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전선시장에 불법·불량 전선이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다. 수요위축과 동가 상승, 과당 경쟁 등 경영 환경이 악화되는 속에서 ‘당장 쓰기에 문제가 없다’는 이유만으로 불법·불량 전선은 빠르고 깊숙하게 시장에 침투, 근간을 무너뜨리고 있다. 불법·불량 전선의 실태와 원인, 해결방향 등을 3회에 걸쳐 긴급 진단한다.
“심지어 자기 공장을 짓는 데도 자기가 만든 전선을 안 써요. 다른 회사 제품을 사다 씁니다. 내 회사 품질에 자신이 없으니까요. 부끄럽지만 이게 엄연한 현실입니다.” 모 전선제조업체 영업 담당 임원의 말이다. 불법·불량 전선이 판치고 있다. 저급 사이비 제품들이 품질은 물론이고 가격질서에다 전선 산업의 건전한 성장까지 좀먹고 있다. 세계 10위권 전선기업을 2개나 보유하고 있는 ‘전선 강국’의 위상은 적어도 국내에선 온 데 간 데 없다. 불법·불량 전선의 제조와 유통은 이미 걷잡기 힘든 수준까지 치닫은 상태다. 전선조합이 최근 41개 주요 제조업체의 시판 제품을 수거해 자체 시험을 실시한 결과 무려 76%에 해당하는 31개 업체의 제품이 불법 또는 불량 제품으로 파악됐다. 전선조합이 시장에서 수거한 제품은 비닐외장케이블(TFR CV)과 내열비닐절연전선(HIV), 로맥스전선(CVF) 등 가장 흔하게 쓰이는 범용선으로 도체저항과 핫셋(가교물의 규격 중 하나), 길이 등을 조사해보니 대부분 기준치에 미달하는 부적격 판정이 나온 것이다. 여기에 부도나 폐업한 회사의 명의를 사용하거나 과거 규격을 따르는 비표준 제품도 엄연히 불법임에도 불구, 버젓이 시장에 돌아다니고 있다. 마치 불법과 불량이 서로 경쟁이라도 하듯 전선시장을 갉아먹고 있는 형국이다. 제조업체 한 관계자는 “시장의 주축 기업부터 영세기업(마찌코바)까지 다양한 형태의 불법·불량 전선을 양산하고 있다”면서 “적어도 전선 품질에 관한 한 현재, 그 어느 기업도 자유롭지 못하다”고 잘라 말했다. 한 기업의 자료에 따르면 범용선인 600V/1kVA HIV 2.5SQ의 유통점 공급단가는 2007년 말 m당 189원이던 것이 올해 6월 m당 176원으로 하락했다. 그러나 이 공급단가에 적용된 동가는 각각 톤당 657만 4000원, 664만 2000원으로 오히려 올해가 더 높다. 전선의 핵심 원자재인 동가가 올랐음에도 전선가격은 반대로 하락하는 기형적인 모습이 연출되고 있는 것이다. 업계 한 관계자는 “현재 범용전선의 시장 유통가격은 원가에서 마이너스 수준이고 갈수록 그 폭이 커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처럼 시장가격이 왜곡되고 있는 것은 불법·불량 전선이 시장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 업계의 분석이다. 이같은 행태의 가장 큰 피해자는 우선 소수이긴 하지만 정상적으로 전선을 만들고 있는 기업들이다. 불법·불량 제품으로 인해 원가 이하의 시장가격이 일반화되면서 정상제품을 만들면 만들수록 손해만 커지는 모순에 직면해있다. 유통업체나 공사업체도 언제든 피해자가 될 수 있다. 실제로 안산의 한 아파트형 공장에선 케이블 수량이 대거 미달되자 유통업체가 포설 공사비용까지 배상해준 사례도 있다. 전선누선으로 인한 화재 등 최종 소비자인 국민들도 불법·불량 전선의 폐해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과연 국내 전선시장이 도대체 왜 이런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 것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