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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족함이 없는 축복의 은혜(시 23:1-6)
할렐루야! 은혜의 보좌 앞에 나온 여러분 모두를 주님의 이름으로 환영합니다. 축복합니다. 참 잘 오셨습니다.
옆사람과 인사를 나누겠습니다.
“참 잘 오셨습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사랑합니다.”
맥스 루케이도가 쓴 “짐을 버리고 길을 묻다(가벼운 여행길)”(Traveling Light)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시편 23편을 들고 떠나는 영혼의 순례”라고 하는 작은 제목이 붙어 있습니다. 저자는 하나님 없이 사는 사람들은, 아마도 시편 23편을 이렇게 읽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나의 목자는 바로 나 자신이니 언제나 부족하리로다. 내가 이 백화점에서 저 쇼핑센터로, 이 병원에서 저 요양원으로 안식을 찾아 헤매고 다니나, 결코 안식을 얻지 못하리로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기어다니며 안절부절 하는도다. 구충제에서부터 전깃줄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두려워하며, 어머니의 치마 고리를 붙잡고 늘어지기 시작하리로다. 매주 열리는 직원회의에 들어갈 때마다, 적들이 나를 둘러 쌀 것이며, 집에 돌아간다 해도, 하찮은 금붕어까지 찌푸린 얼굴로 맞을 것이다. 내가 강력 진통제로 두통에 찌든 머리에 기름을 부었으니, 독한 술이 내 잔에 넘치나이다. 내 평생에 정녕 고통과 불행이 나를 따르리니, 죽는 날까지, 신에 대한 회의 속에서 영원히 거하리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이 시대는 풍요의 시대입니다. 먹을 것과 입을 것들이 넘쳐납니다. 때로는 냉장고에 오래 놔두었다가 먹지 못하고 버리는 것들도 많고, 때로는 장롱 속에 오래 처박아두어서, 세월이 지나고, 철이 지나고, 그러는 사이, 키가 자라서, 입지 못하고 버리는 옷들도 많습니다.
얼마전 다녀온 필리핀에서 차를 타고 시내를 나가면, 아이들이 달리는 차에 올라 탑니다. 목걸이를 손에 가득 들고, 그 목걸이를 팔려고 차에 올라타는 것입니다. “원 달러. 원달러”
필리핀에서 잘 사는 사람들은 우리들보다 엄청나게 잘 산다고 합니다. 그러나 대부분 가난한 사람들은 아이들이 팔아 얻는 몇 달러의 수입이 아빠 한달 수입보다 더 많다고 합니다. 그들에 비하면 우리는 너무나 호화롭게 살고 있습니다.
여러분! 모든 문화적 환경이나 여건들은, 몇 십년 전에 비해서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풍요롭습니다. 그러나 오늘 여러분들이 느끼는 삶의 질은 어떻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물질적인 풍요로움 속에, 정신적인 공허를 느끼고 있습니다. 삶의 무의미 속에서,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먹는 것, 입는 것, 사는 것, 모든 것들이 예전에 비해, 훨씬 좋아졌음에도 불구하고, 삶 속에는 여전히 채워지지 않은 갈증이 있습니다. 목마름이 있습니다. 무엇인가 좇기는 인생을 삽니다. 불안합니다. 뭔가를 해야만 할 것 같은데, 무엇을 해야 할지 모릅니다. 즐 허전합니다. 먹어도 먹은 것 같지가 않습니다.
수능이 며칠 남지 않았습니다. 4일 남았습니다. 고 3학생들은 입시 전쟁 속에서 점수에 생명을 겁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좋은 직장에 들어가면, 예전에는 퇴직할 때까지 한 직장에서 온 생애를 바치기도 했습니다. 평생 직장이었습니다. 그러나 평생 직장이란 단어는 옛말입니다. 직장에서도 자신의 위치가 불안합니다. 사업을 해도, 언제나 팽팽한 긴장감이 맴돕니다. 한 순간 방심하면, 평생을 공들인 탑이 무너집니다. 성공과 실패가 한 순간입니다.
안정되고, 평화스러운 삶의 모습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굶주린 늑대처럼, 무엇인가를 찾아, 좇고 좇기며, 살아가는 것이, 현대인들의 모습입니다. 뭔가에 갈급해 하고, 뭔가에 허기져 있습니다. 채워도 채워지지가 않습니다.
그런데 오늘 시편 23편을 기록한 다윗은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I shall not be in want.)라고 고백합니다. 이것은 “나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습니다. 나는 더 이상 원하는 것이 없습니다.”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 더 이상 요구할 것이 없는 최고로 만족스러운 상태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흔히 이렇게 생각하기 쉽습니다. 다윗이 얼마나 많은 축복을 받았기에,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 상태인가?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시편 23편은 다윗이 인생의 말년에 쓴 시입니다.
이 시의 배경은, 다윗이 사랑하는 아들 압살롬의 반역에 의해 도망 다니던 상황에서 기록되었습니다. 시편 42편이 같은 상황 속에서 쓰여진 시편입니다. 아들 압살롬이 아버지 다윗을 죽이겠다고 칼을 들고 쫓아다니는 상황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다윗을 비아냥거립니다.
“사람들이 종일 내게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오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시 42:3절)
무슨 말입니까? 정말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어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고, 사람들이 조소합니다.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그 비아냥거리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아버지로서, 한 나라의 왕으로서 얼마나 가슴 아픈 일입니까? 얼마나 속상한 일입니까? 그래서 다윗은 눈물이 주야로 음식이 되었습니다. 눈물로 침상을 적셨습니다. 아들 압살롬 때문에 밤새 눈물로 침상을 적시며 울었습니다.
이런 상황이라면, 당연히 하나님을 향하여, 손가락질을 할 만합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어떻게 이런 아픔을 주시느냐고, 하소연할 만도 합니다. 그런데 오히려 다윗은 “나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습니다.” “이 보다 더 좋을 수는 없습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여러분은 이런 상황이라면, 그런 고백이 나올 수 있을까요?
“나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습니다. 이 보다 더 좋을 수는 없습니다.”
“나는 더 이상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나는 더 이상 하나님을 믿지 않겠습니다. 나는 더 이상 교회에 나오지 않겠습니다. 이보다 더 나쁠 수는 없습니다.”
이 두 고백 가운데 어떤 고백을 할 수 있을까요?
다윗은 극한 상황 속에서도 “나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습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다윗으로 하여금, 이렇게 놀라운 믿음의 고백을 할 수 있도록 만들었을까요? 이것은 풍요 속에서도 빈곤을 느끼며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던지는 하나님의 메시지입니다. 그렇다면 오늘의 삶 속에서 다윗처럼 “나는 부족함이 없습니다”라는 고백을 드릴 수 있는 비결은 무엇일까요? 그 비결을 알아 다윗처럼 믿음의 고백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첫째, 하나님은 나의 목자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1절 말씀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아멘.
다윗은 원래 양을 치는 목동이었습니다. 따라서 양과 목자의 관계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양은 좀 특별한 짐승입니다. 언젠가 평창에 있는 삼양대관령 목장에 간 적이 있었는데, 그때 당시 구제역 파동이 있어서, 푸른 풀밭에서 풀을 뜯고 있는 소들은 보지 못하고, 몇 마리 양들을 보고 온 적이 있었습니다. 그 양의 털을 직접 만져 보기도 하고, 사진을 찍기도 했는데, 양은 사람을 보고 도망가지 않습니다. 염소는 뿔로 사람을 들이 받지만, 양은 아주 순합니다. 목자가 이동하기 위해, 줄로 양들을 묶을 필요가 없습니다. 한 마리를 앞세우고 가면, 다른 양들은 줄에 엮인 굴비처럼 따라옵니다. 그러다 보니, 자신을 지킬 만한 능력이 없습니다. 사나운 부리나 발톱이 없습니다. 약초인지 독초인지 구분할 수 있는 능력도 없습니다. 스스로 집을 찾아올 수 있는 능력도 없습니다. 따라서 양은 반드시 목자가 필요합니다. 목자 없는 양은, 언제 낭떠러지로 떨어질지 모릅니다. 독초를 먹고 죽을 수도 있습니다. 사나운 맹수의 공격 앞에 속수 무책입니다. 자기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양 같은 사람이라면, 이 험한 세상에서 패배자가 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도저히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래서 양 곁에는 언제나 목자가 있습니다. 목자는 양이 언제 풀을 먹어야 하고, 언제 물을 먹어야 할지 압니다. 어디에 가면 물이 있고, 어디에 가면 좋은 풀이 있는지 알고 있습니다. 양은 목자 곁에 있으면, 안전합니다. 혹시 구덩이에 빠져도, 목자가 지팡이를 가지고 건져줍니다. 독초가 있으면 뽑아버립니다. 맹수가 와도 막데기로 물리쳐 줍니다. 저녁이 되면, 안전한 우리 안에 집어 넣고, 보초를 섭니다. 이것이 목자입니다.
다윗은 목자로서 양들을 돌본 경험이 있기에,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나는 부족함이 없습니다.”라고 고백합니다. 목자는 양들의 모든 필요와 처지를 다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목자 곁에만 있으면, 만사 OK입니다.
우리는 “나는 하나님의 어린 양입니다.”라는 고백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질그릇과 같이 깨어지기 쉬운 자들입니다. 사람이 강한 것 같지만, 얼마나 미련하고 약한 존재입니까? 한치 앞도 보지 못하고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짐승은 자신의 죽음을 본능적으로 알지만, 인간은 알지 못합니다.
내가 나를 알 수 없고, 지킬 수 없는 존재가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양은 언제나 양이어야 합니다. 양이 호랑이나 사자처럼, 으르렁 거리고 싸우면, 목자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스스로 호랑이나 사자처럼 살려고 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자기 힘을 과시하고, 자기의 능력을 자랑합니다. 자기의 재물을 자랑합니다. 이것은 “나는 양이 아니라 호랑이다”라고 소리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깨닫는 것이, 지혜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나의 약함을 오히려 자랑하리라”고 말씀합니다. 약함 속에 하나님의 능력이 임합니다. 약함 속에 하나님의 도우심의 손길이 임하기 때문입니다. 약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특별한 관심과 사랑을 더 많이 받습니다. 강하면 부러집니다. 그러나 약하면 돌봄을 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나는 양의 문이다”(요 10:7)라고 선포하십니다.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요10:9)고 말씀하십니다. 양의 문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목자로 모시면, 구원을 얻습니다. 생명의 꼴을 먹습니다. 도둑이 오는 것은 죽이고 도둑질 하러 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 10:10)고 말씀하십니다.
이 세상에서 아무리 많은 것을 가져도, 생명의 주인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목자로 모시지 못하면, 삶의 무의미와 결핍 속에 빠집니다. 죄악 가운데서 허우적거립니다. 죽음의 공포 속에서 염려와 근심 속에 빠집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혀 살아갑니다. 물질이 있어도, 그 물질 때문에, 호히려 힘든 삶을 살아갑니다.
제 2차 세계대전 직후, 연합군은, 굶주리고 집 없는 아이들을 모아, 커다란 캠프 안에서 함께 살도록 했습니다. 거기서 아이들은 배불리 먹을 수 있었으며, 보살핌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밤이면 잠을 잘 이루지 못하고, 불안해하는 모습들이었습니다. 마침내 어느 심리학자가, 한 가지 묘안을 생각해 냈습니다. 아이들이 침대 속에 들어간 후에, 각자가 손에 쥐고 있을 빵을, 한 조각씩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것은 먹으라고 준 것이 아니라, 그냥 손에 들고 있도록 준 것입니다. 그런데 그 자그마한 빵 한 조각이, 놀라운 효과를 가져 왔습니다. 아이들은 내일 먹을 것이 있다는 안도감에서, 평안히 잠들었던 것입니다. 내일 먹을 것을 염려해야만 했던 이 아이들이, 내일 염려를 해결 받았을 때, 비로소 평안히 잠들었습니다. 이것이 어찌 전쟁 고아들만의 심리 상태이겠습니까?
내일 먹을 것을 염려하지 않아도 될 만큼, 많이 가진 사람 중에도, 자식들 대에 먹을 것까지 염려하느라, 평안히 자리에 눕지 못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필요함을 느끼기 오래 전에, 이미 우리의 필요에 대해 예비해 놓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이십니다. 다윗은 이러한 하나님의 공급을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라고 묘사했습니다. 푸른 풀밭에 누워 있는 것입니다. 왜 푸른 풀밭에 누워 있는 것입니까? 배가 이미 너무 부르기 때문에, 앞에 푸른 풀밭이 있어도 더 먹을 수가 없습니다. 속이 꽉 찼습니다. 포만감으로, 이제는 더 이상 먹을 수 없어서, 그 음식 위에 쭉 누워있는 양의 모습! 하나님이 우리의 필요를 채우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만이 여러분의 필요를 채우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나의 목자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따라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나의 인도자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대로 따라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장 좋은 것으로, 푸른 풀밭과 쉴만한 물가로 우리를 인도하여 주십니다.
여러분! 오늘날 왜,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땅에 살면서 쉬지 못하고 힘들어하며, 믿지 않는 사람과 똑같은 불안에 사로잡혀 똑같은 스트레스를 받으며, 이 세상을 힘들고 어렵게 살아갑니까? 불안과 두려움 속에서 살아갑니까? 갈증과 목마름 속에서 허우적거립니까? 이유는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것을 믿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돌보심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내 인생의 주인이시고, 목자가 되심을 믿고 나갈 때, 하나님이 나의 인도자가 되심을 믿고 순종할 때, 우리의 인생은 푸른 풀밭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쉴만한 물가에서 주님과 더불어 먹고 마시는 복을 누립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나의 목자로 모실 수 있을까요? 하나님을 목자로 모시는 것은 간단합니다. 어렵지 않습니다. 내 고집을 꺾으면 됩니다. 내 생각, 내 주장 대신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생각을 품으면 됩니다. 내 인생의 진로를 주님께 맡기면 됩니다. 내 고집대로 가려고 하지 말고, 내 인생의 선장되시는 주님께 키를 맡기면 됩니다.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네가 경영하는 것이 이루어지리라”(잠 16:2)
지난 번에 필리핀에 다녀왔을 때, 총무로 다른 목사님들을 섬겼습니다. 총무가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한 마디로 돈 관리입니다. 전체적인 경비는 다 지출되었다지만, 매순간마다 돈 가방을 들고 다녀야 합니다. 우리나라는 팁 문화가 발달되어 있지 않지만, 외국에서는 팁 문화입니다. 어디 가서 식사를 해도, 팁을 줘야 합니다. 과일이 먹고 싶다면, 과일을 사야 하고, 음료수를 마시고 싶다면 음료수를 사야 하고, 이것저것 구입할 때마다 돈을 지불해야 함으로, 돈 가방을 언제든지 들고 다녀야 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맡길 수가 없습니다. 돈을 지불하면, 반드시 수첩에 꼭 적어야 합니다. 하루 일정을 마치고 계산을 하면 잘 생각이 나지 않으므로, 그때 그때마다 꼭 기록을 남겨야 했습니다. 그런데 다른 목사님들은 빈 손 들고, 다닙니다. 왜 그렇습니까? 저한테 다 맡겨 버렸기 때문입니다. 돈 지출하는 것에 대하여는 저한테 다 맡겨 버렸기 때문에, 돈이 있는지 없는지 걱정하지 않습니다. 저의 돈 가방 속에는 한국 돈이 들어 있고, 미국 달러가 들어 있고, 그리고 그 나라 돈이 페소가 들어 있습니다. 주로 쓸 때는 달러로 쓰고, 잔돈은 그 나라 돈으로 받고, 달러가 부족한 목사님이 한국 돈을 달러로 바꿔 달라고 하면, 그 자리에서 환전도 해야 하고, 때로는 이 돈 저 돈이 뒤엉켜서, 얼마를 쓰고, 얼마가 남아 있는지, 계산이 잘 안될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중간중간에 쉴 틈에 쉬지도 못하고, 계산을 하기도 하고, 바닷물에 들어가야 하는데, 돈 가방 들고 들어갈 수가 없어, 돈 가방을 의자에 올려놓고, 긴 수건으로 덮어 놓고, 물 속에 들어갔다 나오면, 한 번 쳐다보고, 물 속에 들어갔다 나오면 또 한번 쳐다보고, 그렇게 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분들은 아무 염려도 없이, 걱정도 없이, 하고 싶은 일들을 마음껏 했습니다.
내가 무언가를 맡고 있으면, 참 힘들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맡겨 버리면, 아주 편합니다.
여러분! 무슨 일이든 하나님께 맡기며 사십시오. 하나님께 맡기면,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십니다. 내 인생을 내가 책임지려면, 피곤하고, 힘듭니다. 인생길이 너무나 곤고합니다. 그러나 내 인생의 목자 되시는 주님께, 내 시간과 물질과 자녀와 직장과 사업을 맡기면, 주님께서 책임져 주십니다. 내 생각이나 경험을 앞세우지 마십시오. 온전히 주님 앞에 겸손히 엎드리십시오. “나는 단지 주님의 심부름꾼입니다. 나는 주님의 청지기일 따름입니다.” 이런 믿음의 고백으로 주님 앞에 서면, 하나님께서 잔이 넘치도록 채워주십니다.
찬송가 549장입니다.
1절: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온 몸과 영혼을 다 주께 드리니
이 세상 고락간 주 인도 하시고 날 주관하셔서 뜻대로 하소서.
3절: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내 모든 일들을 다 주께 맡기고
저 천성 향하여 고요히 가리니 살든지 죽든지 뜻대로 하소서
여러분! 이 믿음의 고백이 있게 될 때, 주님이 주시는 부족함이 없이 채워주시는 축복을 누리게 될 줄로 믿습니다.
부족함이 없는 축복의 은혜를 받으려면,
둘째, 하나님은 나를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분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3절 말씀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아멘.
이스라엘 광야에는 길이 굉장히 많습니다. 그것을 “트레일”(Trail)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고속도로가 아닙니다. 일부러 길을 닦아 놓은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자꾸 밟아서 생긴 산길 같은 것을 “트레일”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의의 길”이란 것은 바로 이러한 길입니다. 짐승이 밟았든, 사람이 많이 밟았든, 거기에는 수많은 길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길들은 사나운 짐승이 밟아서 생긴 잘 닦여진 길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길로 가면 양은 죽습니다. 그뿐 아닙니다. 좋은 길을 한 번은 알았다고 해도, 사막에 모래바람이 불고 나면, 그 길이 금방 다 숨어져 버려, 어디가 길인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나 목자는 압니다.
선교사 스탠리 존스가, 인도 밀림 지역에 선교를 하러 갔는데, 길을 잃어버려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이 밀림 지역에서 죽는구나!”라고 생각하는데, 마침 옆에 벌목을 하는 한 원주민이 있었습니다. 원주민에게 가서 “내가 길을 잃었는데 길을 좀 찾아 주시오.” 하니까, “기다리고 계시오.” 하면서 가는 길은 알려 주지 않고, 오랜 시간 동안, 자기 일만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해가 지니까, 따라 오라고 하면서, 무작정 숲 속을 뛰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텐리 존스가 “길이 어디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원주민은 그를 쳐다보더니, 한 마디 했습니다. 무엇이라고 한 마디 했을까요?
“이 곳은 길이 없소. 내가 곧 길이요.”
원주민을 따라가야 할까요? 다른 길로 가야 할까요?
그 선교사는 원주민을 따라가서, 그는 결국 살아났습니다. 그때 그는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하나님을 향해, “주님이 곧 나의 길이십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여러분! 내가 누구의 인도함을 받느냐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더욱이 의의 길로, 생명의 길로 인도함을 받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한 번도 살아보지 않은 인생의 길을 안내 받는데, 누구의 인도를 받겠습니까? 모든 인생을 주관하는 전문가의 안내를 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의의 길로, 생명의 길로 인도하시는 전문가 중의 전문가이십니다. 그러한 하나님께서 언제 어디서나, 우리를 의의 길로 인도하실 줄로 믿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자기 이름을 위하여, 우리를 인도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서라도, 결코 하나님은 우리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그대로 두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지금 비록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있다 할지라도, 낙심치 않으면, 반드시 잔이 넘치는 축복의 삶으로 채워 주실 줄로 믿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인도하십니다. 우리는 열심히 주님의 뒤만 따라가면 됩니다.
잠언 3:5-6절에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을 인정하기만 하면 됩니다. 하나님을 믿기만 하면 됩니다. 내 힘, 내 머리, 내 돈을 믿지 말고, 하나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저에게 손해가 되더라도 하나님을 따르겠습니다. 주여, 나를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이렇게 기도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항상 의의 길로 인도해 주실 줄 믿습니다. 부족함이 없는 축복을 쏟아 부어주실 줄을 믿습니다.
부족함이 없는 축복의 은혜를 받으려면,
셋째, 하나님은 나를 보호해 주시는 분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5절 말씀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아멘.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신다.”
하나님을 목자로 모시고 사는 사람은, 대적의 모든 것을 꺾으시고, 승리케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덧입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수의 목전에서 보란 듯이 큰 잔치상을 차려 주십니다.
미국의 “수잔 앤더슨” 부인이라는 분이, 시력이 나빠 수술을 받았다가, 수술이 잘못되어 실명하고 말았습니다. 실명이 된 아내를, 남편이 아내의 직장까지 매일 같이 함께 출퇴근을 시켜 주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남편이 아내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언제까지나 내가 당신을 데리고 다닐 수 없고, 당신도 언제까지나 날 의지할 수가 없으니까, 이제부터는 당신 혼자 출근하시오.”
아내가 그 이야기를 듣고 남편의 말에 수긍은 했지만, 마음 한 구석엔 섭섭함이 밀려왔습니다. 그래서 이를 악물고, 혼자 출근하기 시작했습니다. 넘어지기도 하고, 부딪치기도 하고, 때로는 서러워서 눈물도 흘렸지만, 조금씩 적응이 되고, 익숙해져 갔습니다. 그렇게 혼자 다니기 시작한지, 보름쯤 지난 어느 날, 버스를 탔는데 버스 운전사가 “부인은 좋겠네요. 아주 훌륭한 남편을 두셨군요. 매일 한결같이 부인을 보살펴 주는군요.”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알고 보니까, 남편은 아내가 버스를 타면, 같이 타서 뒷자리에 앉고, 아내가 회사에 들어가는 것을 본 뒤에, 자기 직장에 출근했던 것입니다. 아내 보고는 혼자 가라고 했지만, 혼자 둔 것이 아니라, 뒤에서 늘 지켜보고 살펴 본 것입니다. 아내는 보이지 않았지만, 보이지 않는 속에서 보호하고 돌봄을 받은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시험 당할 때, 우리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혼자 두시지 않습니다. 지켜 보십니다. 살펴 보십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우리를 보호하십니다. 우리는 비록 하나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는지, 안 도와주시는 잘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살펴보고 계시며, 늘 돌보아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시험을 당할 때에, 하나님께서 능력으로 보호하고 계심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세상을 살다보면, 때로는 우리의 앞에 놓여진 상황이, 절망적이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는 것과 같은 어두울 때를 경험하기도 합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도저히 감당하기 힘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럴 때에도, 하나님은 우리의 목자가 되셔서, 우리를 모든 역경과 난관에서 구원해 주시며, 모든 위험으로부터 보호해 주십니다. 하나님의 지팡이와 막대기로 보호해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오늘은 일년 동안 보호하시고 지켜주신 하나님께 감사예배를 드리는 추수감사주일입니다. 원래 “감사하다”(THANK)라는 말은 “생각하다”(THINK)라는 단어에서 나왔습니다. 올 한 해 동안, 여러 가지 사고와 질병과 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에벤에셀의 은총으로 지켜주신 하나님을 깊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베풀어 주신 은혜에 대해서, 감사의 제목들을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감사하시기를 바랍니다. 찬양하시기를 바랍니다.
골로새서 2:6-7절을 보면,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고 했습니다.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믿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감사가 넘치는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죽을 수밖에 없고, 멸망당할 수밖에 없는 우리를, 십자가의 보혈로, 용서해 주시고, 사랑해 주시고, 덮어주시고, 깨끗케 해주시고, 자유케 해주시고, 거룩하게 해 주시고, 자녀 삼아 주시고, 아들의 나라로 옮겨주시고, 천국을 소망하게 하시고, 이것저것 다 주셨습니다. 우리가 가진 것, 우리가 누리고 있는 것, 모든 것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다 주셨습니다. 생명도 주셨고, 물질도 주셨고, 가정도 주셨고, 자녀도 주셨고, 교회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늘 감사한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오늘만 감사하는 날이 아니라 우리의 남은 생애가 감사함으로 넘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지난 한 해 동안 우리 주변에는 엄청나게 많은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그 수많은 일들 가운데에서도, 오늘 이 시간 주님의 집인 교회에 나와 앉아 있을 수 있는 은혜를 더하여 주셨습니다. 이것만큼 큰 은혜가 없습니다. 이것만큼 큰 축복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이미 은혜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미 축복받은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은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풍요 속에 빈곤을 느끼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삶 가운데, 부족함이 없는 축복의 은혜를 누리며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원망과 불평의 삶이 아닌 감사와 찬양의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빈곤과 불만족의 삶이 아니라 풍요와 만족의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부족함이 없는 축복의 은혜를 누리며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넘치는 감사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먼저 하나님을 나의 목자로 모시고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의의 길로 인도해 주심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를 항상 지키시고 보호해 주시는 분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 믿음으로 주님을 바라볼 때, 푸른 풀밭과 쉴만한 물가에서, 부족함이 없이 채워주시는 축복의 은혜를 누리게 될 줄로 믿습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필요한 것들을 그때그때마다 공급하여 주십니다. 가장 좋은 것으로 채워 주십니다. 넘치도록 채워 주십니다. 풍성하게 채워 주십니다.
“주님, 나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습니다. 주님 한 분 만으로 만족합니다.”
“나는 행복해요”라는 복음성가가 있습니다.
“주님 한 분 밖에는 아는 사람 없어요. 가슴 깊이 숨어 있는 주를 사랑하는 맘
주님 한 분 밖에는 기억하지 못해요. 처음 주를 만난 그 날 울며 고백하던 말
나는 행복해요 죄사함 받았으니 아버지 품안에서 떠나 살기 싫어요.
나는 행복해요 사랑이 샘솟으니 이 세상 무엇이든 채우고도 남아요
주님 한 분 밖에는 사랑할 이 없어요. 작은 가슴 뜨거웁게 주님 피가 흘러요.
주님 한 분 밖에는 약속한 이 없어요. 나를 믿고 따르는 자 반석 위에 서리라
나는 행복해요 죄사함 받았으니 아버지 품안에서 떠나 살기 싫어요
나는 행복해요 사랑이 샘솟으니 이 세상 무엇이든 채우고도 남아요”
여러분! 이 고백이 우리 모두의 신앙고백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합니다.
주님! 주님께서 나의 구원자가 되셔서, 나를 하나님의 자녀 삼아 주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나의 목자가 되셔서 나를 푸른 풀밭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여 주심을 감사를 드립니다.
나의 인도자가 되셔서 의의 길로 인도하여 주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나의 필요한 것을 그때그때마다 공급하여 주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나에게 건강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나에게 생명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나에게 축복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지난 일년 동안 지키시고 보호하여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교회를 주시고, 교회를 통하여 은혜가 넘치는 삶을 살게 하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