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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장 † (C-1) 자아의 파쇄와 생명의 공급/ 어떻게 우리는 우리의 영을 사용할 수 있는가?
1. 하나님을 섬기는 사역자는 반드시 영을 사용할 줄 알아야 한다.
우리가 보통 말하는 “느낌”이란 감정의 느낌을 말한다. 그러나 내가 지금부터 표현하는 “느낌을 사용한다”라는 말은 감정의 느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영의 느낌을 가리켜 말하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2장에서 말하는 사람(사도 바울)은 그 사람의 영으로 만사(萬事)를 알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영적인 사람이란 바로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정을 아는 사람이다. 우리 각 사람에게는 다 영(靈, spirit)이 있지만, 어떤 원인에서인지 많은 사람들의 영은 사용할 수가 없고 그들의 영은 전혀 유용하지 못하다. 우리 믿는 이의 대부분의 영은 유용하지 않다. 심지어 영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그렇다면 당신은 무엇을 사용하는가? 당신은 구변을 사용하는가? 당신은 두뇌를 사용하는가? 당신은 총명을 사용하는가? 믿는 이들에게, 특히 사역자(성령의 통로가 된 사람)에게 영을 사용한다는 것은 기본적이다. 나의 경험으로 지금까지 사역자 중에서 영을 사용하는 분을 딱 한 분을 만난 적이 있다.
그분은 이제 82세를 넘긴 대규모 장애자복지단체를 운영하시는 O신부님이시다. 이분에 대하여는 후에 다시 언급하겠지만, 나에게 영을 사용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일깨워주신 분이시다. 유일한 생존하시는 나의 영적 스승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다. 언제나 강조해 왔지만, 내가 이야기하는 사역자란 영을 사용하는 믿는 이를 말한다.
“사역자”란 신학대학 졸업장에 의한 소위 목회자나 신부를 의미하지 않는다. 우리가 주님을 섬기고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서는 생각과 감정과 의지, 곧 혼을 상관하지 않고 영을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영을 사용하려면 영의 훈련이 필요하다.
계2:6절에 “오직 네게 이것이 있으니 네가 니골라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 나도 이것을 미워하노라.”라고 말한다. “니골라”당이란 평신도들 보다 자신들이 더 높다고 여기는 한 무리의 사람들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니골라당은 천주교와 개신교가 채택하여 세운 목회자나 신부 계급을 말할 것이다. 이들은 신학교 졸업장과 교리에 의한 안수로 성령으로 하나님의 생명을 공급하는 사역자를 대체해 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사역자란 전 존재의 변화를 체험해야 하며, 당신이 배운 조직신학과 교리가 무너져야 한다. 우리는 반드시 영을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생명을 공급하고 살아있는 복음이 전파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사역자의 탄생을 가장 기뻐하신다. 그래야만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가 건축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영적인 사람이란 무엇인가? 바로 영을 사용하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2. 어떻게 우리의 영을 사용할 수 있는가?
엡6:10절은 “종말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라고 말한다. 에베소서 6장에서 말하는 “강건” “강함”이라는 것은 능력이 임하기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영이 강해져서 우리 안의 능력이 나오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곧 우리의 영이 강건해지지 않으면 우리 안의 능력, 곧 성령이 흘러나올 수 없는 것이다.
우리가 어떻게 해야 영을 사용할 수 있는가? 이것은 너무나 중요한 주제이다. 롬8:14절은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영을 사용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다.
그러나 우리의 혼(=혼=혼생명=자아=겉사람), 곧 우리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가 파쇄된 후에야 우리 속에 있는 영이 흘러나올 수 있고 비로소 우리의 영을 사용할 수 있다.
성경은 사람을 속사람(영)과 겉사람(혼)으로 나눈다. 우리에게는 다른 한 인격, 곧 속사람이 있는데, 이는 우리가 거듭날 때 하나님이 우리 안에 한 사람을 새롭게 태어나게 하신 것이다. 우리 속사람은 겉사람에 싸여 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우리를 만날 때는 우리의 겉사람을 만지거나 혹은 우리의 속사람을 만지게 되어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손을 잡아끄는 것과 장갑을 잡아끄는 것의 차이가 바로 그것이다. 내가 어떤 사람을 만날 때, 내가 만지게 되는 것은 그 사람의 영, 곧 그의 속사람일 수도 있다. 그러나 또 어떤 다른 사람을 만날 때, 내가 만지게 되는 것은 그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 곧 그의 겉사람(=혼=혼생명=자아)뿐이다.
왜냐하면 그 사람의 영은 그의 고집스러운 생각과 병든 감정과 그의 아스팔트처럼 굳고 견고한 의지 속에 완전히 쌓여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마치 우리가 다른 사람의 손을 잡아끌 때, 상대방의 손을 만지지 못하고, 다만 장갑만을 만지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에게는 속사람과 겉사람의 분별이 없다.
속사람(영)과 겉사람(혼)은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 아니라, 속사람은 또 다른 한 사람, 곧 겉사람 안에 싸여 있는 인격이다. 오늘날 우리 믿는 이들에게 절박한 필요는 바로 우리 속사람이 겉사람의 방해를 뚫고, 곧 우리의 영(성령과 연합된 사람의 영)이 나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렇게 할 때 사람들은 생명의 공급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속사람(영)은 어떻게 나올 수 있는가? 우리의 겉사람(혼)과 속사람(영)이 어떻게 분리되는가? 우리의 속사람(영)이 어떻게 겉사람(혼)의 둘러쌈을 당하지 않을 수 있는가? 요한복음은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만일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말한다.
주님을 따르는 우리는 혼생명을 잃어야만, 하나님의 생명을 흐르게 할 수 있다. 우리의 혼생명이 죽는다면, 비로소 우리의 속사람(영) 안에 실재하는 성령, 곧 하나님의 생명을 공급할 수 있다(마16:25). 그렇다면 무엇을 가리켜 생명이 나타나게 한다는 것인가? 그것은 우리의 겉에 있는 껍질이 깨뜨려져서 속에 있는 생명이 나올 수 있는 것을 말한다.
오늘날 수없이 많은 그리스도인이 있지만, 이들은 새로운 생명을 낳을 수 없는 사람들(생산할 수 없는)이다. 곧 생명을 사람들에게 공급할 수 없는 사람들이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교회가 패망하는 가장 큰 이유이다. 오직 겉사람이 파쇄된 사람(자아파쇄)에게서만이 속사람이 나올 수 있다.
유명 신학교를 나오고, 외국의 이름있는 대학에 유학하고 왔다고 해서, 그 흔한 박사학위를 가졌다고 해서 신학자가 되고 성직자나 목회자가 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늘 강조하지만 속사람(영)을 해방할 수 있는 사람만이 사역자가 될 수 있다. 지난 수십 년간 한국교회는 이 진리와 상식을 포기했으므로 망해버렸다.
이 진리를 깨달은 후 나는 목사 안수받기를 포기하였다. 그러므로 나의 글에서는 언제나 ‘성직자’ ‘목회자’ 대신에 ‘사역자’라는 표현을 즐겨 쓰고 있다. 우리의 겉사람이 깨뜨려지지 않고, 하나의 출로를 얻지 못한다면, 우리의 영이 나올 길이 없을 뿐만 아니라 우리 또는 다른 사람의 영을 만질 길이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란 믿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정확할 리가 없다. 다시 말하면 당신이 좋다고 말하는 사람도 반드시 좋은 사람이 아닐 수 있다.
또한 당신이 나쁘다고 말하는 사람도 반드시 나쁜 사람이 아닐 수 있다. 왜냐하면 당신의 영이 죽어 있기 때문에 그 사람의 영적 상태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겉사람이 파쇄되지 않은 것은 전기가 통하지 않은 것과 같다.
동선(銅線)이 고무로 완전히 싸여져 있을 때는 아무리 해도 불이 들어오지 않는다. 곧 겉사람은 속에 있는 것을 만질 방법을 없게 한다. 마치 장갑을 꼈을 때는 이리 끌고 저리 끌어도 장갑밖에 끌 수 없는 것과 같다.
만일 당신이 하나님 앞에서 다룸(죽음과 같은 고난과 고통)을 받은 적이 있고, 그리고 겉사람(자아)이 파쇄 되었다면, 당신의 속생명은 흘러나올 수 있으며, 당신은 많은 영적인 열매를 맺을 수 있다.
3. 자아의 파쇄란 무엇인가?
겉사람의 파쇄란 무엇인가? 겉사람이란 자아(自我)를 가리킨다. 혼은 생각과 감정과 의지로 구성된다(살전5:23). 이 혼을 엑기스한 것이 자아이다. 자아란 그 사람의 마지막 한 단위의 인격, 곧 그 사람 자체를 의미한다. 생각은 그 사람의 지적인 축적과 성향, 곧 지성을 말하며 그 사람만의 독특한 주장이나 고집을 가지게 한다.
생각의 마지막 단위가 자아(=자신=자기)이다. 감정은 혼에서 가장 큰 영역을 차지하고 있는 부분이며 사람마다 성장 과정이나 배경을 통하여 독특한 감성이 형성된다. 특히 어린 시절의 사랑의 결핍과 상처받은 경험은 사람의 무의식에 저장되어 고착화되어 그의 생각과 의지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치게 된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는 그 사람의 인격, 기질, 습관, 성격, 성질로 나타나 한 사람의 생애를 좌우하게 되는 것이다. 이 겉사람(혼)의 파쇄는 또한 십자가의 파쇄의 능력이라고 말할 수 있다. 십자가의 파쇄는 사람의 어떤 부분에 가해지는가? 십자가의 파쇄는 그 사람의 가장 강한 부분(고집스러운 부분)에서 시작한다.
당신의 가장 강한 그 부분에서 십자가는 당신을 잘라내기 시작한다. 반듯이 파쇄되어야만 하는 현재 그 사람을 지배하는 성격 또는 기질, 특히 어릴 때 사랑의 결핍으로부터의 깊은 상처가 무의식 안에 저장되어 비슷한 환경을 만날 때마다 마치 빙산의 일각처럼 어김없이 나타나 표현되는 심리적 상태를 말한다.
사람에게서 이러한 강한 부분이 한 번 파쇄 되고 깨뜨려지면, 우리는 즉시 어떤 사람의 영을 만질 수 있다. 예를 들면, 생각이 크고 감정이 냉철하고 의지가 강한 형제가 있다고 하자. 그러나 우리가 그를 만날 때 우리는 그의 생각이나 감정이나 의지를 만지지 못하고 그의 영을 만지게 된다. 왜냐하면 그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가 다 파쇄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 겉사람의 파쇄를 말하고 있다. 이것은 겉껍질을 벗겨내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겉껍질이 깨뜨려져서 그 흔적이 나타나는 것을 말한다. 만일 주님께서 우리 겉사람에 깨뜨려진 흔적을 내실 수 없다면, 우리에게는 진정한 영적인 길이 없게 된다. 어떤 사람이 영적인 모양을 가장하는 것으로는 절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진정한 겉사람(혼)의 파쇄가 있지 않으면 안 된다. 고린도후서 4장은 보배를 질그릇에 담는 것을 말한다. 그 질그릇은 깨뜨려서 속에 있는 보배가 나타나게 해야 한다. 오늘날 대부분의 우리 믿는 이의 문제는 앞의 예에서 장갑의 좋고 나쁨에 있지 않고 바로 장갑이 찢어졌는가에 있다.
많은 이들이 오랫동안 그리스도인이 되었지만 하나님이 치실 때(죽음보다 진한 고난), 그것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으므로 하나님은 그들의 몸에서 출구를 얻으실 수 없다. 주님의 이 땅에서의 모든 역사는 바로 날마다 겉사람(=혼=혼생명=자아를 섞어 쓰는 것은 성경에 그렇게 섞어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을 깨뜨리는 것이다(계속).
할렐루야! 아멘!
첫댓글 자아파쇄를 통해서 영의 사람으로 하나님의 일을 이 땅에서 이루시게 하시옵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