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Religious Significance of the Near-Death Experience
최준식(이화여대 한국학과)
Choi, Joon-sik (Department of Korean Studies, Ewha Womans University)
목차
I. 들어가며
II. 왜 죽음인가
1. 죽음과 종교
2. 죽음, 그 마지막 성장의 단계
III. 근사체험이란
1. 근사체험 초기 연구사
2. 근사 체험의 내용과 그 단계들
3. 근사 체험의 진실성
IV. 근사체험의 종교적 의미
V. 끝을 맺으며
I. 들어가며
만일 인류가 죽지 않는다면 어떤 일부터 벌어질까? 많은 변화가 있겠지만 그중 가장 큰 변화는 종교가 없어지는 것 아닐까? 그만큼 죽음과 종교는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인류는 죽음이라는 인간의 궁극적인 문제--혹은 절체절명의 위기--와 싸우기 위해 인류에게만 있는 종교라는 독특한 삶의 체계를 만들어낸 것으로 보인다. 죽음을 극복하기 위해 세계의 종교들은 여러 가지 해결책을 제시했지만 가장 일반적인 해결책은 내세를 설파하는 것이었다. 인간은 죽는다고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죽은 뒤에도 다른 형태로--그게 영혼이든 의식이든--계속해서 존재한다는 것이다. 유교가 예외일 수 있겠지만 세계적인 ‘고등’종교 가운데에서 인간이 죽은 뒤에 아무 것도 남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종교는 없는 것 같다.
이러한 종교의 가르침에 따라 그 동안 인류는 죽음 뒤의 생존에 대해 거의 의문을 갖지 않고 받아들였다. 그러나 근세에 서양 과학이 발전하면서 상황은 아주 다르게 전개되었다. 죽은 뒤의 삶이 존재한다는 믿음은 소위 비과학적인 신념으로 매도되어 그 여파로 인류는 서서히 사후생 자체를 불신하기 시작했다. 이른바 과학적인 사고로 무장한 지식인들은 죽은 뒤의 삶을 인정하는 것 자체가 부끄러운 태도로 생각하는 듯 했다. 더 나아가서 죽은 뒤의 삶을 부정하는 것이 지성적인 태도로 간주되기도 했다. 한쪽에서는 그런 태도가 유행하는 가운데 다른 한쪽에서는 죽은 뒤의 삶에 대한 강한 긍정의 태도가 나오기 시작했다. 이것은 20세기 중반이 되면서 나타나기 시작한 일인데 근사체험1)을 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 대한 보고가 바로 그것이다. 이 사람들은 자신들이 분명 죽었고 이른바 영혼으로 불리는 어떤 것이 몸으로부터 빠져 나와 몇 가지 체험을 하고 다시 몸 속에 들어왔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한 연구사에 대해서는 본문에서 비교적 자세하게 다루겠지만 이런 사람들의 체험에 대해 거의 최초로 책을 써서 전세계적으로 주목을 받은 사람은 레이몬드 무디였다.2) 무디와 같이 거론되어야 할 사람은 세계적인 죽음학 학자인 퀴블러 로스인데 로스 박사는 무디의 책에 쓴 서문을 통해 무디가 밝힌 내용은 자신이 그 동안 죽음을 앞둔 환자들을 겪으면서 목격했던 체험과 일치한다고 적고 있다.3)
그런데 이 근사체험을 한 사람들에 대한 보고는 인류사 전체적인 입장에서 볼 때 획기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은 근사체험의 보고에서 나타나고 있는 것처럼 죽음이나 죽음 뒤의 세계에 대해 인류가 이렇게 직접적으로 접한 적이 일찍이 없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근사체험에 대한 연구는 최근에 들어와 과학적으로 연구할 수 있다는 합법성까지 부여받게 된다. 그 결과 근사 체험을 서술하는 수천 개의 사례가 미국 버지니아 대학에 있는 국제 근사체험 연구소(International Association for Near-Death Studies) 같은 연구 센터에 모아졌고 근사 체험을 학술적으로 연구하는 전문 잡지인 『Journal for Near-Death Studies』가 십여 년 전에 생겨나기도 했다. 바야흐로 인류는 죽음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과학적인 연구가 본격적으로 가동되기 전에 인류가 죽음과 그 뒤의 삶에 대해 접한 것은 종교라는 매개체를 통해서였다. 예를 들어 기독교 신자들은 죽음 뒤에는 천국과 지옥 (그리고 연옥)이 있고 천국은 대강 어떤 형태로 낙원의 모습을 지녔으며 지옥은 어떤 형태로 고통의 장소로 되어있는가를 그들의 경전이나 사제를 통해 주입 받았다. 이것은 불교나 이슬람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라 하겠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는 근사체험으로 오면서 완전히 달라진다. 근사체험에서 인류는 죽음을 직접 체험하고 전통적인 종교에서 말하는 것과는 매우 다른 내용을 보고하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죽음 직후에 터널 같은 곳을 통과한다거나 빛과 같은 존재를 만나 그와 함께 자기 생을 영상을 통해 되돌아본다는 체험의 보고는 전통 종교에서 말하는 죽음 뒤의 세계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그리고 천당과 지옥의 개념도 그 실재가 부정될 정도로 다른 양태로 보고되었다.
이런 상태에서 인류들은 근사체험을 통해 종교를 새로운 시각에서 보기 시작했다. 종교와 죽음은 떼래야 뗄 수 없는 극히 밀접한 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서두에서 밝힌 것처럼 인간이 만일 죽지 않는다면 종교는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추론이 가능할 정도로 종교의 영역에서 죽음의 자리는 큰 것이다. 그런 상황인지라 근사체험에는 종교에서 말하는 덕목이나 인생의 의무에 대한 강조와 같은 종교적 요소들이 눈에 많이 띤다. 이것은 근사체험을 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태도에서도 확인된다. 그들은 체험을 한 뒤 종교에 새롭게 눈을 뜨는 경우가 많았다고 보고하고 있다. 이 글은 바로 여기에 초점이 맞추어져서 진행된다. 인류에게 죽음에 대한 새로운 이해의 지평을 열어준 근사체험이 어떤 면에서 종교적인 체험으로 해석될 수 있는가를 보려는 것이다. 근사체험에 대한 연구는 아직도 걸음마 단계에 있다. 이 연구가 진행되고 심화됨에 따라 인류는 종교에 대해, 아니 더 나아가서 인간 자체에 대해서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근사체험을 종교적으로 재해석하는 문제는 대단히 중요한 문제로 생각된다.
이 글에서는 우선 죽음의 문제부터 다루려 한다. 우리는 왜 죽음의 문제가 종교에서 중요한 문제가 되는 지부터 보게 될 것이다. 죽음을 이해하는 방법에 따라 종교에 대한 시각이 달라지기 때문에 죽음을 이해하는 것은 종교와 관계해서 대단히 중요한 주제라 할 수 있다. 그 다음에는 죽음체험 중에 우리는 이 글의 중심과제인 근사체험에 대해서 보게 될 것이다. 특히 서구에서 근사체험이 연구되어 온 역사를 검토해 보고 근사체험의 내용에 대해 보게 될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근사체험이 지니고 있는 종교적 의미를 볼 수 있는 준비를 다 마친 것이 된다.
II. 왜 죽음인가
1. 죽음과 종교
앞에서 우리는 죽음의 문제와 종교는 떼래야 뗄 수 없는 관계라고 했다. 인생을 살면서 만나게 되는 수많은 국면 가운데 죽음에 관한 문제는 대체로 종교 쪽에서 다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그런 까닭이겠지만 종교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죽음과 연관된 일을 주관하게 된다. 예를 들어서 인간의 죽음에는 반드시 의례가 있기 마련인데 이 의례는 당연히 종교적인 인간--그게 사제가 되든 수도자가 되든--이 집전하게 된다. 이런 예는 네안데르탈인이 살던 시대에까지 올라갈 수 있다는 보고가 있다. 그들의 유적에서 시신을 놓고 종교의례로 추정되는 일을 한 것으로 보여지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가운데에는 시신이 놓여 있고 빙 돌려서 작은 돌을 놓은 흔적이 발견된 것이다. 그리고 한 쪽에는 꽃가루가 있는 것으로 보아서 시신에게 꽃을 바치는 종교 의례와 같은 의식을 치른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4)
인간은 어떤 상황에 처해 있기에 죽음에 대해 종교의례를 갖는 등 특별한 태도를 취하는 것일까? 그리고 동물에게는 왜 인간의 경우처럼 죽음을 둘러싼 종교 의례 같은 것이 발견되지 않는 것일까? 이에 대해서는 필자가 다른 책과 다른 글5)에서 상세하게 논했기 때문에 여기서는 지극히 간략하게만 논의해야 할 것 같다. 이 사정을 아주 간단하게 요약해서 말하면 “인간은 자신이 죽는다는 것을 아는 유일한 동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인식은 인간이 갖고 있는 자(기)의식(self-consciousness) 때문에 가능한 것인데 인간은 이 자의식 때문에 자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반면 동물 혹은 그 이하의 생물은 자의식이 없어 자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모를 뿐만 아니라 그 결과로 존재의 반대 개념인 비존재, 즉 죽음에 대해서도 인식을 하지 못한다. 동물들이 죽음을 맞이하는 방식은 안다(know)라고 하기보다는 다만 느낀다(sense)고 하는 게 적절할 것으로 생각된다. 만일 동물들도 인간처럼 자의식을 갖고 있었다면 죽음과 관련된 종교 의례를 만들어냈을 것이다.
죽음을 알게 된 인간은 죽음 앞에서 절체절명의 한계 의식을 갖게 된다.6) 인간은 죽음 앞에서 자신이 갖고 있는 모든 것의 의미가 없어진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유는 극명하다. 자신에게 가장 소중하다고 할 수 있는 자신 자체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데 자신이 소유한 돈이나 권세, 명예 같은 것들이 무슨 의미를 가질 수 있겠는가. 나는 죽음이란 인간의 가진 가장 큰 공포의 원천이라고 했다. 이 공포에 비하면 다른 작은 공포나 불안들은 그야말로 부차적인 것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죽음 앞에서 인간은 절대 허무를 느끼게 된다. 만일 느끼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그 사람의 인식 체계에 문제가 있는 것이지 죽음이 어떤 사람에게는 허무가 되고 어떤 사람에게는 그렇지 않고 하는, 그런 선택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7) 인간이 종교라는 인간 특유의, 혹은 유일의 삶의 분야를 만들어낸 것은 바로 죽음에서 겪는 인간의 태생적인 한계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인간들은 종교를 통해 죽음을 초월하고 절대 허무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을 부단히 생각해왔다. 그 결과 종교는 인간이 죽음 뒤에도 계속 존재한다는 영생 개념을 제시했고 절대 허무를 극복하는 방법으로 인생의 궁극적인 의미에 대해 나름대로 해석을 제시해왔다.
이와 같이 우리 인간이 삶의 궁극적인 의미를 알고 싶어한다면 죽음 혹은 죽음 뒤의 삶에 대한 의미 혹은 해석을 제대로 갖고 있어야 한다. 만일 죽음이 모든 것의 끝이라면 그 허무를 당해낼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죽어서 내가 없어지고 아무 것도 남지 않는다면 지금 이 생에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또 윤리(적인 삶)이 설자리는 어디일까? 죽은 뒤에 아무 것도 남지 않는다면 인간들은 윤리적으로 살아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칸트는 인간의 삶에서 대단히 중요한 요소라 할 수 있는 윤리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요소가 요청된다(postulate)는 주장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 두 가지 요소는 존재하는지 존재하지 않는지는 잘 모르지만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요청된다는 것이다. 두 가지 요소란 ‘사후생’이 있어야 할 것과 ‘심판자로서 신’의 존재가 필요하다는 것이 그것이다. 살아서 나쁜 일을 한 사람이 살아서 벌을 받지 않는다면 죽어서라도 신으로부터 벌을 받는 것으로 되어 있어야 윤리적인 삶이 가능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입장에서 보아도 삶과 죽음은 반드시 같이 가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죽음이 갖고 있는 이런 속성 때문에 많은 종교인들은 죽음에 직면하면서 죽음이나 삶을 초월할 수 있는 전기를 갖게 된다. 예를 들어보자. 한말의 걸승이었던 경허(1849-1912)는 참선에 매진하기 전에는 경에 아주 밝은 유명한 강사였다. 그러던 그가 우연히 전염병이 돌아 적막강산이 된 어떤 마을에 들어가게 됐다. 그때 죽음을 강하게 느낀 경허는 지금까지 자신이 했던 일이 모두 부질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죽음 앞에 서니 세상의 모든 것이 의미를 잃어버린 것이다. 그는 그때부터 경을 버리고 참선에 용맹정진해 깨달음을 얻고 만다. 비슷한 경우는 일본의 원효라고 하는 도겐[道元, 1200-1253]에게서도 발견된다. 전승에 의하면 그는 7세 때 부모가 죽어 화장하는 데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를 보고 인생 무상을 느껴 출가했다고 한다.
종교를 앞에서 정의한 것처럼 인간의 궁극적인 문제에 대한 분석과 해결책 제시라고 했을 때 종교는 죽음에 대한 탐구를 통해서 많은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다. 인간의 궁극적인 문제란 인생의 궁극적인 의미와 직결되는 문제인데 이 문제를 풀기 위해 삶에만 매달리면 그것은 반쪽에만 집중하는 것이다. 그런데 삶과 죽음은 분리할 수 없는 한 쌍으로 이해해야 한다. 따라서 삶의 궁극적인 의미를 알려고 한다면 죽음에 대해서 제대로 알지 못하면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장자도 비슷한 말을 했다. “죽음과 삶은 (인간의) 운명이다. 저 밤과 아침의 일정한 과정이 있음은 자연(의 모습)이다. (이처럼) 인간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바가 있는 것이 모든 만물의 진상이다.”8) 따라서 죽음에 대한 이해는 우리가 삶을 통전적으로 이해하려 할 때 필수 불가결한 요소가 된다. 다른 식으로 표현해서 종교의 의미는 죽음의 입장에서 볼 때에만 제대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9)
2. 죽음, 그 마지막 성장의 단계
죽음이 반드시 높은 수준에 있는 종교인에게만 종교적인 통찰력을 주는 것은 아니다. 일반인들도 뜻하지 않았던 혹은 자연적인 죽음을 직면하게 되면서 생을 되돌아보는 경우가 생길 수 있다. 물론 이런 기회는 살면서도 가질 수 있지만 많은 경우 죽음에 직면했을 때 자연적으로 갖게 된다. 이런 비근한 예로서 나는 일본의 세계적인 감독인 구로자와 아키라(1910-1998)가 만든 영화 ‘이키루[生きる]’10)의 주인공을 들고 싶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30년을 한번도 결근하지 않고 시청 공무원으로 일을 했다. 그러다 위암에 걸려 그 충격으로 무단 결근을 하면서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본다. 자신은 미라에 불과했다는 생각 끝에 처음으로 인생의 궁극적인 의미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그런 탐색 중 그는 죽기 전에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발견한다. 그는 자신이 외면해왔던 사업으로 주민들의 숙원 사업이었던 도심공원 만드는 일에 진력해--수많은 난관을 거쳐서--죽기 전날에 완성시킨다. 주인공은 사랑과 봉사라는 높은 덕목에 대해 뒤늦게 눈을 떠 성숙의 전기를 맞이한 것이다.
인간이 죽음을 통해 종교에서 말하는 내적인 성장 혹은 성숙을 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은 많은 죽음학 학자들이 주장하는 바이다. 앞에서 인용한 로스가 『죽음: 성장의 마지막 단계(Death: The Final Stage of Growth)』11)라는 제목의 책을 저술한 것은 같은 의도였을 것이다. 퀴블러 로스는 불치병에 걸린 환자들이 죽음을 선고받았을 때 나타나게 되는 반응을 다섯 단계로 나눈 것으로 유명하다.12)13) 로스는 죽음을 앞둔 환자들을 면밀히 관찰함으로써 그들이 죽음을 앞두고 어떻게 변화하는가를 관찰했다. 모든 임종 환자들이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죽음을 앞둔 사람들은 생의 의미를 깊게 생각해 보고 얼마 남지 않은 본인 삶에서 의미를 만들려고 애를 썼다. 그리고 주위에 대해 겸손해지고 열릴 뿐만 아니라 세상을 아름답게 보게 된다고 한다. 여기서 더 나아간다면 임종 환자는 성장을 경험할 뿐만 아니라 초월의 영역에까지 도달할 수 있다. 이런 과정에서 만일 환자가 삶의 궁극적인 의미를 깨닫게 된다면 그것은 인간을 넘어선 초월적인 영성이나 종교성을 인정하는 것으로 연결될 수 있다. 빅터 프랭클이 인생이란 일종의 과제이자 임무이며 사명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이런 의미가 있을 것이다.14) 우리는 인생에서 자신이 가져온 과제를 실현하고 그 다음 영역인 초월로 나아가는 것이다.
자신의 대표적 저서인『존재와 시간』에서 하이데거는 인간에게는 본래성과 비본래성이 있다고 주장했다.15) 그의 분석에 따르면 인간을 제외한 다른 존재물들은 다만 존재할 뿐이고 인간만이 실존한다. 이것은 우리가 조금 전에 보았던 것처럼 인간만이 자기의식을 갖고 있다는 분석과 맥을 같이 할 것으로 생각된다. 인간만이 죽는다는 사실을 안다면 인간은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존재로 볼 수 있다. 인간은 죽음 앞에서 공포를 갖게 되는데 이것은 죽음 자체에 대한 공포뿐만 아니라 삶에 대한 의의나 가치를 잃어버리게 될지도 모른다는 데에 대한 공포이다. 이러한 공포를 하이데거는 불안(Angst)이라고 불렀다. 공포는 특정한 대상이 있어야 하지만 불안은 대상이 특정하지 않다는 특징이 있다. 죽음은 알 수 없기 때문에 특정한 대상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인간이 자신의 본래성을 안다는 것은 삶과 죽음에서 파생되는 문제들을 해결하고 그 의미를 알아내는 것인데 이것은 죽음에 대면해야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들은 죽음과 가까워지면서 죽음의 위협을 망각하게 되는데 이런 것들이 실존의 비본래성의 한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우리는 죽음과 대면해서 인생의 의미를 알려고 하지 않고 일상적인 일에 고의로 자신을 파묻어 버려 비본래적인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우리의 인생에서 죽음 자체가 갖고 있는 의미에 대해 보았다. 만일 우리의 인생 목표가 삶의 궁극적인 의미를 파악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죽음과 분리해서는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우리는 죽음을 직접 대면하고 마음대로 연구할 수가 없다. 인간은 한번 죽으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앞서 말한 대로 비록 짧은 순간이지만 죽음을 체험했다고 하는 사람이 있어서 그 사람들의 죽음 체험, 즉 근사체험을 분석함으로써 죽음 자체에 대해 일별이나마 해보고자 한다.
III. 근사체험이란
1. 근사체험 초기 연구사
극히 최근까지 서구 과학이나 의학은 어떤 형태든 인간이 죽음 뒤에 생존하는 것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태도를 취했다. 한 마디로 인간이 죽은 뒤에도 존재하는 것은 희망과 미신에 근거를 둔 허구적인 것이라는 것이다.16) 그러나 1970년대에 들어오면서 상황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근사 체험에 대한 보고가 잇달았기 때문이다. 물론 전 세계적으로 근사 체험에 대해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것은 이 글의 서두에서 인용한 무디의 저서였다. 무디는 의사 생활을 하는 가운데 본인이 죽었다가 살아났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약 150개정도 모아서 책으로 저술했다. 사실 이 이전에 로스 박사 역시 오랜 동안 임종 환자들을 다루는 가운데 근사체험을 한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고 그들의 체험에 대해 잡지나 방송에서 말하고 있었다. 로스는 자신이 발견한 것과 무디가 발견한 것이 정확히 일치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고 그 사실을 무디의 저서에 쓴 자신의 서문에서 간증하고 있다.
그런데 근사 체험에 대한 나름대로의 진지한 연구는 사실은 이보다 훨씬 전에 이루어졌다. 그것도 심리학자나 정신의학자가 행한 것이 아니라 엉뚱하게도 지질학자의 손에 의해 시작되었다. 그 주인공은 스위스 사람으로 앨버트 하임(Albert Heim)이라는 이름을 가진 지질학자였는데 그는 알프스 산을 오르던 중 추락하면서 이른바 근사체험이라 불릴만한 체험을 하게 된다. 그 뒤에 그는 등반을 하다 조난을 당한 사람들로부터 비슷한 체험을 접하게 되었고 그것을 모두 자료화한다. 뿐만 아니라 비슷하게 치명적인 사고를 당한 사람들, 예를 들어 사경을 헤매던 군인, 고공에서 작업하다 떨어진 노동자 등에게서도 비슷한 체험담을 듣고 그것 역시 자료로 모았다.
그는 이 자료들을 1892년에 스위스 등반가 협회에서 정리하여 발표하게 되는데 그의 결론은 앞에서 열거한 사고들이 비록 유형은 다 다르지만 근사 상태에 이르렀을 때 사람들의 반응은 95% 정도가 유사하다는 것이었다. 이때 사람들이 보고한 반응은 대체로 다음과 같았다. 처음에는 정신이 고양되어 사건이나 그 결과에 대한 지각이 명확하게 느껴진다. 그 단계가 지나면 인생을 조감하는 단계가 찾아온다. 의식만 남은 자기 앞에 영상으로 자기가 살아왔던 과거의 사건들이 선별적으로 펼쳐지게 된다. 그런데 그 영상은 선명하기 짝이 없다. 그럴 즈음 피체험자는 초월적인 평온감으로 느끼게 된다. 근사 상태의 초기의 모습에 대한 하임의 묘사는 다소 거칠기는 하지만 20 세기 중반 이후에 학자들이 밝혀낸 것과 비교해볼 때 그 큰 틀은 같다.17)
그런데 하임 교수의 연구가 정작 빛을 발한 것은 한참 뒤에 나타난 정신의학자의 연구에서였다. 1970년 초반에 미국의 러셀 노이예스 주니어(Russell Noyes Jr.)와 레이 클레티(Ray Kletti)는 하임의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조사를 한 결과 무디나 로스가 제시한 연구와 비슷한 결과를 얻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만한 것은 그들이 내린 해석이다. 그들은 죽음에 임박한 사람들이 무집착(detachment)과 초월의 상태에 처하는 것은 임박한 죽음의 공포를 완화시키려는 자아 방어적 반응으로 보았다. 그들은 이것을 “비인격화 현상(depersonalization)"으로 불렀는데 이러한 설명은 무디나 로스가 제시한 것과는 명확한 대조를 이룬다. 사실 노이예스의 연구 이전인 1961년 초심리학자인 카알리스 오시스(Karlis Osis)와 그의 동료들은 임종 환자를 다룬 경험이 있는 의사와 간호사에게 설문지를 돌려 600 여장을 회수해 그것을 분석했는데 이것은 기존 연구의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았기 때문에 여기서는 생략하였다. 그의 연구는 무디나 로스의 연구 결과와 아주 흡사했기 때문이다.18)
그 다음에 나온 연구로 주목할 만한 것은 주 17에서 인용한 책인데 정신분석학자인 그로프와 인류학자인 할리팩스가 그 저자들이다. 그들은 피실험자들에게 환각제의 일종인 LSD를 투여하여 생기게 되는 체험을 근사체험과 비교하고 분석해서 이 책을 저술했다. LSD를 복용한 사람들은 여러 가지 환각적인 체험을 하게 되는데 그 중에 어떤 체험은 근사체험과 매우 유사한 것으로 보고되었다. LSD를 가지고 실험한 사람은 이들 뿐만이 아니다. 1960년 대 초반에 하버드 대학의 심리학과 교수였던 티모시 레어리와 리챠드 앨버트는 LSD가 심리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연구했다.19) 이 연구를 수행하던 중 그들은 죽음 뒤의 세상에 대해 잘 정리한 것으로 이름이 높은 티벳의 『사자의 서』를 입수하고 그들이 LSD 복용자들에게서 얻어낸 체험 결과와 너무 비슷한 것을 발견하고 무척 놀라게 된다. 이 책에서 말하고 있는 내용으로 죽은 다음 환생에 이르기까지의 49일 간에 대한 묘사가 환각제 체험 때 얻은 경험과 너무나 비슷했던 것이다. 그들은 이 티벳의 책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해 LSD를 바르게 체험하기 위한 책으로 다시 쓰게 된다. 이 책은 1964년에 “The Psychedelic Experience“란 제목으로 출간되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이 책은 LSD를 복용할 때 얻게 되는 환상 체험을 처음으로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했다는 평을 받는다.20)
이런 연구 끝에 나온 것이 무디의 저서였다. 그런데 무디의 책은 미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이 주제에 대해 반향을 불러일으켰지만 과학적인 접근은 아니라는 명확한 한계를 갖고 있었다. 무디의 책은 단지 그가 의사로서 진료를 하던 중 만났던 근사 체험 환자들의 체험을 모아놓은 것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한편 당시 무디와 더불어 근사 체험에 대해 설명하고 있었던 로스는 그때까지 어떤 형태로든 이 주제에 관한 책을 전혀 출간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연구는 평가할 만한 단계가 아니었다. 그들의 연구가 과학적으로 재평가되는 것은 케니스 링의 연구를 기다려야만 했다. 링은 주 18에서 인용된 『Life at Death』란 책에서 특히 무디의 연구 결과가 갖는 한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조목조목 논하고 있다.21) 그것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은데 링의 저서는 바로 이런 문제점을 답하기 위해 씌어진 것을 보면 된다.
우선 링은 근사 체험에서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체험의 요소들을 단계 별로 요약하고--이것은 다음 섹션에서 자세하게 보게 된다--이것을 핵심 체험(core experience)이라고 명명했다. 우선 링이 지적한 문제점은, 무디의 연구에서는 죽음을 경험했다고 주장한 사람 가운데 이 핵심 체험을 한 사람들의 비율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근사 체험을 했다고 해서 이 핵심 체험을 다 경험하는 것은 아닌데 무디는 이런 산술적인 계산을 전혀 하지 않은 것이다. 실제로 근사 체험자 가운데에는 이 핵심 체험을 겪지 않은 사람도 많은 것으로 보고되고 있는데 무디는 이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이 없었다. 이것과 연관해서 그 다음으로 나오는 질문은 만일 이 핵심 체험을 경험한다 하더라도 모든 근사 체험자가 핵심 체험에 나오는 단계를 다 겪느냐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근사 체험자가 죽음을 맞이하는 주변 조건에 따라 핵심 체험을 조금씩 다르게 겪을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것에 관한 것이다. 예를 들어 링은 자동차 사고와 같이 급한 사고를 당한 사람과, 심장 발작과 같이 질병으로 인한 사고를 당한 사람과, 자살과 같이 스스로 초래한 사고를 당한 사람들이 겪었던 근사 체험을 분석한 결과 각각 그 핵심 체험의 범위가 다르게 나온다고 보고하였다(가령 자살자들에게는 핵심 체험 중에서 가장 중요한 체험이라 할 수 있는 빛의 존재와 조우하는 체험이 거의 없었다). 이런 세세한 분석은 무디의 저서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다음으로 지적하는 문제점은 무디의 연구에서는 종교성과 핵심 체험의 상관 관계에 대해 검토되지 않았다는 것을 들 수 있다. 이 문제는 자신이 어떤 일정한 종교에 속해 있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더 많은, 그리고 더 깊은 핵심 체험을 하게 되느냐에 관한 것이다. 그런데 링의 분석한 결과를 보면 종교성과 핵심 체험의 깊이는 별 관계가 없는 것으로 나온다. 마지막으로 링이 다루고 싶은 주제는 근사 체험을 한 사람들의 삶이 그 체험을 한 뒤에 어떻게 바뀌는가에 대한 것이다. 앞에서 거론한 연구들을 보면 대부분의 근사 체험자들은 그 이후에 개인적으로 대단히 큰 변화를 겪게 된다고 보고하고 있는데 이 경우 역시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그 집단에서 대표성을 띠는가에 대해 의문을 던질 수 있다는 것이다. 링은 자신의 저서에서 이러한 주제들에 대해 조직적이고 통계적으로(혹은 수량적으로) 접근하고 있다.
링의 저서를 읽어보면 알 수 있지만 그의 연구는 같은 주제에 대한 이전의 어떤 연구보다 주밀 하다. 아마도 그의 연구는 앞으로 근사 체험 연구사에서 이 연구를 한 단계 끌어올린 획기적인 연구로 평가될 것이다. 그럼 지금까지 계속 보아온 근사 체험 그 자체는 어떤 것일까? 우리는 앞으로 이 근사 체험이 갖는 종교적 의미나 중요성에 대해 보아야 하는데 그것을 알려면 우선 근사 체험 자체에 대해서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2. 근사 체험의 내용과 그 단계들
죽음 근처에 갔다 온 사람들이 모두 근사 체험을 하는 것은 아니다. 베커에 의하면 죽었다가 살아 나왔다고 주장하는 환자 가운데 미국인은 10%만이--일본인은 더 적으리라고 생각되는데--그 체험을 했다고 보고한다. 우리는 임종에 가까운 사람들 가운데 어떤 사람은 근사 체험을 경험하고 어떤 사람은 그렇지 못한가에 대해서 그 이유를 잘 모른다. 혹시 모든 사람이 근사 체험을 하는데 기억을 못하는 경우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것은 모든 사람들이 매일 밤 꿈을 꾸는데 어떤 사람은 기억을 잘 하고 어떤 사람은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조사 결과에 의하면 실제로 꿈을 잘 기억하는 사람은 근사 체험에 대해서도 잘 기억한다고 한다.22)
근사 체험의 내용과 단계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학자들이 비슷한 견해를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여기서는 대표적인 것으로 무디의 주장과 베커의 주장을 비교해보자. 물론 지금 제시하는 단계는 모든 사람에게서 발견되는 것도 아니고 단계의 순서가 일치하는 것도 아니지만 우선 무디가 주장하는 죽음 뒤에 벌어지는 상황은 다음과 같다.
1. 말로 표현하기 힘듦(inevitability)
2. (자신이 죽었다는) 말을 들음
3. 평화로움과 고요함을 느낌
4. 소음(이 들림)
5. 어두운 굴(을 빠져나가는 느낌)
6. 몸밖으로 나가는 체험
7. (먼저 죽은) 사람들을 만남
8. 빛의 존재를 만남
9. 자신의 삶을 되돌아 봄(The review)
10. 경계에 다다름
11. 돌아옴
이에 비해 베커는 7 단계를 주장하는데 무디가 주장한 11단계와 비교하면서 각 단계들을 설명해보자. 무디가 첫 번째 항목으로 말로 표현하기 힘들다는 것을 뽑은 것은 죽은 뒤에 만난 세상의 모습이 언설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다는 것에 근거한다. 어떤 근사 체험자는 회고하기를 죽음 뒤의 세상을 묘사하는 것은 3차원에서 통용되는 언어를 가지고 4차원에 대해 설명하는 것 같다는 표현을 했다.23) 그런가 하면 많은 체험자들이 저 세상은 너무도 아름다워서 이승의 아름다움을 훨씬 능가할 뿐만 아니라 지상의 언어로는 그 아름다운 모습을 표현할 길이 없다는 데에 입을 모은다. 무디가 조사했던 어떤 사람은 죽었다 깨어난 다음에 일주일 동안이나 울었다고 한다.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저 세상을 보고 나니 이 세상에서 살기가 싫어졌기 때문이었다.
그 다음에 나오는 ‘자신이 죽었다는 말을 들었다’는 단계는 별 설명이 필요 없을 것 같다. 근사 체험자들은 큰 사고를 당한 직후 옆 사람들로부터 ‘이 사람은 죽었다’라는 말을 듣는 것이다. 베커는 그 다음 단계부터 시작한다. 베커가 주장한 근사 체험의 첫 번째 단계는 체외 이탈 체험이다.24) 이 체험은 한국에서는 보통 유체 이탈(幽体離脫) 체험이라 불리는데 유체란 단어의 뜻이 불분명하기 때문에 여기서는 객관적 용어인 체외 이탈이라는 단어를 쓰기로 한다. 이것을 영어로는 'Out-of-Body Experience'라고 하고 줄여서 'OBE'라고 쓰는데 이 체험은 근사 체험자들에게서 보편적으로 발견되기 때문에 근사 체험 연구에서 대단히 중요한 사항이 된다. 체외 이탈은 말 그대로 어떤 사람의 의식이 몸밖으로 빠져나가 자신(의 몸)이나 주위의 사람들을 허공에서 바라보는 체험을 말한다. 방안에서 이러한 체험을 하면 보통 천장에서 자신의 몸을 바라보게 된다. 이 체험은 결코 이상한 체험이 아니라 정상적인 것이라고 한다. 일반인들 가운데에도 이런 체험을 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가령 10대 가운데에는 60명중에 한 명 꼴로 이 체험을 자연스럽게 한다고 한다. 또 명상을 할 때나 잠이 막 들려할 때(혹은 아주 깊은 잠을 잘 때), 또 마취 상태에 있거나 혹은 아주 피곤한 상태에 있거나, 또 영양 결핍 상태에 있을 때에도 의식이 몸을 빠져나가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근대에 들어와서 근사 체험에 대한 연구가 1892년 앨버트 하임에 의해서 처음으로 시작되었다고 했는데 그 역시 체외 이탈 체험을 경험한다. 알프스 산을 오르던 중 실족해 의식을 잃었는데 뒤에 깨어난 다음에 자신이 미끄러지던 중 의식이 몸을 떠나 추락하는 자신의 몸을 보았다고 말하자 다른 등반가들도 비슷한 체험을 했다고 동감을 표시했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이차 세계대전이나 월남전 때에도 부상당한 병사들 가운데 많은 수가 이 체험을 한 것으로 보고했다. 그들은 단순히 전장(戰場)을 내려보는 경우도 있지만 그(영혼) 상태로 미국에 있는 집으로 돌아가 모친이나 아내들을 만났다고 주장했다.25) 그런데 이들의 주장을 무시할 수 없는 것이 나중에 다시 살아나 자신이 영혼 상태로 집을 방문했을 때 어떤 일이 있었는가를 정확하게 묘사하기 때문이었다. 더 놀라운 것은 이들이 영혼의 상태로 집을 방문했을 때 그들의 모친이나 아내가 그들의 영혼(유령)을 목격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거의 대부분의 경우 이승에 있는 사람들은 죽은 이의 영혼이 옆에 있어도 전혀 알아채지 못한다. 반면에 개나 고양이들은 영혼의 임재를 느낄 수가 있다고 한다. 심지어 어떤 개는 영혼이 나타났을 때 짖을 뿐만 아니라 그 영혼을 향해 뛰고 핥으려고 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26)
이럴 경우 가장 많이 대두되는 질문은 인간이 뇌가 없이도 생각을 하고 의식을 가질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이 문제는 대단히 복잡한 문제라 여기서 자세하게 논의할 수는 없다. 보통 서양 의학에서 뇌라는 기관은 모든 사고의 근원으로 간주되기 때문에 뇌가 없이는 생각이나 의식이 있을 수 없다고 주장된다. 그런데 비록 흔한 경우는 아니지만 뇌파가 꺼진, 다시 말해 뇌의 기능이 정지된 사람들 가운데 극소수가 다시 깨어나 체외이탈 체험을 했다고 증언하는 경우가 있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아주 응급한 상황에서는 마음이 뇌나 육체와 관계없이 기능할 수 있다는 연구 결과도 있었다. 이러한 추론은 과학적으로도 뒷받침되었는데 가령 노벨상 수상자인 존 에클리스 경(Sir John Eccles)은 자신의 저서 『The Self and Its Brain』에서 인간의 의식은 뇌의 활동보다 앞서 간다는 의학적 조사 결과를 보고하고 있다. 에클리스 경의 견해는 지금까지 서양 의학이 견지한 단순한 유물론적인 견해보다 체외이탈 체험과 더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27)
그런데 우리는 무디의 설명에서 약간의 수긍할 수 없는 점이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는 임종 환자가 소음이 들리고 굴을 빠져나간 다음에 몸밖으로 빠져나가는 체험을 한다고 했는데 캄캄한 굴의 체험은 몸밖으로 나서야 할 수 있는 것이지 영혼이 몸 안에 있을 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점은 링도 필자와 같은 견해를 갖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무디의 주장을 조금 수정해 본다면 영혼이 몸밖으로 나갈 때 평온한 느낌과 소음을 같이 체험하는 것으로 정리될 수 있다. 그리고 몸을 벗자마자 먼저 죽은 사람들의 영혼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그 영혼 가운데에는 자신과 극히 친한 친척이나 친구들도 포함되지만 전혀 알지 못하는 영혼들도 있다고 한다. 이 영혼들은 지금 방금 도착한 임종 환자의 영혼을 향해 ‘자신들이 당신을 평생 보호해 왔다’고 하면서 ‘아직 이곳에 올 때가 아니니 돌아가라’고 충고했다는 보고도 있다.28)
베커가 말하는 두 번째 단계는 캄캄한 어둠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영혼이 몸을 빠져나온 직후에 겪게 되는 주요한 현상은 죽음학자들이 모두 주장하고 있는 캄캄한 어두운 공간 혹은 굴의 체험이다. 많은 영혼들은 죽음 직후 아주 어두운 굴속에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 굴을 빠른 속도로 지나가는 체험을 한다고 한다. 그런데 터널의 저 끝에는 아주 환한 빛이 보이고 그 빛에 가까이 갈수록 빛이 커진다고 한다. 그래서 이 체험을 ‘터널 체험(tunnel experience)’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그런데 어떤 때는 이 터널이 수직으로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수평으로 체험된다고 하는데 그 모양이 어떻든 어두운 것은 매한가지라고 한다.
이 터널 체험은 왜 체험되는 것일까? 물론 확실한 것은 알 수가 없지만 이에 대해 대단히 흥미로운 설명이 있어 소개했으면 한다. 링은 자신의 저서 말미에서 근사 체험의 단계를 설명하면서 나름대로 해설을 달고 있는데 여기서 링은 터널 체험에 대해서 매우 설득력 있는 설을 제시하고 있다. 링의 해석에 의하면29) 터널 체험은 우리의 의식이 삼차원적인 감각의 차원에서 그것을 넘어서는 사차원적인 수준으로 옮겨가는 과정에서 생긴 것이라는 것이다. 사차원적인 수준이라는 게 무엇일까? 이에 대해 링은 프리브람의 이론에 의거해 육체적인 삼차원의 세계에서는 시간과 공간이 따로따로 존재하지만 사차원적인 세계에서는 모든 게 한꺼번에 존재하는 홀리스틱한 세계가 펼쳐진다고 주장한다. ‘근원적 실재(primary reality)'는 (에너지의) 진동(frequence)으로만 구성되어 있는데 삼차원 세계에서는 진동 분석기(frequence analyzer)인 뇌가 그 진동을 자기 수준에서 해석하여 이미지로 보여준다고 한다. 그런데 사람이 죽게 되면 뇌의 해석이 없기 때문에 이 진동을 있는 그대로 객관적으로 접하게 된다. 사람이 죽게 되면 이렇게 새로운 실재의 세계를 접하기 때문에 터널 체험은 그런 과정에서 겪게 된다는 것이다.30)
베커는 이렇게 해서 영혼이 터널을 통과하면 아주 빛나고 색깔이 형룡한 세계로 들어간다고 주장한다. 그곳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이 살아 생전에 본 것보다 훨씬 더 아름다운 꽃밭을 보게 되는데 어떤 사람은 그와는 달리 나무나 연못, 언덕, 새 같은 동물들을 본다고 한다. 이 광경은 생전에 보았던 것과는 비교도 안 되게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당사자는 그 속에서 밝음과 안온함을 느낀다고 한다. 또 어떤 사람은 지극히 아름다운 음악을 듣게 되는데 그때에도 아주 편안한 감정을 느끼게 된다. 이와 같이 사람마다 체험하는 이미지는 조금씩 다르지만 모두가 다 자신이 죽어서 저승(next world)에 도착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베커가 말하는 네 번째 단계는 영적인 안내자와의 만남이다. 이 안내자는 보통 아주 밝고 사랑스러운 감정을 가진 빛으로 나타나는데 이 빛은 말할 수 없이 밝지만 눈을 못 뜰 정도로--영혼에 눈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밝은 것은 아니라고 한다. 그래서 이 안내자를 '빛의 존재(Figure of Light)'라고 부르는데 그 전체적인 느낌은 대단히 안온하고 편안하다고 한다. 이 안내자의 모습은 빛 이외에도 인간의 형상 같은 모습을 띠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신이라든가 붓다, 예수, 마리아, 보살, 혹은 먼저 죽은 조상들이 나타나는 경우도 드물지 않게 있다고 한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불교도에게 예수 이미지가 나타나지 않는 것은 당연하겠지만 개신교도에게도 마리아의 이미지는 나타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이와 같이 이미지는 다르게 나타날지 모르지만 그 의미는 같다. 즉 이 빛의 존재는 새로 저승에 도착한 영혼을 안내하는 역할을 맡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말을 쓰지 않고 텔레파시를 이용하여 영혼과 교통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제 다섯 번째 단계까지 왔다. 이 단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의 삶을 영상으로 회고하는 것이다. 이때 자기 앞에서 일생 동안 겪었던 일들이 아주 생생하게 펼쳐진다고 한다. 그런데 이 영상을 혼자만 보는 것은 아니다. 바로 전 단계에서 만났던 빛의 존재가 이 영상에 나오는 내용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것처럼 하면서 같이 이 영상을 본다고 한다. 그런데 이 시간은 아주 짧은 것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내용이 극히 생생하게 보인다고 한다. 예를 들어 자동차 사고가 나서 벼랑을 구르는 아주 짧은 시간에 자기 인생 동안 있었던 많은 일들이 아주 생생하게 보여지는 것이 그것이다. 어떤 사람의 경우에는 어릴 때부터 있었던 일들이 모두 나오는가 하면 어떤 사람의 경우에는 중요한 일 몇 가지만 리뷰한다. 보이는 방식도 사람에 따라 다르다. 어떤 사람은 비디오를 빠른 속도로 보는 것처럼 보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슬라이드나 사진을 보는 것처럼 각 컷들이 계속해서 이어지는 형태로 보기도 한다. 또 어떤 사람은 자기 눈으로 보는 것처럼 모든 것을 조망하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그 자신까지도 대상화시켜 밖에서 보는 것처럼 관찰하는 경우도 있다. 이렇게 각기 다른 형태로 삶에 대해서 회고를 하지만 자신의 생을 재평가한다는 점에서는 모두 일치를 보인다.
이때 그 빛의 존재는 바로 옆에 같이 있게 되는데 그 빛은 임종 당사자가 크게 잘못한 영상이 나오더라도 전혀 질책하는 것이 없이 시종 안온하게 감싸는 분위기를 유지한다고 한다. 어떤 종교에서는 인간이 죽은 뒤 신이 심판하고 벌을 준다고 하는데 근사 체험에서는 그런 흔적을 찾아볼 수가 없다. 베커의 설명을 계속 들어보자.
근사 체험은 좀더 도전적인 생각을 제시한다. 즉 임종자를 심판하는 것(빛의 존재)은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것이다. 그는 이때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행했던 고통을 알게 되고 다른 사람에게 빚진 것도 알게 되며 자신의 이기성이나 무모함에 대해서도 뉘우치게 된다. (이때) 많은 사람들은 그 이후의 자신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큰 변화를 마음속으로 겪게 된다.31)
그러니까 이때가 되어서야 자신이 일생동안 행했던 잘잘못을 알게 되고 자신에게 일어났던 일들의 진정한 의미를 파악하게 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예를 들어 왜 어떤 특정한 때에 자신에게 심장마비 같은 질병이 온 건지, 어떤 자식은 왜 저렇게 망나니로 되었는지 또 남편은 왜 그리 바람을 많이 피웠는지 등과 같은 아픈 현실이 왜 일어났는가에 대해서 알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때 삶의 회고를 통해 배우는 내용에 대해 무디나 로스를 비롯해 거의 대부분의 죽음학자들은 일치된 견해를 보이고 있다. 위에서 인용한 글에서 베커가 이미 밝힌 것이지만 우리는 이 회고를 통해서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삶을 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며 인생의 지혜를 배우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절실하게 깨닫게 된다고 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난 데에는 확실한 의미나 소명이 있음을 알게 된다고 한다. 이런 체험 덕에 근사 체험을 한 사람들은 그 체험에서 깨어난 다음에 그 전의 삶과는 달리 매우 적극적인 삶을 살게 되는 경우가 많다.
사람은 육체를 벗어난 바로 그 때에 이러한 엄청난 지혜를 얻게 되는 모양인데 이에 대해서는 티벳인들도 동감하고 있다.32) 모두 주지하는 바와 같이 티벳에서는 사람이 죽을 때가 되면 계속해서 '사자의 서'를 읽어준다. 그것은 사람이 영혼의 상태가 되면 물질로 구성된 육체나 현세의 조건에 구애받지 않기 때문에 훨씬 더 자유롭게 외부의 정보에 반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불교 식으로 말하면 죽은 직후가 되면 우리의 경직된 마음이 허물어지게 되어 육체를 갖고 있을 때에는 감추어져 있는 불성(佛性)을 만날 수 있는 확률이 높아진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죽은 직후에만 이 책을 읽어주는 것이 아니라 3 단계로 나누어서 며칠 동안을 계속해서 읽어준다. 왜냐하면 시간이 흐르면 죽은 영혼을 둘러싸고 있는 상황이나 조건이 달라진다고 믿기 때문이다. 영혼을 깨달음으로 인도하려는 초기의 시도는 마지막 3번째 단계로 가면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것은 포기하고 보다 나은 환생을 택할 수 있는 쪽으로 도와주는 것으로 끝난다.
그런데 이 빛의 존재는 과연 무엇일까? 베커가 주장한 것처럼 그저 이 빛이 자기 자신의 다른 모습이라고 하면 될까? 그러나 자신이라는 것은 매우 속된 존재에 불과할텐데 어떻게 해서 그 속된 자기가 갑자기 빛에 충만한 성스러운 존재로 바뀔 수 있을까? 이 문제에 대해 링은 매우 통찰력 있는 답을 제시한다. 링에 의하면 이 빛으로 나타나는 자아는 평상 상태의 자아가 아니라 그 자신의 전체적 자아(total self) 혹은 진아(眞我, higher self)이다. 이런 견해에 따르면 개인의 평상시의 인격은 전체적 자아에서 파생된 부분에 불과하고 사람은 죽을 때가 되어야 이 전체적 자아와 다시 하나가 된다. 이 개인의 인격은 평상시에는 전체적 자아와 관계없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보이지 않게 전체적 자아와 연결되어 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이 전체적 자아를 빛으로 파악하는 것일까? 여기에 대해 링은 심리학자답지 않게 매우 신비로운 답을 제시하고 있다. 생생함을 살리기 위해 그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진아(higher self)는 너무 경외스럽고 너무 압도적이며 너무 사랑스럽고 무조건 받아주는데(마치 모든 것을 포용하는 엄마처럼) 각자의 개별화된 의식에게는 너무나 낯설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것을 자기와는 확실히 ‘다른’ ‘분리된(separate) 것으로 느끼게 된다. (그런 상황이기 때문에) 진아는 자신을 밝게 빛나는 황금빛으로 나타내 보이지만 사실 그것은 상위의 형태로(in higher form) 나타나는 자기 자신일 뿐이다...(중략)... 그 황금빛은 내재되어 있는 자신의 신성이 나타난 것(reflection)이며 진아를 상징한다. (죽은 당사자가) 보는 빛은 바로 자기 자신의 빛인 것이다.33)
이 정도 되면 이런 설명은 과학적인 설명을 넘어서서 종교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심리학에서는 신성이니 진아니 하는 말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근사 체험에 관한 서술은 어쩔 수 없이 종교적인 방향으로 갈 수밖에 없는 모양이다.
이 진아에 대한 묘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진아는 그 자신의 과거에 대해서만 아는 것이 아니라 심지어는 미래에 대해서도 알고 있다. 다시 말해 진아는 한 개인에 대해서 전체적인 지식을 갖고 있는 것이다. 이 진아는 빛 외에 목소리로 체험되는 경우도 많은데 이 목소리는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고 한다. 그래서 삶을 영상으로 회고해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 회고하는 가운데에서 모든 것으로 아는 존재처럼 보이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방금 전에 언급한 것처럼 진아는 삶을 회고하면서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서도 보여준다고 하니 이 존재가 갖고 있는 지식은 상식 수준으로는 설명이 안 될 것 같다.34)
그런데 이런 설명을 접할 때마다 드는 의문은--만일 이 설명들이 정확한 것이라면--왜 인간은 죽은 뒤가 되어서야 자신의 진아를 만나고 자신의 인생에 대한 전체적인 이해를 할 수 있게 되는 것일까에 대한 것이다. 생시에는 전혀 뜻하지 않는 사고를 당하거나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그런 일이 왜 생기는지를 몰라 불평하고 괴로워하지 않았던가? 인간은 왜 생전에는 그런 사실을 알 수 없는 것일까? 이런 사실들을 생전에 알 수 있다면 수많은 불필요한 고통을 줄일 수 있을 터인데 상황이 그렇게 밖에 될 수 없는 것은 인간의 피할 수 없는 숙명인 것인가? 어떤 우주적 섭리가 있기에 인간은 그런 여러 사실들을 죽은 다음에야 알게 되는 것일까? 등등의 질문이 생기는 것을 막을 길이 없다. 그러나 이런 질문들은 여기서 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다음 단계로 가보자.
다음은 여섯 번째 단계인데 여기서 영혼들은 장벽(barrier)을 만나 전환점을 맞게 된다. 여기에서 영혼들은 돌아올 것인가 아니면 그 장벽을 넘어설 것인가를 결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장벽에 대한 대체적인 해석은 이것을 넘어서면 다시 환생할 수 없는 그런 마지막 관문이라는 것이다. 이 장벽은 문화마다 다르게 나타나 재미있다. 예를 들어 주위에 사막밖에 없는 곳에 사는 아랍 사람들은 장벽으로 타오르는 사막을 보고 바다만 보고 살았던 폴리네시아 사람들은 넓은 바다를 보는 그런 식이다. 일본인들은 보통 강을 본다고 하는데 아마 이 면에서 한국인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외에도 (빙하 사이의) 갈라진 틈이나 절벽 혹은 막다른 골목 같은 것을 보기도 한다. 어떻든 이 단계에서 우리는 근사 체험이 문화적으로 조건화되어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여기서 환생하게 될 근사 체험자들은 빛의 존재 혹은 목소리로부터 ‘아직 이곳에 올 때가 아니다’라는 통지를 받는다. 이렇게 일방적인 통지를 받는 경우도 있지만 이 존재가 앞으로의 거취 문제를 근사 체험자에게 물어보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돌아가겠는가 아니면 이곳에 남겠느냐고 묻는 경우가 그것이다. 그럴 때 스스로 돌아가겠다고 결정하는 경우도 있지만 혹간 돌아가지 않겠다는 경우도 있다. 빛의 존재와 만나 너무나 아름다운 주위 경관 속에서 지극히 편안한 경험을 하고 있는 근사 체험자로서는 돌아가기 싫다는 생각이 충분히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 ‘당신은 지상에서 해야 할 일을 아직 다 마치지 못했기 때문에 몸으로 돌아가야 한다’라는 지시를 빛의 존재가 내린다. 그렇게 되면 아무리 그 곳에 있고 싶어도 돌아올 수밖에 없게 된다. 여기서도 빛의 존재로 나타나는 진아의 전지(全知)함이 나타난다. 진아는 지상에서 현현된 자기가 어떤 일을 해야 하며 언제 지상의 삶을 끝내고 돌아와야 하는 것까지도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어떻든 이 진아와 관계된 이야기는 우리 상식의 선을 훨씬 넘는 것이라 제대로 설명하는 것이 대단히 힘들다.
이제 마지막 단계에 다다랐다. 마지막은 육체로 귀환하는 것인데 체험자가 깨났을 때 그는 더 이상 죽음에 대해 두려움을 갖지 않게 된다. 사고로 몸이 만신창이가 된 경우에 어떤 사람은 근사 체험에서 깨어난 후 여전히 큰 고통을 느끼는 반면 어떤 사람은 기적적으로 몸이 쾌유된다고 한다. 로스는 자신의 저서에서 어떤 남자가 가족들을 교통사고로 잃고 자살하려는 의도를 갖고 자진해서 트럭에 치였다가 먼저 저승에 간 가족들을 영혼 상태로 만난 기적적인 예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 남자는 체외 이탈한 상태에서 아주 평안한 상태로 있는 가족들을 발견하고 자신은 육체로 돌아가서 죽은 뒤에 극히 아름다운 세상이 있다는 것을 세상에 알려야 한다는 큰 의무감을 느꼈다고 한다. 이러한 강한 소명감 때문이었는지 그는 비록 큰 교통사고로 만신창이가 되었지만 병원 응급실에서 붕대를 풀고 걸어서 나왔다는 것이다.35) 체험자 각자마다 상황은 조금씩 다를지 몰라도 그들은 저승을 경험했다고 믿고 죽음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등 자신들이 지닌 세계관에 큰 변화를 보인다. 이 변화에 대해서는 뒤에서 비교적 자세하게 보려고 한다.
그러나 근사 체험을 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모두 위에서 열거한 체험을 하는 것은 아니다. 이에 대해서는 링의 저서에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는데 많은 수가 두세 단계밖에는 경험하지 못했고 게다가 반드시 위에서 말한 순서대로 경험하는 것도 아닌 것으로 나타났다. 가장 두드러진 예가 자살을 했다가 소생한 사람들의 경우인데 이 사람들은 대부분 죽음을 체험한 뒤 아주 캄캄한 곳에 처해진 느낌과 아무도 자기를 돌보지 않는다는 강한 고독감을 느꼈다고 보고하고 있다. 그러니까 네 번째 단계인 빛의 존재와 만나는 경우는 거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자살 뒤의 체험이 반드시 불쾌한 것은 아니라는 지적도 있다.36) 베커 교수에 의하면37) 수천 가지의 근사 체험이 미국 코네티커트 대학의 컴퓨터에 저장되어 있다고 한다. 그런데 이 기록에는 단순히 체험자의 경험만 들어있는 게 아니라 체험자의 가족사라든가 종교적 신념, 교육 정도 등이 모두 저장되어 있어서 통계와 같은 분석적인 방법을 사용하여 근사 체험을 연구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한다.
3. 근사 체험의 진실성
지금까지 우리는 근사 체험의 실상에 대해 비교적 자세히 보았다. 마지막으로 검토하고 싶은 문제는 과연 이 체험이 사실이냐 아니냐 하는 매우 민감한 문제이다. 이 주제는 아주 복잡한 문제라 이 작은 글에서는 광범위하게 다룰 수가 없다. 근사 체험에 대한 비판 중 가장 일반적인 것은 그것이 산소 결핍증 등과 같은 병적인 상태에서 생기게 되는 환상이거나 혹은 꿈과 같은 것이라는 것이다. 왜냐면 근사체험은 충분히 꿈이나 환상처럼 주관적인 체험으로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의 체험을 경험할 수 없다는 점에서 이 근사 체험과 꿈 혹은 환상은 서로 많이 닮았다.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의식이 꺼진 상태에서 겪었던 체험과 잠자는 상태에서 겪는 꿈에 별 다른 점이 없다고 말한다. 이 점에 관해서 미국에서는 많은 연구가 이루어졌다고 하는데 베커는 이 양 체험의 차이점을 이렇게 정리․요약했다.38)
먼저 꿈은 명확한 이유 없이, 또 주제의 연결 없이 장면이 끊임없이 변하는 반면 근사 체험은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느끼는 것처럼 일관성을 갖고 지속적으로 장면이 변화해간다. 또 꿈은 극히 사적인 것이라 다른 사람과 공유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러나 근사 체험의 핵심 부분은 인간과 문화와 시대를 넘어서 다 똑같은 것처럼 보인다. 다시 말해 근사 체험은 꿈이나 환상보다 훨씬 덜 주관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꿈이나 환상 속에 나타나는 사람은 살아있는 사람이나 혹은 가상적인 인물인 데 비해 근사 체험에서는 살아있는 사람은 거의 나오지 않고 죽은 사람이나 종교적인 인물만이 등장한다. 만일 근사 체험을 하는 가운데 살아 있는 사람이 나오면 그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근사 체험이라고 할 수 없다.
차이점은 계속된다. 꿈이나 환상에서는 자기가 중심이 되어 자기의 마음이 투사되고 소망충족을 위해 꿈이 이용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반면 근사 체험은 자신보다 빛의 존재가 중심이 되어 진행되고 우리의 소망과는 달리 굴속을 지나서 삶을 회고하고 육체로 되돌려진다. 다시 말해 이런 일들은 우리의 소망과는 관계없이 독립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아울러 근사 체험에서는 만나는 존재들과 텔레파시를 통해 소통을 하는 반면 꿈이나 환상에서는 이런 과정이 잘 발견되지 않는다는 것도 지적해야 한다. 한편 꿈은 많은 경우 그 다음날 아침 바로 잊어버리는 경우가 태반이다. 그러나 근사 체험을 잊어버리는 사람은 거의 없다. 아니 없을 뿐만 아니라 근사 체험은 어떤 체험보다도 생생하고 실제적(real)이다. 게다가 꿈이나 환상이 사람의 삶을 바꾸는 경우는 별로 없지만 근사 체험은 사람의 삶을 통째로 바꾸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 점에 대해서는 다음 부분에서 다룰 예정이다.
마지막 다른 점은 꿈이나 환상은 진실된 정보를 전하는 경우가 별로 없지만 근사 체험에서는 체험자에게는 알려질 수 없는 정보를 전하는 경우가 흔하다. 예를 들어 체외이탈 체험을 한 환자들은 의식 불명이 되었을 때 주위에서 있었던 일들을 정확하게 기억해낸다. 근사 체험이 사실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결정적인 이유 중에 하나는 아무도 어떤 친척이 죽었다는 사실을 모르는데 근사 체험을 한 사람만이 그 사실을 아는 따위의 사건에서 찾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오토바이 사고로 근사 체험을 하고 다시 소생한 다음 자신이 아주 아름다운 곳에 있는 할머니와 사촌을 봤다고 진술했다. 다른 친척들은 죽은 할머니를 봤다는 소리는 이해하지만 멀쩡히 살아있는 사촌을 봤다고 하니 환상에 불과하다고 냉소에 부쳤다. 그러나 몇 시간 뒤 그 사촌이 이 오토바이 사고자보다 조금 전에 죽었다는 소식을 접할 수 있었다.
이 마지막 예 같은 것은--이와 유사한 예는 부지기수로 발견된다--근사 체험이 결코 환상이 아니라 실제의 일이라고 주장될 때 가장 많이 인용되는 예이다. 실제로 이것은 근사 체험이 사실이 아니라면 설명될 수가 없는 것이다. 로스도 근사 체험은 말할 것도 없고 죽음 뒤의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은 너무도 자명한 일이라고 하면서 이렇게 적고 있다.39)
죽음의 경험은 출생의 경험과 거의 동일하다. 죽음은 아주 쉽게 증명할 수 있는 다른 존재로 새롭게 탄생하는 것이다. 당신은 수천 년 동안 전해져 온 죽음 후의 세상과 관계된 일을 무조건 “믿게끔만” 강요받아 왔다. 그러나 죽음 후의 세계에 대한 이해는 믿고 안 믿는 신념의 문제가 아니라 앎의 문제이다...(중략) 당신이 이런 건 알고 싶지 않다고 해도 아무 상관이 없다. 어차피 한 번은 죽게 마련이고 당신은 그것을 알게 될 테니까.40)
반면 로스처럼 아주 확고한 태도를 취하는 것은 아니지만 링도 죽음 뒤의 생존에 대해 긍정적인 입장을 취한다. 그는 심리학이라는 과학을 하는 학자답게 죽음 뒤의 생존 여부에 대해 끝까지 객관적이고 조심스러운 입장을 취하는데 자신의 저서 말미에 가게 되면 드디어 다음과 같이 긍정적인 태도를 고백한다. “나는--중략--우리가 육체적 죽음 이후에 의식을 가진 존재로 계속 존재한다는 것과 (근사 체험의 6 가지에 달하는) 핵심 체험은 앞으로 오게 될 것을 흘낏 보는 시작이라는 것이라고 굳게 믿는다. 사실상 나는--중략--‘다른 실재’들을 인식하는 일이 가능하다고 확신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죽음에 가까워진다는 것은 상위의 차원에 속하는 ‘파동(으로만 이루어진) 영역[frequency domain]'으로 가는 하나의 길--이 영역은 우리가 완전히 죽은 다음에는 전적으로(fully) 접근할 수 있다--이라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을 확신한다."41)
베커는 다른 저서42)에서 인간이 죽은 후에 그 인격이 계속 된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육체를 갖지 않은 몸--다시 말해 영혼--을 상정하는 것이 가장 쉬운 방법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 이론에 의하면 인간은 두 개의 몸, 즉 물질적인 몸과 보이지 않는 몸을 갖고 있다. 이때 보이지 않는 몸은 에텔체 혹은 아스트랄체라고 불리는데 사람이 죽을 때나 체외 이탈을 할 때에는 바로 이 몸이 몸을 빠져나가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나타나는 유령 같은 것도 바로 이 아스트랄체라는 것이다. 아울러 우리의 의식과 인격이 소재하고 있는 것은 물질적인 뇌가 아니라 아스트랄적인 뇌라는 것이다. 그래야 우리의 육체가 죽은 뒤에 비록 물질적인 뇌가 더 이상 기능하지 않더라도 우리의 인격 혹은 의식이 지속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사실 이 이론은 결코 생소한 것이 아니다. 힌두교에서도 비슷하게 주장해왔기 때문이다. 힌두교의 베단타 철학에 의하면 우리는 세 개의 몸을 가지고 있다.43) 첫 번째 것은 물론 물질적인 거친 몸(gross body)을 말하고 두 번째 몸은 미세한 몸(subtle body)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방금 전에 본 아스트랄체는 여기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베단타 철학에서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 두 몸의 근원이 되는 몸이 있다고 하고 그것을 원인체(原因体, causal body)라고 불렀다. 이 이론에 의하면 사람이 죽으면 육체가 소멸하는 것은 물론이고 에텔체 혹은 아스트랄체라고 불리는 몸도 없어지고 나중에 끝까지 남는 것은 원인체라는 것이다. 힌두교는 윤회론까지 주장하는 종교이기 때문에 여러 생을 거쳐서 계속 존재할 수 있는 몸의 형태를 규명했어야 했을 것이다.
우리가 여기서는 힌두교나 불교가 말하는 윤회를 언급하지 않을 것이지만 사람이 만일 윤회를 한다면 죽음 뒤에 또 다른 형태의 삶이 존재한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 된다. 이 방면에서는 이안 스티븐슨 교수 같은 사람들의 연구44)가 선구자적 위치에 있지만 베커는 방금 전에 인용한 책에서 윤회와 관련해서 지금까지 서양에서 연구된 것을 정리하고 있어 비상한 관심을 끈다.45) 가령 프란시스 스토리 같은 학자에 의하면 사람은 다시 태어날 때 자신이 죽은 곳으로부터 수백 마일 이상을 벗어나지 못한다.46) 또 티벳의 사자의 서를 발굴하여 서방에 알린 것으로 유명한 에반스 웬쯔(Evans-Wentz)는 윤회는 그 본인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대로 된다고 주장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윤회할 때 성별이 바뀌지 않는다고 믿으면 그는 한 성으로만 태어나게 되고 성별이 바뀔 수 있다고 생각하면 성이 바뀌어 태어나는 것이 그것이다. 한편 파커(Parker)는 윤회를 가능하게 하는 가장 중요한 원인으로 당사자가 잔인하게 죽었던지 혹은 충족되지 못한 욕망이나 물질에 대한 강한 욕망 등을 들고 있다. 마지막으로 덴마크의 마르티누스는 어려서 죽은 사람은 윤회하는 속도가 정상적으로 죽은 사람보다 빠르다고 적고 있다. 이런 사람들은 어려서 죽은 관계로 이생에서 별 경험이 없기 때문에 영계에 가더라도 새롭게 배울 게 없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47) 이런 주장들은 믿기 힘들 뿐만 아니라 검증되기도 힘들지만 그렇다고 영적으로 높은 수준에 도달한 신비주의자들의 주장을 과학적이지 않다고 해서 내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어찌 됐든 이러한 자료들도 죽은 뒤의 생존 가능성을 뒷받침해줄 수 있는 근거 중에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스웨덴 학자 제이콥슨은 주 47에서 인용한 명저에서 한 장48)을 할애하여 신비주의 사상가가 죽음 뒤의 삶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대해 묘사하고 있는데 그가 인용한 사상가가 바로 마르티누스 톰센(Martinus Thomsen)이다. 1890년 생인 마르티누스--그는 필명으로 자신의 성이 아니라 이름을 쓰고 있다--는 1921년 어느 날 아주 조용하지만 생의 지축을 흔드는 종교적 체험을 한 뒤 그 체험을 바탕으로 죽음 뒤의 삶에 대해 술회한다. 제이콥슨이 신비주의자의 주장을 인용하는 것은 그들이 서술한 죽음 뒤의 삶의 모습이 지금까지 우리가 본 사후생의 모습과 거의 일치하기 때문이다. 물론 신비주의자들의 설명이 사후생의 존재를 증명해주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이 지닌 통찰력과 확실성을 고려해볼 때 신중하게 검토해볼 필요는 있다는 것이다. 제이콥슨은 신비주의자들의 주장에 내적인 일관성이 있고 알려진 사실들과 부합한다면 그들의 주장을 작업가설(working theory)로 받아들이지 못할 게 없다고 피력하고 있다.49)
여기서 우리가 사후생에 대한 마르티누스의 가르침을 일일이 다 볼 수는 없다. 또 그럴 필요도 없는 게 앞에서 말한 대로 지금까지 본 사후생에 대한 묘사와 거의 일치하기 때문이다. 그의 설명은 일치하는 정도가 아니라 훨씬 더 진일보한 느낌을 받는다. 그 중에서도 그가 인간의 죽음에 대해 내린 평가는 폐부를 찌른다. 그는 “죽음은 사실은 신이 인류에게 선사한 가장 위대한 경이이다”50)라고 선언한다. 이 주장은 로스가 이야기한 ‘죽음은 인간이 마지막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회이다’라는 주장을 연상시킨다(이렇듯 현자들의 주장에는 일치하는 바가 많다!). 이것은 인간이 죽은 뒤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서 물질계와는 전혀 다른 법칙이나 조건이 적용되고 있는 영계에 대해 확실하게 배워야 인생에 대한 전체적인 배움이 끝난다고 생각한 때문일 것이다.
마르티누스에 의하면 영계는 두 층의 영역으로 되어 있다. 일차 영역(first sphere)과 고차 영역(higher sphere)이 그것이다. 이들 영역에는 공간의 개념은 없고 시간과 (일정한) 조건만이 존재한다. 이 영역은 “과거에 ‘아스트랄적인 물질’ 혹은 ‘영적(psychic) 에테르’로 불렸던 ‘영적인(spiritual) 물질’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물질은 용이하고 가볍고 일시적이라는 특징이 있다.”51) 사람은 죽어서 일단 일차 영역으로 가게 되고 여기서 다른 영적 존재의 도움을 받아 고차 영역으로 옮겨갈 수 있다.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삼가는데 이 영역들에서는 초물리적인 광선(superphysical ray)과 파동의 움직임(wave movement)들만이 통용된다는 사실은 지적할 필요가 있다. 이 설명 역시 영혼은 (에너지의) 진동(frequence)으로 이루어졌다는, 우리가 지금까지 보아왔던 설명과 일치한다. 그래서 이 영역에서는 모든 것이 자신의 생각 혹은 바람대로 자신 바로 앞에서 실현된다. 그러다 생각이 바뀌면 앞에 있던 이미지도 순간에 바뀌어버린다. 그리고 여기서는 같은 파동 혹은 진동을 가진 영혼들만 만날 수 있다. 그래서 만일 탐욕이 가득한 영혼은 그런 영혼들만 만나게 되어 그런 곳은 소위 지옥으로 변하게 되고 그 반대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지옥과 천당은 거기에 준비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 상태가 그대로 반영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만일 이 영적인 영역이 정말로 존재한다면 왜 우리에게는 그 영역으로부터 통신을 받는 일이 드물게 일어날까? 만일 사후생이 실제로 존재한다면 영계에 있는 영혼들이 땅위에 사는 사람들과 교통하기를 원할 텐데 왜 그러한 소통이 광범위하게 이루어지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이런 이유를 가지고 사후생이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기도 한다. 이에 대해 제이콥슨은 사정이 그렇게 간단하지 않을 것이라고 진단을 한다.52) 제이콥슨의 조심스러운 추측에 의하면 영계의 상황은 아마 이승과 교통하는 것이 대단히 힘들게 되어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영혼에게 아주 강한 동기나 노력이 없으면 지상과의 소통은 거의 불가능할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환각제 실험을 하는 사람이 환각제를 먹은 뒤 생기는 변화에 대해 모두 발설하겠다고 작정했다가 정작 환각제를 먹은 뒤에는 그 안에 빠져 아무 것도 보고하지 못하는 경우와 흡사하다는 것이다.
물론 사람들은 영매라는 특이한 사람들을 통해 영계와의 소통을 시도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러한 시도는 속임수가 들어가는 경우가 많아 믿을 수 없는 경우가 태반이다. 그런데 영매를 통해 영계와 소통을 하려고 했던 사람들도 제이콥슨과 비슷한 주장을 해 우리의 흥미를 끈다.53) 이들 역시 영혼이란 (에너지의) 진동으로 이루어져 있고 더 높은 영계로 올라갈수록 진동이 빨라져 빛의 형태에 가까워진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렇게 높은 진동수를 가진 영혼이 육체라는 매우 느린 진동을 갖고 있는 영매의 뇌 속으로 들어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진동수를 현저하게 낮추지 않으면 영매의 몸을 이용할 수 없을뿐더러 낮추는 과정에서 전달하려는 내용과 성질이 왜곡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진위 여부를 떠나서 영혼을 진동으로 파악하고 있다는 점에 일치점이 있음을 주목했으면 한다. 이와 같이 수많은 이론가들과 종교가들이 죽은 뒤의 삶에 대해 매우 유사한 견해를 표명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근사 체험의 성격과 진위 여부에 대해 충분히 검토를 했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과연 이 체험이 어떤 종교적인 의미를 갖는가에 대해 살펴 보는 것이다. 이 체험을 했던 사람들은 적지 않은 경우 그 체험 후에 종교적인 태도를 갖게 되거나 이미 갖고 있던 종교적 신념이 심화되었다는 보고가 있기 때문에 이 체험과 종교를 연결시켜 알아보는 것은 필요한 일로 생각된다.
IV. 근사체험의 종교적 의미
근사 체험을 한 사람들이 그 체험을 묘사하는 표현을 들어보면 대부분 기성 종교에서 익히 주장해오던 것과 너무 흡사해 놀라울 지경이다. 우리는 근사 체험을 하는 사람들이 삶의 회고(life review)를 하는 가운데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배움과 사랑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보고를 많이 접했다. 사랑이라는 것은 세계의 거의 모든 종교들이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강조하고 있다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뿐만 아니라 배움과 사랑이라는 덕목은 불교에서 가장 중요하게 가르치는, 아니 불교의 트레이드마크 자체라 할 수 있는 지혜와 자비와 꼭 일치하지 않는가? 에른스트 베커(Ernest Becker)는 인간이 돈이나 물건, 명성 같은 것을 축적하는 행위가 죽음의 불가피성으로부터 인간 자신의 관심을 얼마나 멀게 만들려고 하는가에 대한 연구로 퓰리처상을 받았다고 한다.54) 죽음은 이러한 인간의 세속적인 행위를 근본적으로 무의미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E. 베커의 결론은 근사 체험자들의 주장과 일치하는데 '죽음에 대한 인식은 자비나 자선, 사랑, 지혜, 동료애 등이 물질이나 자본의 축적보다 무한하게 높은 가치를 지닌다는 것을 알게 해준다'는 것이 그것이다.
미크는 인간이 죽음을 통해서 더 높은 차원으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덕목이 필요하다고 제시하고 있는데 이것은 물론 근사 체험자들의 증언에 바탕을 둔 것이다.55)
먼저 창조주인 신의 뜻을 구하라
‘참 나’를 아는 길을 배우라
남을 사랑하라
자비를 베풀라
친절을 베풀어라
인내를 배우라
남에게 나누어 주라
부지런히 마음을 키우라
남에게 봉사하라
이 덕목들은 지금까지 세계의 모든 종교들이 핵심 가르침으로 제시했던 것으로 우리는 앞에서 말한 것처럼 양자 사이의 흡사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지금 인류에게 가장 큰 종교 전통으로 되어 있는 불교나 기독교, 이슬람교가 수천 년 동안 가르쳐왔던 핵심 덕목들은 앞에서 말한 대로 근사 체험자들의 증언과 일치함에도 불구하고 그 덕목들이 갖고 있는 진실한 의미가 제대로 전달되고 있지 않다. 이것은 이 종교들이 수천 년 동안 발전해 오는 동안 부차적이라고밖에는 볼 수 없는 요소들이 너무 많이 생겨나서 종교의 본질적인 면을 가리고 있기 때문에 생긴 결과라고 생각된다. 가장 적나라한 예를 들어보자. 기성 종교, 그 중에서도 기독교나 이슬람교 같은 유신론적인 종교에서는 지난 수천 년 동안 자기들의 종교를 믿지 않으면 구원은 없다고 강력하게 주장해왔다. 그런데 이러한 생각은 예수나 무하마드 같은 창시자들이 가르쳤던 것이 아니라 후대에 도그마가 발달되면서 부차적으로 생긴 것에 불과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교리 때문에 그 동안 얼마나 많은 살육을 감행했는가? 인류 종교사는 자신의 종교를 남들한테 강요하고 다른 종교인들을 신앙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죽였던 수많은 사건으로 점철되어 있다. 그런데 근사 체험자들의 보고에 의하면 빛의 존재와 만났을 때 ‘당신 종교가 무엇이냐’라든가 ‘왜 교회를 안 나갔냐’하는 따위의 질문은 한번도 받아본 적이 없다고 한다. 아니 그 빛의 존재가 보여주었던 태도는 종교 자체에 대한 관심이 없었다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다.56)
대부분의 세계 종교에서는 삶의 궁극적인 목표로 자아를 초월해서 더 높은 실재의 세계로 나아가는 것으로 설정해 놓고 있다. 불교도 그렇고 기독교도 그렇고 인간의 현 상태는 자기중심적인 사고, 즉 온갖 탐욕과 이기심으로 뭉쳐 있기 때문에 이 상태를 극복하지 않으면 진정한 행복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우리 인간이 여기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자신을 초월해서 보다 높은 초월의 세계를 체험해야 한다. 이것을 전통 종교에서는 신이나 도, 혹은 하늘, 만물과 하나가 되는 것이라고 표현했다. 그런데 이러한 상태로 되는 여정의 출발점에 바로 죽음이 있는 것이다. 이슬람교의 루미 같은 신비주의자들이 자신의 시속에서 “죽음은 감미로운 것이며 영원을 향한 여행“이라고 했을 뿐만 아니라 ”불멸을 노래하는 아름다움“이라고 찬양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57) 아울러 죽음은 인생의 일부이지만 티벳 불교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인간으로 하여금 내면적인 자각으로 향하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기회라는 주장도 죽음이 인간에게 갖는 중요성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이에 대해 링은 조심스럽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근사 체험이 적어도 어떤 사람들에게는 좀더 상위에 있는 영적 실재(spiritual reality)에 대해 갑작스럽게 깨닫게 할 수 있는 한 방법이 될 수도 있다고 볼 수 있다.“58)
이렇게 근사 체험이 갖고 올 수 있는 파급 효과에 대해 피상적으로 언급하는 것보다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체험인지를 알아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이에 대해서 링이 다른 저서에서 아주 잘 정리․요약했기 때문에 그것을 중심으로 보자.59) 먼저 링은 근사 체험을 한 사람의 심리와 행동에 생긴 변화에 대해 적고 있다. 이 변화 가운데 제일 먼저 나오는 것은 삶에 대한 인식의 고양(appreciation for life)이다. 근사 체험자는 체험 후에 일상 생활 속에서 훨씬 고양된 의식을 갖게 된다. 이전에는 관성처럼 습관화 됐던 것들에서 체험자들은 큰 기쁨을 느낀다. 예를 들어 할머니 얼굴에서 아름다움을 느끼고 자연의 위대한 힘을 재인식하며 일상 생활에서도 유머를 활기 차게 즐기는 것이 그것이다. 체험자들이 삶에 대해 갖는 경이와 감사는 계속해서 증가해 간다고 하는데 이 체험 역시 종교 체험과 매우 흡사하다. 깨달은 선사에게 깨달은 뒤가 어떠냐고 물으니 ‘나날이 좋은 날’이라고 대답한 것과 이 체험과는 통하는 바가 있다고 하겠다.
다음 변화는 자기 수용(self-acceptance)이다. 근사 체험자들은 이전에는 없었던 강한 자아존중감이나 자기수용의식을 갖게 된다. 불안정감이나 수줍음, 다른 사람을 지나치게 기쁘게 하려는 욕구 같은 부정적인 태도들이 근사 체험 후 자신감이나 활기찬 태도로 대치된다. 그래서 주위 사람들은 체험자의 달라진 모습에 놀라는 경우가 많다. 이와 함께 다른 사람에 대한 관심도 커져 다른 사람들에게 봉사하고 선행을 하고 싶은 욕구를 누를 길이 없어진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도 근사 체험자가 빛의 존재로부터 받은 것과 비교해 보면 별 것이 아니라고 한다. 바야흐로 사랑이 세상의 모든 것이 되는 것이다. 만인을 사랑하는 것은 그대로 생명 그 자체에 대한 경외(reverance for life)로 연결된다. 동물에 대한 사랑은 말할 것도 없고 자연, 특히 지구 환경을 지키려는 생각이 크게 증진된다.
다음의 몇몇 종목 역시 종교와 아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우선 반물질주의(antimaterialism)이다. 체험자들은 물질적인 가치나 물질만 추구하며 사는 것은 공허하고 무의미하다고 입을 모아 말한다. 물질에 관심이 줄어드니까 물질이나 세속적인 성공을 위해 경쟁하는 일을 더 이상하지 않게 된다. 이른바 반경쟁주의(anticompetitiveness)이다. 이렇게 되니까 자신이 중요한 사람(VIP)이 되고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는 위치에 올라가는 일이 더 이상 중요한 일이 아니다.
이러한 태도는 바로 영성(spirituality)이 함양되는 것과 연관이 된다. 체험자들은 자신들의 변한 모습을 두고 더 종교적으로 되었다고 하기보다는 더 영적으로 된 것이라고 표현한다. 다시 말해 이들의 신념 체계에서는 이전에 갖고 있었던 기성종교의 제도화된 측면들이 덜 중요하게 되고 보편적이고 포용적인 영성이 더 깊은 뿌리를 내리게 된다는 것이다.60) 깊은 영성의 각성과 더불어 지식에 대한 욕구(quest for knowledge)도 아주 강렬해진다. 근사 체험 중에 빛의 존재로부터 배운 것들을 중심으로 그러한 지식에 대해 알고 싶은 욕구가 매우 강해진다. 빛의 존재로부터 배운 것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삶에 대한 목적의식(sense of purpose)이다. 체험자들은 삶에는 반드시 의미가 있고 사람은 모두 신성한 목적을 갖고 태어났다는 것을 아주 깊게 확신한다. 이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근사 체험 뒤의 삶에서 그들의 영적인 존재 이유(spiritual raison d'etre)를 발견하고 삶 속에서 그 사명을 다하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라고 느끼게 된다. 아마 이런 이유 때문에 그들은 다시 삶을 살기 위해 육체로 되돌아왔을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그들은--만일 유신론을 믿는 사람이라면--신이 존재한다는 것(belief in God)을 마음속으로부터 깊게 확신하게 된다. 아울러 죽음 뒤의 삶(life after death)이 존재한다는 것도 확신하게 되는데 체험 뒤 죽는 과정과 연관된 정상적인 공포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죽음 자체에 대한 공포(fear of death)는 사라진다고 한다.
링이 그 다음으로 열거한 변화는 의식의 변화와 초자연적인 능력의 발생에 대한 것인데 이것은 그리 자세하게 볼 필요가 없을 것 같다. 체험자들은 의식이 확장되는 것(expanded mental awareness)을 느끼게 되고 자신이 주체할 수 없을 만큼의 많은 정보를 접하게 된다고 한다. 정보가 많아서 그런지 체험자들에게는 초자연적인 능력(paranormal sensivities)이 발현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예를 들어 텔레파시나 천리안 혹은 예지 능력 등이 생기고 어떤 경우에는 보통 사람들은 보지 못하는 에너지, 즉 오라 같은 것을 볼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 이런 능력 가운데에 치유 능력(healing gifts)이 빠질 수 없다. 링은 자신이 조사한 근사 체험자들 가운데 42%가 치유 능력을 갖게 됐다고--통제 집단에서는 그런 능력을 갖게 되는 사람의 비율이 11%에 불과한 것에 비해--보고하고 있다. 이 이외에도 생리적인 변화와 신경 조직의 변화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는데 이것은 다소 전문적인 내용이라 여기서는 생략하기도 한다.61) 링은 같은 저서 다른 곳에서 어떤 근사체험자가 근사 체험을 통해 배운 것을 정리한 목록을 인용해 싣고 있는데 위의 내용과 거의 흡사하고 약간의 항목에서 좀더 구체적인 면을 띠고 있음을 알 수 있다.62)
지금까지 본 근사 체험자들의 변화는 두 말할 필요도 없이 세계의 모든 종교들이 줄기차게 주장하던 것들이다. 달리 말해서 불교나 기독교 같은 세계 종교들이 우리 삶의 이정표로서 제시했던 덕목들이 여기에 고스란히 들어가 있는 것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진실한 의미에서 불교도이고 기독교도이고 이슬람교도라면 위에서 말한 근사 체험자들이 느꼈던 변화를 하나도 덜지 않고 그대로 자기 것으로 해야 할 것이다. 아니, 저런 태도를 견지하지 않는다면 그는 진정한 종교인이라고 할 수 없다. 예를 들어보자. 링이 정리한 덕목보다 더 실감이 나는 것은 사실 주 62에서 링의 피면담자가 술회한 내용이다. 거기에도 대부분의 항목들이 종교적인 덕목으로 되어 있지만 눈에 더 띄는 것이 있어 우리들의 주목을 끈다. 가령 매일 매일을 마지막 날처럼 살고 순간 순간을 더 의식하면서 산다는 것은 이것이야말로 종교의 본령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종교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구원이 무엇이냐고 할 때 다소 거칠은 답변일는지 모르지만 우리는 영원한 현재(eternal now)에 사는 것이 그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을 대중적으로 표현하면 영생을 얻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어떤 종교건 대부분의 신자들은 영생의 의미에 대해 죽어서 영원히 산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것은 틀린 생각은 아닐지라도 저차원적인 생각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보다 진일보한 가르침에서는 종교적으로 가장 바람직한 태도는 지금 여기(here and now)에 온전하게 존재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과거에 대한 후회나 미래에 대한 불안을 전혀 갖지 않고 지금 존재하는 이 순간에 전 몸과 전 마음을 다하여 충실하면 그때 느끼는 기쁨은 비종교적인 삶을 살 때 느끼는 것과는 비교할 수가 없다. 이러한 태도는 진실된 의미에서 종교인이라면 그가 깨달은 선사이든 신을 확실하게 체험한 사람이든 종교와 관계 없이 갖게 되는 태도라 할 수 있다. 이외에도 이 체험을 하다보면 항상 ‘다른 사람을 판단하지 않는다’라는 덕목을 만나게 되는데 이것 역시 ‘자신이 판단 받기 싫으면 다른 사람도 판단하지 말아라’고 한 예수의 말을 생각나게 한다. 이런 여러 이유 때문에 근사 체험을 한 사람들이 많은 경우 매우 종교적인 사람으로 변하다고 하는지도 모른다.
근사 체험 가운데 가장 종교적인 덕목을 많이 접하고 배울 수 있는 부분은 바로 빛의 존재와 삶을 회고할 때라고 한다. 이에 대한 설명은 별도의 논문이나 단행본이 필요할 정도로 양이 많기 때문에 이 짧은 글에는 포함시키지 않았다.63) 그러나 아주 간단하게 일별해 보아도 빛과 조우하는 체험은 종교적인 태도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양자가 닮았다. 링은 이것을 이렇게 간단명료하게 정리했다.
거기에는 (빛으로부터) 어떤 비난도 없다--당신은 심판 받지 않는다.
당신은 당신을 무조건적으로 사랑하는 존재와 함께 있다.
당신은 완전한 자비심으로 대해진다.
당신은 이미 용서받았다.
당신은 그저 (빛과 함께 삶을 회고하면서) 당신의 삶을 바라보고 이해만 하면 된다.64)
위에서 본 정리는 유신론적인 종교에서 구두선처럼 주장하는 ‘신은 무조건적이고 무차별적인 사랑이시다’라는 교리를 연상하기에 충분하다. 그런데 유신론을 믿는 신자들은 그런 교리에 대해서 간접적으로 성직자나 성전을 통해 전달받을 뿐 그것을 직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방법이 거의 없다. 따라서 그들은 종교 교리에서 별 감동을 느낄 수가 없고 그 결과로 그들의 일상 생활 속에는 그런 교리가 스며들어가지 못한다. 다시 말해 보통의 신자들은 철저하게 종교적인 삶을 살지 못한다는 것이다. 반면에 근사 체험자들은 기대하지 않았던 체험 속에서 사실은 자신이 언제나 이런 말할 수 없이 큰사랑 속에 있었다는 것을 크게 깨닫게 된다. 그것은 바로 근사 체험자의 삶을 바꾸어 버린다. 근사 체험을 하기 전과 그 뒤의 변화가 급격하기 때문에 주위의 사람들이 전혀 다른 사람을 보는 것 같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는 것은 앞에서 이미 언급했다. 같은 맥락에서 근사 체험자들이 체험 후에 종교적인 인간으로 탈바꿈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라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외에도 근사 체험 속에서 종교적인 덕목을 온전하게 체험하는 경우를 더 많이 들 수 있지만65) 위에서 든 정도의 예면 충분할 것 같아 여기서 그쳐야겠다.
V. 끝을 맺으며
이렇게 해서 우리는 근사 체험 자체뿐만 아니라 그 체험에서 파생되었다고 하는 결과에 대해서 보았고 그것들이 지금까지 종교에서 말하는 것과 얼마나 비슷한지 보았다. 아니 비슷한 정도가 아니라 아예 같다고 해도 전혀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그런데 근사 체험자들의 체험이 종교 신자의 그것과 다른 것이 있다면 종교에서 주장하던 덕목들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그 체험의 실상이 직접적이고 생생하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종교에서는 항상 남을 위해 살고 봉사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왜 그래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좋은 설명을 제공해주지 못한다. 그러나 근사 체험에서는 빛의 존재로부터 하염없는 사랑을 받는 체험을 하고 다른 사람의 입장에 서는 것을 철저하게 경험함으로써 다른 사람을 위해 사는 것이 삶의 원리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남을 사랑한다는 것은 베푸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라면 당연히 해야 하는 의무라는 것을 피부에 와닿은 것처럼 깨닫게 된다.
따라서 그 당연한 결과로 그런 체험을 겪은 사람은 별도의 종교 체험 없이 자신의 삶의 태도에서 엄청난 ‘종교적인’ 변화를 겪게 된다. 이 체험에서 당사자들은 이 우주가 불교나 기독교와 같은 세계의 고등종교에서 말하는 대로 짜여있다는 것을 체감하는 계기를 갖게 될 것이다. 앞에서 말한 대로 이러한 세계 종교들은 원래 근사 체험에서 파생되는 여러 덕목들을 중심으로 짜여져 있었으나 너무나 많은 세월을 특정한 문화 속에서 발전되어오면서 비본질적이라고 볼 수 있는 부수적인 것 때문에 이 중심 덕목이 가려져 있었다. 추측컨대 종교를 잘 모르는 일반 신도들은 종교의 본질적인 면과 비본질적인 면을 가려낼 수 없을 정도로 이 두 가지 국면들은 뒤섞여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와 같이 잊혀져 있는, 혹은 가려져 있는 종교의 본질적인 면을 새삼 드러낼 수 있는 게--그것도 연구를 많이 한 학자나 수행을 많이 한 종교인들이 아니라 종교를 잘 모르는 일반인들을 대상으로--바로 이 근사 체험이라는 의미에서 이 체험은 종교 연구에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하겠다. 이런 의미에서 부위훈 박사의 말을 빌어 한참 앞에서 인용한 것이지만(주 9) 죽음 혹은 죽음학의 입장에서 종교를 바라보았을 때 비로소 종교의 의의와 가치가 드러날 것이다, 즉 죽음과 연관되어야 종교가 원래적으로 갖고 있는 구원의 기능이 살아날 것이라고 한 주장은 매우 혜량있는 통찰이라 하겠다.
서두에서 이야기했지만 인류는 근사 체험에 대한 연구를 시작하면서 역사상 처음으로 자신의 죽음을 정면으로 대면하게 되었다. 그러나 인류는 이제 막 근사 체험에 대해 연구를 시작했기 때문에 죽음 자체에 대한 연구는 막 걸음마를 뗀 것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초보적인 연구만으로도 이제 인류는 자신을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 완전히 새로운 지평을 여는 기회를 포착하게 되었다. 인류는 그 동안 종교를 통해 자신에 대한 깊고 통전적인 이해를 시도해왔다. 인류는 자신의 궁극적인 문제가 무엇이고 그 문제는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지에 대해 종교라는 매체를 이용하여 제시해왔던 것이다. 그 결과 우리는 인간의 궁극적인 문제는 일단 죽음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인간이 죽는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인간만이 가진 자(기)의식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인간은 이 자의식으로 인해 그를 괴롭히고 있는 온갖 탐욕, 집착과 같은 자기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벗어나 절대적인 행복을 찾을 수 있는 길은 자기 초월밖에는 없다고 종교는 가르쳐왔다. 자기 초월이란 구체적으로 말하면 무조건적인 사랑이나 자비를 말하는 것으로 세계의 모든 종교는 입을 맞춘 것처럼 이 덕목을 최상의 덕목으로 가르쳐왔다. 다시 말해 인간의 절대적인 행복은 이런 덕목에 준거해 살 때만이 가능하다고 주장해왔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는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지 못했다. 그저 자기네들이 믿는 종교의 교주가 그렇게 말하고 성전에 그렇게 씌어 있으니까 그런 방식으로 살아야 한다고 믿는 정도에 불과했던 것이다. 인류의 대부분은 이러한 종교의 가르침이 왜 올바른 것인가를 직접적으로 체험하는 일이 불가능했다. 그러나 이제 죽음의 연구를--특히 근사 체험의 연구를--통해 우리 인류는 이 종교의 가르침들이 있는 그대로 진실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것도 공부를 많이 한 학자나 수도를 많이 한 종교가들이 발견한 것이 아니라 아주 평범한 인류들에 의해서 이 새삼스럽게 새로운 진리가 밝혀지기 시작한 것이다.
굳이 종교의 경전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인간의 삶은 죽음을 온전하게 이해할 때 제대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죽음을 젖혀둔 삶에 대한 이해는 절름발이에 불과할 수밖에 없다. 죽음과 삶은 동전의 앞뒤면 같은 것이라 항상 같이 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각도에서 볼 때 인류는 그 동안 인생 자체에 대해서 반쪽만 이해해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근사 체험에 대한 연구는 죽음에 대한 객관적인 연구를 가능하게 함으로써 인류는 이제 최초로 자신의 삶에 대한 통전적인 이해에 다다를 수 있게 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죽음의 연구를 통해 인류는 스스로를 초월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이런 면에서 근사 체험에 대한 연구는 인류‘진화’사에서 차지하는 위치가 막중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인류는 근사 체험의 연구를 통해 더 높은 실재의 세계에 눈뜨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이제 이 연구는 시작에 불과하다. 특히 한국에서는 거의 연구가 진행되지 않은 실정이다. 앞으로 근사 체험을 중심으로 한 죽음 연구가 더 깊어짐에 따라 인류는 스스로에 대해 더 깊은 이해를 하게 될 것으로 생각된다.
국문 초록
인류는 1970년 대 중반까지도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 중의 하나인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해 정확한 견해를 갖지 못하고 있었다. 대신에 그들은 불교나 기독교와 같은 종교에 의해 윤색된 천당이나 지옥에 대한 묘사만을 접할 수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70년 대 중반이 되면서 레이몬드 무디나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와 같은 학자들에 의해 소위 죽었다가 살아났다고 하는 사람들에 대한 연구가 시작되면서 인류는 죽음에 대해 완전히 새로운 견해를 갖게 되었다. 소위 근사 체험에 대한 연구가 그것이다. 인류는 근사 체험의 연구를 통해 처음으로 죽음 뒤의 세상에 대해 과학적으로 접근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근사 체험자들의 한결 같은 주장은 기성 종교에서 주장되어 왔던 것들과 완전히 일치해 우리의 관심을 끈다. 근사 체험 속에서 그들은 빛의 존재와 만나게 되는데 그 만남을 통해 그들은 이웃을 위해 헌신하고 진리에 대한 배움을 탐구하는 것만이 인생의 목적이자 의무라고 한결같이 주장했다. 우리는 근사 체험의 연구를 통해서 기성 종교들이 주장해왔던 덕목들이 왜 인류에게 필수불가결한 것인가를 알게 되었는데 이런 면에서 근사 체험에 대한 연구는 대단히 값지다고 하겠다.
영문 초록
Until 1970's, mankind have not had definite perspectives on what life after the death was like,
which is one of the most important problems for them. Their concepts of the 'life and death problem'
has been distorted by the dogmas of the established religions such as Buddhism or Christianity
on heaven and hell. But the mankind came to have wholly different views on the life after death
thanks to the studies by Raymond Moody Jr. or Elizabeth Quebler-Ross in the mid-1970's. This is the studies on the so-called 'near-death experience(NDE)' which made humankind be able to have scientific approach to the life after death
for the first time in their history.
What attracts our attention at this point is, however, that the arguements of the NDErs on humman
destiny accurately coincide with those of the established religions. In the NDE, most of the
experiencers have an encounter with the personal being, symbolized by the Light, through whom
they learnt that the devotion(or love) to the neighborhood and the gain of the wisdom are the sole
meaning of life.
With this result, we can recognize why essential virtues maintained by the established religions
until now such as ultimate compassion, unconditional love, forgiveness, or insightful learning are
so significant, and that our studies of the NDE are very important in this respect.
주제어: 죽음, 사후생, 근사 체험, 터널 효과, 윤회, 빛의 존재, 근사 체험의 종교적 의미
근사 체험을 중심으로 한 죽음 연구. 로는 죽음의 본질을 알아낼 수 없다. 수행한 자 ,깨달은 자의 의식은 일반인의 근사 체험으로 알수 없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일반인의 죽음에서 소생한 기억으로 死후의 세계를 연구하는 것은 위에서 열거한 한계를 드러낸다. 만물은 전체의 일부분이고 일부분은 전체에 귀속된다. 범천과 자아는 한 뿌리라는 인식, 윤회없이 만물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주가 있는 한 어떠한 존재든 존재는 있다. 이 존재는 과거, 현재, 미래에 나타나지만 하나이다. 경전을 읽다 보면 스스로 알아지는 것이지만 말로 할 수 없는 한계를 알게되며 깨달음은 싱거운 것일 수도 있다. 죽음과 사후의 세계에 대한 궁금증 ?
첫댓글 최준식 교수님은 한국죽음학회 회장이십니다.
최교수님의 저서 "죽음 또 하나의 세계"를 읽은 적이 있는데요....최근에 교수님께서 내신 다른 관련 저서나 혹은 웹사이트를 알 수 있을까요?....()
최근 저서는 모릅니다. 한국죽음학회 사이트에 가며 그분의 글을 보실 수 있습니다.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근사 체험을 중심으로 한 죽음 연구. 로는 죽음의 본질을 알아낼 수 없다. 수행한 자 ,깨달은 자의 의식은 일반인의 근사 체험으로 알수 없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일반인의 죽음에서 소생한 기억으로 死후의 세계를 연구하는 것은 위에서 열거한 한계를 드러낸다. 만물은 전체의 일부분이고 일부분은 전체에 귀속된다. 범천과 자아는 한 뿌리라는 인식, 윤회없이 만물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주가 있는 한 어떠한 존재든 존재는 있다. 이 존재는 과거, 현재, 미래에 나타나지만 하나이다. 경전을 읽다 보면 스스로 알아지는 것이지만 말로 할 수 없는 한계를 알게되며 깨달음은 싱거운 것일 수도 있다. 죽음과 사후의 세계에 대한 궁금증 ?
감사합니다. 무조건적인 사랑과 감사가 햄복의 절대적인 조건이며 우리가 해야 할 일이군요.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_()__()_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