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에 적었던 글을 새로 손보았습니다. 찝찝했던 마음이 마무리를 고치며 덜어집니다.
어느 마을에 착한 젊은이가 살았습니다.
젊은이의 어머니는 오랫동안 병을 앓고 있었는데 마을 사람들이 '효자네 큰아들'이라고 부르는 그 젊은이의 효성은 그렇게 극진할 수 없었지요.
그런데 어느 날 집에 스님이 시주하러 왔다가 슬쩍 던져준 말에 효자네 큰아들은 그만 귀가 솔깃해졌습니다.
"저 멀리 어디어디가면 다 죽어가는 사람도 고칠 수 있는 천하명약이 있는데, 그것을 구해 달여 먹으면 자네 모친은 금방 나아질걸쎄. 물론 거기까지 가기에는 무척 고생이 많겠지만..."
그런 말에 동하지 않는 효자가 어디 있을까요. 효자네 아들은 사흘밤 사흘낮을 고민하며 잠을 자지 못했습니다.
그 옆집에 또 역시 효성이 지극한 처녀가 살았습니다. 그 또한 오랫동안 병석을 지켜온 늙은 아버지가 계셨는데 아무리 어려운 살림에도 아버지의 밥상에는 고기반찬이 끊어지는 날이 없었지요.
'효녀네 큰딸'이라고 불리운 처녀의 병수발은 역시 하늘이 감동하기에도 남음이 없어 그 스님 또한 이 처녀에게도 시주를 하러 들렀다가 슬쩍 천하명약의 이야기를 흘려놓았겠지요. 이 효성스런 처녀 역시 눈물과 한숨으로 밥을 짓고 반찬을 마련하며 사흘밤 사흘낮을 고심하였습니다.
효자네 큰아들이 어머니 약을 구한다고 어느 날 갑자기 모습을 감추자 마을사람들의 입방아는 그칠 줄 몰랐습니다.
"흥, 그러면 그렇지. 노모의 병수발이 귀찮아져 약을 구한다는 핑계로 도망친 게 틀림없어."
"그 착하기만 한 효자네 큰아들을 현혹한 땡중, 보이기만 해봐라. 혼을 내 줄테다."
"그렇게 오랫동안 앓아 누운 노친네에게 먹으면 금방 낫게 하는 천하명약이 어디 있을라고?"
"아니 그럼, 그 노친네 수발은 이제 누가 들지?"
"참, 그런걸 보면 효녀네 큰딸의 효성은 정말 대단하지."
효녀네 큰딸이 눈물을 감추고 늙은 아버지의 곁에 다시 다가 안기 위해선 많은 생각을 거쳐야 했습니다.
'약을 구하기 위해 떠나는 그 고생이 무서워 나는 가지 못하나?'
'명약이 있다는 그 스님의 말을 믿지 못해서 나는 떠나지 못하는 건가?'
'떠나더라도 약을 구할 자신이 없어 나는 여기 남아 있는 게 아닐까?'
'아버지를 위하는 정성이 부족해서 인지도 몰라.'
'아니야, 나 아니면 아무도 수발들 사람 없는데, 당장 한끼라도 차려주지 않으면 아버지는 며칠도 안가 돌아가실 게 뻔해. 그런 아버지를 두고 지금 어찌 갈 수 있겠어. 설혹 천하명약을 구해온다손 치더라도 그 사이 이미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만다면 그 아픈 가슴을 누구에게 용서받을까. 벌써 효자네 어머니는 제대로 먹지 못하고 열이 나서, 옷과 잠자리엔 땀과 치우지 못한 똥 냄새가 가득하고 이미 욕창자리도 잡는다던데...'
효녀네 큰딸은 마음을 다잡고 전보다 더 열심히 일하였습니다. 아버지는 물론 효자네 어머니까지도 같이 섬겼습니다. 아버지 병 수발도 힘들었지만 효자네 어머니를 아침저녁 미음을 떠 넣어주고 옷도 갈아 입혀주면서 친어머니같이 섬기는 것은 아마 길떠난 효자네 큰아들 고생하는 것 만할 겁니다.
그러면서 수시로 효자네 큰아들이 무사히 돌아오기를 빌었지요. 곧 돌아오리라는 희망은 없었지만 저절로 지쳐서라도 일찍 돌아왔으면 하는 생각과 함께, 자기의 소원을 더하여 제발 천하명약을 구해서 잃어버린 자신의 희망도 보상해줄 것을 빌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한번도 그전엔 마음두지 않았던 효자네 큰아들에 대해 은근한 그리움까지도 들었습니다.
어느 날 효자네 큰아들이 천하명약을 구해서 돌아온다는 소문이 들렸습니다. 게다가 부잣집 딸로 아내를 얻고 금은보화도 챙겨서 돌아온다고 했습니다.
그 동안 겪은 효자네 큰아들의 고생은 벌써 사람들 입과 입으로 먼저 전해지면서 몇 시간을 이야기해도 다하지 못하는 큰 이야기 거리가 되었지요. 하여튼 고생 끝에 소원을 이룬 젊은이의 소문은 온 마을을 다 흔들었습니다.
"그려, 그려, 역시 효자의 지성이 하늘을 감동시켰구만."
"어릴 때부터 보아온 대로 역시 영특하고 늠름한 젊은이로군."
"하늘이 보살핀 효자를 배출한 우리 마을의 큰 영광이야."
"자랑스러운 우리 동네의 이름을 널리널리 떨쳐야 하지 않겠어?"
효자네 큰아들이 고향에 돌아오니, 그는 이미 마을의 영웅이 되어 있었습니다. 오랜 여정 끝에 돌아온 그는 사람들의 환호 속에서 자신이 이루어낸 것을 돌아보며 뿌듯함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떠나 있던 동안 어머니를 누가 돌보았는지 생각할 겨를이 없이 마을 사람들의 찬사를 받으며 분주한 나날을 보내었습니다.
반면 효녀네 큰딸은 아무런 표도 안 나는 일에 몸과 마음을 다 써버리느라 심신이 다 지쳐 있었지요. 살갗은 다 터지고 가난한 살림의 궁기는 더하고 게다가 혼기도 놓치고 하였지만, 그러나 그런 것보다 더 괴로운 것은 그렇도록 섬김을 다해온 아버지의 마음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지금껏 수발해온 딸의 정성도 잊어버리고, 천하명약을 구해온 아들 둔 이웃집 어머니를 더 부러워하며 그런 것 하나 구하지 못한 능력 없는 딸아이를 은근히 힐난했지요.
효녀네 큰딸이 아버지의 마음을 모를 리 없었습니다. 자신의 선택이 옳았는지 되묻고, 때로는 실망과 고민에 잠기기도 했지만, 아버지를 향한 정성만큼은 한순간도 흐트러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효녀네 큰딸은 문득 아버지의 얼굴에 미소가 떠오르는 걸 보았습니다. 그녀가 매일 정성껏 쑤어 먹인 미음과 약초, 밤마다 손으로 어루만져 준 따뜻한 손길이 어느새 아버지의 몸을 조금씩 일으켜 세우고 있었던거지요.
어느 날 아침, 아버지는 힘겹게나마 자리에서 일어나 창밖을 바라보며 중얼거렸습니다.
“이 바람이 참 시원하구나. 요즘 몸이 좀 가뿐한 것 같아.”
그녀는 그 말을 듣고 가만히 아버지의 손을 잡았습니다. 그 순간 깨달았습니다. 기적이란 먼 곳에서 번쩍이는 보석처럼 오는 것이 아니라, 매일의 고요한 시간 속에서 자라나는 것임을.
한편, 그의 모험을 칭송하며, 그가 가져온 천하명약과 부를 부러워하는 사람들의 환호 속에서 효자네 큰아들도 문득 깨달았습니다. 자신이 없는 사이 그의 어머니를 정성껏 돌본 사람이 누구인지 알게 된거지요. 어머니의 병석을 지킨 것은 천하명약이 아니라, 한결같이 곁을 지키며 미음을 떠넣어 주고, 손을 잡아주고, 때마다 등을 쓸어내린 누군가의 정성이었습니다.
그는 조용히 효녀네 큰딸을 찾아갔습니다. 그녀의 손은 여전히 거칠었고, 얼굴엔 피곤이 서려 있었지만, 눈빛은 고요하고 단단했습니다.
“그동안 정말 고마웠어.”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조용히 말했습니다.
"네가 떠난 동안 나는 여기에 남아야 했어. 누군가는 지켜야 했으니까."
효자네 큰아들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네가 만든 기적이야."
그날 밤, 효자네 큰아들은 마을 사람들을 모아 이야기했습니다.
“나는 천하명약을 찾아 떠났지만, 결국 내 어머니를 살린 것은 약이 아니라, 누군가의 변함없는 정성이었소. 먼 길을 떠나는 용기도 중요하지만, 떠나지 않고 끝까지 지켜내는 것은 더 위대한 일이었소.”
사람들은 조용해졌습니다. 누구도 떠올리지 못했던 기적이 바로 곁에서 매일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깨달은 거지요.
그녀는 먼 길을 떠나지 않았으나, 누구보다 깊고 먼 여정을 걸어왔습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생명을 보듬은 손길은 마을을 지탱하는 뿌리처럼 단단하게 자리 잡았습니다.
어느 저녁, 아버지는 딸의 손을 잡고 창밖을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네가 날 위해 쑤어준 미음 한 그릇, 그게 내게는 하늘에서 내린 약이었단다. 네 손길이 닿을 때마다, 나는 다시 태어나는 기분이었어.”
그녀는 말없이 미소 지었습니다. 기적을 찾으려 떠나는 사람도 있고, 기적을 손끝으로 만들어내는 사람도 있는거지요.
효자네 큰아들은 세상 끝까지 다녀와 반짝이는 보석과 명약을 가져왔습니다. 그러나 효녀네 큰딸은 떠나지 않은 자리에서, 마음 깊은 곳에 숨겨진 빛을 꺼내 마을에 남겼습니다. 그 빛은 눈에 보이지 않았으나, 사람들의 가슴에 스며들어 차가운 밤을 따뜻하게 데웠습니다.
떠남으로 얻는 찬란함은 순간의 불꽃일 뿐이지만, 남음으로 지켜낸 사랑은 흐르는 강물처럼 잔잔하면서도 깊다는 것을 사람들은 깨달았습니다.
그녀의 이야기는 마을을 넘어 바람을 타고 먼 곳으로 흘러갔습니다. 사람들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습니다.
“진정한 기적은 하늘 저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곁에서 묵묵히 빛나는 손길 속에 있더라.”
그렇게 효녀네 큰딸의 삶은 전설이 되었고, 세월을 타고 흐르며 사람들의 마음속 깊은 곳에 뿌리를 내렸습니다. 그녀는 떠나지 않음으로써, 떠남보다 더 큰 것을 남겼습니다. 그것은 사랑의 본질에 대한 조용한 증언이었고, 인간이 존재하는 이유에 대한 은밀한 답변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