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일아 시집 해설(2014. 11. 18)
가 닿을 수 없는 그리움의 시학
1.
‘글이 곧 사람이다’는 이 말은 특히 동양에서 오래 동안 매우 중요한 문학적 가치로 존중돼 왔다. 이 말은 문학을 통해 인간의 심성을 교육하고 훈육해온 문학관을 말하는 것으로, 다시 말하면 그 사람이 쓴 글에는 그 사람의 사상뿐 아니라 인품까지 녹아 있다는 말과 같은 뜻이다.
글에서 수신과 치세를 중요시해 온 동양적 문학관에서는 책을 읽고 글을 쓴다는 것은 곧 완성된 인격체를 향한 끊임없는 질주와 도야를 뜻한다. 그런 이데올로기의 결정체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공자의 사무사(思無邪)정신이다. 시 삼백 편을 한 마디로 말하면 ‘사무사(사악함이 없는 순정한 마음)이라는 이 말은 문장에 대한 도덕과 윤리를 집약해온 말이다.
가령 서구에서는 문학이 동양만큼 윤리적이지는 않다. 프랑스 상징주의나 20세기 미국 소설에서 나타나는 ‘악마주의’ 경향은 문학이 인간의 인격과 전혀 상관이 없는 하나의 오락이거나 인간의 개념구성을 넓히는 특별한 가치를 지칭한다는 것으로 쓰여 왔다는 사실은 세계 문학예술사에서 널리 알려진 바이다. 물론 서양에도 칸트미학에서처럼 윤리적 감수성을 최고의 미학적 가치로 치는 생각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동양에서만큼 지속적이고 강렬한 것은 아니었다.
막 글을 깨우치는 학동들의 교재로 오랜 전통을 가진『소학(小學)』의 첫머리인 입교(立敎) 편에 보면 전설적인 임금인 순 임금이 ‘기’라는 벼슬아치에게 말하기를 “가르치는 아이를 성격을 곧으면서도 온화하고, 너그러우면서 엄정하고, 강하면서도 포악함이 없으며, 대범하면서도 거만함이 없도록 하라” 면서 “시(詩)는 사람의 뜻을 말로 표현한 것”이라는 주장을 하는 게 보인다. 이어 “시는 감정에 바탕을 두고 있으므로 시에서 선(善)을 좋아하고 악을 싫어하는 마음을 불러일으키도록 해야 한다” 고 말하고 있다.
박일아 시인의 이번 시집에 실린 시나 평소 시인의 인품을 보면 바로 동양적 미학관인 ‘글이 곧 사람이다’는 말이 그에게 매우 잘 어울린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0여 년 이상을 같은 문학모임에서 함께 시를 읽고 이야기를 나누고 공부하면서 지켜본바 박 시인은 늘 조용하면서도 예민하고 날카로운 지성적인 면모를 보여 왔다. 이것은 그가 문학 활동이나 시 창작에 보여 온 예의 뜨거운 열정이 겉으로 요란스럽게 드러나기 보다는 속으로 천천히 연소되어 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평소 말씀이 많은 것은 아니지만 이따금 던지는 시나 일상에 대한 언사는 그가 인생에 대해 폭넓은 통찰에 도달해 있다는 신뢰를 갖게 한다.
이번 시집에 실린 박일아 시의 큰 특징은 현란한 수사를 구사하거나 일군의 젊은 시인들처럼 난해한 시 문법을 고집하는 게 아니라 시 공부와 인생살이의 연륜에 맞게 편안하면서도 독자들에게는 깊은 사유를 모색케 한다. 인생뿐 아니라 문학 역시 상선약수(上善若水), 최고의 선은 물 흐르는 것과 같이 자연스러운 것이 아닐까? 박일아 시는 그런 자연스러움의 극대화, 무기교의 기교로 칭해도 좋을 만큼 특별한 시적 의장(衣欌) 없이 자신의 삶에 대해 발언하고 있다.
구체적으로는「마디」「옹달샘」「화장」등의 시에서 보여준 자기성찰,「출석」「나도 나무 할래」「 비눗방울놀이」등에서 보여준 동시적 상상력의 순진무구한 시정신, 「달팽이」「하루치의 무게」「인력시장」「전봇대」「위대한 식사」등의 사회성 짙은 시,「빈손」「어린 시절」「용두방천」「콩나물」「쉐타」등에 나타난 사모곡과 유년시절에 대한 그리움,「첫 손녀」「손주들 생각」「옛날 그대로네」「생일날」등과 같이 할머니로서 손주들에 대한 자애로움 등으로 구성돼 있다.
2.
이번 시집 『하루치의 무게 』에서 내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시는「화장」이다. 이 시는 내가 보아온 바 시인의 성품을 그대로 드러내주고 있다.
가난한 유학생의 아내
세 아이의 엄마
화장은 꿈도 못 꾸고
매일 곱게 단장하고
출근하는 이웃집 여인이
부럽던 선망의 눈망울
어느덧 주름진 모습 쳐진 피부
화장으로 갈무리하고
아닌 척 하면서 피정을 갔지
피정* 때 S대학 교수가
자신이 소녀가장으로 지내던 때를 생각하며
가난한 이들을 위하여
평생 화장을 안 하기로 결심했다면서
맨 얼굴로 강론 하는데
화장한 얼굴이 부끄러워
고개를 숙였지
*피정 : 가톨릭교회에서 일상생활을 떠나서 정신을 고요하게 하는 깊은 기도 시간
-「화장」전문
내가 10년이 넘게 박일아 시인을 곁에서 지켜 본 바 박 시인은 화장을 하지 않는 분이다. 이 시에서 시적 화자는 박일아 시인 자신으로 보인다. 유학생 남편은 유학을 끝내고 유명 사립대 교수가 된 지 오래이다. 그러니까 화자인 박일아 시인은 교수 부인이 되었다. 늘 화장하지 않은 검소한 차림으로 문학공부 모임에 나타나서 열심히 공부한다. 그런 시인의 내면이 어디에서 출발했는지를 보여주는 감동적인 시이다.
시인의 이런 심성은 다음 시로 연결되어 나타난다.
아이는 아플 때마다
더욱 튼튼히 자라나고
대나무는 마디가 있어
홀로 큰 키를 단단히 세운다
나는 오늘 지금까지 살아온
방문을 닫고 못질을 하고
열심히 마디를 만들어
새방을 꾸밀 준비를 한다
내 여생을 더욱 튼튼히
버티고 살아가기 위해
속을 완전히 비우고
지금은 마디를 만들고 있다
자꾸만 틈새로
파고 들어오는 욕심에다
손바닥에 옹이가 박히도록
못질을 하고 있다
-「마디」전문
끊임없이 이웃에게 그냥주려고
스스로를 정화시키고
맑은 샘물을 솟아내고 있다
조용히 깊은 곳으로부터
세상이 잠든 사이에도 조금씩 쉬지 않고
내속에는 무엇으로 가득 찼기에
꽉 막혀 갑갑한지
하나, 둘, 돌덩이를 집어치우고
샘물을 파자
굳어진 흙을 파내고
낮은 곳에 자리 잡아
자신이 정화되고 이웃도 정화되는
샘물이 되고 싶다
-「옹달샘」부분
“속을 완전히 비우고/지금은 마디를 만들고 있다//자꾸만 틈새로/파고 들어오는 욕심에다//손바닥에 옹이가 박히도록/못질을 하고 있다”는 구절처럼 시인은 속을 완전히 비우고 자신을 바로 세우기 위한 마디를 만들고 있지만, 그래도 자꾸만 틈새로 파고드는 욕심을 없애기 위해 손바닥에 옹이가 박히도록 못질을 하고 있다.
그리고「옹달샘」에서는 “끊임없이 이웃에게 그냥주려고/스스로를 정화시키고/맑은 샘물을 솟아내고 있다/조용히 깊은 곳으로부터/세상이 잠든 사이에도 조금씩 쉬지 않고” 자신을 정화시키는 옹달샘의 모습은 바로 박일아 시인 자신의 모습에 등치되는 것이다. 이것은 시인이 그냥 포오즈로 해본 소리가 아니다. 언제나 겸손하면서 남 먼저 헌신하는 실제 생활에서의 시인의 모습이 이 시들에 자연스럽게 오버랩 되는 것은 나만이 아닐 것이다.
시인의 이런 문학적 자세는 앞 서 언급한바 ‘글이 곧 사람이다’는 수신과 처세적 윤리를 앞세우는 동양적 문학과 정확하게 일치하는 것이다.
다음 시들을 보자.
초등학교 삼학년 딸 아이 아파
서울대 병원 가던 날
병원 가로수로 우람하게 서 있는
은행나무를 보고
엄마, 이 나무 몇 살이야
글쎄 몇 백 년은 자라야 이정도 굵지
나보다 오래 살았네
부럽다, 나무들은 오래 살아 좋겠다
발걸음을 옮기다가 또 한 아름 넘어 보이는
튼튼한 느티나무를 보더니
얘는 몇 살이야
못되어도 이백년은 되겠지
그럼 엄마보다 더 많이 살았네
나도 나무 할래
엄마도 나무 할래
-「나도 나무 할래 」전문
이 시는 시적 화자가 어린 딸과 병원 가면서 나눈 이야기가 시의 소재이다. 발상이 어린이답고 참신하다. 나무가 사람 보다 수명이 길다는 것을 알고 아이가 자신도 나무가 되고 싶다는 이야기, 그리고 엄마도 나무가 되고 싶다는 희망을 이야기 한다. 사람이 나무가 될 수 없지만 나무처럼 강렬한 생명력을 갖고 싶다는 아이의 희구는 아이가 병이 났다는 사실과 결부되면서 더욱 강렬한 인상을 준다.
이 시에서 독자들은 아이가 나무가 되고 싶어 한다는 발상의 참신함뿐 아니라 생명의 소중함, 아울러 인간 생명의 유한함이라는 존재의 숙명을 생각하게 된다. 독자를 여기까지 끌고 오게 되면 이 시는 성공한 것이다. 우리 인간의 삶이란 것은 나면서부터 죽음을 향해 돌진하는 여정이고, 삶의 등편에는 언제나 죽음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죽음에 대한 이런 묵상은 교만한 우리 인간을 한 없이 겸손하게 만드는 기제인 것이다.
「나도 나무 할래 」처럼 동시적 발상으로 시작하는 시를 한 편 더 보자.
봄 반 담임선생이 찾아와
출석을 부르면 예, 하고
앞산에 꽃들이 차례로
개나리는 노랗게 모습을 드러내고
진달래는 분홍빛으로, 제비꽃은 보라색을
각자 자기 색깔로 꽃을 피워 대답 한다
키가 큰 꽃들은 온통 초록 잎으로 몸을 숨기다
이름 부르면 부끄러운 듯 꽃송이를 흔들어 대
답 한다
연보라 오동나무, 새하얀 아카시, 붉은 백일홍
이름 모르는 꽃들도
한번은 세상에 태어난 보람 꽃 피운다
앞산에 이렇게 많은 꽃들이 살고 있는 줄
출석 부르기 전에는 몰랐다.
한 덩어리 푸른 산으로 잘 조화를 이루어
각자 목소리를 죽이고 서로 양보하는 자연
-「출석 」부분
산에서 꽃이 피는 현상을 마치 학교에서 선생님께서 출석부를 때 학생들이 대답하는 양상으로 그리고 있다. 발상이 재미있고 표현은 생동감이 넘친다. 금방이라도 출석부를 때 학생들이 대답하듯 꽃들이 고개를 들고 막 뛰어나올 것 같다. 그러나 이 시는 발상의 재미를 뛰어 넘는 메시지가 시를 더욱 돋보이게 한다. 마지막 두 행의 “한 덩어리 푸른 산으로 잘 조화를 이루어/각자 목소리를 죽이고 서로 양보하는 자연”이라는 구절은 양보할 줄 모르는 인간에 대한 따끔한 일침으로 느껴진다.
온몸으로 우주를 기어다니며
자기보다 더 큰집 떠메고
밤낮으로 경제에 가위눌려
신경의 촉각 곧추 세운다
욕심의 창에 줄줄이 이름 엮여
서민들 마음 어지럽힌다
T.V 화면 얼룩이 진다
동아쇼핑 옆구리 좌판 놓고 앉은
등 굽은 할머니
빈 껍질만 남아
불볕더위에 졸고 있다
재래기 배추 덤으로 한줌 집어주며
맛있게 머거이소
온 얼굴에 주름 꽃 핀다
대지를 기어다녀도
죄 값이 모자라
뒤틀린 집 속에 몸을 숨기려
오늘도 힘겹게 등짐을 진다
-「달팽이」전문
안동시 태화동 오거리 인력시장 앞
페인트 빈 통에 헌 나무토막들
활기차게 타오르는 불꽃
어둠 속에서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들면
불꽃 속에 새 설계도 너울대고
하얀 안개 속에서 집들이 얼굴을 내밀면
승합차 발 앞에 멈춘다
타오르던 나무토막이 숨죽이고
한사람 씩 선택되어 일터로 떠나면
불씨마저 사그라지고
고개 숙인 민 씨 노인 혼자남아
어제 마냥 헛기침도 해보고
발바닥으로 인도 블록 툭툭 차본다
-「인력시장 」부분
전봇대에 광고지
일당 받는 아줌마들 열심히 뜯어내면
그 자리에 또 붙이고
자리가 없을 때는 남의 광고위에도 붙인다
전봇대에 얽힌 전깃줄보다 더 많은 사연들
각자의 옷깃에 숨기고 사는 다세대 주택의 세입자
반 지하 홀로 사는 할머니의 잘 키운 오남매
맏아들 외국으로 이민가고
아들 딸 다 서울 부산 객지로 떠나가
영감이 잠든 고향을 못 떠나 혼자 남았다
단칸방에 사는 모녀는
마흔이 넘은 딸 근무력증으로 누워만 지내고
할머니가 리어카에 폐지 주워 모아 연명 한다
옥탑방 사는 영수네 가출한 엄마대신
중학교 일학년 누나가 소녀가장이다
앙상한 가지에 나뭇잎 하나, 둘 남아 달랑거려도
전봇대는 빈틈이 없고
수난의 끝을 알 수 없다
-「전봇대」부분
「달팽이」에서는 “동아쇼핑 옆구리 좌판 놓고 앉은/등 굽은 할머니”가 달팽이로 치환되어 있다. 불볕더위에 빈 껍질만 남은 할머니는 그래도 배추 한 줌 더 팔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인력시장」에서는 새벽 인력시장에서 선택받지 못한 민 씨 노인의 헛기침이 쿵쿵 울리고 있다.「전봇대」에는 광고지 일당 아줌마, 반 지하 홀로 사는 할머니, 자식에게 버림받은 혼자 남은 영감, 근무력증으로 누워 지내는 마흔 넘은 딸, 폐지 할머니, 소녀가장의 삶을 전봇대가 지켜보고 있다.
문학은 현실의 반영이다. 현실에 발을 딛지 않는 문학은 아무리 교언영색으로 꾸며도 그것은 사상누각에 불과하다. 드러내면 드러내는 대로, 숨기면 숨기는 대로 문학은 장직하게 현실을 증언한다.
인용한 시 세 편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오늘날 우리 현실의 일부분이다. 커져가는 소득격차, 불평등, 양산되는 비정규직으로 많은 민중들은 최소한의 생계조차도 위태로운 게 현실이다. 40대 초반의 젊은 프랑스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가 쓴『21세기 자본』이라는 책이 최근 세계적으로 돌풍을 일으키는 가운데 한국사회에서도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다고 한다. 주지하다시피 이 책 내용은 세계 경제 속에서 부의 불균등한 현실을 꼼꼼히 학문적으로 증언하는 것이다. 이 책이 한국사회에서 반향을 일으키는 것은 적어도 한국사회에서 이 책의 효용이 유효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엄중한 현실 앞에서 문학이 현실을 반영하고 증언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문학의 직무유기나 다름없다. 물론 박일아 시인이 부조리한 현실을 폭로하고 고발하는 강렬한 리얼리즘 시인은 아니다. 되레 인생에 대한 폭넓은 통찰과 관조를 보이고 있는 인생파 시인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그의 시의 중요한 부분이 현실에 대한 증언이라는 사실 역시 앞 서 언급한 동양의 윤리적 문학관에 대한 박일아 시인의 문학적 친연성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해가 서산너머 퇴근하면
범어 산과 신천을 오가며
먹이를 나르던 새들
고단한 날개를 접고
막 노동자가 일을 끝내는 시각
어두움이 찾아오는 순간
하루치의 무게를
품고 가는 저녁놀
-「하루치의 무게」
아름다운 표제시「하루치의 무게」에서 “하루치의 무게를/품고 가는 저녁놀”의 풍요롭고 당당한 모습처럼 노동자도, 회사원도, 교사도, 예술가도, 더불어 고단하게 날던 새도, 나비, 곤충류도 제 몫의 하루치를 충실히 하고 휴식의 세계로 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박일아 시인의 이 짧은 시는 바로 평화와 휴식을 희구하는 인간의 오랜 염원을 깔끔하게 그리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성경의 ‘선한 포도밭 주인의 비유’에서 나오듯/해질녘에 나타나 하루 품삯을 쳐 줄/마음씨 착한 농장 주인이 나타날”(「 인력시장」) 그런 이상향은 언제 나타날 것인가? 이런 바람과는 또 달리 나 자신은 오늘을 ‘하루치의 무게’를 느낄 만큼 충실히 살았는지 자성해보는 기회를 제공하기도 한다.
강가에 앉아
두 손 모아 물을 담아 보았다
한모금도 남김없이 다 빠져 나갔다
반나절을 그러고 앉았다
모래사장에 주저앉아
두 손으로 모래를 움켜잡았다
손가락 틈새로 솔 솔 솔 다 빠져 나갔다
반나절이 또 그렇게 지나갔다
하늘에 해는
온 종일을 붙잡으러 쫓아다녀도
서산으로 넘어갔다
붙잡고 또 잡으려 해도
어머니는 떠나 가버렸다
영원한 곳으로
-「 빈 손」전문
손녀 나이 만할 적에
점곡 개울물에 엄마랑 빨래하러갔지(중략)
엄마랑 이웃집 아줌마의 빨래는
좀처럼 끝나지 않았다
살금살금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엄마에게서 멀어지고 있는데
내 키보다 큰 두루미 한 마리
곁으로 다가 오고
아줌마가 야야, 학이 눈 빼 먹는데이
소리 지르는데 놀라
엄마에게 뛰어 가 울었지(중략)
아슴푸레 떠오르는 어린 시절
지금도 돌아가고 싶다
-「어린 시절」부분
시냇물에 헤엄치는 어린 물고기가 귀여워
고무신을 벗어 잡으려 애쓰다
고기도 놓치고 신발 한 짝도 놓쳤다
물결 따라 동동 떠내려가는 내신은
나의 달음질 속도보다 빨리
내 유년의 꿈과 함께 떠내려 가버렸다.
엄마는 따가운 햇살아래서 빨래를 하고
동생과 나는 납작한 돌 강바닥에 깔아
방을 만들고 부엌을 만들어 소꿉놀이 하던
그 시절이 잡힐 듯 잡히지 않고 아득하다
강물은 세월을 삼키고
엄마는 돌아올 수 없는
아득한 곳으로 떠났다
-「 용두방천」부분
어머니가 떠난 지 세 번째 맞는 어버이날
잊고 지낸 날들이 생각난다
콩나물 맹크로 쑥쑥 자라래이
손수 키운 콩나물무침의 도시락 반찬은 일품이다
흔들리는 30촉 백열등 희뿌연 증기에 서리고
몸배 입은 엄마 혼자 낮은 부뚜막에 엎드려
도시락 다섯 개에 아침밥 짓는 것이 당연한 그림이었다
첫아들 낳던 날
자식은 콩나물에 물 주듯 키워야한다
들려주던 그 말이 지금도 들리는듯하다
-「콩나물」부분
몸이 훌쩍 커버려 작아진 낡은 쉐타
어머니는 줄줄 풀어
솥에 물을 끓이고 김을 쏘여
몇 개의 둥그런 깡통에 조금씩 감아 말리면
라면 발 실이
길게 늘어진 국수 가락이 되고 (중략)
수몰된 고향 못 잊어
고향근처에 안식처를 마련한 아버지 어머니
두 개의 털실 공으로 동그마니 남아
아버지는 여전히 행실 조심하라며 실 가닥 풀어내고
어머니는 춥지 않니 밥 먹었니 너희들 잘 있지
걱정의 실타래 감아 옷을 만든다
아버지의 날줄과 엄마의 씨줄이 함께 어우러져 된 옷
-「 쉐타」부분
시인의 어린 시절에 대한 추억과 어머니에 대한 애틋한 사모곡(思母曲) 아름답게 새겨진 시이다. 돌아가고 싶지만 돌아갈 수 없는 시간,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아득한 곳으로 가버린 어머니, 그 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시인 자신이 첫 아들을 낳을 때 절정에 달한다.
인구에 회자하는 그리스 신화를 바탕으로 한 호머의 ‘오딧세이’에서 주인공 오디세우스는 트로이전쟁에서 승리하고 자신의 고향 이타케로 돌아가려고 하지만 여러 가지 난관에 부닥쳐 천신만고 끝에 결국 고향에 도달한다. 귀향하는 도중 어려움도 있었지만 미녀와 부(富)의 달콤한 유혹도 없지 않았다. 그럼에도 기를 쓰고 고향에 가려고 한 것은 인간 본연의 그 무엇을 회복하려는 시지프스적 시도가 아니었을까? 이처럼 시인은 갈 수 없는 그리운 곳을, 그것의 이름을 어머니라 해도 좋고, 고향이라 해도 좋을 어떤 곳을, 혹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 쉼 없이 가려고 노력하는 존재가 아닐까? 위의 시들은 박일아 시인의 그런 본능적이지만 결코 현실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그리움에 대한 슬픔을 독자들에게 오롯이 선사해주는 것 같다.
이처럼 박일아의 시 세계는 어느 한 편에 고정된 것이 아니라 자기성찰과 동시적 상상력의 발현, 날카로운 현실인식과 아울러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유년의 추억, 손주들에 대한 애정 등 다양하게 변주되고 있다.
마지막, 췌언으로 한 마디 붙이자면 이 시집의 끝부분을 차지하는 손주들에게 바치는(?) 따뜻한 헌시는 가 닿을 수 없는 어머니에 대한 사랑의 역설적인 표현이 아닐까?
김용락(시인, 경운대 교양학부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