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뿔싸, '취업'이란 게 이렇게 힘들 줄 몰랐다. 대학시절 내내 지하철 막차보다는 새벽 첫차를 타고 집에 들어가야 즐겁게 놀았다고 생각했던 나였다. 2008년 4학년에 올라가면서 친구들이 모두 '스펙(학력·학점·자격증을 합한 것을 이르는 말)', '스펙'을 외치는 것을 보고 나도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학점 4.3만점에 2.99점, 토익 990점 만점에 795점, 군대에서 따온 한자능력검정시험 2급, 방학 때 급하게 딴 컴퓨터 자격증, 월드비전 기아체험 등 봉사활동 40여 시간' 이게 내 '스펙'의 전부였다. 해외연수·교환학생 경험도 없고 그나마 내세울 수 있었던 것은 신방과 학생회장, 24살이란 젊음과 해병대 출신이란 자부심이었다. '아직 부족하지만 어리기 때문에 더 많이 배울 수 있고, 강인한 해병대 정신력으로 어떤 상황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이게 나를 설명해주는 전부였다. 과연 이런 스펙을 회사는 인정하고 뽑아줄까.
나는 3월부터 부지런히 취업정보를 모았다. 취업박람회·취업특강·기업설명회를 따라다니고, 취업스터디에도 가입해 기본상식·PT(프리젠테이션)면접·인성면접·영어면접을 연습했다. 하지만 취업스터디의 한 선배에게 해외연수한 경험에 토익 점수도 900점이지만 서류전형만 30여 군데나 떨어졌다는 얘기를 듣고 한숨부터 나왔다.
가을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서 K은행 필기시험을 보러 갔다. 세상에 은행에 가고 싶은 사람이 어찌 이리 많은지. 4시간에 걸친 시험은 피를 말리기에 충분했다. 논술·인성·적성으로 이뤄진 필기시험은 당시 이슈였던 리먼브러더스 사태 등 문제 두개를 내놓고 1시간 반 동안 적어내는 것이었다. 언어·한자·수리·물리 등 각종 상식 100문제도 풀라고 했다. 결과는 참담했다. 그래도 서류전형에 합격해 필기시험이라도 본 게 다행이었다. W은행, S캐피탈, H공업, S통신, K공사 등은 서류 전형조차 떨어졌다. 나름대로 세칭 명문대를 나왔다고 자부했는데…. 좌절감에 빠져본 게 난생 처음이었다.
한 중공업 회사에선 다행히 면접까지 올라갔다. 10명 중 1명을 뽑는다고 했다. 공교롭게도 10명 중 아는 선배가 5명이었다. 이들 쟁쟁한 선배들과 경쟁해야 한다니…. 1분간 각자 자기소개를 하라고 했다. 한 명은 영어로 자기소개를 하고는 재차 일본어로 해보라는 면접관의 말에 유창하게 일어로 말하는 것을 보고 감탄이 절로 쏟아졌다. 나와 친하게 지냈던 한 선배는 평소 내가 알던 사람인가 할 정도로 논리적으로 차분하게 말을 풀어냈다. 내가 그 면접에서 한 말은 "제가 입사하면 즐겁게 일 할 수 있습니다"가 전부였다. 면접관도 "면접 자리가 아니라 사석에서 형 동생하며 지냈으면 좋을 것"이라고 했다. 그 순간 나는 회사와 학교는 다르다는 걸 뼈저리게 느꼈다.
9전9패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더 이상 입사 원서를 쓰기 싫어졌다. 부모님도 함께 속 상해했고 주변에 잘나가는 자식을 둔 친구를 만나고 온 날이면 저녁 밥상자리가 편하지 않았다. 나도 신경질적으로 변해가기 시작했다. 아직 졸업도 안 하고 백수가 된 것도 아닌데 벌써 이렇게 되다니…. 남들처럼 학교를 더 다닐까 생각도 해봤지만 마음고생을 1년이나 더 할 생각을 하니 끔찍했다.
나는 도저히 남들과 똑같은 방식으로는 취업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꼭 하고 싶은 일'보다 '뽑히기 쉬운 일'을 택하기로 했다. 마케팅·전략·경영이 아니라 영업 쪽으로 입사원서를 넣기로 했다. 적성·전공 등을 살려 입맛에 맞는 일을 찾는 것은 배부른 사람이나 할 소리였다.
뜻밖의 기회가 왔다. 5주간 인턴했던 한 캐피탈사에서 합격이란 문자메시지를 보내왔다. 인턴 중에서 신입사원을 뽑겠다고 했는데 나에게 그런 영광이 왔다. 그 회사와 궁합이 잘 맞았던 덕분일까, 아니면 내가 달리 갈 데가 없다는 것을 회사에서 알아차린 걸까, '영업이 해보고 싶다'고 일관되게 답변했던 인성면접, 보디랭귀지를 더 많이 사용한 영어면접이었지만 회사는 내 손을 들어주었다.
아버지는 "자랑스럽다"며 100만원을 축하금으로 주셨고, 어머니는 '자식 잘 키워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회사에서 보낸 과일바구니에 감격해했다. 친척들은 골프부터 미리미리 배우라고 했다. 과거급제가 따로 없었다. 친구들만 봐도 5년 만에 졸업하고, 그렇게 어렵게 대학에 들어왔어도 취업이 보장되는 의학전문대학원, 약학전문대학원에 가려고 발버둥 치는 형편이니…. "언제부터 제 힘으로 벌어먹고 살기가 이렇게 어려워진 것일까."
입사 후 하루하루가 나를 기쁘게 했다. 무엇보다 여자친구에게 생전 처음 일인분에 3만5000원 하는 꽃등심을 사주던 날, 난 눈물이 핑 돌았다. 늘 김밥과 라면만 사주었는데, 월급의 위력을 실감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달콤함에 매료되고 노래방에서 선배들의 뽕짝 노래에 익숙해질 무렵, 고민이 시작됐다. 입사에만 눈이 멀어 그간 잊고 있었던 '하고 싶은 일'에 대한 욕구가 불쑥 튀어나왔다. 기존의 스펙에 '일년 동안 여의도에서 닦은 근무경험'을 더해 지금의 직장에 들어올 수 있었다. 회사에선 나 같은 '중고(中古) 신인'을 원했다고 한다. 아무리 좋은 스펙을 가졌다고 해도 신입사원은 6개월 이상을 재교육시켜야 하는 게 회사의 현실이다. 그래서 실무능력과 사회생활 에티켓을 배운 이들을 더 선호한다고 했다. 연봉이 줄고 또다시 새로운 환경 속에 던져졌지만, '일'에 자부심이 생긴 지금, 나는 새로운 인생을 꿈꾼다.
이건희 KB자산운용 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