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 종교와 이성 : 테르툴리아누스 vs 안셀무스
① 종교와 신앙에 대한 관심
우리는 흔히 “왜 사는지 모르겠다” 라는 말을 할 경우가 있다.
“야, 그런거 생각하지 말고 그냥 살아라” 하는 말도 한다.
이른바 삶의 목적이나 의미를 묻는 울음이다. 영미 언어-분석철학의 위대한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은 “세상 안에서 삶의 가치를 찾을 수 없다” 라고 합니다. 즉 삶의 가치는 세상 밖에서 찾을 수 있다는 말이다. 세계는 이성적으로 파악이 된다. 그러나 삶의 목적이나 의미는 초월적인 어떤 것과의 관계에서 비로소 이해를 한다. 초월적인 존재와 삶의 관계를 종교 혹은 신앙이라고 한다.
그러나 문제는 초월적 혹은 종교적 진리는 과학이나 철학 밖에 있다. 즉 이성의 한계를 넘어선다. 이성의 한계를 넘어선 것은 불합리하다는 것이다. 이를 철학은 독단주의 라고 비판 한다.
② 분별지, 견성오도
불교에서 이성적, 합리적 진리를 분별지(分別智)라고 한다. 반면 종교적 진리는 불립문자(不立文字) 견성오도(見成吾道) 라고 한다.
③ 이성과 신앙의 불일치, 불합리하기 때문에 믿는다.
2~3세기 아프리카의 신학자 테르툴리아누스는 불합리하기 때문에 나는 믿는다 라고 했다. 종교적 진리가 상식의 관점에서 볼 때는 불합리하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그는 “신의 아들이 비천한 육신의 몸으로 태어났다 혹은 그가 십자가에 매달리고 부활했다” 는 성경의 진리는 –이성과 과학의 관점에서는 불합리하다, 그러나 나는 불합리하기 때문에 믿는다 라고 주장했다. 이런 면에서 그는 또 예루살렘과 아테네는 관계가 없다 라고도 했다. 전자는 신학과 믿음의 고향이고 후자는 철학과 이성의 고향이다.
과학과 종교는 다르다. 종교는 비과학적이다 는 현대적 관점이 있다.
④ 이성과 신앙의 일치, 안셀무스, 알기 위하여 믿는다.
11~12 세기의 신학자 안셀무스는 “신앙은 지성을 요구한다” 라고 말하고 또 “나는 믿기 위해 알지 않고 알기 위해서 믿는다” 라고 했다. 알기 위하여 믿는다 고 할 때 그 앎이란 상식이나 세상 지식을 말하지는 않는 것 같다. 지성을 요구하는 신앙에서 그는 신존재 증명을 최초로 발견했다. 교회와 성경의 가름침으로 믿는 신, 하나님은 이성적으로도 증명할 수 있다는 믿음이다. 이를 흔히 존재론적 신존재 증명이라고 한다.
최고의 존재 라는 관념이 내 마음 속에 있다. 그러나 내 마음 속에 있기만 하면 그것은 최고의 존재가 될 수 없다 따라서 그것은 현실에서도 있어야 한다. (마음 속의 애인, 현실의 애인)
⑤ 종교의 수용은 각자의 선택과 결단이다. 이는 과학과 비과학의 구별을 초월한다.
https://youtu.be/moguJlDEZV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