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문인활동의 역사적 배경과 서정주의 친일 및 신 군부에 아부 행위를 말한다
서정주는 친일문인의 한 예일 뿐, 수많은 친일파들을 알려면 민족문제 연구소를 방문하라.
지금같은 시기는 일차적 악의 근원인 친일문제 청산부터 척결함이 수 순인가 한다.
세계 제일차대전은 1918년 말에 끝나고 이듬해 3.1운동이 봉기했다. 29년에 대공황이 있었고 일제는 31년에 만주 침략, 37년에 중일전쟁을 도발하고 39년 가을 세계 제2차대전 발발에 이어 41년 말 태평양전쟁이 일어났다.
일제가 이 침략 전쟁을 단계적으로 밟는 기간 무단 통치, 소위 문화통치, 민족 말살 통치로 통치 수 순을 밟고 있었다. 가장 악질적 아수라 통치는 37년 중일전쟁 도발로 시작하여 태평양전쟁 수행 중에 본격화했다.
37년 여름 중일전쟁이 발발하면서 일본 拓務省이 약 10만의 한인 노동자를 만주국으로 이동시킬 것을 결정, 일어의 철저 사용을 강요하는 정책을 밀면서 사립학교의 통제강화를 위하여 사립학교 규칙 개정을 공포하였다. 가출옥사상범의 감시를 위한 처우규정을 만들고 조선정보위원회를 설치하고 각도에 전시체제령을 내렸다. 경성군사원호연맹을 발족하였다. 皇國臣民誓詞, 황국신민체조를 제정하고 일황의 사진을 각급 학교에 배부하고 경배케한다.
38년에 들면서 각도에 일어강습소 1천여개를 설치 전 조선인에게 일어를 강습하도록 지시한다. 조선 교육령을 개정 공포하여 중학교의 조선어 과목을 정과목에서 隨意科로 변경하더니 이어 조선어 시간을 아예 수학 실업으로 대체시켰다.. 조선육군지원병제를 실시하고 일본 '국가총동원법'의 조선 적용을 공포하고 각종 토목공사에 부인동원령을 시달하였다. 식량과 전력, 석유 등 각종 자원의 통제 관리를 강화한다.
근로보국대의 조직을 각도에 지시하고 전국에 방공훈련을 실시하고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창립하고 각지방 연맹을 결성하였다. 시국대책 조사회 '조선사상보국연맹'을 조직 사상운동 전력자를 감시하였다. 전국 관공리 교원에게 제복을 착용케 하였다.이 해 가을에 조선 연합청년단 발대식을 가졌다. 이러한 경험들은 해방 정국에서 수많은 단체 결성에 악용되기도 했다.
39년 경방단 규칙(경호단, 소방단, 수방단을 통합하여 경찰 보조기관으로 할동)을 공포 10월에 시행하고 9월 1일에 2차 대전이 발발하고 그날 국민징용(해방까지 45만 명)실시, 창씨개명 등 이 강요되는 가운데 천도교 본부는 20만 신도를 동원하녀 '정신연맹'을 결성하고 전국 대, 고 ,전문교생 조선학생 精神연맹 결성, 일본으로 노동자 공출을 시작되면서 조선유림회는 국민정신총동원운동에 협력할 것을 결의하였다. 또 '조선문인협회' '조선악극단(김정구 이난영)' 등의 친일 문화 단체와 연예인 단체가 결성되면서 친일 행위가 본격화된다.
40년에 들어서면서 창씨 개명, 만주건설근로봉사학생근로대 파견, 국민정신총동원연맹(전시생활체로 생활 검소화 6시 기상, 12시묵도 등을 강요)하고 늦가을에는 위 연맹을 '국민총력연맹'으로 개편, 황국신민화 운동의 강행을 본격화하여 앙양대회 등을 연다. 이 조직은 전국 애국반원에게 미곡공출 勵行과 5억 원 강제 저축운동 등을 벌리고 총력연맹, 사상통일, 생산력 확충 등 3대 강목의 실천요강을 결정 실시하였다.
41년이 되었다. 신문지법 게제제한령, 조선사상범예비국금령, 국방보안법, 국민근로보국협력령, 농산물 공출제도 강행, 학도정신대 조직, 농산물 공출 강제 시행, 농산물통제령이 실시되는 가운데 중등 이상학교 총력대가 결성되고 친일 시인단체 '국민시가 연멩', '조선 영화협회',친일 일어 문예지 ''국민문학' 조선 연극협회(회장 이서구), 이중섭의 전위미술 단체 '신미술가협회'가 창립되었다. 12월 8일 일군이 진주만을 기습 폭격함으로써 태평양전쟁을 도발하였다. 드디어 곧 조선임시보안법을 공포 시행하였다. 그리고 곧바로 신사참배 거부 기독교인 2천여 명이 투옥되고 50여명이 옥사하게 되었다.
42년에는 조선군사령을 공포하고 징병 검사를 실시하고 청장년의 국민등록을 실시하고 연말에 일 각의는 조선징병제도 실시요강을 결정하였다. 잡지 '삼천리'도 '대동아'로 개제하고 친일지로 배반하였다. 조선어학회 기관지'한글'는 폐간해버렸다. 한국어의 교수와 사용은 금지되었다.
43년 보국정신대를 조직 징용을 강화하고 집회결사에 임시보안령을 적용하고 교육령을 개정 大豫. 중학. 실업교의 연한을 1년 줄이고 학도전시동원체제획립요강 시달하고 전시학도 체육실시요강 시달, 교육에관한비상조치령 공포 , 조선식량관리령, 개정국민징용요령, 생산증가노무강화로 유휴노동력의 전면동원과 여자노동의 효율적 이용을 강요하다가 드디어 한국학생의 징병유예를 폐지하고 학병제를 실시하였다. 징병적령을 1년 인하해서 실시하였다. 이런 가운데서도 부민관(해방후 시민회관-국회의사당-현재 서울시 의회건물)에서는 '戰意앙양국민음악대회'가 열렸다.
44년 전쟁은 막바지로 접어들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일본이 항복하리라고 보는 사람은 극히 일부, 일제의 천년만년을 확신하고 있었다. 긴급국민총동원방책요강이 발표되고 전면 징용이 실시되어 광산과 군수공장에 강제 동원되었다. 조선여자청년연성소규정이 제정되고 일요일 휴무제도 폐지되었다.
형사재판도 삼심에서 2심으로 바뀌고 학도군사교육요령 및 학도동원비상조치요령을 발표하고 총독부에 학도동원본부를 설치하였다. 이 때 7월1일부터 1개월 동안 14만5천 6백44명이 동원되었다. 조선 중요물자공단이 설치되고 군수공업생산책임제가 실시되었다. 지원병 후련소는 6년간 1만7천6백 44명을 배출하였다. 조선총독부군무예비훈련소 관제를 공포하고 평양, 양주, 시흥에 훈련소를 설치 운영하였다.
조선총독부학도동원본부규정을 공포하고 국민학교 4학년이상 .대학, 전문학교 동원체제를 확립하였다. 5월9일 여자정신대 경남반을 시작으로 6월8일 경북반, 7월6일 경기반등 ..... 8월23일에는 여자정신대근무령을 공포 시행하여 만 12세이상 40세미만의 배우자 없는 여성을 일본. 남양, 등지로 징용하였다. 일 관헌은 평양, 대전 등 각지에서 성당을 군대용으로 접수하고 신부 신학생을 군대 또는 노무자로 동원하였다. 주기철 목사도 이해에 순교한다. 그런 가운데서도 종교보국회가 탄생한다.
해방의 45년이 왔다. 여름에 박춘금 등 일제주구당인'大義黨'이 창당되고 한달 뒤인 7월24일 이들이 주최하는 연설회장인 서울부민회관에 폭탄 폭발 의거가 있었다. 이는 현재 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이신 조문기 선생님을 비롯한 몇 분들의 의거였다. 8월15일! 일왕 히로히토(裕仁)가 정오에 항복방송을 했다. 드디어 해방이 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잠시 생각해보자. 전 일제 통치시기에 항일 투쟁은 국내외를 막론하고 꾸준히 계속된 반면 친일 행각도 끊임없이 지속되었다는 사실이다. 전자는 고난의 행군이었고 후자는 온갖 영화를 만끽하였다. 혹자는 어정쩡하여 전전긍긍하였다.
해방 후 이승만과 미군정은 하루아침에 친미파로 둔갑한 친일파를 반공의 기수로 삼아 정권의 중심에 둠으로써 '반민특위'의 반일 민족세력이 도륙을 당하고 내전을 치른 현재까지도 그 기본 구도는 변함이 없다. 왜냐하면 미국이라는 외세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고 지금은 군사대국화 하려는 일본이 전방 배치되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현재 우리는 상대의 전략 전술에 대한 대응이 만족스럽지 못한 상태이다. 이 시점에서 악의 근원인 친일문제 청산부터 척결함이 수 순인가 한다. 이일에 일조가 될까하여 이 글을 올린다. 그의 작품 몇 편을 소개함으로써 그에 대한 평가는 독자들의 판단에 맡긴다.
뻔뻔스런 미당 서정주,
마쓰이(松井)伍長頌歌에서 전두환 생일에 낭송한 아부 訟詩까지, 그가 자라나는 이 땅의 젊은이들을
白痴로 만들거나 오도된 식민지 노예로 길들이고 催眠하고 洗腦한 죄는
그 어느 것으로도 씻을 수 없다. 차라리 고문하고 가두고 총살하는 그 어느
잔혹 행위보다도 民族正氣를 말살하고 역사를 대물림할 민족 새 세대에게 가한
삐뚤어진 정신이상의 가학행위는 千秋로 그 죄악을 씻을 길이 없다.
그래서 일제에 아부하고 미국에 아부하고 그 것도 모자라 광주 학살의 주범인
무자비한 군사 독재자 전두환에게까지 아부의 꼬리를 살랑대며 입질을 하다니
그래서 反獨裁 民主와 反事大 自主와 反戰 平和統一을 질식시켜 압살하려는 자들을 길러내는데 공헌하였다.
나 이제 일제 전쟁 시기 乘勝長驅 千年萬年 일제의 영화를 확신하고 내깔긴 그의 시와 글을
여기 적어서 사람들의 공개 심판을 받고자 한다.
《서정주의 친일 작품들》자료 : 민족문제 연구소
1.<최체부의군속지망>
최체부는 황해 가까운 남선의 어느 읍네 우편소서 배달부를 하였으나 읍네에 편지를 돌리는 배달부가 아니라, 읍네에서도 십리 씩 이십리씩 혹은 삼십리씩 걸어들어가야 하는 산골과 바닥사의 적은 마을들을 걸어서 돌아다니는 배달부였다.
나이는 서른 한 살. 키는 뭐 그저 나즈막한 것이, 뚜벅뚜벅 땅을 드디고 걸어가는 것을 보면 그래도 여간 든든해 보이지 않었다. 그가 스물 다섯 살 때의 일이었다. 읍네 보통학교에서 열린 운동회 날 오후의 마라톤에 최체부는 단언코 참가 하야 한번 뛰어본 일이 있었다. 그러나 꼭 일등을 할 작정으로 덤비었었건만 결과는 꼴찌에서 둘째밖에 되지못했다. 체부 노릇을 한 후에 그가 운동회에 나와본 일은 이것이 아마 처음이요 끝이었다. 그뒤부터 아예 그는 운동회 같은 데에 나갈 생각은 꿈에도 내지 않고 그저 뚜벅뚜벅 항상 걸어다니며 그의 맡은 직책에 충실해왔을 따름이었다.
집에는 한 눈이 먼 늙은 어머니와 국민학교 2학년에 다니는 아들 하나가 있을 뿐이었다. 그의 안해는(그의 안해는 어디로 갔느냐고?)이상하게도 그가 국민학교 운동회의 마라톤에 참가하든 해의 가을에 이 세상을 떠났다. 본래가 외아들인 그에게는 형제도 자매도 없었다.
최체부는 늘 해보단은 일즉 일어났다. 일어나서는 비록 쓰러저가는 그의 집이었으나 마루도 닦고 뜰도 쓸고 하였다. 어머니가 아침밥을 짓는 것도 돌보아주고, 늘 자기보단은 조금씩 늦게 일어나는 아들놈의 옷도 입혀주고 하였다.
그러는 동안에 해가 뜨면은 최체부는 무슨 일을 하다가라도 일을 쉬이고 넹큼 배달부의 옷저고리를 찾어 입고 마당가에 나와 서서 동쪽을 향해 눈을 모으며 「도시오!」하고 그의 아들 놈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면 도시오는 어디에 있다가라도 아버지의 소리를 용하게는 알아듣고, 「하잇」그렇게 군대식으로 대답하고는 역시 좀 떠러졌으나 댄추는 다섯 개 고루 갖춘 교복을 떨쳐입고 그 아버지의 곁에 나와서 나란히 선다.
「규-죠-요하이!」그러나 이렇게 호령을 부르는 것은 아버지가 아니라 그의 아들이었다. 사실은 규-죠-요하이를 맨 처음 시작할 때는 최체부가 호령을 불렀었으나 그는 늘 구-조-요하이라고 틀린 발음을 하고 있다가, 도시오가 2학년이 된 새학기의 어느날 톡톡히 한번 핀잔을 먹고는 아들에게 그 책임을 맡긴터였다.
규-조-요하이가 끝날 무렵에는 어머니는 언제나 조촐한 밥상을 보아 놓고 방에 앉어서 아들과 손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최체부는 실상은 이 규-죠-요하이를 처음 시작할 때는 그의 늙은 어머니와도 같이 하려한 것이었으나 몇 번 권고해도 그의 어머니만은 도모지 자기의 마음대로 되지 않었다(벌써 늙으셔서 허리도 잘 궆으려지지 않을테니까 우리 둘이 대신 어머니의 몫까지 하면 되겠지). 최체부는 생각하고 그의 어머니만은 단념하는 수밖에 없었다.
하기는 아침밥을 마치고 우편소에 출근할 때 마닥 소장이 「오늘도 규-죠-요하이를 했나?」하고 묻는 것이 그 중에도 「가족들이랑 가치했어?」하고 묻는 것이 최체부에겐 처음에는 여간 괴롭지 않었다. 그래 한동안 그는 아침에 출근하여 소장을 때할 때 마닥 얼골을 붉히고 지내였다. 그러나 여러 날이 지내는 동안에 그는 이래서는 안될 일이라 생각하였다(바로만 말하면 소장도 알아 줄 것이다. 못 알아 줄 리가 없다). 이렇게 생각하고 용기를 얻은 그는 어느 날 아침 출근하자 바로 소장이 미처 뭐라고 묻기 전에 「소장님! 사실은 소장님. 즈이 집은 어머니와 제 자식과 저와 세식구뿐인데, 제 자식과는 소장님이 말씀하신 바로 그 이튿날부터 꼭꼭 해가 마악 뜰려고 할 때 마닥 구-조-요하이를 해왔습니다마는 어머니만은 너무 늙으셔서 제맘대로 안됩니다. 자식과 둘이서 어머니 몫까지 정성을 드린다고 생각은 하고 있습니다만」하고 고개를 숙이였다. 그러나 그의 생각과 같이 소장은 역시 그의 마음을 알아주었다.
「고맙다. 그렇게 말해주는 네 정직함이 고맙다. 아들과 둘이서 만이라도 끝까지 그 정성을 잊지말고 해주기 바란다」하고 소장은 오히려 그를 칭찬하고 격려까지 해주는 것이었다. 이리하야 그는 비로소 마음의 무거운 짐을 네리우고 부끄러웁지 않은 얼굴로 우편소에 출근하야 그의 맡은 직책을 꼬박꼬박 이행할 수가 있었다.
최체부가 배달을 맡은 구역은 상하면(上下面)이라는 데와 해리면(海里面)이라는 데의 두 개의 면(面)이었다. 상하면은 왼통 산골 속에 있는 면이요, 하리면의 동리들은 대개는 바닷가에 있었다. 최체부는 이 상하면과 해리면을 하롯씩 번갈어 다니면서 배달을 하였다.
깃수일(奇數日)날. 그러니까 하롯 날이나 사흔 날이나 닷새 날이나 그런 날. 상하면의 면청이 있는 「알뫼」란데 와서 배달을 하고 나면 대개는 점심때가 되었으나, 늦봄으로부터 여름철에 접어드는 긴긴해에는 그건 아침술참 때 ―즉, 열시 반이나 열한시도 되지 못했다. 그럼으로 우리의 최체부는 낮이쩌룬 가을과 겨울에는 늘 「알뫼」의 어느 국밥 집에서 점심을 먹었으나, (그러니까 국물을 죄끔 거저 얻거나 한 오전어치쯤 사서 싸가지고 간 벤또를 먹었으나) 봄과 여름에는 흔히 마을도 없는 산골을 지내다가 혼자 바위 우에 앉어서 적적히 먹었다. 배달을 시작하던 처음 얼마 동안은 최체부에게는 이렇게 먹는 점심이 좀 적막하였다. 그러나 날이 지내 그 해가 겹치는 동안에 그건 벌써 아무렇지도 않었다. 아무렇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건 누구네 국밥집에서 국물을 죄끔 얻어서 먹는 것 보단도, 누구네 사랑에서 깍뚝이 같은 걸 죄끔 얻어서 먹는 것 보단도 훨씬 나었다.
최체부가 바위에 걸터 앉어서 점심을 먹고 있는 상하면의 산골에서는 참, 별에별 새소리며 벌레소리가 한꺼번에 쏟아져 흘렀다. 별 기는 즘생, 나는 즘생들이 다아 뵈였다. 「머리 곱게 곱게 빗고 싀집 가-」하고 우는 것이라고 들었기 때문에 귀를 기우려 보면 아닌게 아니라 최체부의 귀에는 아직도 꼭 그렇게만 들리는 꾀꼬리 소리며, 진달래 꽃 때에는 낮에도 우는 두견새 소리며 큼직한 두루미, 자잘한 미영새, 할미새, 그밖에 이름도 모를 여러 가지 새의 무리들, 흰나븨, 노랑나븨, 남빛나븨, 범나븨, 그 밖에 이름도 모를 여러 가지 나븨의 떼들. 최서방은 각금 대티가 가려워져서(개미가 들어갔나? 이가 있어 그러나?) 각금 각반을 클르고 디려보는 때가 있지만, 그러한 때는 문득 써늘한 동아뱀이란 놈이 반쯤 풀섶에 묻힌 그의 대리를 스치고 지내가는 일도 있었다. 그러면 최체부는 「이녀석이 까불긴 왜 까불어? 조심해 댕기지 못하고? 응? 좀 조심해서 천천히 댕기지 못하고?」 마치 즈이 어린놈이 나타일르듯이 천천히 중얼그리였다.
그러나 이렇게 기고 날고 우지짖는 즘생들에게까지 우리의 최체부가 말을 걸기 시작한 것은 그가 국민학교 운동회에서 마라톤에서 꼴찌로부터 줄째를 한 후에, 그의 안해가 이 세상을 뜬 뒤에도 훨씬 좀 때가 지내서 부터였다.
해리면의 면사무소가 있는 곳까지는 우편소에서 천천히 걸어도 한시간쯤 밖에는 걸리지 않었다. 거기다가 해리면사무소에는 일즉이 그와 국민학교(즉 그전의 보통학교)를 가치 졸업한 동무가 하나 서기로 있었고, 또 그곳 학교의 교장인 「다까하시」 선생은 최체부의 재주를 누구보단도 애껴주었던 그의 보통학교 시절의 은사였다(좀 진작 말할 걸 잊어버렸으나 최체부는 보통학교 시절에는 세 해를 우등생이었고, 육년간 개근상장을 받은 사람이었다).
그러기에 지금은 사실이 좀 고독한 최체부는 깃수보단도 해리면에 나가는 웃수일을 더기대리였다. 면사무소와 학교에 우편물이 한가지도 없는 날이라곤 없는 까닭이었다. 신문이라도. 그래 먼저 면사무소를 찾아가서「우편입니다」소리를 치며, 그 말을 잘 듣지 않는 유리 미닫이를 열고 우편물을 디리 밀면서 동무가 앉어 있을 자리를 보면, 동무는 행용 거기 앉어서「너 왔구나」할 때도 있고,「오늘은 좀 늦었구나」할 때도 있고, 그렇잖으면 그냥, 보통학교다닐 때에 자기를 보고 웃어뵈이던 것처럼 한결같이 웃어뵈이기도 하고, 어떤 때 출장을 나가고 없을 때엔 그의 「요꼬후에」만 한자루 사무보는 책상 한편에 놓여있기도 하였다. 그러면 우리의 최체부는 그 「요꼬후에」를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벗을 만난 것처럼 웃고 안심하고 돌아갈 수가 있는 것이다. 그는 그 길로 은사가 있는 학교로 간다. 그러나 스승은 벗과는 달러서 꼭꼭 뭐라고 말을 걸어주거나 웃어주는 일은 없다. 그렇지만 역시 최체부의 얼골이 알아보게 여웻다거나, 속에 걱정을 지니고 있을 때라거나, 그런 때에는 틀림없이 스승은 그걸 알아채고 「웬일이냐?」고 간단허나 역시 지키고 있었던 음성으로서 물어준다. 최체부에겐 그게 무한히 기뻤다. 감기를 앓고 난 후이면 그 감기가, 걱정이 속에 쌓여있을 때는 그 걱정이 모조리 씻기여 간 듯이 기뻤다. 이러헌 때는 최체부는 차라리 속으로 노래를 부른다.
육자백이나 새타령이나 그런 것을 속으로 부르면서 벗과 스승이 있는 마을을 뒤로 두고 조그만 산을 하나 넘어가면 바다가 보인다. 여기에서부터는 최체부는 차라리 육성을 뽑아 입에서 나오는 대로 멋들어지게 한 번 육자백이를 불러보기도 한다.
어디를 갔다가 인제 오느냐 너 어딜 갔다가 인제 오느냐 얼시구나 절시구 절시구나 좋을시구.....
그러나 물론 최체부가 이렇게 노래부르는 것을 아무도 본 일은 없다. 혼자 갈 때에 한해서만 부르는 까닭이요 또 벌서 그 산 모롱의 근처에 사람 기척만 있으면 어데론지 자최도 없이 스러지는 산울림만양으로 노래는 자최도 없이 사라지고 마는 까닭이다. 최체부가 바닷가의 마을로 내려가면 바다가 흥성흥성할 때는(사실이 또 바닷가란 제철을 만나면 행용은 흥성한 것이지만)마을 사람들은 만주나 내지에 가있는 아들의 편지만 한장 가지고 가도 곧잘 체부를 붙들고 점심을 먹고 가라고도 하고, 막걸리를 마시라고도 하였다. 그러나 우리의 최체부는 담배도 술도 할 줄을 몰랐다.
뭐, 밥도 그렇게 많이 먹는 편도 아니었으나 역시 정으로 주면 고맙게 얻어도 먹었고, 그 중에도 생생헌 생선 갈치 토막을 구어주는 것은 맛있게 먹었다. 「체부, 그래 하루에 몇십리씩이나 걷능기라우?」하고 그 자리에서 누가 물으면, 그는 그냥 생선갈치를 젓갈에 집어든대로 「한 칠팔십리 되는가....」하고 흥미없는 대답을 할 정도로 그걸 먹는걸 그렇게 좋아하기까지 하였다. 「오매! 체부가 괴기는 잘먹네!」 「날마닥 그렇게 걸어다니면 다릿심은 좋겠네!」 「좀 팍팍할 때도 있을걸? 팍팍하지라오?」그러나 점심과 고기를 정으로서 대접한 그들이 이렇게 짓거리고 물어댈때에는, 최체부는 뭐라고도 대답을 하는 일이 없었다. 그저 수긋하고 일어서서 「잘먹었구만요....」진정으로 고마운 얼골로 한마디를 드뇌이고는 다시 자기의 배달길을 떠나고 떠나고 할 뿐이었다.
그러나 늘 혼자 걸어다니기 때문에 좀처럼해서는 심심해할 줄도 모르고 뇌곤할 줄도 모르는 최체부게에도 일없이 빈 가방을 둘러메고 돌아가는 길만은 수얼찮이 심심하였다. 아니 이것도 8년이 되고 9년이 되면서부터는 사실은 심심할 것도 없이 되었다. 이렇게 그가 하로의 배달을 마치고 집에 돌아올 때는 대개 해가 진 뒤였다. 그것은 해리면을 다녀올 때에도 상하면을 다녀올 때에도 늘 그러하였다.
집에 들어가면 맨 먼저 도시오의 국어독본을 읽는 소리가 들리고 그 다음엔 희미한 석유 호롱 밑에 아들인 자기의 밥상을 채려놓고 기다리고 있는 한 눈이 먼 어머니의 얼골이 보이었다. 「다다이마」하고 최체부는 어떤 때, 도시오에게 보단도 어머니를 보고 배달부의 정모를 벗으며 나즉이 국어로 이렇게 소리쳐 본다. 그저 「어머니!」하고 한번 불러보고 싶은 최체부의 고독한 심정을 여러분은 알 것이다. 그러면, 어머니는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이상스럽게 찌푸려진 얼골을 해보이며 「오늘도 그 바위에서 점심 먹었냐?」하거나, 「오늘도 갈치 얻어먹었냐?」하거나 두 가지 중에 한 가지를 물을 따름이었다. 그 물음에도 최체부는 요즘 좀처럼 대답을 해보이는 일이 없다. 그는 그저 아무말도 없이 저녘밥을 마치고 나면 「도시오 오늘 복습은 끝났나?」하고 역시 국어로 아들에게 다짐을 받고는, 그제서야 안심하고 비로소 하롯동안 띠였던 눈이 감기는 것이었다.
지루한 봄이 지내고 여름이 들 무렵 바로 우편소 앞인 경찰서의 게시판에는 「육군 군속 모집」이라는 붉은 글씨의 새로운 게시가 붙었다. 최체부도 물론 그것을 보았으나 처음에는 최체부에게는 그것은 그렇게 까지 유심히 보여지지는 않었다. 그러나 그렇게 보여지지 않은 걸 최체부는 나중에 뉘우쳐야 했다.
그 게시를 본지 며칠이 지낸 어느날 해리면에 배달을 나가서 면사무소엘 들리니, 마침 자리에 앉어있던 소학 동창인 그정다운 벗―가네무라군은 뜻밖에도 웃음 대신에 손짓을 하며 잠깐 들어오라고 하였다. 들어오라고 해서 가방을 문간에 부려놓고 그 옆으로 가니, 동무는 닷자 곧자로「나! 육군 군속을 지원했네! 우리 면에서는 이번엔 별로 나갈 사람이 없어서 내가 지원했네!」하고는 곧 얼골이 붉으레- 상기가 되었다. 말주변이 없는 최체부는 자기도 벗을 따라 얼골이 잠깐 후끈그려졌을 뿐, 아무대답도 충고도 주지는 못하고 헛되이 다시 그의 배달가방을 주서메고는 면사무소를 나왔다.
그는 근처의 배달을 마친후에 일즉부터 자기를 알아주던 스승이 있는 학교로 갔다. 그는 학교의 사무실 문을 열면서 웬일인지 오늘만은 「선생님!」하고 그의 스승을 불렀다. 그러나 스승은 한 손으로 이마를 고이고 무슨 생각에 잠겨있는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었다. 「선생님!」하고 최체부는 두 번째 스승을 불렀다. 그제서야 스승은 간신히 이마에서 손을 떼이고 이쪽을 보기는 하였으나 「뭐야?」하고 퉁명스럽게 한 마디를 물을뿐, 그전과 같은 얼골을 하여주지는 않었다. 더구나 자기는 요새 좀 아펐고 마음속도 여러 가지로 괴로운 것이다. 스승은 왜 「웬일이냐?」고 하고 그전같이 모든 것을 다 아는 얼골로 자기를 보지않는 것인가. 최체부는 아무래도 거기에서 그래도 발걸음이 떨어지지가 않어 함참동안을 우두머니 서 있었다. 그랬드니 선생은 의외에도 「아우가 전쟁에 나가 전사하였다! 나도 나이가 늙지 않으면 당장에라도 나가겠다만!」하고 다시금 왼손으로 이마를 고여버렸다.
최체부는 이 자리에서도 여전히 아무말도 없이 물러나오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바다가 보이는 산모롱을 올라설 때에도 아무 노래도 나오지는 않았다. 그날은 또 이상히도 가치 뭐라고 이야기라도 하고 갈 동행하나도 없었다. 최체부는 그 바닷가의 맨 처음 마을에 당도하도록 까지 웬일인지 벌써 여섯해 전에 죽은 그의 안해의 일만 생각하고 있었다. 마을에 다어서도 그는 마을 사람들이 권하는 점심도 물리치고 안해의 얼골을 그려보고는 바다를 보고, 또 그려보고는 바다를 보고 걸어갔다.
그러는 동안에 어디로 어떻게 걸오온 것인지 벌써 해리면의 배달은 다아 끝나고 자기의 어깨에는 빈 가방만 털레털레 매여달린 채, 해는 아직도 해리면이 또 하나가 있어도 넉넉히 배달할만큼 길게 남어 있었다.
최체부의 걸음은 한없이 느리었다. 그에게는 이제까지 자기의 종사하는 배달부의 직업이 이렇게도 누추하게 느껴진 적은 없었다(아들도 공부하고 어머니도 먹여살리고 나도 되도록 단 한시간이라도 기를 써보고 살다가 죽을 그런 일은 없을까? 어디 없을까? 가만 있거라. 나도 가네무라 만양으로 군속을 지원할꺼나? (나라를 위하여서.....) 이렇게 생각하면서 아직도 터덜터덜 걸어가든 최체부의 걸음은 해리장터에 다다르자, 뜻밖에도 일즉이 그의 십년이 넘는 배달의 생애에서도 찾어보기가 어려우리만큼 굉장히 빨라져서 동쪽을 향해 달리여 갔다.
뜻밖에도 그는 오랫동안 가지않던 그의 처가(妻家)엘 가보고 싶어진 것이다. 최체부의 처가가 있는 곳은 해리장터에서 동으로 십리쯤을 가면 성내면이라는 데에 있는 「미린내」라는 마을이었다. 뜻밖에 찾어온 홀애비 사위를 맞이하야 장모는 오랜만에 또 한번 물음바랑이 벌어졌다. 그러나 최체부가 보러온 것은 아니들으러 온 것은 이러한 장모의 울음도 서름도 아니였다.
최체부는 뜻밖에 닷자곧자로 장모를 향하야 「처제(妻弟)는 있는 기라우?」하고 모를 질문을 하였다. 「왜?」하고 장모는 물음을 걷 거두고 사위의 얼골을 보았으나 무엇을 알아챘는지 못알아챘는지 「순득아!」하고 지금은 단 하나뿐인 그의 셋째딸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나 최체부가 절박한 듯이 찾는 그의 처제를 꼭 무슨 방년의 처녀로나 알어서는 안된다. 최체부는 안해가 되었던 여인이 큰 딸이요 그 밑에 출가한 둘째 딸과 큰 아들, 둘째 아들, 그 다음에사 나은 셋째딸인 순득이는 인제 겨우 열네살인 소녀로서 국민학교 육학년생의 단발머리인 것이다.
순득이는 어머니의 부름에 곧 들어와서 형부에게 공손히 인가를 하였다. 아! 보니, 그건 죽은 최체부의 안해 그대로다. 아직도 어린애였만은 최체부는 그 단발머리를 향해 「공부 잘 하는게라우? 요새는 더워서....」어쩌고 저쩌고 하여쌓드니 「처제는 헤이다이상이 좋든게라우?」하고 실오 엉뚱한 질문을 하였다. 「이이데쓰.....」하고 소녀는 조용히 대답하였다. 소녀의 입에서 이 말이 떨어지자 최체부는 빙그레하고 한 번 웃었다. 그러드니 불쑥 일어서서 그의 장모에게 작별인사를 올리고 신을 신기도 바쁜 듯이 그의 사는 읍네를 향해 처음 기세와는 달리 또다시 천천히 걸어갔다. 그러나 그것은 태연한 걸음걸이였다. 그러나 그것은 태연한 걸음걸이였다.
이튿날 최체부는 여덟시가 되어도 우편소에 출근하지 않었다. 그러나 여덟시 반이 되자 돌연히고 그의 얼굴은 경찰서에 나타나서 한 장의 봉투 편지를 우께쓰께에 바쳤다. 절수가 안붙은 걸로 보아 배달편지가 아님은 물론이다. 겉봉에는 「경무주임전」이라고 씨워있었다.
드디여 이 편지를 떼여볼 경무주임은 들고 보든 손이 떨리여서 그걸 책상 우에 떠러트렸다. 그건 아직도 온전히는 마르지 않은 최체부의 피로서 적은 「육군군속 지망」의 탄원서였다. 「덴노헤이까이 반사이!」하고 큰 획으로 맨 처음 줄을 아로색인 밑에 신문지를 두쪽에 낸 것만헌 백로지우에 탄원의 문구가 그득히 씨워져 있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최체부의 소원은 마침내 관계 관원들을 울린배 있어서, 그의 벗인 해리면사무소의 가네무라군과 가치 얼마 후에 두 사람은 군속이 되어 먼 남녘나라로 떠났다.
최체부는 떠난달부터 꼭꼭 그의 집에 돈을 부치여, 집안은 오히려 그 전보단 살기에 군색지 않고, 마을사람들의 끝없는 호의와 존경속에서 최체부의 어머니도 손자를 따라 아침해가 떠오를때면 「규-죠-요하이」를 하는 갸륵한 습성이 생기었다. (8월 22일)
『조광』 1943년 11월
2.<헌시:반도학도특별지원병제군에게>
정면에서 눈을 돌릴 수는 없느니라 그리움에 젖은 눈에 가시를 세워 사랑보단 먼저 오는 원수를 맞이하자
유유히 흐르는 우리의 시간이 이제는 성낸 말발굽 뛰듯 하다
벗아 하늘도 찢어진 지 오래여라 날과 달이 가는 길도 비뚜른지 오래여라 거친 해일이 우리와 원수의 키를 넘어선지 우리의 뼈와 살을 갈기 시작한 지도 벌써 오래여라
지극히 고운 것이, 벗아 우리 형제들의 피로 물든 꽃자줏빛 바다 위에 일어나려 아른아른 발버둥을 치는도다. 우리 혼령으로 구단(九段) 위에 짙푸를 사랑에, 사랑애 목말라 있도다
정면에서 눈을 돌릴 수는 없느니라 그리움에 젖은 눈에 가시를 세워 사랑보단 먼저 오는 원수를 맞이하자
주사위는 이미 던지어졌다 다시 더 생각할 건 절대로 없었다
너를 쏘자, 너를 쏘자 벗아 조상의 넋이 담긴 하늘가에 붉게 물든 너를 쏘자 벗아! 우리들의 마지막이요 처음인 너 그러나 기어코 발사해야 할 백금탄환인 너!
교복과 교모를 이냥 벗어버리고 모든 낡은 보람 이냥 벗어버리고
주어진 총칼을 손에 잡으라! 적의 과녁 위에 육탄을 던져라!
벗아, 그리운 벗아, 성장(星章)의 군모 아래 새로 불을 켠 눈을 보자 눈을 보자 벗아...... 오백 년 아닌 천 년 만에 새로 불을 켠 네 눈을 보자 멋아......
아무 뉘우침도 없이 스러짐 속에 스러져 가는 네 위엔 한 송이의 꽃이 피리라 흘린 네 피위에 외우지는 소리 있어 우리 늘 항상 그 뒤를 따르리라
『매일신보』 1943년 11월 16일
3.<스무살된벗에게>
어디에다가 우리의 몸을 던질까, 던져야 할까, 아니 결국은 던지고 있는 것인가를 생각해 보지.
우리가 애기적에 걸음을 배운 것은 벌써 밖에로의 지향이었다. 그러기에 겨우 반신반의의 위태로운 걸음으로도 어린것들은 늘 밖으로만 나가고 싶어하는 게 아니냐. 글쎄 겨우 무색투명이 겹쳐서 있을 뿐인 저 푸른 하늘이 사람의 씨에게는 무척 매력적인가 보다. 오히려 그것은 매력의 전부와 같구나.
아직도 유치한 내 어린놈은(물론 유치한 까닭에) 아침에 눈만 뜨면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간다. 여러 이웃의 어린 놈들의 모습은 참으로 헤엄치는 것 같구나.
그러나 어른들은 벌써 무슨 목적이 있어야만 밖에로 나간다. 모이를 주으로 혹은 무슨 약속이행 때문에 넉넉히 저희 어린 놈들처럼 공기의 자유를 헤엄칠 수 있는 자격을 가지고도, 자격이 없는 것처럼 그림자가 낀 얼굴들을 하고 밖으로 나간다. 물론 이러한 밖에로의 저항은 마찬가지로 사람이 아닌 동물들에게도 있어 이 모이를 주으며 소요자적하던 닭의 무리는 흔히 끓어오르는 정오 무렵이면 수탉들의 단병접전으로써 그 소요자적의 절정을 이루는 수가 있다(벼슬에 피를 묻히며).
벗이여, 한 피는 진실로 어머니에게서 받았으나 벌써 어머니의 것은 아닌 우리의 몸뚱이를 어디에다가 던져야 할 것인가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자.
벗은 일찌기 헤엄을 쳐본 일이 있는가? 저 하늘의 모습을 닮아 무색투명이 겹쳐 흐르는, 그 하늘 다음에는 제일 많고 그러기에 역시 푸르른 바다나 강물에 몸을 잠그고 떠다녀본 일이 있는가? 하다 못하면 한 일 분 동안이라도 두 손으로 코와 귀를 막고 그 속에 잠기어서 발버둥을 쳐본 그런 '개구리해엄'의 경험이라도 가지고 있는가? 그런 경험이 전연 없으면 멀리서 혹은 가까이서 헤엄치는 구경만을 하여 봤어도 좋다. 역시 벗도 거기 잠겨서 유유히 오고가는 '재주'를 가지고 싶었던 것이다(혹은 벗이 이미 헤엄에 능통이라면 나의 여상의 몇 겹의 질문은 쓸데없는 것이 된다).
내가 여기에서 지금 설명할 필요도 없이 바다와 강물에는 구름과 일월과 육지의 편영이 어린다. 세월의 모습이 어린다. 죽음과 삶을, 동시에 받아들일 수 있기에 그것은 또한 끝까지 무정○○ 하기도 하였다. 아니, 무정이라고 할 수도 없을 만큼 무정하다. 내게 힘이 조금만 풀어지면(그래서 깜박 회복치를 못하는 마당이면), 우리도 끝끝내는 무정 속에 동화해 버려야 할 무정인 것이 아니냐.
죽음이 우리들 젊은 사람을 단련시키기 위하여서 아름다운 운명의 빛깔을 하고 우리의 발밑을 흘러간다. 끝없는 힘을 믿는 몸짓으로서 넌지시 꿈틀거린다. 아―이 번릉( 弄)과 모욕은 차마 못 당하겠구나!
자신이 있는 사람이면 발가벗고서 뛰어들어가 보기를 나는 권고한다. 오분 동안의 자신이 있는 사람이면 오 분 동안에 나올 수 있는 곳까지, 오십분 동안의 자신이 있는 사람이면 오십 분 동안에 나올 수 있는 곳까지, 섣불리 건방진 '재주와 생각' 다 버리고 온 전신으로서 침잠하고 부유하고, 향락해 보기를 나는 충심으로써 바란다(섣불리 건방진 '재주와 생각'을 네가 끝까지 부려볼 뱃심이면, 너는 다시 우리의 공기 속으로 나오지 않게 된다 해도 나는 모른다).
자신 있으면 뛰어들어 가거라! 뛰어들어 가지 않고 어찌 견딜 것이냐! 오! 남에게 알리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이 재미! 바다에 떠서 물이랑을 갈고 갈 수 있는 데까지는 나는 바다보다도 세구나. 말이 아니라, 이리도 넓고 깊고 무서은 것이, 그 아름다운 빛깔과 몸놀림으로서 지극히 아름다운 여인과 같이 내 밑에서 눌리우지 않느냐. 내 사지는 분명히 내 것일 것이나 벌써 내 것은 아니다. 간신히 머리를 치켜들며, 치켜들며, 전체로 들이마시는 아―고마운 공기.…정말로 무슨 푸른 빛의 '기체사탕'과 같이 한 번 들이마시어서는 오래 깨물어 먹어야 하는 이 아까운 공기. 공기도 벌써 내 것은 아니다. 내 눈도 코도 타는 입술도 바다여(또 운명의 모습을 땅 위에서는 가장 많이 지닌 것이여) 네 것이지 내 것은 아니다. 바다여 그러나 이 영혼은 내 것이다. 이렇게 뻑뻑이도 빈틈없이, 둘러싸는 네 속에서도 살아나가는 이 영혼은 내 것이다. 바다여! 내가 다시 육지로 갈 때에도 네 품속에서 처럼 '모두 내 건 아니라"고 거부할 테니, 공기까지도 늘 주인에게서 얻어마시는 기체사탕과 같이 마시고 살테니 이 영혼만은 내 것이다! 바다여 그렇다고 대답해다오.
편지가 제 흥에 겨워서, 벗이여, 너를 향해 말을 하던 것이 나는 잠깐 옆으로 얼굴을 돌리고 씨부리었다.
그럼 결론은 우리의 몸뚱이를 어디에다가 던져야 할 것인가를 다시 한번 생각해보자. 젊은 벗이여.
네 나이는 인제야 스무 살이다. 명년에는 스물 한 살.……너는 벌써 어려서부터도 어느 맑은 자리에 뿌리를 박은 충실한 나무와 같이 지혜와 용력이 뛰어났었고, 한 쌍의 눈은 언제나 두 개의 별처럼 개어 있더니, 지금도 여전하구나. 벌써 삼 년을 너를 보지 못한 동안에 물론 너는 많이 컸을 것이나, 네가 나한테 보내준 글에는 여전히 옛날 같은 네 두개의 총명한 눈동자가 반짝이고 있는 듯하여 나는 기뻤다.
'징병제의 발표가 있은 후로 사실 나는 많이 생각하여 왔습니다. 늘 부족한 자기를 채찍질하여 이에 와서야 간신히 마음의 준비가 완료되었습니다. 내일이라도 용약출전할각오가 섰습니다. 댁에 영이는 많이 컸습니까―하략'
너는 이렇게 나한테 편지를 주고 ―자기의 이야기라고는 겨우 위의 몇줄을 적어보낸 외에 그 나머지의 전부는 내 걱정만을 하여 주었다.
네 편지는 나를 크게 감동시켰다. 벗이여 고백하거니와 나는 울었다. 며칠 동안을 두고, 네 편지를 거듭 읽어보면서 나는 나의 정신의 위치를 너의 그것에 비겨보고는 저울질을 하고 있었다. 부끄러운 말이나 너의 고달한 고봉에 비겨서는, 나의 입명(立命)해 있는 자리는 형체도 잘 보이지 않을 만큼 희박하고 옅은 것임을 스스로도 긍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의 이야기를 조금 쓰겠다. 총명한 너는 내가 쓰지 않아도 벌써 내 속을 뻔히 들여다보고 있을 것이지만, 그럼 너를 부르면서 씌어지는 이 글은 다른 동무들에게라도 읽히기로 하자(그것도 너는 용서할 테니까).
내 나이는 너도 아다시피 지금 스물 아홉이다(너보다는 아홉 해가 손위이로구나). 부끄러웁게도 나는 지금 내가 스무살이라면 어떠한 심적 체험을 할 것인가 하는 것을, 그저 어지간히 거죽으로만 핥았을 뿐, 깊이는 생각해 보려 하지도 않았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명년에 입영해야 할 네가 몸소 당사자로서 겪은 필연적일 의미의 심적 체험으로서는 체험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나는 지금, 나의 존재의 주위에 나의 존재를 가급적, 향미로운 것으로 유지해 가기 위한 정서를 모으는 외에 할 바를 모르고 있다. 때로 하폄하고는 후회하고, 가위 타성적으로 분신(分身)하려는 자기를 간신히 주워모으고는 해질 때에 문밖에서 노는 아이들의 수그러진 머리를 한 번이나 두 번씩 쓰다듬어 주는 정도에서 자위하고 있다. 화초 등을 매만지는 소규모의 성실, 애써서 간신히 얻어지는 조그마한 용서들의 연습, ……그외에 있다 해도 그 비슷한 것들이다. 모든 현상을 영원한 모면에서만 향수하려 하는 한 사람은 얼마든지 게을러질 수 있는 것이다. 아무의 앞에서도 부끄럼을 느끼려 하지 않던, 이 향수태도 때문에 오는 나의 소극성이, 벗아 네 앞에서는 부끄러웁구나!
운명에 대한 숭엄한 그 긍정을, 벗아, 인제 겨우 스무 살인 벗아, 나도 너처럼 하고 싶구나. 나도 총을 메고 머언 남방과 북방으로 포연과 탄우를 뚫고 가보고 싶구나.
'간신히 마의 준비가 완료되었습니다'
……네가 말할 때, 네 말은 저 찬란하던 의지의 시절―막부 말의 어느 의사의 이야기를 생각케 한다. 이야기를 들은 지가 오래되어서 이름도 연대도 소속도 다아 잊어버렸으나, 아마 그 사람도 우리처럼 젊은 사람이었다고 들은 것 같다. (내 나이가 되었거나 네 나이가 되었거나, 그 중간이나 되었거나 한, 그런 젊은 청년이었을 것이다)―그 젊은 사람은 형의 집행을 받는 몇 시간 전에 간수에게 태연히 거울을 청했다 한다.
"무엇에 쓰려오?' 간수가 물으니 "수염을 좀 깍으려오! 이대로 가기는 너무 추하니……" 젊은 사람은 대답하였다 한다. 대답하고는, 간수가 갖다준 거울을 들어 천천히 수염을 깍고 갔다고 한다. 물론 이것은 너의 입장과는 성질이 수월찮이 다르다. 그러나 역시 아무렇든 마찬가지가 아니냐.
운명.―물론 이 말은 너 같은 정신의 체중을 가진 사람에게는 그대로서도 알아듣겠기에 편의상 그대로 썼다.―어떠한 운명도 벌써 이 젊은 의사를 건드릴 수는 없으리라. 그는 벌써 운명을 타고 앉아 운명을 지휘하고 있는 까닭이다.
이런 것을 한 개의 '수영의 상태'에 비겨봄은 어떨까? 벗이여, 물론 이것은 너를 지극한 선수로서 믿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벗이여, 네가 아무리 도사리고서 나한테 숨기려 하여도 네 속을 이루는 것이 결국은 '사랑'임을 나는 안다! 내가 네 속을 냄새로나마 못 맡을 줄 아느냐? 아무도 너를 사랑하지 않아도 괜찮을 줄을 너는 너의 그 오랜동안의 '미움'을 통해서 공부하였지? 정말로 준비가 완료되어 있는 한, 사랑이란 진실로 하늘과 바다의 합계보다는 큰 것이다. 놀 개어 있어서 너는 좋겠구나.
기왕에 네가 편지를 주어 내게 요설을 벌이게 하였으니 조금만 더 지껄이게 하여다오. ……이러한 역사라는 것은 사실은 우리가 이렇게쯤 되게 원했기 때문에 지워진 것이다. 싸움을 기다렸기 때문에 싸움이 왔고 총을 원했기 때문에 총이 쥐어지고, 몸 던질 곳을 찾았기 때문에 그 길이 열린 것이다. 그러기에 인수해야 할 의무가 있음은 물론이다.
스무 살인 벗이여. "준비가 되었습니다" 그 한 마디 말은, 세상이 아직까지 생전 구경하지도 못하던 것, 무엇 한 가지를 우리 앞에 내어놓을 듯이 들리는구나.
우리의 몸뚱이를 어디에다가 던질까? 벗이여, 그것은 말하지 않는 네가 더 잘알고 있을 것이다.
『조광』 1943년 10월호
4.<마쓰이 오장 송가>
마쓰이 히데오! 그대는 우리의 오장(伍長) 우리의 자랑. 그대는 조선 경기도 개성 사람 인씨(印氏)의 둘째 아들 스물한 살 먹은 사내
마쓰이 히데오! 그대는 우리의 가미가제 특별공격대원 귀국대원
귀국대원의 푸른 영혼은 살아서 벌써 우리게로 왔느니 우리 숨쉬는 이 나라의 하늘 위에 조용히 조용히 돌아왔느니
우리의 동포들이 밤과 낮으로 정성껏 만들어 보낸 비행기 한 채에 그대, 몸을 실어 날았다간 내리는 곳 소리 있이 벌이는 고흔 꽃처럼 오히려 기쁜 몸 짓 하며 내리는 곳 쪼각쪼각 부서지는 산더미 같은 미국 군함!
수백 척의 비행기와 대포와 폭발탄과 머리털이 샛노란 벌레 같은 병정을 싣고 우리의 땅과 목숨을 뺏으러 온 원수 영미의 항공모함을 그대 몸뚱이로 내려쳐서 깨었는가? 깨뜨리며 깨뜨리며 자네도 깨졌는가--
장하도다 우리의 육군항공 오장 마쓰이 히데오여 너로 하여 향기로운 삼천리의 산천이여 한결 더 짙푸르른 우리의 하늘이여
서정주의 <오장(伍長) 마쓰이 송가(頌歌)> 부분
임종국이 문제삼은 것은 과거에 있었던 일 그 자체가 아니었다. 그가 분노한 것은 정권이 바뀔 때마다 변신을 거듭하여 불의와 결탁하는 친일파들의 모습이었다.
시는 서정주 시인이 짖고 일제시대 카미카제 특공대를 예찬하던 서정주는 5공화국 때는 전두환 대통령 56세의 생일을 맞아 그를 찬양하는 축시를 보낸다,
5.<전두환 탄신 56회 축시>
한강을 넓고 깊고 또 푸르게 만드신 이여 이 나라 역사의 흐름도 그렇게만 하신 이여 ...... 새 맑은 나라의 새로운 햇빛처럼 님은 온갖 불의와 혼란의 어둠을 씻고
참된 자유와 평화의 번영을 마련하셨나니 ...... 이 나라가 통일하여 흥기할 발판을 이루시고 쉬임 없이 진취하여 세계에 웅비하는
이민족 기상의 모범이 되신 이여 이 겨레의 모든 선현들의 찬양과
시간과 공간의 영원한 찬양과 하늘의 찬양이 두루 님께 오시나이다.
<전두환 탄신 56회 축시>
한강을 넓고 깊고 또 푸르게 만드신 이여 이 나라 역사의 흐름도 그렇게만 하신 이여 ...... 새 맑은 나라의 새로운 햇빛처럼 님은 온갖 불의와 혼란의 어둠을 씻고
참된 자유와 평화의 번영을 마련하셨나니 ...... 이 나라가 통일하여 흥기할 발판을 이루시고 쉬임 없이 진취하여 세계에 웅비하는
이민족 기상의 모범이 되신 이여 이 겨레의 모든 선현들의 찬양과
시간과 공간의 영원한 찬양과 하늘의 찬양이 두루 님께 오시나이다.
◆ 종천순일(從天順日)이라는 논리의 허구성<자료: 민족문제연구소> 문학평론가 한수영 씨의 글을 소개한다.
미당 서정주는 다른 친일 문학자들과는 달리 자신의 친일경력을 비교적 여러 차례에 걸쳐 밝혀온 바가 있다. 애써 감추고 숨기려는 친일 인사들이 훨씬 많은 사실에 견주어 그 솔직함만은 사줄 만한 것이다. 그는 1972년에 나온 《서정주 문학전집》의 〈부끄러운 이야기〉에서 친일경력을 밝혔으며, 1992년 1월 잡지 『시와 시학』의 대담에서도 솔직히 털어놓았고, 최근에는 『신동아』 1992년 4월호에서 「일정 말기와 나의 친일시」라는 글에서 당시에 시비가 일고 있던 그의 친일경력을 또 한 번 시인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친일행위를 변명하기 위해 기뵤한 상황론에다가 죄 없는 조선 사람 전부를 공범(?)으로 옭아넣어 얼토당토않은 합리화를 꾀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 논리가 가장 노골적으로 드러난 것이 자전적 담시집 《팔 할이 바람》속에 있는 〈종천순일파?〉라는 시에서다.
그러나 이 무렵의 나를 '친일파'라고 부르는 데에는 이의가 있다. '친하다'는 것은 사타구니와 사타구니가 서로 친하듯 하는 뭐 그런 것도 있어야만 할 것인데 내게는 그런 것은 전혀 없었으니 말씀이다. '부일파(附日派)'란 말도 있긴 하지만 거기에도 나는 해당되지 않는 걸로 안다. 일본에 바짝 다붙어 사는 걸로 이익을 노리자면 끈적끈적 잘 다붙는 무얼 가졌어야 했을 것인데 나는 내가 해준 일이 싼 월급을 받은 외에 그런 끈끈한 걸로 다붙어 보려고 한 일은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때 그저 다만, 좀 구식의 표현을 하자면-- '이것은 하늘이 이 겨레에게 주는 팔자다'하는 것을 어떻게 해서라도 익히며 살아가려 했던 것이니 여기 적당한 말이려면 '종천친일파(從天順日派)' 같은 것이 괜찮을 듯하다. 이때에 일본식으로 창씨개명까지 하지 않을 수 없었던 우리 다수 동포 속의 또 다수는 아마도 나와 의견이 같으실 듯하다.
친일하게 된 연유에 대해 '일본이 그렇게 쉽게 항복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못 가도 몇 백 년은 갈 줄 알았다'는 미당의 고백은 그 솔직함과, 또 솔직함 뒤에 놓인 그 우매함 덕에 이제 제법 많이 알려진 말이 되었다. 그러나 이 말은 뒤집어 보면, 일제가 1945년 8월에 패망하지 않았으면 그의 친일행위는 더 연장되었을 것이란 말과 똑같다. 열 발짝을 양보해 그의 말을 다 받아들인다 해도, 그 일제 말의 참혹한 상황에서 설움을 곱씹으며 묵묵히 버텨낸 수많은 우리 민족의 선남선녀와, 징병 가라, 학병 지원해라, 당신 아들 지원병 보내라고 떠들고, 가미가제(특공대)의 자살 놀음을 숭고한 애국 행위로 본받으라 소리 높여 노래하고, 혈서로 군속 지원을 하는 젊은이를 미화시키고, 일본 군대 꽁무니를 따라다니며 종군 기사를 쓴 그가, 대체 어떻게 동일시될 수 있단 말인가. 어떻게 그 행위에 감히 '하늘 뜻에 따라(從天)'라는 변명이 붙을 수 있는가. 겉으로 드러난 말뜻의 꼬리를 잡아 시비를 따질 생각은 추호도 없지만, 친일이 하늘 뜻에 따른 것이었다면 당시에 혹독한 탄압을 무릅쓰고 나라 안팎에서 항일운동을 한 애국지사들은 '하늘 뜻을 거스른 사람'들이란 말인가.
시대의 오욕을 참고 견뎌내는 일과, 자의든 타의든 불의의 압력에 굴복하는 일은 완전히 다른 것이다. 친일행위에 대한 미당의 반성이 진정한 것이 되기 위해서는 일제의 존재가 불의인 줄 몰랐거나, 불의인 줄 알면서도 그 힘이 너무 강하고 오래 지속될 것 같아 굴복하고 말았던 사실, 그것 자체에 국한되었어야 한다.
1980년대 중반에 미당이 민중문학자들을 향해 그토록 강조했던 문학자가 지녀야 할 신중함과 글쓰기의 엄중함은, 거꾸로 그의 친일행위와 해방 이후에 그가 보여 준 체제 순응적이고 권력 지향적인 숱한 발언과 행적을 향한 경구(警句)가 되어야 도리에 옳을 것이다.
미당은 여전히 국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대가급의 시인이며, 그 애송시의 보유 숫자로도 으뜸가는 큰 시인이다. 이 점은 아무도 부인할 사람이 없다. 그러나 그의 언행과 정치적 행보는 그 큰 사랑에 견주면 실망스러운 대목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물론 그의 친일과 해방 이후의 활동이 우리 시문학에 남긴 그의 큰 발자취와 성과를 완전히 부정하는 조건이 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그의 영향력과 명성이 너무도 크기 때문에 과거의 잘못에 대한 용기있고 진실한 반성이 필요해지는 것이다.
이 글이 그의 진면목을 드러내 참된 미당의 시인됨을 밝히기에는 처음부터 '당랑거철(螳螂拒轍)'의 형국을 면하기 어려운 것이겠지만, 역사의 엄중함을 신뢰한다면, 그의 시와 시인됨이 온전히 하나로 묶여, 덜고 보탬이 없이 객관적으로 조명받을 때가 반드시 있으리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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