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광사(松廣寺)는 전북 완주군 소양면 대흥리, 종남산 아래 자리한 사찰이다. 승보사찰로 유명한 전북
순천의 송광사와 한자어까지 이름이 같아 여행자들에게 착각을 불러일으키키도 하는 절.
신라 경문왕 7년(867년) 보조국사에 의해 창건되었으며, 당시 이름은 백련사였다. 당시 백련사는 아주 규
모가 커서 일주문이 3km 밖에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황폐화되어 완전히 폐찰되었다가, 광해
군 때부터 중창을 시작했며 광해군 다음 임금인 인조 때 크게 중창되었다. 당시 병자호란으로 청나라에
끌려간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의 무사환국과 국난의 치유를 불력에 의지하고자 했다 한다. 절 이름이 이때
송광사로 바뀌었다.
이 송광사는 순천의 송광사보다 규모는 작지만 한적하고 아늑한 분위기의 사찰이다. 일주문부터 금강문,
천왕문이 차례로 나오고 종루 옆을 지나면 대웅전이 있으며, 대웅전 뒤로 나한전 등의 건물이 있다. 일주
문에서 대웅전까지는 건물들이 일 자로 배치되어 있는데, 이 공간이 자연스러워서 아주 편안하고 아늑하
다. 마치 우리의 전통 정원을 걷는 듯한 느낌을 준다.
송광사는 대웅전 안에 있는 소조삼존불좌상 (塑造三尊佛坐像, 보물 제1274호) 흙으로 빚은 삼존불로 가운
데 석가모니불과 왼쪽에 약사여래불, 오른쪽에 아미타여래불이 있다. 보물로 지정되었을 만큼 가치있는
불상이기도 하지만 그것보다 아미타여래좌상이 땀을 흘리는 것으로 더 유명하다. 대웅전의 아미타여래좌
상은 나라에 좋지 않은 일이 생길 때면 땀을 흘린다고 한다. 최근에서 IMF 사태가 있기 며칠 전인 1997년
12월에 땀을 흘렸다고 한다. 대웅전 옆에 땀 흘리는 아미타불의 사진을 붙여 놓았는데 사진으로는 잘 확
인이 되지 않는다.
또 대웅전의 천장에 그려진 불화, 주악비천도(奏樂飛天圖)도 유명한데, 이 불화는 2002년 월드컵과 2001
년 ‘전주세계소리축제’때 캐릭터 상품으 로 개발된다고 한다.
대웅전 앞의 종루로 특이한 형태의 건물로 전북 유형문화재 제3호로 지정된 건물이다. 이 건물은 일명 십
자각이라 불리는데, '十' 자 형태로 지어진 이층 누각이다. 현재는 이런 형태의 건물들이 꽤 있지만 중창
당시인 조선 중기 때는 아주 드문 형태의 건물이었던 모양이다.
송광사는 이외에도 벚꽃으로도 유명하다. 봄이면 송광사로 이어지는 진입로 약 2km 정도가 벚꽃으로 뒤덮
혀 꽃나들이를 나온 인근 지역 사람들로 붐비는 곳이다.
2009년 2월 25일 날씨는 맑고 따뜻한 이른 봄날 이었다. 전주 완주에 있는 송광사를 5년 만에 찾아 나섰다. 좀 일러 꽃을 볼 수 없지만 날이 더 따뜻해지면 환한 벚꽃이 송광사 들어서는 길목 약 1.5Km를 벚꽃 동굴로 만들어 놓는다. 벌써부터 계곡 천을 잘 다듬고 송광사 경내를 넓히는 공사와 연못지를 다듬는 공사가 한창 이었다. 일주문과 사천왕문 사이에 장승 둘 은 어쩜 그렇게도 환하게 웃으며 맞아주는지 나 또한 절로 함박 웃음을 웃게했다. 경내로 들어 설 때 마다 각 곳에 서 있는 부처상들은 입이 귀밑까지 벌리고 껄껄 웃는 모습으로 서 있어 보는 이로부터 행복하게 했다. 지금 생각해도 웃는 모습이 너무 행복했다.
송광사소조사천왕상(完州松廣寺塑造四天王像) 보물 제 1255호
전북 완주군 소양면 대흥리 569 송광사. 조선시대의 것으로 1997년 6월 12일 보물로 지정되었다.
사천왕은 갑옷을 입고 위엄이 충만한 무인상을 하고, 동·서·남·북의 사천국(四天國)을 다스리는데, 우리나라에서는 통일신라 초기부터 나타나기 시작하여 조선시대에는 사찰입구에 사천왕문을 세워 모시고 있다. 대웅전을 향하여 오른쪽에는 동방 지국천왕(持國天王)과 북방 다문천왕(多聞天王)이, 왼쪽에는 남방 증장천왕(增長天王)과 서방 광목천왕(廣目天王)이 위치하고 있다.
송광사의 동방 지국천왕상은 오른쪽 팔꿈치를 높이 쳐들어 칼을 잡고, 왼손은 엄지와 검지를 길게 펴서 칼끝을 잡으려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왼쪽다리 옆의 악귀는 상의를 벗고 오른쪽 어깨로부터 굵은 끈을 왼쪽 옆구리에 걸쳤으며 바지를 입고 있다.
북방 다문천왕상은 양손으로 비파를 들고 있으며 지상에서 약간 들어올린 왼쪽다리를 악귀가 오른손으로 받쳐들고 있는 형상을 취하고 있다. 악귀는 상투 장식에 눈이 심하게 튀어 나오고 주먹코에 광대뼈가 튀어나와 입체감을 나타낸다.
남방 증장천왕상은 왼손에는 보주를 잡고 오른손으로 용을 움켜쥐고 있는데, 용은 입을 벌리고 천왕상의 얼굴을 향해 치솟고 있으며 꼬리는 팔뚝을 한번 휘감으며 올라가고 있다. 악귀는 꽃장식이 달린 모자를 쓰고 있는데, 발등의 근육과 발톱까지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다.
서방 광목천왕상은 오른손을 들어 깃발을 잡고 있는데 깃발은 뒤로 휘어졌다. 왼팔은 거의 어깨까지 올려 손바닥 위에 보탑을 올려놓았다. 다리 아래의 악귀는 측면을 향하고 있는 다른 악귀에 비해 정면을 향하고 있는 점이 다르다.
서방 광목천왕상 왼쪽 머리끝 뒷면에는 조선 인조 27년(1649)에 조성된 것을 알 수 있는 글이 있으며, 왼손에 얹어 놓은 보탑 밑면에는 정조 10년(1786)에 새로이 보탑을 만들어 안치하였음을 알려 주는 기록이 있다.
완주송광사대웅전 (完州松廣寺大雄殿) 보물 제 1243호
전북 완주군 소양면 대흥리 569에 자리한 송광사는 조선시대의 것으로 보며, 1996년 5월 29일 보물로 지정되었다.
송광사는 통일신라 경문왕 7년(867)에 도의가 처음으로 세운 절이다.
그 후 폐허가 되어가던 것을 고려 중기의 고승 보조국사가 제자를 시켜서 그 자리에 절을 지으려고 했지만, 오랫동안 짓지 못하다가 광해군 14년(1622) 응호, 승명, 운정, 덕림, 득순, 홍신 등이 지었다고 한다. 대웅전은 절의 중심이 되는 건물로, 기록에 따르면 조선 인조 14년(1636)에 벽암국사가 다시 짓고, 철종 8년(1857)에 제봉선사가 한 번의 공사를 더하여 완성하였다고 한다.
앞면 5칸·옆면 3칸 규모에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대웅전·의창군서’라고 쓰인 현판도 있는데, 의창군은 선조의 8번째 아들이며 광해군의 동생이다. 인조 14년(1636)에 세운 송광사개창비의 글도 의창군이 썼다 한다.
건물 안쪽에는 석가여래를 중심으로 좌우에 아미타여래와 약사여래를 함께 모셔 놓았다.
송광사소조삼불좌상및복장유물(完州松廣寺塑造三佛坐像및腹藏遺物) 보물 제 1274호
1997년 8월 8일 보물로 지정되었다. 신라 경문왕 7년(862) 도의선사가 창건한 송광사에 모셔져 있는 이 삼불좌상은 본존불인 석가불을 중앙에 안치하고, 오른쪽에는 아미타불, 왼쪽에 약사불을 배치하고 있다.
무량사 소조아미타불상(5.4m)과 함께 가장 거대한 소조불상(5m)으로, 신체 각 부분이 비교적 조화를 잘 이루고 있는 작품이다. 장중하고 원만한 얼굴과 두껍게 처리한 옷은 당당한 불상양식에 걸맞는 표현기법을 보여준다.
본존불에서는 삼불의 조성기와『묘법연화경』을 비롯한 불경류, 후령통(喉鈴筒)등 다수의 복장품이 발견되었다.『조성기』에 의하면 숭정 14년(인조 5년, 1641) 6월 29일 임금과 왕비의 만수무강을 빌고 병자호란으로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가 있던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의 조속한 환국을 기원하면서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명나라와 청나라의 연호를 함께 사용하고 있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당시의 극심한 혼란기를 극복하기 위한 국난극복의 의지와 역사의식의 반영과 함께 당시의 문화적 역량을 최대한 발휘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이 불상은 만든 연대가 확실하고 역사 의식이 반영된 작품이라는 점에서 귀중한 자료로, 불상과 함께 복장유물 12종 중 불상조성기 3점과 후령통 3점이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송광사종루 (完州松廣寺鍾樓)보물 제1244호
조선시대의 것으로 1996년 5월 29일 보물로 지정되었다.
종을 달아 놓은 종루는 십자각을 가리키는 말이다. 십자각은 열 십(十)자 모양을 하는 2층형 누각이다. 종이 걸려 있는 중앙칸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에 각각 1칸씩 덧붙여 이루는 모양인데, 지붕 역시 중앙에서 모아지는 화려한 모습을 하고 있다.
가운데 칸에는 종을 두고 목어·북·운판은 돌출된 칸에 각각 보관되어 있다. 마루 밑의 기둥들은 원형기둥과 네모기둥이 섞여 있으며, 위에 기둥들은 모두 원형기둥을 세워 놓았다.
조선시대의 유일한 열 십(十)자형 2층 누각으로 그 가치가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