담겨 있는 백담산장으로 발을 옮겼다.
(신축중인 백담산장 모습)
아주 작은 산사의 이름은 백담사다. 만해 한용운은 나리를 잃은 현실에 절망하며 내포에 있던 홍성의 집을 떠나 정가평 즉 내설악 수렴동 위에 있던 오세암에서 출가한다. 그리고 백담에 기거하며 조국해방에 대하여 늘 염려하며 님의 침묵을 비롯한 조국과 관련된 주옥같은 시를 발표한다. 출가라는 단어는 스님에게만 고정된 단어라는 관념을 깨트린 사람들이 있었다. 도시의 문명과 생업과 가족들과 헤어져 입산하는 이들이 있었다. 그중 스스로 산장을 손수 짓고 산이 된 사람은 윤두선 이었다. 1968년 백담사입구에서 약 220m 위에 있던 숲 속에 산장을 짓는다. 그리고 들어 안아 산장지기 생활을 시작한다. 윤두선 선배가 백담산장을 만들어 산장지기를 하면서 여러 대학산악부나 단과 대학별 백담산장을 찾아 MT를 하고 마등령을 넘어 금강굴, 비선대를 경유한 후 설악동으로 목적지로 등반하는 일이 많았다. 당시 용대리부터 걸어서 이곳에 도착해야 했다. 기슬링을 메고 걷다보면 지쳐 더 이상 오를 수 있는 체력이 바닥이 났다. 그래서 백담산장은 산악인들에게 요긴한 쉼터였다. 이곳에 하루 쉬고 백운동 계곡을 올라 봉정암에서 하루 일박 하거나 소청이나 중청에서 야영을 한 후 대청에 오른 후 하산하였다. 이토록 중요한 산장이 관리권을 82년경 빼앗긴다. 건축물 대장이 없던 백담산장을 인제군에 양성화 시켜줄 것을 줄곧 요청하였으나 거절을 당한 후 인제군에 관리권을 넘기게 된다. 인제군에선 82년경 새롭게 건축하여 운영하다 전두환 대통령 유배 때 경찰경비 숙소가 되어 관리권은 다시 백담사가 쥐게 되고 유배가 끝난 후 약 5년 동안 빈채 남았다. 그 이유는 백담사를 찾는 신도나 설악산을 찾는 등산객이나 모두 용대리 주차장에서 출발하는 버스를 이용하다보니 산장으로서 효용성이 떨어진 것이다. 백담산장의 영화는 버스라는 문명이기로 인하여 퇴색하고 만 것이다. 오히려 수렴동 대피소가 호황을 누리게 된다. 지금은 국립공원관리공단에서 리모델링 후 설악산 자연사 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한국 산하에서 산장의 역사는 미천하다. 그 이유는 깊은 산 어디나 산사(山寺) 즉 절이 있어 산장의 역할을 대신하였기 때문에 별도의 산장이 필요 없었다. 그러나 세월이 바뀌면서 산을 찾는 사람들이 늘어나자 조난을 당하고 목숨을 잃는 일이 종종 벌어졌고 또한 전문 산악인들이 늘어나면서 독자적인 산장을 짓게 된다. 그 대표적인 곳이 바로 북한산 백운대 산장과 백담산장이다. 그리고 외국인 선교사들이 휴양을 목적으로 건축한 노고단 기슭에 세웠던 산장도 지리산의 산장문화를 열게 된다. 산악활동 인구가 늘어나자 심심치 않게 발생된 산악사고는 공화당 정권에서 전국 산 곳곳에 콘크리트와 돌로 짓는 산장을 산악연맹의 협조를 받아 건축하게 된다.
초기에는 산장 지기가 없었으나 시간이 흐르자 도시의 모든 것을 버리고 출가 승처럼 전문 산악인들이 산으로 들어 선다. 그 1호가 지리산 노고단 산장 함태식이고 설악산 권금성에 유창서, 도봉산 도봉 산장 유용서 , 보문산장 배영복씨. 북한산 엠포르 대피소 위에 있던 북한산장은 번동 전씨 등이 산장지기로 자리를 잡아 나간다. 대부분 제도권에서 건축한 산장에 입주하지만 자신의 비용으로 산장을 짓고 60년대 후반에 산장을 개설한 사람은 윤두선 선생이 유일하다. 입소문이 나면서 수많은 학교 산악부원들은 백담계곡 코스를 선호하였다. 설악동에서 출발한 팀도 하산 길은 백담계곡으로 잡는 것이 유행처럼 퍼져 나갔다. 건물의 형태나 시설이 사설 산장이다 보니 산장으로서 기능이 월등했다. 산장문화 초기에 기여했던 전문 산악인들이 바로 위 사진에 있는 사람들이었다.
위 좌측 털보가 권금성 산장지기 유창서 선생이고 그 옆은 도봉산장지기 유용서선생은 유창서의 친형이다. 아래 왼쪽은 설악산 전문 사진작가 김근원선생이다. 학창시절 설악동 가게에서 팔던 흑백 설악산 사진 대부분은 이분 작품이었다. 성동규라는 사람은 한참 후에 설악동에 들어 온 사람이다. 검은베레모 쓴분이 노고산산장지기 함태식 선생이고 그 옆에 계신분이 바로 백담산장지기 윤두선 선생이다.
초기 백담산장 모습.
백담산장 주인이었던 윤두선 선생은 이대 정문 왼쪽 골목으로 내려가면 신촌역이 나왔는데 신천역 부근에 콜롬비아라는 커피점을 자려 놓고 내부 모습을 산장처럼 꾸며 놓았었다. 당시 보기 쉽지 않았던 산악장비였던 자일, 카라비너, 각종 하켄, 래더, 등 암벽장비와 동계용품 설피, 피켈, 고굴, 스키, 스틱 등등 을 배치해 놓고 멋을 부렸었다. 그리고 원두를 이용하여 커피를 내려 주었는데 그 맛은 장안 어느 다방을 가도 맛볼 수 없는 명품이었다. 아마 나의 생각으로는 한국최초 바리스타는 윤두선 선생이 아니였는가 한다. 나는 시간날 적 마다 학업을 끝낸 후 들러 커피를 마시곤 오래동안 머물러 있다 나오곤 했었다. 그리고 나도 언젠가는 깊은 명산으로 가는 길목에 저런 분위기를 만들어 운영하고 싶다는 생각을 갖았었지만 그것은 마음뿐이었다.
운영및 관리권을 인제군에 넘긴 후 윤두선 선생은 혼신을 다해 사랑했던 백담 산장을 떠난다. 그리고 삼둔 사가리가 있다는 홍천군 내면 깊은 곳에( 이 곳은 국가의 변란이 있어도 조금도 피해를 입지 않은 깊고 깊은 산중 안에 있는 곳이다) 살둔 산장을 짓는다. 얼핏모면 백제문화가 깃든 것 같은 불교적 건물로 착각을 들 정도의 미려함을 갖고 있는 건물이다. 이 때 사용했던 목재 대부분은 인제군 백담사 증수공사에 사용하고 남은 목재를 옮겨 자재로 사용하게 된다. 당시 목재 이동 시 산판에서 이용하던 트럭을 이용하였고. 목수들 또한 대목과 소목으로 절을 짓는 노련한 장인들이 달라 붙었다.
목재만을 이용하여 건축한 살둔 산장. 입소문을 타고 산꾼들에게 퍼져 나가기 시작하였다. 백담산장에서 떠난 윤두선 선생을 아쉬워 하던 산꾼들은 이곳에 들렀다가 운두령을 넘어 오대산 등반을 즐기곤하며 인연을 이어나갔지만 백담처럼 자주 찾을 수는 없었다. 그것은 바로 접근성이 좀 떨어졌기 때문이다. (계속)
(현재 백담산장의 모습, 자연사박물관으로 명칭이 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