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松溪 박희용 麗陽南禪軒 독서일기 2024년 7월 6일 토요일 흐림]
왕양명 문집 『신역 傳習錄 안길환 편저』 「상권 徐愛의 기록」 중
<知天과 事天, 하늘을 아는 것과 하늘을 섬기는 것> 논주
제자 서애가 盡心知性 진심지성과 生之安行 생지안행에 대해 묻자, 왕양명은 성인의 경지인 知天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원문] 愛問 盡心知性 何以爲生之安行 진심지성 하이위생지안행?
先生曰 性是心之體 天是性之原 盡心卽是盡性 惟天下至誠 爲能盡其性 知天地之化育 성시심지체 천시성지원 진심즉시진성 유천하지성 위능진기성 지천지지화육
[국역] 서애가 묻기를, 진심지성(마음을 다하여 본성을 알다)이 어찌하여 ‘태어나면서부터 알고 편안히 행한다(생지안행)인 성인의 일이 되는 것입니까?
선생이 말하기를, 본성이란 마음의 본체이며 하늘이란 본성의 근원이 된다. 마음을 다한다는 것은 바로 본성을 다하는 것이 되고, 오직 천하의 ’지극히 정성스러운 사람‘만이 그의 본성을 다할 수 있게 되는 것이며, 하늘과 땅의 변화와 생성을 알게 되는 법이다.
[송계 논주] ’何以爲生之安行?‘에서, 인간 세상에 성인이 있는가? 있을 수 있을까? 사람들은 우상 만들기를 좋아한다. 스승을 우상으로 만들고, 조상을 우상으로 만들며, 종교 창시자를 우상으로 만든다. 그리고는 존경과 공경, 모범이라는 미사여구로 분식한다. 인간은 조상의 육신을 어받아 태어나지만, 혼자 자라고, 혼자 생각하고 판단하며, 혼자 행동하다가 죽는다. 그러므로 生知安行하는 성인은 없다. 물론 全善의 性氣로 태어나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이상의 경우에 해당하고, 실제로는 모든 사람이 人人箇箇마다 기질과 성질이 다르다. 그러므로 왕양명의 논리는 주자에 대척하기 위하여 만든 牽合府會의 논리이다.
’性是心之體 天是性之原‘에서 心, 性, 天은 어떤 관계인가.
유학자들이 갖는 인식 대상과 체계는 같으나 학설에 따라 순서가 다르다. ’心-性-天‘이라 하는 학파가 있고 ’天-性-心‘이다라는 학파가 있다. 편역자 안길환은 [해설]에서 ’왕양명이 주창한 ‘지행합일’의 사상은 성인과 현인, 그리고 범인에 관한 일을 주자와는 반대되는 순서로 이해하도록 만든 것이다‘라고 한다. 즉 왕양명은 ’天-性-心‘이다. 왕양명은 ’知天‘만 하면 모든 것이 술술 풀린다고 주창한다. 그 知天을 위해서 致良知할 수 있는 ’修心‘이 필요하다고 주창한다.
그런데 유학자들이 간과하는 것이 있다. 즉 천, 성, 심을 일률적이고 고정적인 것으로 보는 관점이다. 그러나 물리적인 사물과 현상은 何時何處라도 동일하나, 살아있는 생물인 인간은 각자의 심이 다르다. 그러므로 성과 천도 다르다. 즉 同心, 同性, 同天이 아니라 個心, 個性, 個天이다. 聖賢들이 논하는 심성천의 동일성은 자연과 우주의 근본 원리이다. 그러나 자연과 우주의 근본 원리는 일정하지만, 실제 운용에 있어서는 다양한 변화가 발생한다. 그러므로 근본 원리의 일정성과 운용의 변화성을 함께 봐야 한다. 물론 변화성을 볼 때 무도하고 불법적인 변화는 걸러내야 한다. 이것이 세상 이치를 제대로 보는 지혜이다.
’天是性之原 천시성지원‘을 바로 읽어야 한다. 여기에서 天은 어떤 모양일까? 天이 둥글다고 볼 수도 있고, 모났다고 볼 수도 있다. 실제의 지구와 우주는 다양다채하다. 일정하게 정해진 한 모습이 아니다. 그러나 우주학을 몰랐던 선현들은 天을 관념화하여 이상적인 극치의 경지로 보았다. 객관적이 아니라 주관적으로 보았으며, 과학적 대상이 아니라 도덕적 가치로 여겼다. 天은 냉엄하다. 작은 정에 연연하지 않는다. 만물만사만생으로 하여금 희로애락 길흉화복 영고성쇄 생로병사를 반복하도록 풀어 놓는다. 이러한 天의 정체를 정확하게 보는 능력이 지혜이다. 지혜를 아는 자는 天이 돌리는 수레바퀴에 매달려 가면서도 느긋하게 웃는다. 天이 가슴을 지나 마음에 들어앉았기 때문이다.
이어서 양명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원문] 存心者 心有未盡也 知天 如知州知縣之知 是自己分上事 已與天爲一 존심자 심유미진야 지천 여지주지현지지 시자기분상사 이여천위일
[국역] ’마음을 두고 있는 사람‘은 마음을 다하지 못하는 바가 있는 것이다. 하늘을 안다(知天)는 지(知)는 지주, 지현(주와 현과 같은 고을의 사정을 잘 알다)의 지와 같은 뜻으로서, 그것은 모든 사물을 자기 자신에 관한 일로(세상 만물만사가 나를 중심으로 서로 얽혀있다) 받아들이는 것이기 때문에 이미 하늘과 하나가 됨을 뜻하게 된다.
[송계 논주] ’存心者 心有未盡也‘에서 ’存心者‘란 자기 마음에 집착하는 자, ’存心養性事天‘, ’마음을 다하여 본성을 알고 하늘을 알려고 노력하는 자, 즉 현인을 말한다. 마음이 성과 천으로 통하는 길로서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말한다. 그런데 마음, 심은 온갖 것들의 소굴이다. 그중에서 반듯하고 든든한 것들을 골라내어서 가지런하게 정리해야 한다. 그 능력이 마음의 힘이고, 가지런하게 정리한 것들이 성이다. 이 성은 곧 천에 이어지는 재목이다.
그런데 왕양명은 ’致良知‘할 수 있는 주체로서 ’마음‘을 사상의 중심으로 삼는다. 그러면서도 ’知天‘을 聖人의 경지인 上智로 삼고 ’事天‘을 賢人의 경지인 下智로 삼는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했듯이 그 ’마음‘이란 물건이 한 공장에서 찍어낸 물건이 아니라 살아있는 생물인 인간마다 갖고 있는 고유의 소유이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 그러므로 ’마음‘의 다양성과 변화성을 중시하지 않는 사상과 철학은 구두선이나 공리공론일 수밖에 없다.
’是自己分上事 已與天爲一‘은 천하만물의 존재 의미와 원리, 가치를 알아 자기 것으로 만들다이다. 또한 천지가 나를 태어나 존재하게 하고, 또한 거두어들임을 이해함으로써 천과 나는 하나가 된다.
이어서 왕양명은 ’事天‘을 ’知天‘의 성인에 못 미치는 현인으로 말한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이 주자의 학설을 비판하고 있다.
[원문] 今卻倒做了 所以使學者無下手處 금각도주료 소이사학자무하수처
[국역] 그런데 주자는 지금 이 성인, 현인, 범인의 순서를 반대로 이해하고 있다. 그래서 학문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손댈 수 없게 만들었던 것이다.
[송계 논주] 성인과 현인은 단번에 이루어지지 않고 오랜 공부와 수양을 거쳐서 비로소 이루어진다. 그렇다면 凡人-賢人-聖人의 순서가 맞다. 공부의처음으로 格物致知가 맞다. 生而知之 성인은 말과 이상에는 있지만 현실에는 없다. 천성이 선량하고 양순한 사람이 있다. 그러나 그 사람이 성인의 경지에 저절로 든다고 할 수는 없다. 생각이 많은 사람과 적은 사람의 차이, 깊은 사람과 얕은 사람의 차이가 있다. 생각 많고 깊을수록 복잡한 사람이고 작고 얕을수록 단순한 사람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學而時習之하며 꾸준히 지식을 쌓고, 쌓은 지식을 경험과 섞어 발효시켜 지혜로 만들어 승화시켜야 한다.
주자의 학문 순서가 맞다. ’親民‘을 ’新民‘으로, 學而時習之의 ’배울 學‘을’ 본받을 效‘로 본 아집은 있지만 학문에 대한 자세는 학자답다. 초학자는 ’盡心知性知天‘의 성인을 목표로 하여 심신수양과 격물치지를 하며 학문의 기초를 닦고, 불철주야 궁구노력하여 ’存心養性事天‘의 현인에 당도하는 것을 최선의 성과로 삼아야 한다.
그러나 왕양명은 주자에 반대하고 맞서기 위해 무리하게 논리를 비약시키거나 비틀고 있다. 고전을 오독하거나 牽合府會하는 경우가 있다. 아마 그러한 점들 때문에 양명학이 동양학문의 주류가 되지 못하고 변방에 머물렀을 것이다.
’격물치지‘가 주자성리학의 출발점이지만 다른 학문을 하는 데도 유효하다. ’격물치지‘가 기르고자 하는 목표는 사물과 현상에 대한 관찰과 성찰을 통한 본성과 본질의 파악이다. 옛 학문에서는 서책을 바탕으로 주로 학인 자신의 직관과 사유를 통한 지식의 습득이었다. 축적한 지식을 종합하여 사물과 현상의 본질을 파악하여 자기 생활에 이용하는 것을 지혜로 삼았다. 그러나 현대사회는 옛날보다 훨씬 많은 서책과 정보가 넘쳐 흐른다. 뿐만아니라 이미 고금의 현인들이 축적해놓은 지혜가 많다.
古學人들은 격물치지 할 수 있는 방법이 서책과 주변 환경 등으로 한정되어 있었지만, 현대에는 물리학, 생물학, 화학, 천문학 등 사물과 현상의 본질을 깊이 파악한 학문이 즐비하다. 현대과학을 공부해 보면, 불교의 무상, 공, 겁, 윤회 등의 개념과 성리학의 태극론, 무극론, 이와 기, 일이분수, 일원론, 이원론 등의 개념이 현대과학의 원리들과 비슷한 인식 체계를 가짐을 볼 수 있다. 불교와 성리학의 개념들이 현대과학에 의해 검증되고 있다고 할 수 있으므로 앞으로 불교와 성리학이 더 깊어질 수 있을 것이다.
고학인들의 지식 통로와 의식 체계는 단순했다. 그러나 현대인은 매우 복잡하고 다양한 지식 통로와 의식 체계를 갖고 있다. 고학인들에 비해 지식과 지혜에 접근하기가 훨씬 쉽다. 즉 ’知天‘과 ’事天‘에 가까이 있다. 서울로 가는 방법은 다양하다. 학문의 성취에 이르는 방법은 다양하다. 학문의 성취에 이르는 방법론을 갖고 이러니 저러니 다투고 경쟁하고 시샘하고 반대하는 것은 소인배의 짓이다. 凡人-賢人-聖人의 순서가 바로든 거꾸로든 주자와 왕양명 모두 학문을 통해 ’事天‘의 경지에 오르고 이어서 ’知天‘의 경지에 오르고자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