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소망
2001년 10월 21일
본문말씀: 히브리서 6: 9-12
6:9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이같이 말하나 너희에게는 이보다 나은 것과 구원에 가까운 것을 확신하노라
6:10 하나님이 불의치 아니하사 너희 행위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으로 이미 성도를 섬긴 것과 이제도 섬기는 것을 잊어버리지 아니하시느니라
6:11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
6:12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
성경은 사람을 건져내기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의료 보험 제도나 국민 연금 제도 같은 것은 이 세상을 사는데 있어 좀 더 수월하기 위해서 있는 겁니다. 결코 우리를 이 세상에서 구출하기 위함은 아닙니다. 사회 제도로서 개인의 인격이 바꾸어지지 않습니다. 사회 제도가 철저하면 철저할수록 인간은 거기에 적응하려고 하기에 오히려 거기서 빠져 나오는데 더 빡빡하게 됩니다.
성경은 구원이 이것하고 상관없음을 천명합니다. 슬슬 나올 준비를 하라는 겁니다. 노아 홍수 때의 구원의 장치는 무엇이었습니까? 방주였습니다. 그런데 노아가 방주를 만들 때 대부분의 사람은 그 값어치를 몰랐습니다. 어떻게 보면 상당히 신기한 일입니다. 사람을 신의 형벌에서 건져내겠다고 만드는 방주가 얼마나 고마운 일입니까.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 방주를 외면했습니다. 왜 그럴까요? 방주라는 것이 그 시대에 꼭 필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 팔았다고 합니다. 따라서 그들은 방주를 믿을 하등 이유가 없었습니다. 오늘날의 사람들의 관심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떻게 잘 사고 잘 팔고, 잘 장가가고 잘 시집가느냐 하는데 있을 것입니다. 여기에 도움되라고 구석구석 마다 작은 모임들이 만들어집니다. 동창회나 계모임 같은 생활은 모두 참여하면 할수록 이 사회에 안정적인 닻을 내릴만한 힘이 됩니다. 그만큼 평안한 여생의 보장과 사는데 위험부담을 작게 만들기 위한 모임들입니다.
그러나 노아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계모임이나 동창회가 이 세상에서 우리를 빼내어 줄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러면 오늘날에서 있어 무엇이 방주 역할을 하는 겁니까? 교회입니까? 국가나 민족이나 가문입니까? 아닙니다. 사랑입니다. 교회나 국가나 민족이나 가문은 모두가 집단적인 성격입니다. 그러나 사랑은 하나님과 나 사이에 독단적인 관계입니다. 즉 너와 내가 힘을 합쳐야 우리가 이 세상에서 구출되는 것이 틈灸?개인적으로도 사랑만 있다면 얼마든지 구원될 수 있는 것입니다. 마치 방주 안에서 홍수 심판을 면한 것과 같이 말입니다.
고린도전서 16:22에 보면,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찌어다 주께서 임하시느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교회가 아니라 사랑입니다. 집단이나 공동체가 아니라 사랑입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면 그것으로 구원 완성입니다. 교회란 그 사랑을 도와주고 봉사해주는 것 밖에 안됩니다.
우리는 이 인간 사회를 살면서 서로 결속력을 다지는데 익숙해져 있습니다. 그런데 의외로 그것이 아니라 "네가 어느 구석에 놓여 살더라도 날 사랑하느냐?"에서 결정됩니다. 사랑이 나를 건져내는 기중기입니다.
오늘 본문 9절에 보니,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이같이 말하나 너희에게는 이보다 나은 것과 구원에 가까운 것을 확신하노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구원이 가깝다고 평가해 줄 사람은 이미 사랑을 아는 사람에게만 해당됩니다. 10절에도 "사랑으로 성도를 섬긴다"는 겁니다. 내 속에 있는 사랑이 천국 가는 우주선입니다. 정말 쉽고 가볍게 생각될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랑은 아무나 갖는 것이 아니라 기적입니다. 이미 우리는 나름대로 세상을 향한 사랑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랑을 제치고 더 큰사랑으로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정말 특이한 현상입니다. 아까 불렀던 찬송가 509장 l절 가사를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네가 어둠 속을 걸어 갈 때에 그 손 못 자국 만져라
주가 참 평안을 네가 주시리 그 손 못 자국 만져라
그 손 못 자국 만져라 그 손 못 자국 만져라
주가 널 지키며 인도하시리 그 손 못 자국 만져라
어둠 속을 걸어 갈 때에 주님의 손 못 자국을 생각하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있습니까? 사람이 어둠에 들어가게 되면 도리어 주님에게 항의하기 바쁘지 십자가의 사랑을 믿는 사람은 참으로 드뭅니다. 이것이 기적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일어날 일입니까?
1절 가사를 봐도 "거친 세상에서 실패하거든 그 손 못 자국 만져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세상을 거칠다고 생각 안하고 있는 사람 누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런 와중에서도 주님의 십자가의 박힌 것을 생각하는 사람만이 정말 사랑의 위력을 아는 자입니다. "어둠이 짙게 몰려온다 할지라도 주님의 손 못 자국 만질 사랑은 나에게 있다"라고 나설 수 있는 자가 진정 사랑을 아는 자입니다. 어두움이 오든 실패를 하든 그것이 무슨 대수입니까? 주님의 사랑만 있으면 이래 사나 저래 사나 아무 것도 아닌데 "나는 꼭 이렇게 살아야 돼"라고 고집을 부리시면 스스로 힘드십니다.
사랑이 약하면 자꾸만 어디에 묶여 사는 자가 됩니다. 사랑만이 있으면 더 됩니다. 그 나머지는 무슨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보면, 참된 사랑에는 반드시 뒤 따라 오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으로 참 사랑이냐 아니냐를 판정할 수 있습니다. 11-12절에 보면,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보면, '동일한 부지런'라는 말이 나오고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진짜 사랑이 있다면 이 세상에 믿을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명심하고 살아야 합니다. 여기서 끈질김과 동일한 부지런함과 게으르지 아니함이 지속될 수밖에 없습니다. 일관성이 있다 이 말입니다.
쉽게 예를 들면, 국토 대장정을 하는 대학생이 있다면, 처음에는 이들은 이 국가와 국토를 내가 사랑하고 끝까지 지키리라 각오하면서 땅 끝 마을에서 저 북쪽 임진각까지 행군에 나섭니다. 그런데 그 사랑이 단단치 못하면 도중에 낙오자가 생기고 군데군데 살고 있는 친척 집으로 빠져 버립니다. "국가 사랑도 좋지만 나는 대전에 사는 우리 고모 집이 더 좋아"하면서 말입니다. 하지만 끝까지 국가와 국토와 민족을 사랑하게 되면 옆에 친구 집이나 친척집을 지나쳐도 돌아보지 않고 끝까지 임진각에 이르도록 완주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세상에 아무 것도 믿지 않을 때,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네가 진실로 나를 사랑하는구나" 하십니다. 교회에서 흔히 장로 투표나 권사 투표에서 떨어지게 되면 분란이 일어납니다. "내가 이 교회에 와서 수 십 년 동안 얼마나 봉사했는데 왜 날라 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내느냐"하는 식이지요. 그러나 진실로 주님을 사랑한다면 온갖 교회 잡동사니를 초월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장로 투표, 권사 투표를 왜 믿었습니까? 믿은 게 잘못이지요. 애당초 믿지 마세요. 믿으니까 실망이 큽니다. 이래 사나 저래 사나 아무 것도 아닌 것을 아는 것, 이것이 사랑입니다. 그러니까 부지런함으로 게으르지 아니하고 하나의 목표로 매진합니다.
그렇다면 사랑이 구체화 된 것이 따로 있는 겁니까? 없습니다. 정말 손에 쥔 체험 같은 것은 믿을 만한 사랑의 대상이 아닙니다. 아무 것도 없는 허공, 그 속에 주님으로 날라 오는 단 하나, 그 약속만이 사랑의 전부입니다. 사랑은, 그 분만 사랑하는 것으로 종결입니다. 더 추가하거나 보탤 필요가 없습니다. 더 추가 할 것이 없다는 이 사실이 우리 마음을 얼마나 홀가분하게 하는지 말로 다 할 수 없습니다.
"중보 기도하게 되면 안 믿는 식구들까지 몽땅 교회에 나오게 된다"는 이 사실을 믿지 마세요. 그냥 주님만 사랑하세요. 그 손 못 자국 만지면 끝나는 겁니다. 더 보탤 필요가 없습니다. 깔끔하게 사세요. 딴 것을 자꾸만 끼어 넣으려고 하지 마세요. 예수님말고 다른 것은 다 빼세요. 어렵고 괴로울 때마다 주님의 손이 못 박힌 것을 생각하는 것, 이외에 무엇이 더 필요합니까? 사람들이란 남들이 하지 못한 것을 하게 되면 마치 훈장처럼 두뇌 속에 저장이 되고 축적됩니다.
이것을 성경에서는 교만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타인에게 분노를 퍼붓는 근거가 됩니다. 과연 사랑은 그 자체만으로 충족한 것입니다. 요한 일서 4:8-10절에 보면,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18절에 보면, "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없나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라는 이 자체를 사랑하는 것이 진짜 사랑입니다. 그래서 딴 것이 더 이상 추가 될 필요가 없는 겁니다. 하늘에서 주신 완벽한 그대로의 사랑입니다. 노아의 인격이나 행실과 무관하게 노아의 방주가 노아의 그 식구를 구원하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사랑이 임하면 그 사랑으로 인해 이 세상에서 건짐 받는 겁니다.
여기에 비해 세상 적인 사랑은 고린도전서 13장에 나오는 내용에 의해서 다 걸려지게 됩니다. 천사를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면 모든 비밀과 지식을 알아도 사랑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며 산을 옮길 만한 믿음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요, 구제와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헛것이라는 겁니다.
그 이유가 뭡니까? 그것은 완벽한 사랑에는 새로 투입될 요소가 없기 때문입니다. "제가 기도하니까 산마저도 옮겨졌습니다. 하지만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저는 오로지 완벽한 주님의 사랑만 생각합니다"라고 하는 자가 진정 참 사랑 안에 있는 자입니다. 사랑은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는 겁니다. 이게 기적이 아니고 되는 일입니까? 윤리나 도덕은 자신을 더욱 훌륭한 인격으로 다듬기 위한 노력에 불과합니다. 이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이처럼 자신을 끊어버리고 과거를 과감하게 잊어버리는 겁니다.
빌립보서 3:13-14절에 보면,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잊어버린다는 말은 내가 사랑할 대상은 이미 확보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이래 사나 아무 것도 아닙니다. 여타의 세상일이 나를 상처 낼 이유가 없이 되는 겁니다. 만질 사랑이 못 자국이 있잖아요. 이것이 동일한 부지런함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가치란, 주님이 주신 사랑을 남에게 보여주는 겁니다. 자기 것을 내놓은 것이 사람 사는 이유가 아닙니다. 자기가 위대해 줄 이유가 없고 심적인 부담도 그만큼 없는 것입니다. 사랑에는 두려움 없습니다. 마태복음 11:29에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주님이 나를 사랑하는 그 사랑만 보여주면 그만이기에 이것보다 더 편한 삶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문제는 잡티가 끼어 들어와 있다는 겁니다. 그것을 빼버리고 시원하게 살아 보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스스로 고민을 자초하는 어리석은 인생을 종결시켜 주시옵소서. 이것저것 없어도 주님 주신 무한한 사랑만을 유일한 보물로 여기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출처:우리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