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 김장하던 날
우리 집 김장하던 날은 금년 겨울 들어 가장 추운 날이었다. 서울 최저 영하1.7도, 낮 최고 4도 충청도에는 대설 주의보까지 내려지고 지리산에는 30cm 눈이 쌓였다. 내일은 더 추워질 것이라고 한다.
어제 서울에 첫눈이 내렸지만 내리자마자 녹아버려 첫눈의 아쉬움은 컸다. 어찌 첫눈에 많은 것을 기대할 수 있으랴!
첫눈이 내리고 추워지는 겨울이 되면 가정에서는 겨우살이 준비로 김장김치 담구는 일이 아마도 큰 일중 하나일 것이다.
작년까지만 해도 김장배추를 사기위해 멀리 파주 적성까지 승용차를 타고 갔었던 어려움도 있었지만 금년에는 여름 내내 태풍도 없었고 비도 많이 내리지 않아 모든 농작물이 대풍년을 맞아 배추 값 또한 헐값으로 김장비용부담도 줄어들게 됐다.
농부들은 한 해 작물을 심고 가꾸어 그 과실을 팔아 일 년 생활비를 마련할 진데 흉작이 들면 값을 오르나 내다 팔 물건이 없어 한숨이 생겨나고, 풍년이 들면 물량은 많으나 값이 떨어져 채산성도 없고 씨알 값도 못 챙기는 적자가 생긴다고 한탄한다.
농산물은 풍년들어도 흉년이 들어도 모두가 걱정일 뿐이니 농사짓는 사람들이 항상 어려움을 겪고 사는 실정이다.
얼마 전 아내가 동사무소 주민자치회 김장자원봉사 나갔다가 동네주민 배추밭 주인을 만나 90일 배추를 한 포기당 1천원에 구입하기로 약속하였고, 어제 첫눈 내리던 날 배추밭에서 30포기를 뽑아왔다.
한 둥치가 어떻게 크던지 세 포기를 한 가슴에 안기가 버거울 정도로 탐스러웠고 싱싱하였다. 여름날에 씨앗을 심어 무려 3개월 동안 자식 기르듯 정성으로 거름 주고 물을 뿌려 이렇게 한아름의 통배추를 키워왔었는데 포기당 단 돈 천으로 내동댕이쳐 남에게 넘겨야하는 주인의 마음은 어떠하였을까 감히 짐작이 간다.
그래도 주인아주머니는 내년에도 배추를 잘 가꾸어 조달할 테니 전화번호를 잘 적어두었다가 꼭 자기네 배추로 김장하라고 심심 당부한다. 금년 같은 해 소비자인 우리로서는 배추 값이 싸서 부담이 줄어 좋아할 일이지만 여름내 뙤약볕에 얼굴 구슬려가면서 가꾸어온 농부들에게는 미안한 마음까지 들었다.
승용차 뒤 트렁크에 가득이나 싣고도 공간이 모자라 뒷좌석까지 차지한 배추동이를 보면서 금년에는 행여 횡재라도 한 듯 기분이 좋았었다. 근래 들어 단돈 3만원에 김장배추를 장만하였던 해가 언제 있었던 일이던가?
나이 들어가면서 조그마한 하찮은 것에도 만족하고 감동하는 우리부부를 보면서 세상 살림살이가 요즘처럼 어렵게 꾸려갔었던 일이 그렇게 많지 않았던 것 같다.
집에 돌아온 아내는 포기가 큰 배추포기를 장칼로 사정없이 반으로 가르면서 속도 꽉 차고 노랗게 익은 속잎이 단맛이 난다면서 속잎 하나를 때어 나에게도 건넨다,
작년에는 멋모르고 60일 배추를 사다가 김장을 하였던 봐 한 겨울에 들기도 전에 김치가 물러서 먹기도 안 좋았을 뿐 아니라 맛도 없어 양념값이 아까워 본전생각이 절로 든다고 하면서도 기어이 버리고 말았다.
나는 배추하면 모두가 다 같은 종자에 같은 성장기간을 거쳐서 재배되는 줄로만 알았었는데 작년 김장을 통해서 많은 것을 배우게 되었고 그래서 금년에는 산지에서도 90일 배추인가를 확인 한 후에야 비로소 구입하기로 했다.
하찮은 이 작은 배추 하나 고르는데도 프란시스 베이컨의 “아는 것이 힘이라”는 너무나 평범한 진리를 터득하면서 아직도 나는 많은 것을 더 배워야만 하는 건가 의문을 가졌다.
배추는 푸르다 못해 검은 빛을 냈다. 배추를 그냥 두고 보고만 있어도 흐뭇할 것 같은데 배를 가르고 죽여야 하는가, 아까운 생각이 든다.
배추를 가르고 나면 또 한 번 죽이는 일이 소금으로 절이는 일이다. 그래서 김장은 배추를 밭에서 칼로 뿌리를 자르고 집에서는 통배추를 두 쪽을 내어 다시 소금에 절이고 또 양념속을 채워서 마지막으로 무덤인 김치냉장고에 잠들게 하는 등 다섯 번 죽이는 일이라고도 한다.
TV에서 충북괴산 김치공장 지배인의 말에 의하면 김장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 배추를 소금에 적당히 절이는 일인데 그 간을 맞추는 일이 무척 중요하다고 하였다. 아내는 그동안 수년 동안 해오던 경험에 의해 조금도 거리낌도 없이 배추에 마구 소금을 뿌려댄다,
그것도 넓은 대야에 차곡차곡 쌓아 덮개로 덮어두는 것이 아니라 김장용 비닐봉지에 넣고 주둥이를 묵거 하룻밤을 지낸다. 옛날 우리 어머니 방식이 아닌 새로운 과학에 의한 절임방식에 의한 것이다.
나는 김치공장 지배인의 말을 기억하면서 소금 너무 많이 풀면 배추가 물러져 사각사각한 맛이 없어진다고 말하였다가 아내가 언제 김장김치 한번이라도 직접 담아봤냐고 잔소리가 많다며 구박만 한다.
내가 젊었을 때에는 어디 김장하는 날이 언제였는지 몰랐으며 저녁에 퇴근하여 새 김치 맛보라고 하였을 때가 바로 김장하던 날 이였음을 기억한다. 나이 들어가면서 늘어나는 것이 얼굴에 주름이요 말인 것 같다. 이제 아내는 내가 말만 하면 잔소리 많다고 구박을 주니 그 젊은 날 가장으로서 위엄은 다 어디로 가고 우리 집 애완견 “솔”이 마냥 꼬리를 내리고 앉아 있을 뿐이다.
저녁에는 부부가 TV앞에서 마늘을 깐다. 8시 뉴스시간대부터 아내는 거실에서 연속극을 내리 보기 때문에 함께 앉아 있지 못하고 나는 방으로 들어가 별도의 TV로 뉴스를 보면서 마늘의 까야만 했다. 뉴스 뿐 만아니라 밤에는 잠자리도 서로 다른 방에서 편다. 하기야 이런 생활이 그동안 익숙해져 하나도 어색한 것이 없고 오히려 서로가 편안해 졌다. 아마도 이것 하나만으로도 많이 늙어가고 있음을 직감할 수 있다.
다음날인 오늘은 아침부터 바쁘다. 아내가 배추를 씻는 일을 도와주어야 한다. 아내 옆에 서서 아내의 말이 떨어지기가 바쁘게 거들어야 하는데 상당히 자존심이 상한다. 남들은 이 고생을 하지 않으려고 절인 배추를 주문하고 택배로 받아 배추 속만 넣으면 김장이 끝나는데 배추를 소금에 절이고 또 물에 씻은 후에 물이 잘 빠지도록 건조대에 올려 물 빠지는 동안에는 무채를 밀어야 한다. 아내의 말에 의하면 절인 배추 10kg에 35천원인데 잘해야 10포기 정도라고 한다. 그것도 절이고 택배로 오는 기간 합하면 2-3일 소요 되 배추가 물러져 김장김치가 제 맛이 안 난다고 한다.
한편으로는 아내가 외손녀를 돌보면서도 절인배추를 주문하지 않고 힘들 텐데도 구지 직접 생 배추를 사다가 절이고 씻고 양념을 넣는 번거러움을 마다하지 않는 이유는 경비절감차원도 있지만 택배로 주문한 절인배추김치가 싱싱하지 않아 맛이 없다는 것이다. 무척 고마운 일이다.
가정의 주부는 항상 콩나물 살 때도 값을 깎는 그런 마음의 자세로 살아야 집안의 낭비를 줄이고 알뜰살림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안다.
무채를 밀고나면 그 무채를 넓은 대야에 아내가 옷소매를 걷어 올리고 버물러야 하는데 여기서 아내의 조수역할을 잘 해야 한다. 고춧가루를 뿌려주고 새우액젓을 잘 섞이도록 적당히 부어주고 미원이다 설탕이다 하명하는 데로 잘 행동해야지 조금만 잘못해도 구박이 직방으로 쏟아진다.
그러기에 궁합이 잘 맞아야 하는데도 나는 맵지 않게 짜지 않게 해야 한다고 양념을 조금씩만 뿌려대니 아내가 구박할 수밖에, 그렇지만 오늘 김장 담구는 일만큼은 궁합이 잘 맞았던 것 같다. 앞으로는 많이 싸우고 다투는 일이 없을 것같다하면서도 오늘 이후면 고무줄처럼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고 말 것이 염려된다.
물 빠진 절인 배추 속에 양념무채버무리를 배추 잎 사이사이에 넣어 다독거리는 일 또한 자상한 손놀림이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양념이 골고루 끼어들어야 제 맛이 난다면서 오늘 김장 담구기는 일에서 가장 중요한 하이라이트라고 강조한다.
그 옛날 어머니는 그냥 아무렇게나 배추에 양념속을 넣었던 것 같아도 어려웠던 시절 그 배추김치 한 가닥으로도 밥 한 그릇을 후딱 치워버렸던 추억의 그 맛을 항상 뇌리에 담고 산다.
어머니만한 아내가 있을 까? 우리들 남자들은 항상 어머니와 아내를 비교해서 모든 것을 생각한다. 어머니 같은 아내가 세상에 존재할 수 있을까? 그렇지만 아내가 어머니를 닮기를 바랄 때마다 아내는 더욱 어긋 진다.
그러나 나이 들어 늙어가면서 아내에게서도 어머니 냄새가 조금씩은 풍겨나는 것 같다. 그것은 아마도 그동안 함께 살면서 나의 비위를 어느 정도 맞춰가면서 사는 것이 아닌가 싶다.
젊었을 때 아내는 맵고 짜고 달고 아주 자극적인 음식을 좋아해 나와는 상충되는 음식 맛을 내어 잔소리도 많이 했었는데 지금은 반찬도 국거리도 많이 싱거워졌고 담백해 졌다.
그래서 오래 사는 부부들이 서로 닮아간다는 이야기가 이런 경우를 두고 한말 같다.
어느 모임에 갔더니만 노후에 여자 혼자 살면 만고강산이고, 남자 홀아비로 살면 적막강산이란다. 그리고 부부가 함께만 살아도 금수강산이고, 아내를 두고 별도 애인을 두면 화려강산이라고 한다. 노후에 남자들에게는 특히 아내가 보물 같은 존재이다. 아내가 없으면 적막강산이라고 하니 어떻게 외롭게 살아갈 수가 있겠는가?
앞으로는 더욱 더 아내의 말을 잘 듣고 더욱 도와가면서 살아야 할 것 같다.
아침 일찍부터 서둘러 시작한 김장 담구기는 일이 오후 1시가 넘어서도 마무리를 짓지 못 했다.
그때 전화가 걸려왔다. 사실 오늘 매월 셋째 화요일이면 정기적으로 만나 등산하는 친구 모임이 있었는데 김장하는 일로 그만 참석치 못하였다.
친구들은 북한산 비봉에 올랐다가 내려오는 길인데 김장일 끝났으면 인근 음식점으로 나와 함께 점심을 하자는 전갈이었다. 사실 오늘 나는 김장일 도우면서도 마음은 친구들과 함께 산에 있었는데 내 마음을 꿰 뚫어보고 연락을 한 것이다.
아내에게 지금 나가도 될까하고 무의식적으로 말을 꺼냈다가 아직 마무리가 되지 않았는데 지금 나간다는 말이 돼야 며 퉁산이를 주고 만다.
배추 속넣기가 끝나면 김치통을 김치냉장고 넣는 일이며 흩어진 쓰레기를 모아 뒷청소까지가 내가 오늘 해야 할 몫인데 중도에 나간다는 것이 말이 아니라는 것이다.
결국 친구들에게 미안하다는 말로 답례하고 전화를 끊었다.
오늘 하루 모처럼 아내를 도와 김장하면서 이 조그만 한 이 가정행사 하나도 나의 삶의 한 부분이라는 생각에 더욱 충실했었고 더욱이 아내와 모처럼 호흡을 맞춰가면서 하루를 보냈다는데도 그 의미가 컷 던 것 같다.
오늘 담근 김치가 우리부부가 함께 만든 작품인 만큼 지난 어느 겨울보다 준비된 일용양식으로 따듯한 겨울을 지낼 것 같다.
날이 더욱 추어지면 김치는 더 많이 익어갈 것이고 추운 겨울 식탁에서도 나의 정성이 밴 김치를 목에 넘길 때쯤이면 아마도 우리 집은 행복한 날이 될 것이다.
2013. 11. 19. 금 치
첫댓글 금치님의 귀환(?)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정성어린 글 잘 읽었어요.
어떻게 시골 초등학교 출신이 이렇게 청산유수여...
사랑하는 아내와만든 작품 언젠가 친우들께 선보이겠지요~~~ 행복함이 눈에훤희 보여!! 샘나네.....
금치님의 글맛이 잘익은 명품 김장맛입니다.
아침마다 설레이며 열어보는 세들리버, 여기가 이민자의 보물창곰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