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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선조들은 홀딱 벗고 농사를 짓곤 했다?? - 정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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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는 정월 대보름날(1월 15일) 총각들이 벌거벗고 농사를 지었던 나경(裸耕)이란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나경을 통해 우리 조상들은 한 해 농사의 풍년을 기원했다고 하는데~ 과연 사실일까? |
앞면에는 머리 위에 긴 깃털 같은 것을 꽂은 채 따비로 밭을 일구는 남자와 괭이를 치켜든 인물이 있고 그 옆에는 항아리에 무엇인가를 담고 있는 인물이 새겨져 있다. 뒷면에는 좌우에 두 갈래로 갈라진 나무 끝에 새가 한 마리씩 앉아 있는 모습이 표현되어 있어 우리 민속에서 보이는 솟대[神竿] 신앙을 연상케 한다. 청동기시대의 농경모습과 농경의례의 실상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며 당시의 회화 수준을 짐작케 해주는 귀중한 유물이다. 대전에서 출토되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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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무 국립중앙박물관장은 한국청동기시대가 주전공인 고고학자. 이런 그가 품고 있는 오랜 의문 중 하나가 농경문(農耕文) 청동기다. 농경문 청동기가 무엇이기에?
문제의 청동기는 1970년대 초반 대전의 한 골동품상에게서 구입해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것으로 한국 청동기시대 유물로는 아주 특이하게 당시의 농경 모습을 음각 문양으로 새기고 있다.
출토지가 대전 괴정동(槐亭洞)으로 전하는 이 농경문 청동기(폭 12.8㎝)는 앞뒷면에 모두 문양이 있다. 그 중 한쪽 면에는 좌우에 각각 두 갈래로 갈라진 나무 끝에 새가 한 마리씩 앉아 있는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현재도 일부 지방에서 볼 수 있는 솟대와 대단히 닮아 있다. 이랑이 난 사각형 밭도 확연히 묘사돼 있다.
더욱 흥미로운 곳은 그 반대편. 왼쪽 면에는 항아리에 무언가를 담고 있는 여성을 형상화하고 있고, 그 반대편에는 머리 위에 긴 깃털 같은 물체를 꽂은 채 따비로 밭을 일구는 남자와 괭이를 든 인물이 표현돼 있다.
왜 이 그림이 흥미롭다고 하는가? 따비로 밭을 가는 남자가 벌거벗고 있기 때문이다. 나체임은 어찌 아는가? 두 가랑이 사이로 성기(性器)가 너무 뚜렷하기 때문이다.
기원전 3-4세기쯤 제작됐다고 추정되는 이 유물에 대해 1992년 국립중앙박물관 주최 '한국의 청동기문화' 특별전 도록은 "생산의 풍요를 비는 주술적 의미가 있는 의기(儀器)로 판단된다"고 하고 있다. 제사용품일 가능성이 있다는 의미다.
당시 이 특별전을 주도적으로 준비한 이가 국립중앙박물관 고고부장으로 있던 이건무 현 관장이다. 따라서 풍요를 비는 주술적 의기로 판단된다는 언급은 바로 이 관장 자신의 생각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관장에게 여전히 체증처럼 남아 있는 문제는 그렇다고 확신하거나 확증할 만한 증거를 확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 그를 요즘 '난데없이' 흥분케 하는 일이 일어났다.
국립민속박물관(관장 김홍남)이 조선전기 각종 문집을 추려내 펴낸 자료집인 '한국세시풍속자료집성'에서 '나경'(裸耕)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저명한 의사 허준을 발탁한 주인공으로서, 조선중기 때 지식인인 유희춘(柳希春.1513-1577)의 문집 '미암선생집'(眉巖先生集)에는 "먼 변방 비루한 풍속"이라고 비난하고 퍼붓고 있는 '입춘 나경에 대한 논의'(立春裸耕議)라는 글이 그것이다.
미암은 이 글에서 입춘날에 함경도라든가 평안도와 같은 북쪽 지방에 행해지던 농경 습속 중 하나로 미암은 나경(裸耕), 즉, 벌거벗고 밭을 가는 세시 행사를 소개하면서 이런 야만적인 습속은 없애야 할 것을 강하게 주장하고 있다.
미암의 증언에 의하면 "매년 입춘 아침에 토관(土官. 지방관아)에 (사람들을) 모이게 하고는 관문(官門) 길 위에서 나무로 만든 소(木牛)를 몰아 밭을 갈고 씨를 뿌려 심고 거두는 형태에 따라 해를 점치고 곡식의 풍년을 기원한다."
"이 때 밭을 가는 자와 씨를 뿌리는 자는 반드시 옷을 벗게 한다"고 하면서 미암은 그런 행위가 "노인들이 서로 전하기를 추위에 견디는 씩씩함을 보고 세난(歲暖)의 상서로움을 이룬다고 한다"고 덧붙이고 있다.
사실 함경도 일대에 비교적 최근세에 이르기까지도 이런 나경 습속이 있었음은 조선일보 논설고문 이규태 씨 등에 의해 민속학계에서는 비교적 널리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런 습속을 미처 접하지 못했던 고고학자 이건무 관장은 미암집을 통해 공개된 '벌거벗고 쟁기질 하는' 이 나경 습속을 최근에 대하고는 그동안 농경문 청동기에 대해 품고 있었던 거의 모든 의문을 해결한 듯한 기분이다.
"물론 기원전 수백년 전 농경문 청동기와 미암집은 시대적인 격차가 너무 크다는 점에서 곧바로 (둘을) 연결시키기에는 곤란한 점이 있겠으나, 다른 무엇보다 남자가 벌거벗고 따비(쟁기)로 밭을 갈면서 그 해 풍년을 빈다는 점은 같은 맥락에서 설명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이 관장은 덧붙였다.
한편 갑골문 전공자인 상명대 김경일 교수('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의 저자)는 1999년 출간한 '제대로 배우는 한자교실'(바다출판사)에서 밭을 간다는 뜻을 지니고 있는 '籍'(竹이 없는 글자)이라는 글자의 갑골문자가 이 농경문 청동기에 등장하는 벌거벗은 남자의 따비질 모습과 똑같다는 파격적인 주장을 제출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