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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암록 61칙 풍혈(風穴)화상의 한 티끌(一塵)
마음 한티끌로 지옥도 만들고 천당도 만들어
{벽암록} 61칙은 풍혈화상이 한 티끌을 세운 법문을 다음과 같이 수록하고 있다.
“풍혈화상이 대중에게 법문을 제시하였다. '만약 한 티끌을 세우면 나라가 흥성하고, 한 티끌을 세우지 않으면 나라가 멸망한다.' 설두화상이 주장자를 들고서 말했다. '함께 생사(生死)를 함께 할 납승이 있는가?'”
擧. 風穴垂語云, 若立一塵, 家國興盛, 不立一塵, 家國喪亡.(雪竇拈杖云, 還有同生同死底衲僧.)
욕심 한 티끌 세우면 번뇌 일어나
마음을 비우면 근심걱정도 사라져
풍혈화상은 임제 문하의 제4세로서 남원혜옹(南院慧)의 법을 계승한 연소(延沼. 896~973)선사인데, 여주 풍혈산에서 교화를 펼쳤기 때문에 풍혈화상이라고 불렀다. 그의 전기는 {전등록} 13권과 {광등록} 15권, {오등회원} 11권 등에 전하고 있고, {벽암록} 제38칙 '풍혈화상의 철우(鐵牛)'에 등장한 바가 있다. 본칙의 공안은 {광등록} 제15권 풍혈전에 다음과 같이 전한다. "풍혈선사가 상당법문했다. '만약 한 티끌을 세우면 나라가 흥성하지만 농부는 눈살을 찌푸리고(蹙), 한 티끌을 세우지 않으면 나라가 멸망하지만 백성은 무심하여 편안(安貼)하다'" 풍혈화상의 상당법문은 역설적인 입장에서 설법한 것인데, 설두중현선사가 취사선택하여 긴요한 문제만을 제시하여 수행자들이 이 공안을 통해 불법의 대의를 체득하도록 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상당설법으로 설한 수어(垂語)를 수시(垂示), 수계(垂誡), 수훈(垂訓)이라고도 하는데, 안목이 있는 선승이 학인들을 위하여 불법을 교시하는 말씀을 내린 것이다. 따라서 수시의 법문에는 선문답이 아니기 때문에 스승과 학인과의 빈주(賓主) 문답이 없고 각자가 주인이 되어야 한다.
풍혈화상이 어느 날 대중을 위한 법문으로 "만약 한 티끌을 세우면 나라가 흥성하고, 한 티끌을 세우지 않으면 나라가 멸망한다"라고 설했다. 한 티끌은 일진(一塵)으로 미세한 먼지를 말한다. {벽암록} 19칙 구지화상의 한 손가락을 세우는 법문에 "한 티끌(一塵)을 들면 대지가 수용하고, 한 꽃(一花)이 피면 세계가 흥기한다"라는 말은 화엄철학의 '법성게'에서 설하는 "한 미세한 티끌에 시방세계를 포함한다(一微塵中含十方)"는 상즉상입(相卽相入)의 도리를 설한 것이다. 풍혈화상은 한 티끌이 일어나는 것은 국가의 흥망성쇠와 같다고 주장한 것이다.
즉 국가에 한 사람의 훌륭한 인재나 영웅호걸이 배출하면 도탄에 빠진 인민의 고통을 구제하고 국가가 흥융한 사례는 역사를 통해서 많이 볼 수 있다. 풍혈화상의 설법은 이러한 국가의 문제를 화두로 제시한 것이 아니라, 국가의 흥망성쇠를 비유하여 선의 정신을 설하고 있다. 즉 마음에 미세한 번뇌망념이 일어나면 선악(善惡)과 범성(凡聖)의 차별심이 일어나게 되고, 지옥이 건립되고 천당도 건설된다. 한 생각의 번뇌망념에는 부처도 있고, 중생도 있으며, 인간세계나 아귀의 세계같이 육도의 윤회세계도 만들어 진다. 무명의 한 생각이 팔만사천의 번뇌망념으로 미친 듯이 번창하는 모습을 국가가 흥성한다고 표현한 것이다.
원오는 "나는 법왕이 되어 법에 자유자재하다. 꽃도 수북하고, 비단도 수북하다"라고 착어하고 있다. 풍혈화상이 한 티끌(一塵)을 건립한 것처럼, 국가가 흥성하거나 멸망하거나 그것은 법왕인 풍혈화상의 자유다. 풍혈뿐만 아니라 누구라도 한 생각의 번뇌망념이 일어나면 번뇌의 마음가짐과 마음먹기에 따라 지옥도 만들고 극락도 건립할 수다 있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풍혈화상의 법문은 일체를 놓아 버린 방행문(放行門)의 교화방법을 제시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한 티끌을 세워 국가흥융을 이루는 것에 주안점을 둔 것이 아니라 '한 티끌을 세우지 않으면 국가가 망한다'는 전연 반대의 입장을 제시한 파주문(把住門)에서 선의 실천정신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천차만별의 일체 경계를 철저하게 소탕하고 인정하지 않는 불심의 본체에서 절대평등의 세계를 제시한 것이다.
즉하나의 미세한 번뇌망념도 일어나지 않으면, 마음속에 어떠한 경계도 없다. 부처도 없고 중생도 없으며, 황제도 서민 농부도, 범부나 성인, 고락(苦樂), 미오(迷悟), 선악(善惡), 미추(美醜) 등의 일체 차별경계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화엄오교장}에 "한 생각의 번뇌망념이 일어나지 않으면 부처(一念不生名爲佛)"라고 한 그 경지이다. 원오는 "자취를 쓸어 없앤다"라고 착어하고 있는 것처럼, 번뇌망념의 흔적과 자취까지 완전히 없애버린 경지이다. 나라가 멸망한다는 '상망(喪亡)'은 자취나 종적도 없어진 것을 표현한 말이다. 번뇌망념이 없는 깨달음의 자취까지 텅 비워버린 경지이다. 원오는 "눈동자를 잃고 코(鼻孔)의 생명도 잃었다"라고 착어하고 있다. 천차만별의 차별경계를 보는 눈도 상실해버리고, 냄새를 맡는 코도 기능을 잃고, 소리를 듣는 귀도, 맛을 보는 혀도, 주관의 마음도 객관의 대상인 사물도 일체 모두를 멸각했다는 의미이다.
하나의 미세한 번뇌망념도 없어진 경지는 어떻게 되는가? 원오는 "일체처가 광명(光明)"이라고 착어하고 있다. 근원적인 본래심(本地)에서 풍광(風光)이 일어나고, 대도의 광명(光明)이 현성한다는 의미이다. 완전한 건강은 약이나 치료의 문제는 물론, 병이 다 완치되었다는 의식까지 없어지고 무심한 경지에서 일상생활을 하는 것이다. 국가의 흥망성쇠를 말한다는 것은 사실 국가의 비상사태인 것이다. 국민이 불안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진정한 태평 시절은 원오가 "국가를 언급해서 무엇하려고?"라고 착어하고 있는 것처럼, 국가라고 하는 말도 의식도 완전히 없어진 경지이다. {광등록} 풍혈의 설법에 "한 티끌을 세우면 나라가 흥성하지만 농부는 눈살을 찌푸리고, 한 티끌을 세우지 않으면 나라가 멸망하지만 백성은 무심하여 편안하다"라는 법문을 음미할 필요가 있다. 요순황제의 시대처럼, "해가 뜨면 들에 나가 일을 하고, 해가 지면 집에 와서 쉰다. 목마르면 우물 파서 물을 마시고, 밭을 갈고 씨 뿌려 곡식을 만들어 먹는다. 황제의 권력이 나에게 아무 소용없다"라고 노래한 것과 같다. 원오는 '수시'에 "성왕이 홀로 왕궁(中)에서 천하를 다스리는 일"로 표현했다. 풍혈화상의 선풍은 임제의 가풍을 그대로 계승한 것으로, 지금 여기 자기 자신의 본분사의 일을 무심의 경지에서 살고 있도록 제시한 법문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뒤에 설두화상은 여러 사람들에게 주장자를 들어 보이며 '이 주장자와 함께 생사를 함께할 사람이 있는가?'라고 말했다. 설두가 제시한 주장자는 자기 자신이며, 온 천지와 우주와 하나인 것이다. 따라서 이 법석의 납승과 대중, 설두나 풍혈, 뿐만 아니라 일체의 모두가 주장자와 함께 살고 함께 죽지 않는 자는 한 사람도 없다. 설두는 주장자를 가지고 풍혈화상의 한 티끌을 세우고 세우지 않는 입장, 흥성(興盛)과 상망(喪亡)의 두 가지 차별적인 입장을 지양하고 도리어 나와 함께 생사를 함께할 사람을 찾고 있다.
설두는 국가 흥성의 건립문(建立門)에서 중생교화의 입장으로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읊었다. "시골 늙은이가 설사 구겨진 이맛살을 펴지 않는다 해도" 국가를 발전시키고 문화시설과 국방예산을 완전하게 하기 위해서는 세금을 올리고 많은 법칙과 규제를 시행한다. 따라서 시골 농부는 눈살을 찌푸리게 된다는 말이다. 수행자들을 위해 많은 법문과 잔소리를 한다는 말이다. '국가의 웅대한 터전을 세우고자 하는데' 국가의 발전을 위한 국책사업을 펼치기 위해서는 농부의 빈축을 걱정해서는 안 된다. 풍혈화상이 중생을 위해 다양한 방편법문으로 대기대용을 펼친 것이라는 의미이다. "지모 있는 신하들과 용맹스러운 장수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설두의 주장자 법문을 읊은 것으로, 지금 국가 흥성과 국책사업에 천자를 보필할 신하처럼, 훌륭한 수행자는 있는가? "만 리에 맑은 바람이 부니 자연히 알게 되리라." 요즘 세상에는 좋은 납승이 없지만, 설두 주장자의 살아있는 법문을 멀리 청풍(淸風)은 알리라.
벽암록 62칙 운문화상과 하나의 보물(雲門一寶)
“우주 가운데 하나의 보물은 인간의 불성”
{벽암록} 제62칙은 운문화상이 대중에게 하나의 보물에 대하여 설한 법문을 다음과 같이 싣고 있다. 운문화상이 대중에게 설법하였다. "하늘과 땅 사이, 우주 가운데 하나의 보물이 있으니, 형산(形山)에 감추어져 있다. 등불(燈籠)을 들고서 불전(佛殿)을 향해 가고, 삼문(三門)을 들어서 등불(燈籠)위로 올려놓았다."
擧. 雲門示衆云, 乾坤之內, 宇宙之間, 中有一寶, 秘在形山. 拈燈籠向佛殿裏, 將三門來燈籠上.
'삼문을 등불위에 올려놓다'는
'크다 작다' 분별을 초월한 경지
본칙의 공안은 {운문광록} 중권의 법문(垂示 代語)에 보이며, {굉지송고} 92칙에도 인용하여 설하고 있다. 운문화상의 법문은 '평창'에도 언급한 것처럼, 승조(僧肇)의 저술로 알려진 {보장론(寶藏論)} '광조공유품(廣照空有品'의 한 절을 인용한 것이다.
원오는 '평창'에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승조법사는 서천 27조 반야다라 존자의 깊은 경지에까지 이르렀는데, 어느 날 난을 만나 사형을 당하게 되었을 대 7일간의 여가를 얻어 {보장론}을 저술하였다. 운문화상은 {보장론} 가운데 네 구절을 제시하여 설법하기를 '어째서 값으로 매길 수 없는 보물이 음계(陰界) 속에 숨겨져 있는가' 라고 묻고 있다. {보장론}의 내용은 존문의 말들과 일치되고 있다.”
승조법사는 구마라집 문하의 이해(理解)제일의 제자로서 {조론}과 {주유마힐경} 10권의 저술이 있다. {보장론}은 8세기 후반의 저술인데, 승조에 가탁한 작품이다. 운문화상이 인용한 {보장론}의 일절은 동산양개선사도 {조당집}제6권에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설법하고 있다. “'하늘과 땅 사이, 우주 가운데 하나의 보물이 있으니 육체(形山)에 감추어져 있다. 사물을 인식하는 신령스러운 광명은 안과 밖이 텅 비었네. 적막하여 그 본체를 볼 수 없고, 그 위치는 그윽하여 파악 할 수가 없다.' 단지 자기에게서 찾아야지 다른 물건을 빌려 찾으려 해서는 안 된다.”
“하늘과 땅 사이, 우주 가운데 하나의 보물이 있으니, 형산(形山)에 감추어져 있다.” '하늘과 땅(乾坤)'은 천지(天地)이며, 우주(宇宙)에 대하여 위는 천(天)이고 아래는 지(地)를 우(宇)라고 하고, 고왕금래(古往今來)를 주(宙)라고 하는 것처럼, 우(宇)는 공간, 주(宙)는 시간을 말한다. 즉 불교에서 말하는 시방이라는 무한의 공간과 삼세라는 무한의 시간이 전개하는 그 가운데 귀중한 하나의 보물이 있으니 형산(形山)에 감추어져 있다고 설한다. 여기서 말하는 형산(形山)은 인간의 육체를 말한다. 천지에 충만하고 있는 하나의 보물은 우주의 본체이며 진여, 혹은 법성(法性), 불성(佛性)이라고 한다. 광대무변한 진여 법성은 우리들 인간의 본심이며 본성인 것이고, 경전에서는 불성이라고 한다.
{전등록}6권에 마조선사가 혜해에게 "지금 나에게 질문한 것이 바로 그대의 보배(寶藏)"라고 설하고 있다. 즉 중생심은 윤회의 고통을 초래하는 업장을 만들지만, 불성의 지혜작용은 무진장한 보배이며 보물과 같이 값진 삶을 만드는 창조적인 것이다. {원각경}에도 불성의 지혜작용을 여의보주(如意寶珠), 마니보주에 비유하고 있으며, {법화경}에도 상투속의 보물(珠)로 비유하고 있다. {전등록} 18권에 현사는 "온 시방세계가 바로 하나의 밝은 구슬(一顆明珠)"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불성을 보물에 비유한 말은 {조당집} 5권에 운암선사가 "문으로 쫓아 들어온 것은 보배가 아니다"고 설하고 있다. 육근의 문으로 들어온 보배는 경전과 선승들의 설법을 통해서 들은 언어 문자의 법문을 말한다. 이러한 법문의 내용을 마음으로 깊이 사유하여 깨닫고, 언어 문자의 지식을 지혜로 전환시켜 자신의 무진장한 보배로 만들어야 한다.
자신의 살림살이(지혜)로 만들지 않으면 인연 따라 곧 문을 통해서 나가버리게 되고 만다. 참선수행은 지식으로 전해들은 경전의 말씀과 선승들의 법문을 깊이 사유하고 관찰하여 자신의 지혜로 만드는 수행인 것이다. 경전이나 어록의 법문 내용을 완전히 파악하지 못하면 문제의식이 남게 되며, 이 문제의식이 의심인 것이다. 간화선은 의심을 하는 것이 아니라 선문답을 깊이 사유하여 불법의 대의를 체득하고 반야의 지혜와 정법의 안목을 구족하는 수행이다.
원오는 "형산에 감추어져 있다."라는 말에 '찰(). 점(點)'이라고 착어하고 있다. 찰()은 정말 형산에 감추어져 있는가. 분명히 확인해 보자라는 말이고, 점(點)은 감추어져 있는 그 곳을 점검해 버린 것을 착어한 것이다. 그러나 운문화상은 원오의 착어보다도 더 강하게 점검하도록 "등불(燈籠)을 들고서 불전(佛殿)을 향해 가고, 삼문(三門)을 들어서 등불(燈籠)위로 올려놓았다"고 설하고 있다. 등불을 들고서 불전을 향해 간다고 하는 말은 하나의 보물이 형산에 감추어져 있다는 사실을 바꾸어서 말한 것이다. 하나의 보물이 형산에 있다고 말한 것은 상당히 신비적인 표현으로 들리지만 사량분별이 따른다. 그래서 운문은 무심한 등불을 무심한 불전에 봉납(奉納)한 것과 같은 것이라고 말하면 이상하게 생각 할 것도 없고, 사량 분별도 따르지 않고, 청정무애하고 자유자재한 경지를 설한 것이다. 즉 육체를 불전과 같이 보고, 등불이 불빛을 비추는 것과 같이 심성(心性)을 본다면 우주의 본질인 불법의 대의를 체득 할 수가 있다고 설한다.
'삼문(三門)을 등불(燈籠)위에 올려놓았다.'는 말은 무슨 말인가? 삼문(三門)은 사찰에 들어가는 산문(山門)으로 공(空), 무상(無相), 무원(無願) 또는 무작(無作)의 삼해탈문(三解脫門)을 말하는데, 그렇게 큰 삼문(三門)을 불전의 등불 위에 올려놓았다고 하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불전은 대(大), 등불은 소(小), 삼문(三門)은 대(大), 등불은 소(小)로서 대소의 차별을 초월한 경지에서 대소가 상즉상입(相卽相入)하여 원융무애한 불가사의 해탈의 경지를 구체적인 사물을 제시하여 설하고 있다. {유마경} 불가사의 해탈법문에 수미산이 겨자씨에 들어가고, 사해의 바닷물이 한 터럭 구멍에 들어간다고 설하고 있는 내용이다. {보장론}에서 이론적으로 설한 법문을 구체적인 사물인 삼문(三門)과 등불이 불전 가운데 수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하나의 보물인 불성이 육체 가운데 감추어져 있는 불가사의한 경지를 비유로 설한 것이다.
설두화상은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읊었다. “살펴보고, 살펴보라!” 설두는 무엇을 '살펴보라'고 하는가? 운문화상이 설법한 것처럼, 각자가 육체에 감추어져 있다고 하는 하나의 보물을 살펴보라고 한 것인가? 원오는 "높이 눈을 떠라"고 착어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 하나의 보물은 범부의 차원 낮은 눈으로는 볼 수 없기 때문에 정법의 안목을 갖춘 정문(頂門)의 눈으로 잘 살펴봐야 한다. 대소(大小), 범성(凡聖)의 차별의 눈과 사량분별하는 정식(情識)의 눈으로는 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옛 언덕에 어떤 사람이 낚싯대를 잡고 있는가?” 운문화상은 승조법사의 말을 낚시에 매달아 고기먹이로 하여 대중에게 시중법문의 낚싯대를 던지고 있다. 마치 태공망(太公望)이 강 언덕에서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는 것처럼, 운문화상도 선(禪)의 바다에서 불법의 대의를 체득한 큰 고기를 낚으려고 한 것이다. 원오가 '수시'에서 말한 것처럼, 옛 언덕(古岸)은 대소(大小)나 범성(凡聖)의 차별을 초월한 무심(본래심)의 경지에서 무연(無緣)의 자비심으로 청하지 않은 벗이 되어 무작(無作)의 묘용(妙用)으로 낚싯대를 던진 운문의 마음을 칭찬하고 있다. “구름은 뭉게뭉게. 물은 넘실넘실” 이 말은 옛 언덕(깨달음의 경지)을 읊은 것인데, 구름과 물과 같이 운문이 무심의 경지에서 무한한 자비심의 지혜작용(묘용)을 펼친 것이다. 또한 사람들 모두가 본지풍광(本地風光)이 무심의 경지에 작용하고 있음을 말한다. “밝은 달 갈대꽃을 그대야 스스로 살펴보라!” 달빛도 희고, 갈대꽃도 흰 색이지만, 잘 살펴보면 명월(明月)은 명월의 빛이 있고, 갈대꽃은 갈대꽃의 색이 있다. 형산(形山)과 하나의 보물, 육체와 마음, 등불과 산문이 같은 것 같지만 다른 정법의 안목을 구족해야 한다는 운문의 설법을 잘 파악해야 한다고 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