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대영화사의 큰 이름, 잉그마르 베르히만...
* 스웨덴 필름 아카이브에서 도착한
* 잉그마르 베르히만의 주옥같은 일곱작품, 필름상영!
* 당신 생전에 베리만의 영화를 필름으로 볼 기회가 쉽게 오지 않는다!!
베르히만은 개신교회의 유명한 목사의 2남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권위적이며 이중적인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훗날 그의 영화 속에 나오는 신/종교에 대한 회 의로 표출되곤 한다.(<화니와 알렉산더>)
외스터맘의 팜그렌이라는 학교를 졸업한 뒤 스톡홀름 대학에서 연극을 통해 명성을 쌓는다. 학생 때인 38년부터 113편의 연극작품을 만들면서 연극에 대한 애정을 마음껏 드러낸 그는 이후 1942년 '스벤스크 영화사'의 각본조수로 영화와 인연을 맺고 44년 알프 시외베르그 감독 <고통>의 시나리오 작가로 데뷔, 흥행에 성공하면서 주목을 받는다.
67년 자신의 영화사 '페르소나 Persona'와 '시네마토 그래피 Cinematograph'를 세워 본격적인 작품세계를 펼쳐나간다.
베르히만은 스트린드베리와 입센으로부터 예술관이 형성되었다고 스스로 말한다. 57년 이전 초기작들은 주로 프랑스의 시적사실주의의 영향을 받아 젊은이들을 주인공으로 한 멜로드라마를 주로 만들었으나 그 안에서도 신의 부재 속의 인간의 방황과 죽음의 그림자, 파괴되는 부르주아 가정, 의사소통의 부재와 같은 정서를 드러낸다. 그러나 이후 점차 난해한 주제를 내세운 작품들로 제작의 입지가 줄어들자 영화자금을 구하기 위해 가벼운 코미디물을 만들었으며 (<사랑에 관한 한 레슨>, <여자들의 꿈>, <한 여름밤의 미소>)그로 인한 흥행성공을 발판으로 <제 7의 봉인>을 비롯한 '신의 침묵 3부작'(<산딸기>, <페르소나>)를 내놓는다.
연극으로 출발하여 영화와 연극사이를 넘나들고 오페라를 비롯한 여러 가지 실험적 기법을 도입한 작품들을 선보인 잉그마르 베르히만은 영화사의 흐름이 세워지기 이전부터 자신만의 장르를 만들고 창조해낸 작가이다.
얼마 전 '영화 산업은 매춘산업'이란 말을 남기고 은퇴를 선언한 베르히만. 신과 인간의 관계, 내면으로 향하는 여정과 탐구를 통해 구원과 확신을 찾아내고자 한 진정한 작가 잉그마르 베르히만의 대표작들을 모아서 상영한다.
* 입장료: 놀라지 마시라.. 3500원
* 일정: 2001년 3월 24일 (토) ~ 4월 12일 (목)
* 시간: 1회 11:00 / 2회 1:00 / 3회 3:00 /
4회 5:00 / 5회 7:00 / 6회 8:50
* 시간 및 일정
[상영작]
한 여름밤의 미소 -- A
제 7의 봉인 -- B
산딸기 -- C
처녀의 샘 -- D
어두운 유리를 통해 -- E
외침과 속삭임 --F
가을소나타 -- G
영화를 ‘예술’이라 칭하고자 했던 사람들의 마지막 머뭇거림을 지워주었던 영화 철학자 잉마르 베리만. 그의 영화 7편이 오는 3월24일부터 4월12일까지 하이퍼텍 나다의 감독 주간 영화제를 통해 필름으로 상영된다. <한여름밤의 미소>(1955)부터 <가을 소나타>(1978)까지, 북구에서 날아온 ‘일곱개의 봉인’을 미리 뜯어본다. -편집자
잉마르 베리만(1918∼)은 자신의 창조력은 유년기와의 대화에 연원을 두고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창조력의 기반으로서 베리만의 과거로 돌아가보면 어둠 속에서 떨고 있는 한 소년을 만나게 된다. 루터교 목사인 엄격한 아버지는 죄지은 아들을 따끔하게 벌하고자 그 아들을 벽장 속에 가둬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 ‘못된2 아들은 벽장 속 괴물이 혹시 발가락을 뜯어먹지나 않을까, 하는 생각에 두려워 떨고 있다. 아마도 베리만은 이처럼 지워지지 않는 유년기의 한 장면 속에서 이미 존재의 비밀을 봐버린 듯싶다. 컴컴한 세상 속에서 두려워하고 번민하며 회의하는, 허약하기 그지없는 인간이란 존재의 실상을 말이다. 그렇듯 베리만의 세계는 고통과 내적인 동요와 불안, 그리고 절망과 광기, 자기 혐오로 가득 찬 어떤 세계이다. 베리만에게 영화를 만든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이 절망적인 세상에서 존재의 기반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과정이었다. 그는 그의 세계를 여행하는 우리에게도 영화 속 인물들과 다르지 않을 만큼의 고통스런 경험을 안겨주었고, 또 영화 속에 그려지는 삶과 세상이 그토록 불모의 것일수록 그가 던지는 존재론적 질문들은 더욱더 절실한 것임을 알려주었다. 그런 의미에서 베리만은 영화로 ‘고통의 형이상학’을 논한 드문 시네아스트로 기억될 것이다.
홍석남/영화평론가 antihong@hitel.net
▶<한여름밤의 미소>
Sommarnattens leede/ Smiles of a Summer Night 1955년,
출연 군나르 비외른스트란드, 에바 달벡
지나치게 침울했고 또 지나치게 예민했던 베리만은 어려서부터 유머 감각이 없다는 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사실 이건 아득한 절망의 끝까지 다가가는 그의 많은 영화들을 보고 나면, 굳이 그 자신의 술회를 직접 듣지 않더라도 손쉽게 유추해낼 수 있는 점일 것이다. 그런데 쾌활함의 기질이라곤 전혀 없었을 듯한 그 베리만이 어울리지 않게도 코미디영화를 만들 때도 있었다. 50년대 초·중반, 자신의 말에 따르면 단지 돈을 벌기 위한 목적으로 그는 관객에게 웃음을 선사하는 일련의 영화들을 만들었던 것이다. <한여름밤의 미소>는 베리만의 그런 가벼운 초기 영화들 가운데에서 단연 대표작으로 꼽을 만한 작품이다.
중년의 변호사인 프레드릭은 자기 아들 연배의 젊고 사랑스런 안을 새 아내로 맞아들였으나, 그녀와는 아직도 ‘플라토닉’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상태다. 조언을 구하러 옛 연인이자 매력적인 여배우인 데지레를 찾아간 프레드릭. 때마침 데지레의 현재 애인이라는 말콤 백작이 나타나면서 착종된 애욕의 관계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영화 속에서 누군가는 사랑은 다시 태어나는 삶이라고 하고 또 누군가는 넌더리나는 일이라고 한다. 사실이 어찌됐든 <한여름밤의 미소>는 정말이지 사랑이란 단어가 ‘남용’되는 그런 영화다. 영화 속 주요 인물들은 대개가 사랑에 들떠 있느라 자신들의 어리석음을 알지 못하고 또 보지 못하는 이들이다. 하지만 영화는 결국 그들의 모자람을 호되게 질책하기보다는 교교한 달빛으로 품어준다. 마치 젊은 연인들, 막무가내로 바보인 자들, 그리고 외로운 사람들을 향해 차례로 미소를 지어주는 여름밤처럼.
사랑으로 그 공기를 가득 메운 로맨틱코미디 <한여름밤의 미소>는 작품 내적으로는 베리만 자신보다는 의외로 에른스트 루비치의 세계에 좀더 가까이 있는 듯 보이는 영화다. 그러면서도 베리만의 필모그래피 안에서 이것은 본격적인 베리만적 세계로 이어지는 가교에 해당하는 영화이기도 하다. 이 영화가 거둔 (특히 상업적인) 성공 덕에 베리만은 자신이 꼭 만들고픈 <제7의 봉인>을 촬영할 기회를 어렵게나마 얻을 수 있었으니까 말이다.
▶<제7의 봉인>
Det sjunde inseglet/ The Seventh Seal 1957년,
출연 막스 폰 시도, 군나르 비외른스트란드
“나는 믿음이 아니라 지식을 갈구합니다…. 나는 신이 당신의 손을 내밀며 모습을 드러내길 바라고 있습니다…. 두려운 나머지 우리는 어떤 상(像)을 만들어내서는 그걸 신이라고 부릅니다.” 헛되었던 10여년간의 십자군 원정을 마치고 돌아온 기사 안토니우스 블록이 원한 것은 이 고통스럽고 가혹한 세상에서 신의 존재를 감지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의 간절한 요구에 대답하는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신은 여전히 침묵을 지킬 뿐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과연 존재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단 말인가?
<제7의 봉인>은 지친 몸을 이끌고 귀향하는 기사 블록의 여정을 따라가는 일종의 로드 무비이다. 그의 여정이란 곧 ‘질문의 여정’이다. 자신 앞에 불쑥 나타난 ‘죽음’에 블록이 체스 게임을 제안한 것은 심연의 공포로서의 죽음을 피하거나 미뤄보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무엇보다 그건 신으로부터 정당한 대답을 얻을 시간을 벌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자신의 종말을 유예해놓고 블록이 목격한 것은 흑사병, 고행의 행렬, 불신, 마녀 사냥으로 휩싸인 끔찍한 지옥이었을 뿐이었다. 신은 보여지지 않은 기적 뒤로 숨어 있기만 할 뿐이었다. 베리만 자신이 종교적 믿음에 대해 혼돈스러운 상태에서 만들었다는 <제7의 봉인>은, 그렇게 침묵하는 신이라면 위험하고 또 악한 존재가 아닌가, 라며 기독교적인 신에 대해 도저한 회의의 시선을 던진다.
그 중심 주제란 게 ‘중세적으로’ 너무 나이브하지는 않은가, 또는 그것이 동시대적인 울림을 전해주는가, 하는 문제는 별개로 생각해봐야 할 것이지만, 어쨌든 <제7의 봉인>이 창작자의 진지한 철학이 담긴 ‘사색의 영화’라는 점은 분명하다. 그래서 너무 고루한 느낌이 든다면, 에릭 로메르의 지적을 한번 상기해보면 좋을 듯하다. <제7의 봉인>에 대해 쓴 리뷰에서 그는 이 영화의 가장 뛰어난 미덕은 무엇보다도 이것이 한편의 ‘영화’라는 사실에 있다고 말했다. 비록 이 영화가 추상적인 주제를 다룸에도 불구하고 그런 명상의 출발점이 어떤 추상적인 ‘착상’이 아니라 구체적인 ‘이미지’에 있다는 것이다. 과연 먹구름 아래서 여섯 인물들이 죽음의 춤사위를 추는 황홀하도록 아름다운 장면 같은 경우는 이제 전설적이란 수사가 붙을 만한 것이다.
▶<산딸기>
Smultronst llet/ Wild Strawberries 1957년
출연 빅토르 시외스트룀, 비비 안데르손
잉마르 베리만의 영화 경력에서 1957년은 특별한 한해였으리라고 감히 말할 수 있을 듯하다. 자신의 대표작이자 세계영화사의 걸작으로 꼽히는 <제7의 봉인>과 <산딸기>가 모두 이 한해에 공개되었으니 말이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외형상으로는 확연히 다른 이 두편의 영화는 상당한 친연성을 갖고 있기도 한데, 무엇보다도 둘다 ‘탐색’(quest)의 로드 무비라는 점이 그렇다. <제7의 봉인>에서 기사 블록의 귀향기가 신의 존재에 대한 질문을 던지기 위한 여정이었다면, <산딸기>에서 이삭 보리 교수의 여정은 바로 자기 자신을 ‘발견’해가는 여정이었다. 다시 말해, 그 두 주인공의 여행이란 공히 물리적 이동이라기보다는 영혼으로의 침잠의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는 유의 것인 셈이다.
<산딸기>는 이삭 보리라는 한 노회한 교수가 명예학위를 받으러 스톡홀름에서 룬드로 향하는 하룻동안의 여행길을 뒤밟는다. 이 여정이란 그가 자신의 지나온 삶을 되거쳐가는 과정이다. 현실과 환상, 또는 꿈, 그리고 과거와 현재가 자유로이 접합되는 여정 속에서 그는 자기를 떠난 옛 애인을 만나고 죽은 부인의 부정(不淨)을 목격하며 몸서리칠 정도의 공포와 굴욕을 경험한다. 그리고나서야 그는 사회적으로 성공한 자신의 삶이 결코 인간적으로도 성공한 삶은 아니었음을 깨닫게 된다. 그는 이를테면 베리만적인 ‘리어왕’ 또는 베리만적인 ‘스크루지’ 같은 존재였던 것이다.
베리만은 이 냉혹하고 무정한 이기주의자 보리가 자기 아버지를 닮은 듯하지만 실은 다름아닌 자기 자신의 분신이라고 말한 바 있다. 출세는 했건만 철저히 고립된 실패자인 보리는 당시 베리만 자신의 모습 그 자체라는 것이다(이삭 보리의 이니셜인 IB는 잉마르 베리만의 이니셜과 일치한다). 베리만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산딸기>가 온전히 자신의 영화가 될 수 없었다고 실토했다. 주연을 맡은 빅토르 시외스트룀이 보리라는 인물에다가 그의 경험들을 불어넣고 말았으니 영락없이 이건 시외스트룀의 영화가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하긴 <산딸기>라는 영화 자체가 무성영화시기 스웨덴의 거장 감독이기도 했던 시외스트룀의 <유령 마차>(1920)로부터 많은 영감을 받았을 것이라는 점은 평론가들 사이에서 일종의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지 않은가.
▶<처녀의 샘>
Jugfruk llan/ The Virgin Spring 1959년,
출연 막스 폰 시도, 군넬 린드블롬
북구의 중세 전설을 토대로 만든 <처녀의 샘>은 “신은 과연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제7의 봉인>과 “신은 과연 침묵하고 있다”고 말하는 <침묵>(1963) 사이에 놓여 있는 작품이다. 이건 <처녀의 샘>이라는 영화가 만들어진 역사적 시기의 측면뿐 아니라 신학적인 주제에 대해 이 영화가 취하는 태도의 측면에도 똑같이 해당되는 말이다. <처녀의 샘>은 부조리하게도 순결한 영혼이 오히려 고난을 겪어야만 하고 그런데도 신은 그저 방관하고만 있는 이 사악한 세상을 통탄할 것처럼 진행된다. 순정한 영혼을 지닌 소녀 카린은 교회에 가던 도중 양치기 형제들을 만나 그만 겁탈을 당한 뒤 살해당하고 만다. 이 사실을 안 카린의 아버지 퇴레는 양치기 형제들을 모두 죽인다. 퇴레의 이 ‘잔인한’ 복수는 과연 침묵하고 있는 신을 대신한 정당한 정화(淨化)의 행위였을까? 마지막까지 신의 존재 여부는 증명되지 못했건만 영화는 퇴레가 신에게 용서를 구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처녀의 샘>이 종교적인 주제에 대해 이처럼 다소 모호한 태도를 취한 것은 베리만 자신도 잘 알고 있었던 듯하다. 베리만이 술회한 바에 따르면, 이 영화를 만들 때쯤에 그의 종교적 갈등은 이미 상당히 미약해진 상태였다고 한다. 당시 영화의 이야기에서 자신의 관심을 끈 것은 종교적인 문제가 아니라 강간과 복수 같은 극적인 사건이었다는 것이다. 그래서였는지 카린이 강간당하고 또 퇴레가 복수를 행하는 난행(亂行)들을 영화는 또렷이 지켜본다. 퇴레가 양치기 형제들을 살해하는 장 같은 경우는 아예 카메라 앞에서 이뤄질 정도다. <처녀의 샘>은 세상의 난폭함을 직접적으로 묘사하는 이런 장면들 때문에 개봉 당시 적지 않은 논란을 일으켰다. 예컨대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을 수상한 이 영화에 대해 미국의 평자들 가운데 상당수가 역겹다는 반응을 노골적으로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처럼 일부 장면들에 대해 불쾌감을 갖는 어떤 이들이라도, 전체적으로 이 영화가 풍기는 우울하게 신비로운 ‘북구적’ 정조(情調)만은 쉽사리 거부하긴 힘들 것 같다.
▶<어두운 유리를 통해>
S som i en spegel/ Through a Glass Darkly
출연 군나르 비외른스트란드, 하리엣 안데르손
“인간과 신 사이의 관계를 다루지 않는 드라마는 흥미가 없다.” 유진 오닐의 이 말을 자주 인용했고 또 그것에 동의했던 베리만은 60년대에 들어오면서 신과 믿음의 문제를 본격적으로 천착하는 일련의 영화들을 만든다. 흔히 ‘신앙 3부작’이라고 불리곤 하는 그 영화들은, 베리만의 말을 직접 빌리자면, 믿음의 ‘위축’이라는 주제로 한데 묶일 수 있는 것들이었다. <어두운 유리를 통해>는 <겨울빛>(1962)과 <침묵>으로 이어지는 바로 그 3부작의 첫 번째에 해당하는 작품이다.
작가인 아버지 다비드, 그의 딸 카린과 남편 마르틴, 그리고 카린의 남동생 미누스, 휴가차 외딴 섬을 찾은 이 네명의 가족에게만 전적으로 카메라를 들이대는 영화 <어두운 유리를 통해>는 우선 가족 드라마로 이야기를 펼쳐나간다. 베리만의 영화들이 흔히 그렇듯, 일단 이 가족 사이의 정상적인 ‘관계’를 방해하는 일차적인 책임은 아버지 다비드에게로 돌려야 할 것처럼 보인다. 작가로서 사회적 삶이 중요한 그에게 가족이란 오히려 소원한 것일 뿐이다.
영화는 카린의 정신병이 재발하는 순간을 계기로 이 어긋난 가족에 대한 드라마 위에 종교에 관한 이야기를 덧씌운다. 치유가 불가능한 정신병에 들린 카린은 이제 자기 몸에 신이 들어와 있다고 생각한다. 그게 사실이라면 신은 고통을 동반하는 존재라는 것일까? 어쨌든 베리만은 카린의 ‘붕괴’ 속에서 치유력이 없는 믿음이 붕괴하는 것을 본다. 그리고는 영화의 말미에 가서는 다비드의 입을 빌려 태연스럽게 신에 대한 단순한 ‘진실’ 하나를 이야기한다. 신은 사랑이며 사랑이 곧 신이라는 것을. 바로 이 순간은 이런 믿음이 ‘기적’을 일으키는 순간이기도 하다. 아들 미누스에게 다비드가 먼저 말을 건 것이다! 베리만의 이토록 친절한 과잉설명은 구원을 바라는 그 자신의 바람이 너무나 강렬한 탓이었을까?
▶<외침과 속삭임>
Viskningar och rop/ Cries and Whispers 1971년,
출연 하리엣 안데르손, 리브 울만, 잉그리드 툴린, 카리 실반
베리만적인 세계에서 여성들이 배제된다는 것은 알모도바르적인 세계에서 그런 것만큼이나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물론 그 베리만을 두고 페미니스트라고 부르기는 어렵겠지만, “모든 여성들이 나를 감동시킨다”고 언젠가 베리만이 고백한 것처럼, 그의 우주가 많은 부분 여성들의 세계에 의해 지배되고 있음은 아주 분명한 사실이다. 여성들을 경이로워하는 눈으로 관찰하며 보듬을 때 베리만의 영화들은 특히 미묘하고 불가사의하며 또 매혹적인 것이 되곤 한다. <외침과 속삭임>은 <페르소나>(1966)와 함께 그 점을 가장 잘 보여주는 영화로 첫손에 꼽을 만한 작품이다.
영화는 네명의 여자들, 즉 죽어가는 아그네스를 거쳐 그녀의 동생인 마리아, 언니 카린, 그리고 하녀 안나까지 차례대로 옮겨가며 그녀들의 감정을 섬세하게 어루만진다. 마치 네개의 악장처럼 나뉘어진 이 네 여자들의 이야기는 제각각 애증의 관계로 불가해하게 얽혀 있는 영혼들의 고통스러운 ‘외침과 속삭임’이다(<외침과 속삭임>이라는 이 제목은 사실 모차르트 사중주에 대해 ‘외침과 속삭임’ 같다고 쓴 어느 음악 평론가의 글에서 빌려온 것이다). 죽어가는 이를 둘러싸고 자매들의 의례적인 애정에서 시작했던 영화는 관능적인 열정의 밤을 지새지만 가혹하게도 그들 사이의 진심어린 증오를 폭로하면서 끝나는 것이다.
이 여성들이 가진 영혼의 표정을 잔인하게 드러내기 위해 베리만이 사용하는 중요한 장치는 색감과 거리감이다. 우선 이 영화 속에서는 스산하다고 표현할 만한 스토리와는 극렬하게 대조를 이루는 붉은 색이 자주 우리의 눈을 자극하는 걸 볼 수 있다. 특히 클로즈업된 얼굴 뒤로 보이는 붉은 색의 배경은 시점의 전환과 플래시백을 알려주는 형식적 장치인데, 그것은 또한 우리가 이미 영혼의 내면으로 들어왔음을 은밀히 알려주기도 한다(실제로 베리만이 어린 시절 그림으로 그렸던 영혼의 내면은 붉은 색이었다고 한다). 베리만은 또한 영혼에 다가가는 또다른 특별한 통로로 클로즈업을 활용한다. 이에 대해 프랑수아 트뤼포는 아주 적절하게도 “베리만 외에 인간의 얼굴에 그렇게 가까이 다가간 영화 감독은 없다”라고 쓴 적이 있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건 베리만이 클로즈업을 단지 빈번히 사용하기 때문만이 아니라, 이를테면 마리아를 보여주는 한 장면에서처럼, 거울에 비친 눈가의 주름만으로도 영혼의 권태로움을 낱낱이 투시할 수 있는 비범한 능력을 보여주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외침과 속삭임>은 정말이지 영혼을 표현하는 몇 안 되는 영화 가운데 하나라고 할 만하다.
▶<가을 소나타>
H stsonaten/ Autumn Sonata 1977년,
출연 잉그리드 버그만, 리브 울만, 레나 니만
베리만의 세계에 속한 많은 사람들은 어떤 면에서 보자면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서 재능이라곤 전혀 없는 사람들이다. 서로 소통하지 못하는 사람들, 그래서 고통받으면서도 상황을 바꾸지 못하는 무능력자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인 것이다. <가을 소나타>의 세 모녀 역시 마찬가지이다. 소원하게 지내오던 큰딸 에바와 어머니 샤를로테는 어떤 새로운 국면에 대한 막연한 기대감을 품고 7년 만에 재회하지만 결국 그들은 서로를 진심으로 증오해왔다는 사실만을 확인하고 황망히 헤어질 뿐이다. 마치 상처와 고통과 불행으로부터 구원받는 것은 불가능하기라도 한 것처럼, <외침과 속삭임>의 카린과 마리아, 두 자매 사이의 애증관계는 극단적인 성격과 함께 이들 모녀에게 대물림된 것이다.
베리만의 많은 영화들에서와 마찬가지로 <가을 소나타>에서도 비명을 동반하는, 죽어가는 자의 참을 수 없는 고통이 묘사된다. 샤를로테와 에바가 서로의 증오심을 고백하는 그 시간에 <외침과 속삭임>의 아그네스처럼, 죽음을 기다리는 또다른 딸 헬레나는 침실 바닥에 뒹굴며 애타게 그들을 부른다. 간헐적으로 찾아오는 그녀의 고통은 어쩌면 샤를로테와 에바의 화해를 위한, 일종의 대속(代贖) 경험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부질없게도 고통은 계속되지만 끝내 아무도 구원받지 못한다.
황량한 실내극 <가을 소나타>는 베리만 만년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영화이지만 베리만 자신은 그리 만족스러워하지 않던 영화였다고 한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이 영화는 자신의 영화가 아니라 “유감스럽게도 베리만이 만든 (잉그리드) 버그만의 영화”라는 것이다. 실제로 암과 투병중이던 잉그리드 버그만은 샤를로테 캐릭터에 놀라울 정도로 활기넘치는 신경증의 이미지를 불어넣었다. 이 동적이고 외향적인, 따라서 베리만적인 것과는 거리가 있는 버그만의 연기가 너무나 강렬해서 베리만의 특별한 인장들이 다소 불명료하게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지독한 염세주의자 베리만이 자신의 작품들에 대해 종종 극도의 불만감을 표하곤 했었다는 점을 생각해 본다면, 이 고통에 찬 과도한 자기비판에 우리마저도 현혹될 필요까지는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