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동마을로 가보라 하네, 그대. 가서 향단*에 잠시 머물러 보라 하
네. 그대 만나고 돌아오자 내 몸에 금線하나 새겨져 버렸는데. 교실의
나무책상 한복판에 깊이 그어진 칼자국 같은 굵은 금 하나, 이제는 지
울 수도 어쩔 수도 없는. 더 깊이 젖어드는 게 무작정 여기까지 걸어
온 내 몸인가, 축축하게 비 맞고 있는 옛집의 저 기둥들인가. 안채 사
랑채 행랑채를 이어 붙여 둘레를 친 그 속, 뜰을 안고 있는 '與'자 모
양의 집, 향단에 쪼그려 앉아 나를 가두고 있는 먼 곳의 그대를 생각
하네.
동쪽 담벼락에 벼락맞은 늙은 향나무, 머리가 잘려나가고 반쯤 찢
겨진 몸뚱아리의 나무가 내 몸 안에 들어온다. 그리움은 저 나무처럼
허공을 끌어안고 눈도 뜨지 않고 살아가는 일이다. 그대 찾아 나서는
것은 아득한 미궁 속을 헤매는 일이다. 그대쪽으로 나 끝내 걸어들
어가는 것은 깊은 상처를 가슴에 안고 하루 하루를 견디는 저 향나무
가 되는 일이다. 그래, 차라리 어지러운 어둠이라도 좋다. 몸에 번진
그리움의 毒 다 풀어헤쳐 차라리 깜깜 어두워져야겠다. 그대 내 몸
에 새겨놓은 굵은 금 아무도 보지 못하게.
* 향단香檀
:경주시 강동면 양동마을에 있는 50여칸의 與 모양의 古家
모친 병간호를 하고 있는 회재 이언적(1491~1553)을 위해 중종이
하사한 집이라 한다.
도탐리 사람들
-물꼬를 보는 아버지
-김시민
새벽 안개가 어린 모의 온 몸을 덮고 있다
무논의 사랑을 밤새워 지킨 논두렁,
제 가슴인양 조심조심 밟고 오는 아버지께
자리를 내 준 채
곤한 새벽잠에 든다
아직 희미한 새벽
밤새 기둥처럼 무논의 집을 받든 논두렁길을
아버지는 고요히 걷는다
밤새 넘치거나 모자라지는 않았을까?
물과 모의 적당한 사랑의 높이를 만나러 가는 길
채워야 할 마음과 빼야할 마음
그 어디쯤 아는지
물은 그 만큼의 높이로 누워 찰랑이며
어린 모의 허리를 꼭 끌어안고
안개를 덮어 새벽잠을 재운다
이불 속에서 알알이 영그는 그들의 꿈
아버지는 행여 그들의 단잠을 깨울까
논두렁을 걷는 발걸음은 새벽 별보다 더 잦아들고
밤 새 문종이를 뚫으며 그들의 사랑을 훔쳐보던
게아재비 소금쟁이 물자라도
아버지 마음속에 들어와 잠들었다
마르지도 넘치지도 않는 적당한 그들의 사랑
이불 끝자락에 살짝 손을 넣어 온기를 보며
고개를 끄덕이다가
아버지 발걸음에 부딪혀 후두둑 떨어지는 이슬방울
그 소리에도 놀라 잠깰까봐
아버지는 이슬 한 가득 장화에 묻힌 채
자식 같은 무논을 막 벗어난다
회귀
-엄하경
저기 모비딕,
쇼핑몰 분양 광고 깃발 속에서
불쑥 튀어나온 향유고래 한 마리
눈부신 분수의 향연 벌이며 돌아오고 있다
바다는 늘 그렇게 출렁거렸다
땅을 박차고 뛰어들던 그 날처럼…
피톨 속에 숨쉬는 레트로포존*의 기억을 따라
빌딩 숲을 가르며 들어서는 그녀
억만년 전 푸른 초원 위에서
풍요로운 젖을 새끼에게 물리던
엉덩이 펑퍼짐하고 마음씨 좋은 엄마
등에 업은 새끼 추스르며 잠시 숨을 고르곤
떨이 물건 속에서 쓸만한 것을 고르느라
씩씩하게 팔을 젓는다
새끼를 등에 업은 엄마는 거칠 것이 없다
양 손 가득 장바구니 들고도
풍성해질 저녁밥상에 절로 흥겹고
사람들 틈새 비집고 들어가서는
버스 안 빈자리를 놓치지 않는다
칭얼대는 새끼 보듬고 서슴없이
희고 둥근 젖무덤 드러내어
눈 맞추고 웃으며 물리는 엄마
그녀의 젖내음으로 세상은 열리고
거친 바다에서도 새끼들은 외롭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다시 돌아오는 것이다
넓디넓은 사람의 바다를 향해
힘차게 물살 가르며
모비딕, 그녀가 돌아오고 있다
쇼핑몰 분양 광고 깃발
출렁이는 물결 속으로
다시 첨벙, 들어서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