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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의 나는 누구인가?
▷ 나답게 산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일까?
▷ ‘개념화된 자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용기와 시도가 필요하다
▷ ‘맥락으로서의 자기’를 직면하고 받아들이면 다시 시작할 수 있다
교장 선생님으로 정년퇴임하고 현재 아파트 경비 아저씨가 됐다면 나는 교장 선생님일까, 경비 아저씨일까? 장교로 전역하고 회사에 입사했는데, 군대 있을 때는 감히 나를 쳐다보지도 못했던 사람들이 이제는 신입사원이라고 나를 햇병아리 취급한다. 나는 장교의 마인드로 살아야 할 것인가, 신입사원답게 자세를 낮춰야 할 것인가?
나는 학교 다닐 때 공부 못했고 미움 받았던 열등생이었다. 어렵게 취직이 돼 사회생활을 시작했는데, 이젠 당당하고 자신 있게 살 수 있을까? 다른 사람들로부터 사랑받으며 연애도 잘 할 수 있을까?
많은 사람들이 이런 문제로 고민하고 어려움을 겪는다. 변화하고 적응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도, 마음은 불편하고 심지어 억울하기까지 하다. 나의 현재는 과거에 의해 형성된 것일 텐데, 과거를 완전히 부정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얽매여 살 수도 없다. 지금의 나는 누구인가? 나답게 산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일까?
◇ 수용전념치료(ACT), ‘개념화된 자기’와 ‘맥락으로서의 자기’
수용전념치료(Acceptance commitment therapy, ACT)는 수용(Acceptance)과 전념(Commitment)을 강조하는 심리치료 방법이다.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문제를 그 자체로 수용하고 인정하는 것에 초점을 둔다. 문제를 없애는데 주력하기보다는 문제가 큰 문제가 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심리적 고통(Pain)을 회피하거나 통제하려고 하면서 더 큰 괴로움(Suffering)을 겪게 된다고 본다.
‘개념화된 자기(conceptualized self)’는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스스로가 만들어낸 이야기를 믿고 그에 따라 살아가는 자기를 뜻한다. ‘나’를 ‘교장 선생님’에 융합해 ‘나=교장 선생님’으로 여기고, ‘나’를 ‘자신감 없는 나’에 융합해 ‘나=공부 못했고 미움 받았던 열등생’으로 여기는 것이다. 개념화된 자기는 ‘직업적인 나’, ‘관계성 속에서의 나’, ‘심리적인 나’ 등 다양하게 표출될 수 있다.
중요한 점은 개념화된 자기가 과거의 나를 결정하는데 머물지 않고, 현재와 미래의 나를 결정해버린다는 것이다. 나와 개념화된 자기가 융합됐기 때문인데, 탈융합되기 전까지는 개념화된 자기에 얽매여 살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맥락으로서의 자기(self as context)’는 사적 사건들이 일어나는 맥락을 지켜보고 지금-여기의 경험을 조망하는 자기를 뜻한다. 현재의 나는 경비 아저씨로서의 역할을 해야 하는 것이고, 과거에 열등생이었어도 현재는 충분히 일을 잘 할 수 있고 사랑받을 수 있다고 가능성과 마음을 열어둬야 하는 것이다.
◇ ‘개념화된 자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용기와 시도
실제 생활에서 내가 스스로 느끼는 갈등과 어려움, 영화와 드라마에서 등장인물이 자아에 대해 느끼는 고민과 갈등의 원인은 개념화된 자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인 경우가 많다.
고등학교 때 전교 1등만 했어도 같은 성적의 학생들이 입학하는 대학생이 됐을 때 평범한 성적을 내거나 하위권에 머무르는 자신을 보며 무척 자존감이 떨어질 수 있는데, 전교 1등이라는 개념화된 자기에서 벗어나는 용기와 시도를 할 수 있어야 한다. 예전 같지 않은 지금의 나를 스스로 인정하고 수용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개념화된 자기에서 벗어나라는 조언을 듣고 과거의 나, 한 때 잘나갔던 나를 모두 부정하고 없애려는 시도 또한 위험하다. 개념화된 자기에 융합된 나를 그 융합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지, 그 자체를 무시하거나 부인하라는 뜻은 아니기 때문이다.
◇ ‘맥락으로서의 자기’를 직면하고 받아들이면 다시 시작할 수 있다
개념화된 자기에서 벗어나려고 했을 때 ‘한 때 잘나갔던 내가 이런 취급밖에 못 봤나’라는 자괴감을 느낄 수도 있고 나를 지탱하고 있었던 것들이 무너져 내릴 수 있다는 생각에 두려울 수도 있다.
사람들로부터 공감을 얻지 못하면서도 ‘내가 이런 사람이었어’라고 하면서 항상 옛날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개념화된 자기에서 벗어나면 나를 지탱하기 힘들어질 수 있다는 두려움을 내면에 본인도 모르게 가지고 있는데, 불필요한 걱정이다.
개념화된 자기와 맥락으로서의 자기 사이의 간극이 크면 클수록 현재가 힘들어지고 미래가 나아질 가능성이 줄어든다는 점을 염두에 둬야 한다. 과거 잘나갔던 기억이 현재의 나를 얽매는 족쇄라는 점을 인정하고, 맥락으로서의 자기를 직면하고 받아들이면 다시 시작할 수 있다.
맥락으로서의 자기를 진정으로 받아들이면 나답게 살면서도 행복하게 살 수 있다. 과거보다 잘나가지 않는 현재 속에서 희망을 찾을 수 있고, 잘나가지 못했던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새로운 가능성을 찾을 수 있다.
영화와 드라마에서 주인공이 현재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새롭게 성장할 때 관객들은 감동하며 카타르시스를 느끼는데, 개념화된 자기에서 탈융합해 맥락으로서의 자기를 수용하고 인정했기 때문인 경우가 무척 많다.
현재 상영 중인 드라마 <뷰티 인사이드>에서 한세계(서현진 분)의 개념화된 자기가 톱스타 배우라면, 맥락으로서의 자기는 한 달에 일주일 타인의 얼굴로 살아가며 그로 인한 오해로 인해 주연이 아닌 조연 배우로 영화에 출연하는 것이다. 만약 한세계가 맥락으로서의 자기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면 영화감독 이희섭(김승욱 분)에게 다시 인정받지 못했을 것이다.
서도재(이민기 분)의 맥락으로서의 자아는 선호그룹 티로드항공 본부장으로 로열패밀리의 핵심이다. 그런데 사고로 안면인식장애를 가지고 대인관계가 매우 어렵다. 서도재는 앞에 선 여성이 내 어머니인지, 지나가던 옆집 아주머니인지 알기위해 자주 입는 옷차림, 손버릇, 걸음걸이, 가까이서 맡아지는 체향 하나하나 모두 다 기억했고, 어디를 가도 항상 비서를 대동했다. 만약 그가 맥락으로서의 자아를 인정하고 수용하지 않았으면, 안면인식장애가 생긴 이후 다시 재기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많다.
맥락으로서의 자기를 직면하고 받아들이면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영화, 드라마에서의 주인공과 현실에서의 나뿐만 아니라 회사와 조직도 마찬가지이다. 왕년에 잘나갔던 경험과 기억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면서도, 현재의 나를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인정할 경우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지금 다시 시작한다는 것은, 왕년에 잘나갔던 나, 개념화된 나로부터 다시 시작하는 게 아니라 현재를 스스로 인정하고 수용하는 나, 맥락으로서의 나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다시 시작한다면, 과거의 나답게 살지 않고 현재의 나답게 살면서도 충분히 행복하게 성취하면서 더 잘 살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천상욱 전자
명상은 마음을 고요히하여 정신을 맑게하는 정신수양법이며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며
목적달성이나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는 정신훈련이라면
참선은 "나는 무엇인가?"를 참구하는 마음탐구연습이다.
"나는 누구인가?""나라는 존재는 내몸뚱인가?" "내몸을 맘대로 움직이는
나의마음인가?" 그렇다면 내마음은 어다에 있는가?
아니 마음을 고쳐먹을때는 내마음을 움직이는 제3의무엇이 있다. 그게 무엇안가?그게 나인가?
하루에도 열두번씩 변하는 나의 마음은 실체가 무었인가?
내가 죽었다. 그 시체가 나인가? 눈,코,입,팔다리가 다있는데 나인것도 같고 아닌것도 같다. 갖다 묻었다.
얼고 썪고,벌레파멱고 그것도 정말로 나라고 말할수없고 나의 주검에 불과하다.육신은 아닌게 분명해졌고
그렇다면 육체에서 분리된 나의 마음(정신? 영혼?)인가? 그럼 어디 있다가 어디로 가있단 말인가?
육체가 죽었을때 분리되어 천국이나 지옥으로 가고 있는가? 아니면 육체와같이 소멸되는가?
살아있을때에는 어디서 어떻게 작동하는가?
*달마의 유일한 제자 신광이 달마가 거들떠 보지않자 왼팔을 칼로 잘라 달마에게 내던지고
"제 불안한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십시요. 마음이 아직 편하지 않습니다." 하니 달마가
"내게 네 불안한 마음을 가져오너라" 신광이 "마음을 찾을수가 없으니...," 달마曰
"마음(現在心)이란 필경 不可得이라, 이미 네마음은 편해졌노라".
*혜능이 방금전에 자신을 죽이러 왔다가 꿇어앉아 가르침을 청하는 혜명에게 "방금전 마음과
지금 이순간의 마음이 어떻게 다르냐?"라고...,
-마음관련 좋은글 모음-
* 마음의 주인
어떤 사람이 도끼를 잃어버리고는 이웃집 아들을 의심하였다.
걸음 거리를 보아도 도끼를 훔친 것 같았고
안색을 보아도 도끼를 훔친 것 같았고
말투를 들어도 도끼를 훔친 것 같았다.
모든 동작과 태도가 도끼를 훔친 사람 같았다.
얼마 후에 골자기를 지나다가 그는 잃었던 도끼를 찾았다.
다음 날 다시 이웃 집 아들을 보니
동작과 태도가 전혀 도끼를 훔친 사람 같지를 않았다.(列子)
* 때에 따라서 동일한 대상이 다르게 보이는 것은 왜? 그럴까?
그때마다 마음의 주인이 다르기 때문이다.
마음의 주인은 항상 변한다.
어느 날은 정의가, 어느 날은 탐욕이,
어느 날은 진실이, 어느 날은 거짓이
사람의 마음의 주인으로 자리를 잡는다.
* 破山中賊易 산 속의 도적은 무찌르기 쉬우나”
破心中賊易 마음속의 도적을 무찌르기는 어렵다 (王陽明)
* 내 생각으로만 사물을 보는 버릇을 편견(偏見)이라 하고
내 생각으로만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편애(偏愛)라 한다.
편견은 큰일을 다 망치고, 편애는 생사람을 잡는다.
사고의 수평(水平)을 유지하고, 보편타당한 것이 최고의 진리다.
* 훈련되지 않는 마음처럼 제멋대로인 것은 없다
훈련된 마음처럼 잘 복종하는 것도 없다 (불 경)
* 心靜樂千年 (마음이 고요하면 즐거움이 천년을 간다.)
* 아무도 보지않는다고 생각하고 춤을 추어라.
누구에게도 상처받지 않는것처럼 사랑하라.
아무도 듣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노래를 불러라.
마치 지상이 천국인것처럼 살아라. (퍼키)
* 기쁨을 주는 사람만이 더많은 기쁨을 즐길수있다.(알렉산더 듀마)
* 피할수 없으면 즐겨라(Robert Eliot)
*나는 무엇인가?
부처님께서 어째서 인간은 생노병사하는 괴로움을 당하는가를
일념화두로 고민하셨던것입니다 명상이아닌 참선을 하신것입니다
출발은 일념화두로 시작하여야 합니다 일념화두의 길로 가야 진심의 명상자체가 됩니다
일념화두로 모든것 몰아내고 깨부셔야지요
보고듣고 말하며 느낄줄알고 생각할줄아는 이것은 무엇인가
부처도 물건도 마음도아닌 이것은 무엇인가
세상의 모든 작용현상이 무궁무진하여 내가 부딪혀 살아가면서도
매순간 언제나 어떤경우에든 끝없이 이한생각 의심만 남기고 다른것 모두 깨부수면 바람직합니다
한생각의심이 모든생각 모든감정을 이겨내려는 의지를 굳건히 세워야합니다
똥싸기전급할때나 똥싸는통쾌한순간이거나 똥싸고나서 방금전 똥싸는일 잊어버렸거나
화나거나 즐거우나 괴로우나 기쁘거나 앉거나 서거나 걷거나 일상생활하면서
특히 아무생각 없을때일수록 더힘써 할수있는한 최대한 언제나 이의심을 놓치지않으면
이일념의의심이 자신의 창과방패가 되며 점점 힘이 생깁니다
호랑이가 물어가도 정신을 차리는것입니다
세상의 모든작용이 나를 지배하려할때 이의심을 놓치지않으면 정신을 놓치지않은것입니다
이것만으로도 참선의 값어치는 한량없이 큽니다만
잠을자면서도 의심을 놓치지않고 꿈속에서도 일념의심이되면 자신도모르게
의심에 완전히 끝간데모르고 빠져든다면
자기자신의 주인공을 만나고 결국 진리를 만나게됩니다
결국 진리와 하나가되어 그힘이 이리저리 왔다갔다 자유자재케되니
부처도 그를어쩔수없고 죽음도 그를 어쩔수없다합니다
이러한것이 바람직합니다
매순간 영원히 나는무엇인가를 절실히 의심하는것이 바람직합니다
이거 해보면 쉽지않고 이거해보면 참묘용이 미묘함을 알게됩니다
일상에서의 할도리하면서 죽어도 이것은무엇인가 일념의심을 놓치않는의지를 갖고
시작하면 길이 펼쳐집니다 인연따라 길이 펼쳐집니다
*명상은 마음을 편하게 가진다는 의미에 가깝고
참선은 마음을 비운다는 의미로 통합니다.
명상은 생각이 있다고 하여야 하나
참선은 생각이 없다고 하여야 합니다.
명상은 마음 편하면 되는 것으로 두고
참선은 하나의 생각으로 일여삼매에 들어가야 합니다.
차츰 그 하나의 생각이 사라지고 생각한다는 마음도 사라지게 되면
禪定이 옵니다.
시작이 반이라 하면 그것으로 충분히 시작이 되었다 할 수 있습니다.
깨달음에 이르기까지 그만 둘 수 없을 것입니다.
부처님이
고행할 당시 선정에 있었을 것이므로 무념의 상태였다고 할 수는 없으나
종국에는 무념의 상태였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참선하는데는 무었보다도 자세가 중요합다, .
자각 선사는 선의 기본자세로, 다음과같이 말하고 있다
1 :서원을 크게 세워라,
2 :모든 인연을 놓아라. (放下着)
3 :음식조절으하라.
4 :잠을 적당히자라,
5 :장소를 조용하고 안정된곳을 택하라.
6 :몸을 잘 조정하라,(調身)
7 :호흡을 고르고 길게하라(調息)
8 마음을 잘고르게 하라,(調心)
몸이안정되면 자연히 마음이평정되고 자연히 호흡또한 고르게되며, 모든 번뇌가
사라져 청정한 본마음자리가 들어나게 되는것이다,
인도선에는 수식관[수를 세여 마음을안정시키는방법]과 부정관 [사물을 전부 부정한것으로 보는것] 그리고백골관[ 사람을 백골로보는것]등이 있고
달마선에는 묵조선[ 바른생각,: 즉 정려]를 말하고,간화선[ 1700공안]을 화두로 하는선을 말합니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 모든 것은 오로지 마음이 짓는 것이다
일체유심조는 원효대사가 여행도중 동굴에서 밤에 맛있게 먹은 물이 아침에 보니
흙탕물을 해골바가지에 퍼서 먹은 사실을 알고 크게 깨우쳤다는 말에서 나온다
물은 그대로인데 마음이 그물을 깨끗하게 또 더럽게 만든다는 의미다
모든 현상(사물)은 단지 마음이 만들어 낸 것이라는 뜻이다
이 말의 의미를 좀 더 깊이 알아보자
마음이 사물을 만들어 낸다는 것은 두 가지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다
(1) 마음이 외부의 사물을 창조한다는 의미와
(2)외부에 이미 존재하는 사물을 마음이 주관적인 의미를 부여하여 사물을
재창조 한다는 의미다
여기서는 외부에 이미 존재하는 사물을 마음이 좋게 혹은 나쁘게 분별한
다는 (2)의 의미일 것이다
(1) 의 의미는 나중에 다시 살펴보기로 하자 원효대사가 마신 물은 그냥 중립적으로
있는 그대로 존재하는데 그 물을 좋게 나쁘게 만든 것이 마음이라는 의미다
누구라도 자신만의 판단으로 좋은 사물과 나쁜 사물을 구분한다
같은 사람을 두고도 좋은 사람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고 좋지 않다고 보는 사람도
있다
사물자체는 좋고 나쁨이 없는데 그 사물을 마음이 좋게 나쁘게 만든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원효대사가 깨달은 것은 무엇일까?
단지 사물을 우리가 좋거나 나쁘게 봄으로써 긍정과 부정을 말한 것일까,
아니면 다른 무엇을 말하고자 함인가?
사물을 좋게 보고 긍정적으로 살아가라는 의미는 아닐 것이고, 사물을 좋게도 나쁘게도
보지말고 있는 그대로 보라는 의미일것이다
사물은 좋거나 나쁘게 또 귀하게 천하게 존재하지 않고 그냥 존재하는 그대로 존재한다는 것을 알면 자유롭게 살 수 있다는 가르침일 것이다
우리가 사물을 좋게 보고 집착하고 나쁘게 보아서 혐오하여 세상을 나누고 스스로 사물에 구속되어 고통을 부른다고 하는 의미다
좋거나 나쁜 것에 집착하면 반드시 고통에 이른다
삶을 좋아하고 죽음을 혐오하면 고통받을 수밖에 없다
좋아하는 사람과 멀리 떨어지고, 싫어하는 사람과 같이 있다면 고통을 받을
수밖에없다 그러니 세상을 분별하면 안된다
즉 좋고 싫음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세상을 존재하는 그대로 보아야지 자신만의 잣대로 보아서는 고통을 받는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사물을 좋아하고 싫어하는 우리는 사물을 존재하는
그대로 보지 않고 나름대로 자신만의 안경으로 환상을 창조하여 본다는 말이다
그래서 고통받으니 있는 그대로 보라는 가르침이 일체유심조다
즉 사물은 우리가 생각하는대로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의 생각은 공하다는 가르침이다
생각으로 헤아려 사물을 보면 제대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니 곧 사물의 공성 즉 중도를 의미한다
사물자체는 좋고 나쁨이 없다 칸트의 말을 빌리면 물자체는 알 수 없다
우리가 보는 대로 존재하지 않고 다르게 존재한다는 의미다
즉 직관으로 보아야 제대로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은 마음이 사물을 분별하기 이전의 사물을 보는 것이다
그냥 모든 사물들이 얽혀서 전체로 존재한다 그런데 마음이 그 사물을
세상에서 분별하고 떼어내고 다시 그사물을 좋고 나쁨으로 판단한다
그러니 일체유심조는 마음이 그렇게 환상으로 세상을 창조하니 그것을 멈추고
그냥 있는 그대로 바라보라고 한다 "본모습을 보라"고 한다
분별하는 마음을 거두어야 진리를 알 수 있다는 의미다
그러니 일체유심조는 사물은 공하다는 공(성)의 가르침이기도 하다
분별을 잘하라는 의미가 아닌 "분별하는 마음을 멈추어라"는 가르침이다
이것은 자신만의 견해에 집착하지 말라는 뜻이기도 하다
모든 생각은 진리가 아니기에.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보자 마음이라는 의미는 두 가지로 사용된다
분별하는 부분적인 마음과 전체적인 마음이 있다 좋고 싫음에 매달리는 마음은
일상의 분별하는 마음이다 그 분별을 멈추면 드러나는 마음이 있다
(진공묘유의 의미다) 전체적인 마음 혹은 절대적인 마음이다
일심(一心)이라고 할 때의 마음이며 불성이다
오염되지 않은 순수마음이며 무한한 마음이다
이 마음 속에서 세상만물이 나타나고 머무르고 사라진다
삶과 죽음을 포함하고 초월한 마음이다 세상의 근원이며 바탕인 무한한 마음이다
세상은 이 마음 속에서 태어나므로 이 마음이 세상을 창조했다고 할 수 있다
이 절대적인 마음이 세상을 창조하고 다시 또 세상을 흡수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무상한 세상은 불변의 절대적인 마음이 만든 것이다
위 글의 (1)의 의미대로 마음이 세상을 창조한 것이다 절대적인 있음(혹은 없음)이
세상을 지어 낸 것이다 일체유심조다
이렇게 해서 일체유심조는 일심이라는 큰 마음 혹은 불성이 세상자체를 창조했다는
(1) 의 의미와
존재하는 세상을 분별하는 작은 마음이 창조한다는 (2)의 의미
두가지 모두를 가진다
분별하는 작은마음을 멈추면 큰 마음이 드러나고
그 마음 속에 그림자 같은 세상이 나타나고 사라지니 진정으로 존재하는 것은
오직 그 마음 뿐이라는 의미이기도 한다
그래서 일체유심조는 두가지 의미를 동시에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기세간을 창조한 일심과 그 창조된 세간을 다시 재창조한 작은 마음을 동시에
나타낸다고 본다
그 작은 마음에서 벗어나서 큰 마음을 향하라는 가르침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마음(불성)이 세상을 창조하고 그 창조된 세상을 다시 마음(자아)이
재창조하다는 것이다
불성(일심)을 깨달아 올바르게 사물을 보고 자유를 찾아라는 뜻이다
일체유심조(좁은 의미) - 세상사 마음먹기 나름이다
일체유심조(넓은 의미) - 세상은 있는 그대로 존재한다 참모습(실상)은
우리가보는대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색즉시공 공즉시색 - 세상은 비어있지만 모양은 존재한다 진실로
(절대적으로는) 존재하지 않지만 경험적으로는 생생하게 존재한다 (꿈처럼)
摩詞般若波羅蜜多心經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
觀自在菩薩 行心般若波羅蜜多時 照見五蘊皆空 度一切苦厄 (액)
舍利子 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 受想行識 亦復如是
舍利子 是諸法空相 不生不滅 不垢不淨 不增不減 是故 空中無色
無受想行識 無眼耳鼻舌身意 無色聲香味觸法 無眼界 乃至無意識界
無無明 亦無無明盡 乃至無老死 亦無老死盡 無苦集滅道 無智亦無得
以無所得故 菩提薩唾 (보리살타) 依般若波羅蜜多故 心無罫碍 (심무가애)
無罫碍故 無有恐怖 遠離顚倒夢想 究竟涅槃 (원리전도몽상 구경열반)
三世諸佛 依般若波羅蜜多故 得阿樓多羅三邈三菩提 (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
故知般若波羅蜜多 是大神呪 是大明呪 是無上呪 是無等等呪
能除一切苦 眞實不虛 故說 般若波羅蜜多呪 卽說呪曰
揭帝 偈帝 般羅 偈帝 般羅僧揭帝 菩提 僧莎詞
(아제 아제 바라 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세번)
우리말 번역 : 한마음선원 대행스님의 "뜻으로푼 반야심경"
두루 차고 깊은 지혜 한마음은 밝았으니 저 세상과 이 세상을 두루 살펴 자재로이 행하시는 한마음이 죽은 세상 산 세상 한데 비추어 보시니
모든 중생들은 본래부터 공생(共生), 공심(共心), 공용(共用), 공체(共體), 공식(共食)하며 고정됨이 없이 나투고 화하여 돌아가건만 그것을 몰라서 일체 고(苦)의 길을 걷나니라.
사리자여,
물질과 마음이 다르지 않고 마음은 모든 물질적 현상과 다르지 않나니 모든 물질적 현상은 곧 한마음으로 좇아 있나니라. 느끼는 생각과 행하는 의식도
또한 둘이 아니어서 이와 같나니라.
사리자여,
우주 생명과 모습은 본래 생겨났다 없어졌다 함도 없으며
더러운 것도 깨끗한 것도 없으며 늘지도 줄지도 않느니라.
이런 고로 고정됨이 없는 차원의 물질도 둘이 아닌 까닭에 없나니
감각, 지각, 의지적 행동, 인식작용도 따로 없느니라.
눈, 코, 귀, 혜, 몸, 뜻도 따로 고정됨이 없으며
냄새, 맛, 감촉, 법도 따로 고정됨이 없으며
보이는 세계와 의식 세계까지도 따로 고정됨이 없느니라.
죽지 않는 것도 죽는 것도 또한 둘이 아닌 고로 없으며
늙고 죽음도 없고 또한 늙고 죽음이 다함까지도 없느니라.
온갖 괴로움의 원인과 괴로움을 벗어나는 방법까지도 없으므로
지혜도 깨달음도 얻을 바가 없으니 없는 까닭은 일체 고정된 것이 없이
화(化)하여 찰나 찰나 나투는 까닭이니라.
자유인의 한마음은 깊은 무(無)의 세계에 회전하며 일체 걸림이 없느니라.
마음에 걸림이 없는 고로 두려움이 없으며 뒤바뀐 헛된 꿈 같은 생각을 떠나서
본래부터 영원한 밝음의 구경에 이르렀나니라.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의 모든 부처님들도 이 마음 자리를 깨달아
가장 높고 밝은 지혜를 얻어 생사를 초월하고 자유 자재의 경지를 성취하셨나니 마땅히 알라.
깊은 미지의 지혜로운 한마음이야말로 가장 신비하고 가장 밝고
가장 높고 가장 당당한 위 없는 심경이므로
이 깊은 미지의 주문은 진실하여 허망치 않음을 알라.
일체 고난에서 벗어나리라. 이에 깊은 한마음을 깨닫는 주문을 설하노니,
발 없는 발로 길 없는 길을 어서 어서 벗어나세 우리 함께 벗어나세 이승 저승 없는 마음 어서 어서 벗어나세 한마음의 깨달음은 그대로 여여하게 밝았으니 우리 함께 어서 어서 벗어나세(3번)
摩訶般若波羅蜜多心經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
크고도 큰 ‘본래 청정한 자아’ 마음의 날줄로 삼다.
1. 觀自在菩薩行深般若波羅密多時 照見五蘊皆空度一切苦厄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
관자재보살이 깊이 숨겨진 모든 이치의 근본인 ‘본래 청정한 자아’를 찾아 다니며 이를 구할 때 5온을 만나, 이 모두가 헛된 에너지(체)임을 알게 됨에 그 5온에 밝히 빛을 비추어 모든 괴로움과 어려움으로부터 건널 수 있었다.(5온...색, 수, 상, 행, 식)
2. 舍利子色不異空 空不異色
사리자 색불이공 공불이색
사리자야,
보이는 것은 에너지(체)에 의하므로 이는 서로가 다른 것이 아니고
떠돌거나 머무는 에너지(체)들이 보여지게 하므로 그 작용과 다른 것이 아니니라.
(색...색은 보이는 것이다. 이는 엄격히 나와 별개의 다른 존재가 가지고 있는 것으로, 그 안에 있는 어떤 에너지(체)들의 작용에 의해 보는 이들로 하여금 보여지는 것을 뜻한다.)
色卽是空空卽是色 受想行識 亦復如是
색즉시공 공즉시색 수상행식 역부여시
또한 보이는 것 모두는 곧 미세(아원자)에너지로 구성 되어져 있음에
이 미세 에너지가 모여서 바로 보이는 것(물질)이 되느니라.
보여지는 색 또한 에너지로 되어 있으니
보여진다는 것은 곧 비어있거나 허상과 같으며
없거나 비어있는 듯한 것이 곧 ‘물질’이며 ‘색깔’이며 ‘보이는 것’이느니라.
수상행식도 또한 이와 같은 이치이니라.
수(다른 존재로부터 건너와 내가 받아들이게 된 어떤 에너지(체)를 뜻한다.)
상(‘수’와 내 안에 자리잡은 것들로부터 형성된 것들이 서로 섞이고 영향을 주고 받으면서 나타나는 생각{에너지(체)}을 뜻한다.)
행(‘수’와 ‘상’이 합하여 나를 움직이게 만드는 작용의 에너지(체)를 뜻한다.)
식(‘수’와 ‘상’과 ‘행’과 더불어 내 안에 자리잡은 세상적 앎과 규범, 틀, 관념들이 모여 또다른 ‘나’를 만들고 ‘나’를 대변하는 총체적 분별심과 에너지(체),
그 작용을 포함한다.)
3.舍利子是諸法空相 不生不滅 不垢不淨 不增不減
사리자 시제법공상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
사리자야,
이 모든 것의 본래 모습(지구 안에서의 ‘본연의 성’)은 그 모습의 실체를
눈으로 보고 재기 어려운 것이라 하여
이를 빈 것이라고 하거나 ‘없는 것이다’라고 하거나 허상이라고 하느니라.
이는 새로이 생겨나는 것도 없어지는 것도 아니며,
더러워지는 것도 아니고 깨끗해지는 것도 아니며,
본래의 모습에서 늘어나는 것도 아니며 줄어드는 것도 아니니라.
4.是故空中無色 無受想行識 無眼耳鼻舌身意 無色聲香味觸法 無眼界
乃至無意識界 無無明 亦無無明盡 乃至 無老死 亦無老死盡 無苦集滅道 無智 亦無得
시고 공중무색 무수상행식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 무안계
내지 무의식계 무무명 역무무명진 내지 무노사 역무노사진 무고집멸도 무지 역무득
원래 비어있는 본래 모습(우주적 본래 청정한 자아)에는
다른 존재가 드러내는 에너지(체)도 없고, 그로부터 받는 것도 없고, 내 안에 만들어진 생각도 없으며, 받은 것과 생각으로 만드는 행동도 없으며, 모든 총체적 분별도 없느니라.
눈, 귀, 코, 혀, 몸, 뜻이 만드는 작용이 (없음으로 온갖 마음을 만들고 받아들이는 작용도) 없느니라.
색깔에서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체)도 없고
소리로 전해지는 에너지(체)도 없고
냄새로 퍼져 오가는 에너지(체)도 없고
맛으로 움직이는 에너지(체)도 없으며
닿음이 이끌어내는 에너지(체)도 없고
도덕과 규범, 관념 안에 묶어두는 에너지(체)도 없으며,
눈으로 볼 수 있는 경계조차 없고,
나아가 무엇을 분별하는 의식의 경계도 없으며
‘밝음’이 없음도 없으며 ‘밝음’이 다함에 이르는 일도 없으며
적어도 늙고 죽는다는 일도 없고
늙거나 죽음에 이르는 일도 없으며
기쁘고자 하는 마음에 불충족됨도 없고...<고락>
많아지고 높아지고자 하는 마음에 불충족됨도 없고...<유무>
생사와 존재성에 대한 불충족됨도 없고...<생멸>
의식이 도달할 바에 대한 불충족됨도 없으며...<완성>
작은 지혜를 얻고자 함도 없고
역시 증득하고자 함도 없느니라.
5.以無所得故菩提薩陀 依般若波羅密多 故心無罣碍 無罣碍 故無有恐怖 遠離顚倒夢想 究竟涅槃
이무소득고 보리살타 의반야바라밀다 고심무가애 무가애 고무유공포 원리전도몽상 구경열반
오래된 습관과 쌓아두며 얻는 바를 없이 함으로써 (관자재)보살은 ‘본래 청정한 자아’를 믿고 따랐느니라. 그러므로 마음에 거리낌이 없고도 없으며 어떤 두려움과 의심된 마음도 없이, 거꾸로 된 꿈같은 허망한 일을 멀리한 까닭에 마침내는 니르바나의 참기쁨을 헤아릴 수 있게 되었으며 이에 이르게 되었느니라.
6. 三世諸佛依般若波羅密多 故得 阿褥多羅三邈三菩提
삼세제불 의반야바라밀다 고득 아뇩다라삼먁삼보리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부처님도
‘본래 청정한 자아’를 믿고 따름으로 확실한 해탈을 얻었느니라.
故知般若波羅密多 是大神呪 是大明呪 是無上呪 是無等等呪
고지 반야바라밀다 시대신주 시대명주 시무상주 시무등등주
그러므로 알아라.
‘본래 청정한 자아’를 구하는 마음은 곧,
크나큰 신에게 향하는 노래<주문>이며
더없는 밝음을 향한 노래이며
위없는 노래이며
이에 비길만한 것이 없는 노래이느니라.
能除一切苦眞實不虛 故說般若波羅密多呪 卽說呪曰
능제일체고 진실불허 고설반야바라밀다주 즉설주왈
이 청정한 자아는 참되고 참되어 약하지 아니하고
허망하지 않아 이 모든 괴로움을 능히 없게 하느니라.
그러므로 청정한 자아를 향한 노래를 외라.
그 욀 노래는 이러하느니라.
揭諦揭諦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菩提 娑婆訶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가세 가세 어서 가세
저 찬란한 세상으로 모두들 어서 가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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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야바라밀다심경의 뜻을 풀면서
불교의 핵심, 정수라고 까지 할만한 “반야바라밀다심경”이 전하는 뜻을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눈높이와 새로운 문명을 준비하는 사람들에게서 나타나고, 또한 그들이 알 수 있는 현상들로써 풀었다. 그리고 이를 푸는 과정에서 언제인지도 모를, 그 오랜 시절에 우주의 근원적 자아와 지금 우리가 당면한 이야기들과 현재의 세상 사람들이 겪어야 할 일들을 적어 놓았다는 것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참”책에서 밝힌 보이지 않는 미시 세계와 에너지적 세상을 어느 정도 이해하는 것을 전제로 쓰게 되었음에 먼저 양해를 구한다.
일반적 해석과 다소 동떨어짐을 지적할 수 있겠지만 -언제나 겪는 일이지만- 일반적인 것이, 시속의 큰 흐름에 따라가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며 정답일 수만은 없기 때문에 이를 밝히어 알리고자 한다.
전체를 6등분으로 나누었다.
이것은 전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다르기 때문이다.
즉 지구 내에서의 각자의 영혼이 감당해야 할 일과 우주적 본래 자아가 겪고 감당해야 할 부분이 다르기 때문인데 이를 하나의 관점과 같은 영역에서 해석을 하면 너무나 다른 이야기를 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는 책 ‘빛세상 이야기’를 토대로 이해를 하면 우주 전반의 운영을 짐작할 수 있으며 다소 이해에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1은 관자재보살의 체험담에 속한다.
2~3은 사리자에게 전하는 5온에 대한 설명이다. 지구적 차원 내에서 일어날 수 있는, 그리고 에너지(체)들에 대한 일로써 우리가 이겨내고, 겪으며 나아가야 할 이야기이다.
4는 우주적 관점에서 본 본래의 자아 (혹은 상위자아)에 대한 이야기이다.
5는 관자재보살의 체험담의 일부이다.
6은 본래의 자아를 찾고 구하라는 것과 그것을 통해 저 찬란한 빛세상을 건널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라는 당부를 주문 즉, 노래로 만들어 외게 한 내용이다.
또한 이 심경이 누가 만든 것인지 언젯적 것인지에 대해 분분한 이론이 있다고 들었다.
그러나 나는 그러한 이론에 매달리거나 판단이나 확답을 찾기보다 심경의 바른 뜻을 알고, 누군가가 이토록 간절히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준 내용을 현세에 살고 있는 우리가 잘 받아들여 유용하게 쓰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심경은 아는 바와 같이 인도말을 중국의 한자로 옮겨왔기 때문에, 또한 한자도 그 시절 중국에서의 쓰인 것이라 그 뜻도 일부 지금과는 다를 것이고 더구나 지금의 한국에서의 쓰임과 분명코 다를 수밖에 없는 일정 부분을 우리는 감안하여야 한다고 본다. 어쩔 수 없이 두 가지의 언어가, 아니 그 이상으로 섞이면서 발생할 수 있는 작은 일들에 대해, 그리하여 필요했던 의역에 대해 큰 이해를 바라는 바이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이 우리는 손가락이 가리키는 ‘달’을 보아야 제대로 풀어질 수 있음을 잊지마시기를 또한 당부드린다.
반야바라밀다 심경
<이해를 돕는 기본이 되는 풀이>
1...반야(지혜)바라(청정)밀다(모든 법)
일반적으로 커다란 지혜, 청정한 지혜, 슬기 등으로 해석이 되어지고 있다.
이 풀이에서는 우리가 도달하여야 할 우리의 본래 자아를 회복하는 의미로
“본래의 청정한 자아”로 정했다.
경(經)은 날줄이다.
우리는 날줄을 바로 세우고 씨줄을 엮어 나감에 사람들의 삶 속에, 마음 속에 “본래의 청정한 자아”를 향한 마음을 날줄로 삼도록 했다.
(책 “긴 여정을 거쳐 준비된 당신에게” 17p 참조)
2.... 아뇩다라 삼먁삼보리
일반적 해석은 ‘무상 정등각’이라 하며 바른 깨달음을 뜻한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엄밀히 깨달음과 해탈은 그 과정과 격에서 크게 다른 일이다,
아뇩다라 삼먁삼보리는 궁극적 다다름이므로 이의 참 뜻인 곧, 해탈로 표했다.
3... 오온
지구의 모든 존재가 수 생을 통해 만들고 쌓아온 에너지(체)의 작용을 5가지를 크게 나누었다. 5온에서의 벗어남이 곧 자유자재함의 경지에 다다르는 것이다.
<5온....색 수상행식>
색은 자아와는 엄밀히 분리된 他 존재이며 개체로써 독립된 상태를 일컫고 있다.
수상행식은 색과의 관계와 자신이 만들어 낸 에너지(체)들과의 교류 혹은 힘겨루기에서 나타내지는 현상을 현상별, 혹은 점진성이나 차등성을 가지고 분류되어진다.
색수상행식의 엮어냄은 세상 속에서 서로 간의 “관계”를 여실히 보여준다. 즉 윤회 안에서의 모든 相을 나타낸다.
‘수상행식’과 ‘색’이 따로 떨어져 분리되어 쓰여진 것이 ‘색’이 가르키는 참 뜻, 정확하게 다른 존재의 문제, 나와의 문제가 있기 전의 상태라는 것을 확연히 말해준다.
<예: 색불이공 공불이색.......수상행식 역부여시//공중무색 무수상행식.....>
4... 공(空)
헛된 것이라는 의미와 에너지(체)를 가리키는 의미와 미세 에너지적 상태
즉 영점장 (zero point field)으로써 비어 있는 듯한 상태를 의미하기도 하며 본래의 무상한 ‘우주적 자아’를 일컫기도 한다.
5... 본문 중 3 파트는 지극히 지구 내에서의 우리의 영혼을 가리키고 있다. 지구에 올 때의 그 상태를 유지할 수밖에 없는 영혼의 볼륨, 그리고 영계설계에서 받아온 그 생의 공부로써의 의미를 그대로 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의식 성장을 위한 “공부”라는 차원에서 볼 때, 자신의 의식을 확장시켜 볼 수 있을 때, 어떤 이도 ‘더럽다’, ‘깨끗하다’ 할 수 없음을 알게 된다는 뜻이다.
6... 본문 중 4파트의 한 귀절 한 귀절 들은 점차 심오한 영역으로 진행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본디 우리의 상태는 4파트의 글귀 가운데에서 역으로,
즉 뒤에서부터 앞으로의 상태로 나아가면서 자꾸만 에너지적 덧씌우기를 하면서 살아온 것을 의미한다. 이는 곧 다시 반대로 그쪽으로 회복하면서 되돌아 가야 한다는 것을 내포하고 있다.
7... ‘안이비설신의’와 ‘무색성향미촉법’은 서로 다른 관계이며 구분되어져야 할 의미이다.
‘무안계’는 일반 가시(可視)의 상황을 넘어서 그 밖의 것까지 볼 수 있는 경계를 가리킨다.
‘색성향미촉법’에 관하여서는 책 “긴여정을 거쳐 준비된 당신에게”의 78p을 참조하면 더 도움이 될 것이다.
8... 본문 중 4파트의 “밝음”이란 ‘본래의 청정한 자아‘가 가진 에너지와 그의 준위, 볼륨을 의미한다. 어떤 작은 존재라도 ’밝음‘ 즉 자신의 고유한 에너지를 가지고 있음에 “밝음이 없음이 없다”라고 밝히며, 우주의 그 모든 것은 어느 것도 예외없이 생과 멸을 거치 지만 그 기간이 너무나 장구하여 인간의 인식 체계로서는 거의 영원에 가깝다.
하여 이 ‘밝음’이 다함(滅)에 이르는 일은 없다고 말하는 것이지만 각각의 의미는 엄밀 히 다름을 밝힌다.
4파트의 “고집멸도”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게 추구하는 바
즉, <고락苦樂>, <유무有無>, <생멸生滅>, <완성完成>으로 큰 획을 그었다.
이 4가지를 구하기 위해, 그리고 이를 얻고자 하는 마음과 이에 대한 ‘불충족감’이 많은 사람들을 힘들게 만들고 슬프게 만드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점차 맑아지고 밝아지면서 욕심이 점점 적어질 때 ‘없어서 불안함’과 ‘부족감’과 ‘불충족감’의 차이를 현격하게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욕심이 아닌 진정한 “고집멸도”의 의미는, 더구나 현 시점과 같이 “참 자아”, “청정한 자아”를 찾아가고 회복하는 길목에 있어서는 더욱 “불충족됨”으로써 일어나고 벌어지는 현상들임을 알 수 있게 된다.
특히 도를 추구하며 공부를 찾는, <완성>의 부분에서는 각 생의 영계설계에서 받은 공부를 제대로 해야만 하는, 무의식에서부터 나오는 갈급함과 그 공부를 제대로 해야 하는 소기의 목표를 향한 ‘부족됨’과 ‘불충족됨’이 가져다 주는 여러 모습을 의미한다.
또한 ‘무노사 역무노사진’의 부분도 “늙고 죽음”이라는 윤회 시스템 하의 지구적 삶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라서 우리는 이 부분에서 ‘그냥 존재함’의 의미를 새겨볼 수 있다.
우주에서는, 우주적 청정한 자아는 “그냥 존재함”이라는 상태를 유지한다는 것과 맥을 같이 하는 부분이며, 이는 현재를 사는 사람들로서는 아직은 도저히 알아듣기 힘든 경계에 속한다.
9... 주문이란 주술적 분위기를 내포하여 사용되기도 하지만 그 본래의 참뜻은 “기쁜 노래” 이다.
찬송을 하는 것과 같이 신을 향한 예배이며 기뻐 어쩔 줄 모르며 외고 부르는 노래이다.
그리하여 “노래”라는 표현을 했다. 어쩌면 슬로건이다.
다음의 문명, 다음의 새로운 세상이 올 때까지 절대로 잊지 말라고 간절하게 알려준 노래이다.
옛 이야기와 민속 음악은 구전(口傳)되어 언제까지도 전해져 온다.
그 무엇보다 그 전해져 오는 힘이 큰 것이 구전의 형식이다. 오래 전 이를 전한 분들은 참으로 간절함을 실어 현생의 우리에게 까지 이 노래가 닿을 수 있게 하려고 마음을 썼을 것이다.
“가세 가세 어서 가세 저 찬란한 빛세상으로 우리 모두 어서 가세....”.
10... 빛세상이란
성인(聖人)격의 의식을 가진, 자신의 카르마를 넘어선 사람들이 살아가게 되는 세상으로 지금 우리 모두는 이 빛세상을 향해 그 문을 들어가려 정화하며 애쓰고 있다.
깨달음과 해탈 혹은 피안(彼岸)을 이제라도 쓰임과 이해에 있어서 달리 구분되어 써야 하며 알아야 한다.
‘깨달음(覺)’은 저쪽 언덕으로 가야 한다는 것을, 저쪽 다른 세상이 있음을 알게 된 것
그리고 우리에게 닥친, 그리고 겪고 있는 이 일들이 허상이며 에너지적 문제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 깨달음(覺)이며 그 과정이 ‘깨달음’의 과정이다.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되는 것까지도 지금까지는 너무나 험난하고 어려운 과정이었다.
수많은, 5온에 포함되고 5온을 일으킬 수 있는 에너지체를 알아낸 상태가, 그리하여 ‘본연의 자아’가 있다는 것을 확연히 알게 되는 그 상태가
즉 깨달음(覺)에 해당된다.
그리고 그에 대한 각자의 대응을, 그것을 극복하고 넘어서 자신의 카르마를 소멸하고 윤회의 고리를 끊어 자유자재 사람이 해탈이며 니르바나를 만난 것이라고 구분된다.
피안으로 가는 길이 멀지 않았고 그를 건널 수 있는 '헥소미아'라는 배도 띄워져 있다.
저 언덕 너머의 세상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는 그에 다가갈 수는 없다.
그러므로 깨달음과 해탈의 경지를 같은 단어로, 같은 졸업증서로 보면
안 된다는 것을 굳이 밝힌다.
저 언덕 너머의 세상을 지금 우리는 편의상 ‘빛세상’이라고 부르고 있다.
<2008년 10월 24일 다생소활의 德明이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의 뜻을 풀다.>
2009년을 준비하며 음력 10월 상달을 맞아
덕명 쓰다.
출처(다생소활 덕명 컬럼) : http://dasaeng.net
※ 따뜻한 마음을 품고 사십시요※
행복한 사람이 되고 싶으면 마음의 세계를 이해해야 합니다.
모든 것은 마음에서 나옵니다. (一切唯心造)
행복도, 불행도 마음에서 나옵니다.
사랑도, 미움도 마음에서 나옵니다.
몸을 잘 쓰는 것도 중요하지만
마음을 잘 쓰는 것은 더 중요합니다.
인생에서 승리한 사람들은 몸보다는 마음을 더욱 잘 쓰는 사람들입니다.
마음을 잘 쓰면 복을 받고, 마음을 잘못 쓰면 화가 임합니다.
마음을 경영하는 것이 자신을 경영하는 것이고,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 자신을 다스리는 것입니다.
마음을 새롭게 하는 것이 자신의 인생을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우리는 매일, 매순간 마음을 잘 다스려야 합니다.
마음이 차가워질 때 사랑이 식습니다.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사라집니다.
마음이 차가워지면 우주의 기운이 약해집니다.
모든 것이 얼어붙게 됩니다.쉽게 남을 비판하고 정죄하게 됩니다.
마음은 따뜻하고 부드러울수록 좋습니다. 사람들은 따뜻한 사람을 좋아합니다.
따뜻한 사람은 따뜻한 마음을 소유한 사람입니다.
따뜻한 사람은 친절합니다. 따뜻한 사람은 사람들을 따뜻하게 합니다.
만물은 따뜻한 기운 아래 소생합니다.
물이 지나치게 맑으면 고기가 살지 않습니다.
지나치게 비판적인 사람은 주위에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는 비판은 삼가야 하지만 분별력은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 인생에서 분별력은 아주 중요합니다. 지혜는 분별력입니다.
선택하고 결단할 때 중요한 것은 분별력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냉철한 머리로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마음은 따뜻해야 하지만 머리는 차가워야 합니다.
머리가 뜨거우면 분별력을 상실하게 됩니다.
분별은 차가운 머리로 해야 하지만, 사람을 품는 것은 따뜻한 가슴으로 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