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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주정씨를 통해 본 조선시대 사대부가의 존재 양상
2012년 12월 18일 11:00~18:00
한국학중앙연구원 강당 1층
[화환 기증자]
영일정씨 포은공파종약원 이사장 정춘영
해주정씨 대종친회 회장 정석준
해주정씨 부산지회장 정석근
해주정씨 대종친회 전남지회장 정병섭
신한은행 법조타운지점 지점장 곽의권
해주정씨 서울지회장 정상근
해주정씨 행촌공파 회장 정행섭
해주정씨 충의공파 회장 정부경
온 종합병원장 정근
해주정씨 경북지회장
서울법원청사 우체국장
전북지회장 정기문
[제1부 개회 및 기조강연]
사회: 김학수 (한국학중앙연구원 국학자료실장)
본 행사에 앞서 개막행사를 갖도록 하겠습니다.
(장서각에서 주무를 맡은 김학수 실장의 사회)
개회사
정정길 한국중앙연구원장께서 개회사가 있겠습니다.
정정길 (한국학중앙연구원장)
개회사
혹한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이 학술대회를 빛내주기 위해 우리 연구원을 찾아주신 모든 참석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이번 학술대회는 장서각에서 해주정씨 해평부원군 종가의 고문서를 수집하는데서 시작되었다고 들었습니다.
이 자리에 참석해 주신 정태수 차관님과 연구 자료를 제공해 주신 해주정씨 대종회 정석준 회장님, 정기두 부회장님과 해평부원군 종가에 먼저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금년 한 해 동안 각 분야의 전문 연구자들이 정력적으로 진행한 연구자 여러분들, 수고하셨습니다.
특히 기조 강연을 맡아 주신 이성무 교수님께 더욱 감사를 드립니다.
저는 이번 학술대회가 저희 연구원의 방향과 부합하는 면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은 지난 30여 년 동안 민족문화의 창조적 계승과 발전이라는 목표를 향해 정말 열심히 달려 왔습니다. 여기에 대해 굳이 일일이 말씀드리지 않아도 굵직굵직한 성과가 잘 보여준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제 좀 더 새롭고 참신한 주제를 개발할 필요도 있다. 이렇게 저는 보고 있습니다. 최근 한류가 붐입니다. 문화에서 뿐만 아니라 경제에 이르기까지 해외에서 한국을 바라보는 시각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여기에는 그야말로 탄탄한 문화적 저력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우리 연구원이 정말로 다시 한 번 우리 대한민국에 기여할 부분이 있는 것입니다. 한국학 연구 성과 전반에 대한 정밀한 분석을 바탕으로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바람직한 좌표를 묘색하는 것입니다.
지금의 한류를 조성하는데에 우리 연구원이 기여한 바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전국에 산재한 우리나라의 소중한 잠재적 문화자산인 고문서, 고서와 같은 역사적 기록물들을 발굴해 내고 이들을 다시 가공하여 학계에 보급해 왔던 것입니다.
이러한 성과는 대한민국의 문화적 저력을 강화하는데 보이지 않는 밑거름이 되었다고 믿습니다.
한국문화의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는 이 시점에서 우리 연구원, 특히 장서각의 새로운 좌표가 요구되고 있습니다. 어렵게만 느껴지는 이렇게 고문헌을 학술적 역량을 모아 보다 쉽고 재미있게 가공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국민들이 편하게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느끼게 하는 것도 그 방향일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우리의 문화 저력을 강화하는 것, 그것은 원전자료의 충실한 분석입니다. 이것을 위해 전국에 산재한 소중한 고문서, 고서 등을 이제 국가적 차원에서 발굴하고 연구하고 해야 합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우리의 문화적 내공이 쌓이게 될 것이고 이 한류라는 것도 새로운 에너지원을 얻게 되는 저력과 잠재력이 될 것입니다.
해주정씨 해평부원군 종가에서 저희 연구원에 연구를 의뢰한 것은 이러한 배경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소중한 500년의 역사를 담고 있는 고문서들을 제공해 주신 것 참으로 뜻 깊은 일입니다.
해주정씨 해평부원군 종가는 ‘조선시대의 명문가’입니다. 조선초기에는 효령대군을 사위로 맞이할 정도로 왕실과 가까운 가문이었습니다.
18세기까지 많은 훌륭한 관료를 배출하여 조선시대 양반사회의 전형을 보여 준다는 사실입니다.
모두 여덟 분이 각 분야에서 연구한 것을 이번에 발표하게 됩니다. 그 분야도 사회, 정치 뿐만 아니라 경제와 문학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구성해서, 학제간 연구와 분석이 되도록 잘 기획된 것 같습니다. 이번 발표가 최종 결과물이 아니고 아마 좀 더 보완해서 보다 충실한 연구 결과가 될 것이라 기대됩니다.
연구원은 자료의 발굴과 소개라는 기초를 탄탄히 하는 역할에도 충실해야 합니다.
더불어 이제는 자료에 대한 분석과 연구를 통해 국민들이 쉽게 소화하도록 할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또 바로바로 연구 자료로 이용될 수 있도록 이처럼 연구성과를 공개하여 다양한 학계의 학문적 자극을 유도하는 것이 중요한 일입니다.
해주정씨 해평부원군 종가에서 연구자료를 제공해 주시고, 또 연구도 의뢰해 주셔서 다시 한 번 고맙습니다. 이번 기회에 그간 연구원에서 생각하고 있던 연구 저변의 확대와 활용이라는 고민도 다시 한 번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넉넉지 못한 연구자원에도 불구하고 최선의 노력을 다해주신 여러 발표자 선생님들께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유익한 토론을 해 주실 토론자 여러분도 고맙습니다.
끝으로 연구를 준비하고 진행한 장서각 관장을 비롯한 관계자분들도 고생이 많았습니다. 유익한 학술발표회가 될 것이랄 기대하면서 인사를 대신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012년 12월 18일
한국학중앙연구원 원장 정정길
인사말
이종철 장서각 관장님의 인사말이 있겠습니다.
이종철 (장서각 관장)
[인사말]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장서각 학술대회에 왕림해 주신 내외 귀빈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무엇보다 이번 학술대회를 지원해 주신 해주정씨대종회 관계자 여러분을 비롯하여 종중 어르신 여러분께 먼저 감사의 말씀 드립니다. 그리고 이번 학술대회를 빛내주기 위해 어려운 걸음 해 주신 정태수 전교육부차관님께 감사의 말씀 드립니다.
올해 1월 해주정씨대종가에서 조선시대 500년 동안 축적된 고문서의 고서 약 1,400점을 장서각에 연구 의뢰하였습니다. 이를 계기로 원본자료를 활용한 연구가 본 궤도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저희 장서각에서는 이들 귀중한 사료를 토대로 대중적으로 쉽게 풀어쓴 도록 ‘명가의 고문서’를 발간함과 동시에 이번 학술대회를 기획했습니다.
해주정씨대종회에서 적극적으로 현지조사와 자료이용 편의를 제공해 주셔서 그 덕택으로 ‘명가의 고문서’가 무사히 간행되었습니다. 아울러 이번 학술대회를 위해 저희 장서각에서는 저희 연구원 명예교수이시자 회원이신 이성무 선생님을 비롯하여 사계의 학자 여덟분을 모셨습니다.
기조강연을 맡아 주신 이성무 선생님, 일곱분의 발표자와 토론자, 그리고 종합토론 사회를 맡아 주신 정만조 선생님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저희 장서각에서는 금년도 한 해 동안 집중적으로 해주정씨대종가에서 제공해 주신 자료에 대해 연구, 분석했습니다. 그리고 중요 자료에 대해 소개와 더불어 기반연구를 수행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향후 장기적인 연구를 염두에 두고 전체 자료에 대한 체계적인 소개는 물론 전시, 심층적인 학술연구 등을 기획하고자 합니다. 앞으로도 계속 관심을 기울여 주시기 바랍니다.
이번 뜻 깊은 학술대회를 위해 여러 분이 수고를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해주정씨대종가 종손이신 정기탁 선생님, 해주정씨대종회 회장이신 정석준 선생님을 비롯하여 해주정씨대종회 부회장이신 정기두 선생님의 적극적인 후원에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더불어 소중한 연구성과를 발표해 주시는 여러 선생님, 다시 한 번 고맙다는 말씀 드립니다.
2012년 12월 18일
장서각 관장 이종철
축사
정석준 해주정씨 대종회장께서 축사을 하시겠습니다.
정석준 (해주정씨대종회장)
[축사]
안녕하십니까?
먼저 해주정씨대종회를 대표하여 이런 학술대회를 마련해 주신 한국학중앙연구원 정정길 원장님과 장서각 이종철 관장님에게 무한한 감사를 표합니다.
아울러 바쁘신 가운데도 기조강연을 맡아주신 이성무 전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님과 연구에 참여하여 오늘 발표를 해 주시는 여러 선생님들께도 심심한 감사를 표합니다.
오늘 이렇게 날씨가 추운데도 불구하고 경향각지에서 본 학술대회를 빛내 주시기 위하여 교통여건도 좋지 않은 이곳까지 찾아주신 종원과 타 문중의 여러 선생님들 그리고 내외귀빈께도 고개 숙여 감사를 표합니다.
이번 학술대회는 비 가문의 700년 동안 대종가에서 보존해 온 고전적들을 장서각에 의뢰하여 정리하고, 그 가운데 중요한 것을 간추려 한글세대를 위한 도록을 간행하면서, 중요 선조를 중심으로 심도있는 연구를 해보자는 의도에서 추진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일들은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이 아니면 할 수 없다고 판단되어 의뢰하게 되었으며, 1년도 채 안되는 짧은 기간에 이러한 성과를 가져온 것은 장서각에서 주무를 맡은 김학수 실장과 정수환 선인연구원의 탁월한 안목과 추진력의 덕분이라고 생각됩니다.
끝으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하면서 본 학술대회 개최를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2012년 12월 18일
해주정씨대종친회 회장 정석준
기조강연: 해주정씨의 세계와 인물
이성무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기조강연: 해주정씨의 세계와 인물
1 세계(世系)
2 해주정씨 종손계의 인물들
1) 상계(上系)
2) 정역(鄭易)
2) 정종(鄭悰)
3) 정미수(鄭眉壽)
4) 정효준(鄭孝俊)
5) 정중휘(鄭重徽)
*(2)번이 겹쳐 있슴
문중의 사료를 연구하다보면 불확실한 부분이 많이 나옴니다.
정확한 기록이다 하나 다소 틀리기 쉽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도 기록을 하다보면 한 집안 간에도 다른 자료가 나오기도 합니다.
혹시 다른 부분이 나오면 자료를 제출하셔서 수정을 해야 합니다.
단 수정을 할 때는 개인 주장만이 되는 것이 아니고 꼭 사료를 제출하셔야 합니다.
오늘 발표문도 모두 과거 자료를 바탕으로 이루어 진 것입니다.
시작하기 전에 한 해주정씨 문중의 한 분이 발표내용이 틀린다며 거센 항의를 하면서 오늘 발표는 해서 안된다고 하여 조금은 소란스러운 분위기 였다.
1) 상계(上系)
해주정씨의 시조는 정숙(鄭肅)이다.
언제 태어났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가승(家乘)에 의하면 신종(재위 1198~1204) 때 문과에 급제해 벼슬이 전법정랑(典法正郞)에 이르렀고, 중현대부(中顯大夫) 전객서(典客署) 서령(署令)으로 치사(致仕)했다.
정숙의 후손으로 정언(鄭언)이 있으나 연대로 따져보아 아들이 될 수 없다.
2) 정역(鄭易)
이방원과 동방(同榜:이방원은 병과(7인)에, 정역은 동진사(23인)에 급제)으로 친했으나 조선왕조가 개창될 때 협력하지 않고 두문불출해 공명(功名)에는 뜻이 없었다.
그런데 이방원이 친히 문병을 가고, 둘째아들 효령대군을 정역의 딸과 혼인하게되고 특별한 예우를 하자 감격해 비로소 신왕조에 협력했다.
2) 정종(鄭悰)
정종은 세종 때 좌찬성을 지낸 정충경과 목사 민호덕(閔好德)의 딸 여홍 민씨 사이에 외아들로 태어나, 1450년(세종 32) 1월 24일 문종의 외동 딸 경혜공주(敬惠公主)에게 장가가 영양위(寧陽尉)가 되었다.
3) 정미수(鄭眉壽)
정종의 외아들이 정미수다. 아버지 정종이 죄에 걸려 부인 경혜공주를 다리고 광주로 귀양갔다.
1454년(단종 2)에 아버지 정종이 처형 당하고 1461년(세조 7)에 경혜공주가 서울로 불려 올라갔고 그 때 정미수의 나이 7세이다.
4) 정효준(鄭孝俊)
아버지는 돈녕부 판관 해성군 정흠이요, 어머니은 공조판서 신점(申點)의 딸인 정부인 평산신씨다.
1656녕(효종 7)에 해풍군(海豊君)으로 승습(承襲)하고 곧 동지돈녕부사로 승진했다.
그런데 5자(植, (木+益), 晳, 樸, (木+責)) 1손(重徽)이 모두 문과에 급제해 1663년(현종 4)에 예조판서가 “5자가 등과하면 나라법에 그 부모가 살아 있으면 쌀을 내려주고, 죽었으면 증직(贈職)과 치제(致祭)를 베풀게 되어 있는데 동진돈녕부사 정효준은 5자가 모두 문과에 급제했으니, 특혜를 받을 만 합니다.”라고 건의 했다.손자인 정중휘(鄭重徽)도 문과에 급제했다.
5) 정중휘(鄭重徽)
정식의 장남이 정중휘다. 자는 신백(愼伯)이요, 호는 돈곡(敦谷)이다.
나면서 준수해 증조할아버지 정흠이 사랑해 옆자리의 작은 책상에 앉히고 “너는 반드시 우리 문중을 크게 일으킬텐데 내가 늙어서 보지 못하는 것이 한스럽다”고 했다.
1660년 11월에 사간원 정언, 1661년에 사헌부 지평이 되었다.
제1주제: 여말선초 海州 鄭氏의 정치·사회적 성장
강문식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학예연구사)
2. 여말선초 海州 鄭氏의 주요 인물
1) 정역(鄭易)
2) 정충경(鄭忠敬)·정종(鄭悰) 부자
3) 정충석(鄭忠碩)과 그의 아들들
3. 정치·사회적 성장의 요인
1) 왕실과의 친분과 혼인
2) 명문가(名門家)와의 혼인과 유대
3) 관료로서의 실무 능력
2. 여말선초 海州 鄭氏의 주요 인물
1) 정역(鄭易)
1. 상계(上系)
1694년(숙종 20)에 편찬된 [해주정씨족보(海州鄭氏族譜)]의 서문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우리 정씨는 수양(首陽 : 해주)에서 비롯되었다. 당초 신라와 고려시대에 크게 번성하였으나 세대가 멀고 족보가 없어서 연대 및 근원과 지파를 상고할 수 없다. 정도공(貞度公)이 우리 조정[조선]에 출사한 이후로 더욱 창성하여 300여 년 동안 대대로 이름난 재상과 높은 벼슬아치가 있었다.
2. 여말선초 海州 鄭氏의 주요 인물
1) 정역(鄭易)
정역(?~1425)은 자가 순지(順之)이고, 호는 백정(栢亭)이다.
정역의 부친 정윤규(鄭允珪)는 고려말에 판예의사(判禮儀事)를, 조부 정언은 사복시소윤(司僕寺小尹)을 했다고 전해지나 그 이상의 이력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2) 정충경(鄭忠敬)·정종(鄭悰) 부자
정역의 두 아들인 정충경(鄭忠敬) · 정충석(鄭忠碩) 형제는 아버지만큼 크게 두각을 나타낸 인물은 아니다.
정충경(?~1443)에 관해서는 전해지는 바가 전혀 없고 동생 정충석이 1406년(태종 6)에 태어났다.
3) 정충석(鄭忠碩)과 그의 아들들
정역의 둘째아들 정충석(1406~1473)의 행적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는 그의 사위 이승소(李承召)가 지은 [묘표음기(墓表陰記)]가 거의 유일하다.
40여 년동안 관직을 지속적으로 하여 일찍 사망한 형 정충경을 대신하여 집안의 큰 어른으로서 가족을 이끌었다.
3. 정치·사회적 성장의 요인
해주 정씨가 정치, 사회적으로 크게 성장할 수 있었던 몇가지 요인은 크게 세가지로 나누어 정리해 본다
1) 왕실과의 친분과 혼인
정역의 등장 이후 해주 정씨가 유력가문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요인은 조선 왕실과 친분 및 혼인 관계를 들 수 있다.
정역은 태종과 개인 친분이 있는데 정역은 1383년(우왕 9)에 우현보(禹玄寶)와 이인민(李仁敏)이 주관한 과거에 급제했는데, 태종 역시 같은 시험에 급제했다.
이에 따라 정역과 태종은 우현보, 이인민을 좌주(座主)로 하는 ‘동년(同年)’의 관계를 같게 된다.
2) 명문가(名門家)와의 혼인과 유대
정역과 그의 자손들이 왕실 외에 당시의 여러 명문가와 혼인을 맺은 것도 해주 정씨의 정치, 사회적으로 성장에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3) 관료로서의 실무 능력
정역과 그 아들 및 손자들이 실무 관료로서의 능력을 갖추고 있었던 것도 해주정씨의 정치적 성장에 일조했다고 할 수 있다.
4. 맺은말
정역(鄭易)은 해주 정씨가 명문가로 성장하는데 있어 출발점이 되었다.
고려 우왕대에 출사한 정역은 고려말 ~조선초에 중앙과 지방의 요직을 두루 역임했으며 1411년에는 원종공신에 책록되었다.
정역의 딸과 효령대군의 혼인으로 이어졌다.
해주 정씨와 왕실은 이 후에도 계속되어 정역의 아들 정충경의 셋째 딸은 세종의 아들 영응대군과 정충경의 아들 정종은 문종의 딸 경혜공주와 혼인하였다. 이 같이 왕실과 연속적인 혼인관계는 해주 정씨의 사회적 위상이 높아지는데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한다.
정역과 그의 자손들은 왕실 외에도 여말선초(麗末鮮初)의 여러 명문가와의 혼인관계가 있었는데 정역은 당대의 대표적 명족이었던 안동 권씨 권사종(權嗣宗)의 딸과 혼인했고, 또 정역의 셋째 딸도 권근(權近)의 넷째 아들 권준(權蹲)과 결혼했다.
정역의 큰아들 정충경은 고려 후기의 이른바 ‘재상지종(宰相之宗)’에 포함되었던 여흥 민씨 민호덕(閔好德)의 딸을 부인으로 맞았고, 둘째아들 정충석은 연일 정씨 종종성의 딸과 혼인했는데, 정종상은 절의(節義)의 충신의 상징으로 추앙 받던 정몽주(鄭夢周)의 아들이었다.
이러한 요인들이 해주 정씨의 성장에 크게 기여하였다.
중식
구내식당 창 밖으로 내다 보이는 국사봉 등산길에 대해서
獐山 최재일 선생의 뜻깊은 이야기가 있어 경치도 좋고해서 한장 올렸다.
[제2부 주제 발표]
사회: 안승준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책임연구원)
최근 문화일보에 경혜공주관련 기사와 동아일보에 해주정씨부인 관련 기사를 올린 사회자 (안승준)
‘易’ 를 정씨 문중에서는 어떻게 읽습니까?
‘역’으로 발음합니다.
네~ 참고로 18세기 해주정씨 문중에서 자녀분에게 물려주는 서신에서 한글로 ‘이’로 표시한데가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제2주제: 海平府院君 鄭眉壽의 官歷과 政治活動의 특징
(해평부원군 정미수의 관역과 정치활동)
박병련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1. 서론-정미수의 특수한 지위와 연구의 의미
2. 세조, 예종 그리고 성종시대:
사로(仕路)가 열리고 경륜을 발휘하다.
1) 관직 임명에 따른 정희왕후와 대신·대간의 대립
2) 유(儒)·리(吏) 겸전의 경륜
3. 연산군 시대: ‘생명살림’의 선봉장
4. 중종시대: 사림의 중망(重望)과 유자광·박원종의 견제
1) 사림의 중망과 박경(朴耕)의 옥사
2) 유자광·박원종의 견제와 모략
5. 맺는 말
제3주제: 虛菴 鄭希良의 學文과 經世論
(허암 정희량의 학문과 경세론)
한희숙 (숙명여자대학교 교수)
1. 서론
2. 가계와 생애
3. 정희량의 家系와 官歷
4. 經世論
5. 결론
허암(虛庵) 정희량(鄭希良)은 1469~?)은 연산군 초에 정치생활을 했던 젊은 사림이자 관료였다.
그는 1495년(연산군 1)에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承文院 權知 正字로 관직에 나아간 뒤 연산군 4년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귀양을 가게 됨으로서 관직에 물러났다. 그리고 1501년(연산군 7) 유배지에서 모친상을 당한 후 그해 9월 천변(天邊)으로 귀양에 풀려나 선산(先山)에서 시묘살이 하던 중 이듬해 어느날 34세의 나이로 조강(祖江)가에 신과 옷을 벗어 놓은체 홀연히 세상에서 사라져 그의 죽음이 베일에 싸였던 인물이다.
제4주제: 鄭文孚의 壬亂 시기 救國活動과 역사적 평가
(정문부의 임란 시기 구국활동)
한명기 (명지대학교 교수)
1. 머리말
임진왜란이 일어난 직후 일본군은 파죽지세로 북상했다.
1592년 4월 13일 일본군이 부산에 상륙했고 조선의 최후 보루였던 도순변사(都巡邊使) 신립(申砬)의
부대가 충주 탄금대에서 패하자 선조와 조정은 4월 28일 서울을 버리고 파천하기로 결정한다.
결국 선조는 압록강변 의주에 내몰렸고 小西行長의 제1군과 加藤淸正의 제2군은 각각 평안도와 함경도까지 북상했다.
이렇게 조선 전체가 일본군에게 유린 된데에다 復國의 전망이 불투명했던 위기 상황에 길주(吉州)
등지에서 일본군을 물리치고 관북(關北)지역을 수복하는데 결정적인 공을 세운 사람이 정문부
(鄭文孚:1565~1634)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났던 초반 류성룡은 정문부의 전공에 대해 크게 평가를 했다.
임진왜란을 이길 수 있었던 공을 치자면 첫째 이순신의 수군 활약이다.
두 번째가 낙동강우도의 의병장 곽재우와 김면의 활약이며, 세 번째로 정문부의 관서지방 의병 활동이다.
이 세가지의 활약이 없었다면 아마 조선은 멸망하지 않았으가?
현종(顯宗) 연간 함경북도 북평사(北評事)를 지냈던 이단복(1625~1689)는 1661년(현종 5) 다음과 같은 내용의 서신을 민정중에게 보낸다
“ 대체로 鄭평사(評事) 문부(文孚)의 일은 선친께서 일찍이 칭찬하시면서 애석히 여기셨습니다. 이제 이 기록을 보고 또한 몸소 이 지역 인사들을 찾아보니 정문부의 공이 큽니다. 그러나 살아서는 이미 무고를 당해 불우했고, 죽어서도 또한 표창(表彰)을 하는 자가 없으니 진실로 애석합니다. ”
말고삐를 잡고간 내시에게도 호조공신으로 책록하면서 나라를 구한자에게는 아무 표창도 없어 선조의 비방받는 이유이다.
2. 전란 초기 함경도의 상황
1) 일본군의 진입과 민심(民心)의 이반(離叛)
1592년 4월 29일 선조가 경복궁을 나설 때 그를 호종한 신하는 100명을 맴돌았다. 뿐만 아니라 선조는 서울에서 의주까지 피난 도중 자신과 조정에 대해 극심한 반감을 품고 있던 백성들의 적대적인 반감을 목도하였다.
7월 23일에는 국경인(鞠景仁)을 비롯한 반민(叛民)들이 들고 일어나 왕자 임해군(臨海君)과 순화군(順和君)을 붙잡아 일몬군에 넘겨주는 사태까지 빚어진다.
뿐만 아니라 감산부(甲山府)에서는 반민이 병사(兵使) 이혼(李渾)의 머리를 베어 적에게 바치는 사태까지 일어났다. 함경도는 일본군이 진입할 무렵부터 부정부 상태였다.
2) 복배수적(腹背受敵)의 분위기
국경인(鞠景仁) 등 반적들은 함경도의 지방 수령이나 반적들을 살해하고 부일(附日) 행위를 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일본군을 자극하여 두만강 건너의 여진 지역까지 침략하도록 부추겼다.
3. 鄭文孚의 義兵 활동
1) 북평사(北評事) 부임과 民心 수습
일본군의 칩입과 번호(藩胡)들의 발호 속에서 반민(叛民)들의 반역과 부일행위까지 만연하고 있던
함경도에서 민심을 수습하고 일본군을 격퇴할 실마리를 마련한 사람은 정문부였다.
다음의 기록을 보자
‘정문부 등이 드디어 의병을 일어켰다. 명주(明州)와 길주(吉州) 지경에 군사를 일어키니 병력이 천여 명에 달했다. 부대를 편성하여 매우 엄하게 다스렸다. 반란민도 와서 따르는 자가 많았는데, 정문부가 이들에게 후하게 대해주자 사람들이 모두 기꺼이 따랐다. 단천군수(端川郡守) 강찬(姜瓚)이 기병하여 성세(聲勢)를 돋구어 서로 응원했다. 정문부는 정견룡(鄭見龍)을 불러 대장으로 삼고 군사를 전진시켜 적을 무찔러 연달아 적을 베었다. 조정에서는 정문부를 절충장군으로 삼고 평사를 겸하게 했다.'
2) 경성(鏡城) 거의(擧義)와 부일반적배(附日叛賊敵輩) 처단
반적(叛賊)과 부일배들이 설쳐대던 함경도에서 정문부는 몇 차례 죽을 고비를 넘긴다.
대체로 정문부의 병력은 3~5천명에 이르렀다. 경성부를 지키던 정문부 휘하의 부대는 9월 18일 길주성에 몰려온 일본군 90여명을 맞아 전투를 벌여 그들을 물리쳤다.주목되는 것은 승전 직후 국세필(菊世弼)이하 반적 13명을 참수하고 6진 지역에 격문을 돌려 또 다른 반적들을 처단하라고 촉구했던 점이다.
정문부의 격문을 받은 회령에서는 유생 신세준(申世俊)이 군사를 이르켜 국경인(鞠景仁)을 비롯한 반민들을 주벌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국경인과 국세필 등 반적을 대부분 제거하자 효과는 금방 나타나서 함경도의 남과 북이 비로소 통하게 되고 사실상 무정부지대였던 함경도가 조선의 공권력이 부활하여 지역민을 다시 통치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 된 것이다.
3) 길주(吉州), 장평(長坪), 임명(臨溟), 단천(端川) 지역의 일본군 격파와 함경도 수복
4. 맺음말
임진왜란 당시 정문부가 세운 이 같은 전공을 고려할 때 그는 마땅히 공신으로 녹공(錄功)되어야 했다. 하지만 1604년(선조 37) 11월 확정된 녹공 심사에서 녹공되지 않았다.
당시 功臣 녹공과정에서 호종공신 편향의 방향으로 흘러갔기 때문으로 호종공신이 86명인데 선무공신은 고작 18명에 그쳤다. 곽재우나 정문부 같은 의병장들은 어느 공신에도 책록되지 못했다.
한 때는 “의병 덕분에 망해가던 나라가 부활했다”고 상찬하기도 했지만 , 전쟁이 소강 상태로 접어들자 선조를 비롯한 재조 관인들의 의병에 대한 인식은 변화되어 갔다. 그것은 분명 문제였다.
호종공신 86명 중 단순히 선조를 수행했던 환관(宦官)이 24명, 말고삐를 잡았던 마부가 6명이나 포함되어 있다.
함경도를 되찾아 풍패지향을 지켜낸 큰 공을 세우고도 공신에 녹공되지 못한 때부터 정문부의 불운과 비극적인 최후가 예비되었는지 모른다.
이괄(李适)의 난까지 격게되고 정문부가 쓴 시조차 ‘정치적’으로 해석하여 그를 끝내 죽음으로 몰아 넣은 것은 그들의 정치적 초조함을 드러낸 것이다.
결국 절대절명의 위기 상황에서 공을 세운 의병장 출신도 목숨을 보존하지 못하는 비극이 자행되었다.
임진왜란 시기 함경도를 구해 낸 정문부의 업적을 되돌아 보고 그 역사적 의의를 정당하게 자리 매김해야 할 필요성이 절실한 시점이다.
휴식
제5주제: 17세기 정국변동과 鄭孝俊~鄭重徽 3대의 정치활동
(정효준~정중휘)
이영춘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관)
1. 序說
2. 17세기의 정국 동향과 海州鄭전氏란 오룡가(五龍家)
3. 정효준(鄭孝俊)~정중휘(鄭重徽) 3대의 정치활동
1) 해풍군(海豊君) 정효준(鄭孝俊)의 생애와 활동
2) 해원군(海原君) 정식(鄭植)의 생애와 활동
3) 참찬(參贊) 정익(鄭익木+益)의 생애와 활동
4) 예조참판(禮曹參判) 정석(鄭晳)의 정치 활동과 文學
5) 대사헌(大司憲) 정박(鄭樸)의 생애와 활동
6) 사예(司藝) 정적(鄭적木+責)의 생애와 활동
7) 해흥군(海興君) 정중휘(鄭重徽)의 정치 활동
4. 結語
정효준(鄭孝俊)-정식(鄭植) 5형제-정중휘(鄭重徽)에 이르는 3대 오룡가(五龍家)
해주정씨 오룡가는 조선중기의 대표적인 훈척가문으로서 해풍군(海豊君) 정효준의 아들 5형제와 장손이 모두 文科에 급제하여 고관대작으로 진출하였다.
문과의 오자등과(五子登科)란 매우 드문 일이었고, 모두가 청요직(淸要職)을 지내거나 고관대작이 되는 일은 더욱 희귀한 일이었다. 그래서 문중에서는 이 집안을 ‘오룡가’라 부르고 있다.
당대에 세상을 울렸던 5형제는 해원군(海原君) 정식(鄭植:1615~1662), 참찬(參贊) 정익(鄭익(木+益):1617~1683), 예조참판(禮曹參判) 정석(鄭晳:1619~1677), 대사헌(大司憲) 정박(鄭樸:1621~1692), 사예(司藝) 정(鄭적(木+責):1635~1672)이었고, 정식의 장자(長子) 해흥군(海興君) 정중휘(鄭重徽:1631~1697)와 정적의 손자 정필녕(鄭必寧)도 문과에 급제하고 참판에 올라 가문의 영광이었다.
이들 중에는 단명하였던 정식과 정적을 빼면 모두가 재상급의 당상관에 올랐던 것이다.
해주정씨 오룡가의 인물들이 활동하였던 시기는 대체로 선조 후기~숙종 중기로서 국내외적으로 정치적 변화가 극심한 시기였다.
제6주제: 해평부원군가의 학풍과 문학적 특징
(梧亭(오정) 鄭鎔(정용)을 중심으로)
박용만 (한국학중앙연구원 선임연구원)
1. 序說
2. 해평부원군가의 내력과 학풍
3. 정용의 한시와 해평부원군가의 문학적 특징
1) 정용의 삶과 한시
2) 절구형식의 애호와 소박한 표현
정용의 작품 8수 중 1수를 제외하면 절구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 점이 특징적이다.
<거문고 소리 들으며(聞琴)>
佳人挾朱瑟(가인협주슬) 아름다운 여인 붉은 비파를 끼고
纖手弄柔荑(섬수농유이) 삘기 같은 섬섬옥수로 희롱하네
忽彈流水曲(홀탄유수곡) 갑자기 유수곡 타니
家在古陵西(가재고릉서) 집은 오랜 무덤 서편에 있네
<어떤 이에게 주다(贈人)>
二月燕辭海(이월연사해) 이월이라 제비가 바다를 건너오니
千村花滿奏(천촌화만주) 고을마다 꽃이 가득할 때로다
每醉淸明節(매취청명절) 매번 청명절이면 술에 취한 것도
至今三十春(지금삼십춘) 지금껒 삼십년일세
2월 봄날 청명절을 맞아 어떤이에게 준 시이다. 2월을 청명절이라 했다.
정용에게는 청명일은 제비가 돌아오고 꽃이만발하는 좋은 시절로 인식되어 30년동안 청명일을 맞아 술에 취하는 행위가 반복되었다.
<밤에 짓다(夜作)>
鵂鳴園裏樹(휴명원이수) 부엉이 동산 나무에서 우는데
雲黑五更天(운흑오경천) 구름은 오경이라 어둑어둑
遠客那堪聽(원객나감청) 멀리서 온 나그네 어찌 그 울음소리 견디리오
悠悠夜似年(유유야사년) 길고긴 하룻밤은 일년과 같구나
앞의 시와는 사뭇 다르지만 부엉이의 눈을 상상하게하는 울음과 깊은 밤 구름 낀 하늘은 더욱 어두워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이 시의 1, 2구에 대해 허균은 ‘사람의 머리카락이 곤두서게 한다’라고 평하였다.
정용이 살았던 16세기 말은 조선 시단이 크게 변화하는 시기였다.
이전의 설리적(說理的)인 송시(宋詩)를 따르던 풍기(風氣)가 일변하여 당시 중에서도 성당시(盛唐詩)를 배워 익히는 시대로 변모하였다.
3) 당풍(唐風)의 수용과 정회(情懷)의 표출
<노산군부인의 거처를 지나며(魯宮)>
人渡桃花岸(인도도화안) 사람들은 복사꽃 핀 언덕을 건너고
馬嘶楊柳風(마시양유풍) 말은 버들가지에 부는 바람에 우는구나
夕陽山影裏(석양산영이) 석양의 산 그림자 속에
廖落魯王宮(료낙노왕궁) 노산군 부인께서 계시던 궁이 쓸쓸하구나
이 시는 정용이 지은 시 중에 시대를 알 수 있는 유일한 시다.
‘해주정씨가승’에는 <신사춘과노산부인구궁(辛巳春過魯山夫人舊宮):신사년 봄 노산군 부인의 옛 거처를 지나며>
<가을의 심회(秋懷)>
菊垂雨中花(국수우중화) 국화는 빗속에 꽃을 드리우고
秋驚庭上梧(추경정상오) 가을이라 뜨락의 오동잎에 놀라네
今朝倍惆愴(금조배추창) 오늘 아침 갑절이나 서글퍼짐은
昨夜夢江湖(작야몽강호) 어젯밤 시골 꿈을 꾸었기 때문이리
정용은 본래 성품이 공명과 벼슬을 마음에 두지 않았으며 얽매이는 것을 꺼려했다.
<늦은 봄에(春晩)>
醉滴春眠後(취적춘면후) 봄날 자고 일어나 술을 따르니
花飛簾捲前(화비염권전) 걷어 올린 발 앞에 꽃잎이 날리네
人生能幾許(인생능기허) 사람의 삶이 얼마이리오
悵望雨中天(창망우중천) 쓸쓸히 비오는 하늘을 바라보네
<어떤이에게 주다(贈人)>
萬里鯨波海日昏(만리경파해일혼) 만리 큰 바다에 날은 저무는데
碧桃花影照天門(벽도화영조천문) 벽도화 그림자 하늘 문에 비치네
鷰驂一息空千載(연참일식공천재) 신선 수레 한 번 쉬면 천년이 훌쩍 지난다던데
緱嶺靈笛半夜聞(구령영적반야문) 구령의 신선 피리소리 한밤에 들리누나
위의 시 <春晩>과 이 시<贈人>의 칠언절구를 정용의 작품 중 허균이 가장 뛰어난 것으로 평한 작품이다.
“인간 세상의 언어가 아니다”라고 극찬하였다.
<춘만>의 1,2구에 대해 “채 말아 올리지 않았는데 꽃이 이미 떨어진다(未捲而花已落云)”라고 평을 달았고, 마지막에는 “글자마다 보배롭다(字字珠璣)”라는 전체적인 비(批)를 달았다.
허균은 <贈人>의 1,2구에 대해 “신선인가 귀신인가 절로 사람을 감동시킨다”라고 하였다.
<失題>
棲身三角三十春(서신삼각삼십춘) 삼각산에 깃든 지 삼십년인데
日日每向南雲哭(일일매향남운곡) 매일 남녁 구름 바라보며 늘 울었네
松風不如龍吟聲(송풍불여용음성) 솔바람 소리는 피리소리만 못한데
蘭雁又下三陵鶴(난안우하삼릉학) 난안은 또 삼릉학만 못하도다
三陵鶴不來(삼릉학불래) 삼릉학은 오지를 않고
蜀道峯前秋月黑(촉도봉전추월흑) 촉도봉 앞에 가을달만 어둡구나
4. 맺음말
해주정씨 해평부원군가는 조선 초부터 조선 중기에 이르기까지 대대로 현달하여 중앙정치권력의 핵심에 있었던 가문이다. 그러나 많은 인물을 배출하였음에도 학문적 관계를 살필 수 있는 자료가 태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여기서는 정용의 한시가 보여주는 수준이 매우 뛰어나고, 문학적 지향이 분명하여정용을 집중적으로 살폈다.
정용의 한시는 8수에 불과하지만 당풍이 조선에 수용되어 정착되는 시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관료문학이 조선문학이었으나 17세기 말부터 문학과 정치가 분리되었다고 본다.
제7주제: 고문서를 통해 본 해주정씨가문의 사회경제적성격
정수환 (한국학중앙연구원 선임연구원)
제7주제: 고문서를 통해 본 해주정씨가문의 사회경제적 성격
1. 머리말
2. 조선초기 왕실과의 인연과 경제적 특권의 확립
1) 왕실혼과 정국공신
2) 왕실과 국가로부터의 경제적 특권
3. 17세기 사환가적 성격과 효율적 경제운영
1) 사회적 배경과 등과를 통한 교유
2) 사환을 통한 효율적 가산관리
4. 18세기 정치적 부침과 양주 우거
1) 근기 남인적 성향
2) 가산의 안정화와 계승
4. 맺음말
해주정씨는 조선 전기 이방원과 함께 과거에 급제한 정역이 좌명원종공신이 되고, 그의 딸을 태종의 둘째 아들인 효녕대군에게 시집보내면서 왕실과 인연을 맺었다.
그리고 정종이 경혜공주와 혼인하여 영양위가 되는 등 강력한 왕실혼적 기반을 형성했다. 뿐만 아니라 정종의 아들 정미수가 중종반정에 적극 가담하여 정국공신에 책봉되면서 조선시대 해주정씨를 국반(國班)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17세기의 해주정씨는 정효준 대에 이르러 과거를 통한 관료를 배출하게 되면서 크게 번성했다. 그의 다섯 아들이 모두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이를 계기로 해주정씨대종가는 이른바 ‘五龍家’ 혹은 ‘五木家’로 널리 알려졌다. 뿐만 아니라 그의 손자 정중휘가 가문의 전통을 이어 중앙과 지방의 요직을 두루 역임하면서 해주정씨 대종가는 한양의 핵심 양반으로 존재할 수 있었다.
18세기 이 후에는 한양을 떠나 양주에 정착했다. 정택조를 비롯한 문중내 여러 인물들이 성호학파 등 실학적 성향의 인사들과 교유가 빈번하면서 해주정씨 대종가는 근기남인의 성격을 지니게 되었다.
조선초기는 정역이 공신이 되고, 또한 고관을 지속적으로 역임하면서 매우 강력한 경제적 기반을 형성했다.
양주를 기반으로 종가를 운영하면서 선대의 노비중심 가산구조에서 토지의 확보를 통한 안정적 재산의 확보를 위해 노력했다.
휴식
종합토론
사회: 정만조 (국민대학교 명예교수)
☞ 정수환(한국학중앙연구원 선임연구원), 박용만 (한국학중앙연구원 선임연구원), 이영춘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관)
한명기(명지대학교 고수), 한희숙(숙명여자대학교 교수), 박병련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강문식(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사회:
정만조,
☞사회: 정만조, 송응섭(동덕여자대학교 강사), 신병주(건국대학교 교수) 강제훈(고려대학교 교수)
노영구(국방대학교 교수) 임성빈(한국학중앙연구원 전임연구원)
함영대(고려대학교 한자한문 연구소) 유현재(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