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라이카맨 오스카 바르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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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카 바르낙(Oskar Barnack)이라는 한시대의 장인과 라이카라고 명명될 카메라를 그가 어떻게 발명하게 되었는가 하는 이야기는 라이카 사진의 거장인 테오 키젤바하(Theo Kisselbach)가 ‘라이카 책(The Leica Book)이라는 저서에서 언급한 바 있다. 바르낙은 1879년 브란덴부르크 근처에서 태어나 독일 광학산업의 또 하나의 심장부인 예나에서 근무하였고 1891년 웨츨러에 있는 라이쯔사에 들어왔다. 웨츨러는 프랑크푸르트에서 40마일 북쪽에 위치한 인구 5만 2천의 작고 쾌적한 마을로 란(Lalin)강이 중세기 마을과 현대도시를 가로질러 흐른다. 언덕과 나무들은 휴일 휴양지로서 최적의 조건을 이루고 있고 콘 마크르(Korn Markt)에 있는 집의 장식판에는 ‘괴테가 머물렀다’는 자랑스런 문구가 걸려있다. 따라서 라이쯔 왕조와 공장의 창설자는 구태여 언급하자면, 루덜스돌프(Rudersdorf), 엥겔버트(Eugelbert), 켈르너(Kellner)와 벨트(Belthe)가문의 유업을 계승하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라이쯔사의 연륜은 184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
바르낙은 라이쯔사에서 영화카메라의 개발에 몰두하고 있었고, 당연히 거대한 뷰 카메라를 옮기는 고생을 체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 그는 영화용 필름이 스틸 사진용으로 쓰여질 수 있는 가능성을 엿보았다. 그는 영화필름을 사용할 수 있는 작은 카메라를 만들었고 그 결과 꽤 큰 확대가 가능한 고품질의 네거티브를 얻게 되었다. 이것이 그 유명한 라이쯔의 명구(名句)‘작은 네거티브 큰 인화’의 연원이 된다. |
훗날 UR - 라이카로 알려진 프로토타입 카메라는 1913년 바르낙에 의해 만들어졌는데 사실은 정확히 두 대를 만들어 그 한대는 바르낙이 사용하였고 나머지 한대는 언스트 라이쯔 2세 (Ernst LeitzⅡ)가 사용하였다. 그러나 바르낙이 그 카메라를 1914년 봄 미국여행시 사용하였으므로 우리는 당연히 그를 최초의 라이카맨으로 칭하는데 있어 주저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전쟁을 치르면서 그 작은 카메라는 발전의 시기를 놓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식을 얻기 위해 농부와 사진을 교환해야 했던 그 지겨웠던 시절, 바르낙은 그 초기디자인의 결점을 점검했고 필요한 개량계획을 수립해 나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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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카의 처음 이름은 레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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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전 후 카메라는 라이쯔사에서 상품성 논의의 대상이 되었고 31대의 시제품에 여러가지 개선이 행해졌다. 기타 개선점들은 생산제품 모델의 디자인에 첨가될 수 있도록 확실히 해두었다. 상품명에 대한 논의를 거듭한 결과 라이쯔 카메라(Leitz Camera)의 머리글자를 딴 Lei와 Ca를 합성시켜 그 명칭을 결정하였고 초기에는 I를 생략한 채 레카(Leca)로 명명하여 광고를 내보내기에 이른다. |
물론 가장 중요한 논의의 초점은 그 카메라를 과연 생산할 것인가 하는 결정에 관한 것이었다. 그 당시 청년이었던 언스트 라이쯔 3세는 라이쯔사의 이사들과 그 문제를 논의했던 그 시기를 ‘가장 길었던 날들’이라고 회상한다. 카메라를 생산해야 한다는 측과 반대의견을 가진측의 의견은 평행선을 그어나갔다. 카메라 생산을 반대하는 측의 의견은 인플레이션에 대비하기 위하여 사진유리건판을 대량 비축해 두었던 당시 사진기자재 판매상들의 이해를 반영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실제 그 당시에 독일은 심각한 인플레이션을 맞고 있었다. 값싼 35mm필름을 사용하는 카메라는 35mm필름의 폭발적인 수요를 창출해 낸 반면 전통적인 기자재 생산이익을 감소시켰다. 과거 라이쯔 공장건물의 벽에는 1924년 바르낙의 라이카 생산 결정이 이곳에 이루어졌음을 시사하는 현판이 걸려있다. |
공식적인 생산시기는 1925년으로 알려져 있으나 이는 그 해 봄 라이프찌히 박람회에 그 카메라가 공식적으로 대중에 선을 보였기 때문이며 실제는 1924년에 생산되었고 그 해 겨울 몇 대의 카메라가 발주되었다. |
의심할 여지없이 라이카는 그 출발부터 성공을 거두었다. 비싼 가격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고 재고는 없었으며 품질은 최상이었다. 상당한 준비와 독일인 특유의 철저성으로 조심스럽게 생산이 전개되었다. 1924년부터 25년까지 870대의 카메라가 제작되었고 일련번호가 1천대에 도달했다. (첫 생산된 31대는 시제품으로 별도 분류되고 100대 이하의 번호는 사용되지 않았음) 공식적인 명칭이었지만 LEICA란 명칭은 레인지파인더가 내장된 라이카Ⅱ가 나오기까지 카메라에 표기되지 않았다. 단지 각 카메라에는 Ernst Leitz와 D.R.P(Deutche Reichs Patent : 독일의장등록)란 문자 그리고 일련번호가 음각되었다. 번호는 내부 부속품에도 부분적으로 표시되었는데 이로써 훗날 어떤 주요부분이 개량되었는지 점검하기가 용이해진 것이다. |
1926년 생산을 배가하여 1천 645대의 카메라를 제작하였고 대부분 포칼플레인 셔터를 사용한 반면 200여대는 콤파셔터를 채택하였다. 1927년에 이르러 또 한번 생산을 늘려 3천대를 돌파하게 되고 1928년에도 여전히 비약적인 도약을 계속하여 한해 7천대 이상을 제작했다. 1929년에는 적당한 규모로 제작량을 늘려가다가 1930년에 이르러 3만 8천대 이상을 제작하면서 그 절정을 맞게 된다. 1931년도는 모델을 변경한 해로 불황까지 겹쳐서 그 결과 생산량이 1만 1천대에 그치게 되나 1932년 카메라 제작이 전반적으로 재개되면서 매년 평균 3만대에서 3만 5천대의 라이카가 제작되었다. |
라이카의 발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점은 향후 모든 개발의 핵심이랄 수 있는 디자인에서 2가지 개념의 도입이었다. 첫 번째는 1930년에 도입된 렌즈 교환방식이다. (초기에는 카메라에 새겨진 일련번호의 첫 3자리 숫자를 렌즈에 음각시킨 형태로 특정한 카메라에 특별히 맞춰진 일련의 렌즈군에 교환이 국한되었다.) 두 번째는 모든 렌즈에 자동적으로 연동되는 레인지 파인더를 내장하는 것이었다. 모든 카메라 렌즈가 카메라 몸체 사이에 언제나 마음먹은 대로 장착될 수 있도록 플렌지와 필름막사이의 거리가 표준화된 것이 1931년의 일이었고, 그 이후 1932년이 지나서야 그 결합이 효율성을 갖게 되었다. 초기렌즈들도 물론 정확한 등록번호가 확인되고 보정되었으며 레인지 파인더를 부착하게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