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용주유고 제19권 / 신도비(神道碑)
증 영의정 김 장군 신도비명병서(贈領議政金將軍神道碑銘 幷序)
명(明)나라 만력(萬曆) 47년 기미년(1619, 광해군 11) 봄에 건주 여진(建州女眞)이 항명하자 천자가 혁노(赫怒)하여 정벌하러 출병하면서 우리나라에도 군대를 징발하게 하였으니, 내복(內服)과 다름없이 여겼기 때문이다. 당시에 명나라의 경략(經略)은 양호(楊鎬)였으며, 우리나라의 원수는 강홍립(姜弘立), 부원수는 김경서(金景瑞)였는데 군대를 좌영(左營)과 우영(右營)으로 나누었다.
장군은 선천군수(宣川郡守) 겸 조방장(助防將)으로 좌영의 군대를 통솔하였다. 진군할 때 유 도독(劉都督 유정(劉綎))과 교 유격(喬游擊 교일기(喬一琦)은 선봉을 맡고 우리의 좌영은 그 좌익(左翼)이 되었는데 이일원(李一元)이 장군을 보좌하였으며, 강홍립과 김경서는 중군을 통솔하여 심주(深洲 심하(深河)에 이르러 진을 쳤다.
장군이 이일원에게 이르기를,
“병서에 ‘먼저 북쪽 산을 점거하는 쪽이 승리한다.’는 말이 있다. 지금 우리는 낮은 곳에 진을 쳤으니 불가하지 않겠는가. 어디 높은 곳이 없단 말인가.”하였으나, 이일원은 고집을 부리며 따르려 하지 않았다. 머뭇거리는 사이에 오랑캐 기병(騎兵) 수천이 우리의 왼쪽 진과 오른쪽 진으로 치고 들어오자 이일원이 먼저 달아나 버렸다. 이에 오랑캐의 정예병이 모두 좌영을 집중적으로 공략하였다.
장군이 군중에 군령을 내리기를,
“포수는 화약을 장전하고 궁수는 활을 한껏 당기고 있다가 내가 북을 치거든 그 소리를 신호로 발사하라. 그렇지 않으면 군법으로 다스리겠다.”하였다. 이윽고 철갑으로 무장한 기병이 담장처럼 육박해 왔는데 거리가 10보도 채 안 되었을 때 장군이 북채를 잡고 북을 울리자 탄환에 맞아 죽은 오랑캐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고 빈 안장의 오랑캐 말들이 길을 메우면서 오랑캐가 크게 무너졌다.
잠시 후 오랑캐가 또 장사를 선발하여 손실된 병력을 보충하여 사력을 다해 거의 3, 4합(合)을 싸웠는데 붙었다 하면 아군이 이겼으므로 오랑캐가 달아나려고 하였다. 그런데 갑자기 거센 바람이 몰아쳐 모래와 자갈이 날려 얼굴을 때리고 햇빛을 가려 어두컴컴해졌으며 화기(火器)와 화약이 공중에 날려 아군은 기량을 발휘할 수 없게 되었다.
오랑캐가 이러한 때를 틈타 반격해 오자 아군은 혼란에 빠졌다. 장군은 홀로 버드나무에 의지한 채 대황(大黃)을 당겨 오랑캐를 향해 쏘았는데 맞았다 하면 반드시 쌍으로 맞았고 쏘는 대로 쓰러져서 죽은 오랑캐가 상당히 많았다. 화살이 바닥나자 장검을 쥐고 접전을 벌였는데 베어 죽인 적이 또 쏘아 죽인 것보다 배나 되었다. 장군도 수십 군데나 상처를 입어 이미 목숨이 끊어졌는데도 칼자루를 잡고서 움직이지 않고 꿋꿋이 선 채 눈에 노기를 띠고 있었다고 한다.
그때 중군에서 일단의 지원군을 보내 조금만 도왔다면 오랑캐가 많더라도 장군의 일격에 절반 정도는 타격을 입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강홍립과 김경서는 그저 성벽 위에서 관망하며 되풀이하여 간계만 내다가 장군이 범의 이빨에 물려 피를 흘리는 것을 달갑게 여기며 오랑캐를 향해 화살 한 대도 쏘지 않았으니, 오랑캐가 원수가 아니라 바로 강홍립과 김경서가 원수이다. 이소경(李少卿)이 말하기를,
“나와 위율(衛律)의 죄는 하늘에까지 닿았다.”하였으니, 이는 그래도 자신의 죄를 아는 것이다.
강홍립과 김경서는 자기들의 죄를 아는지 모르겠다. 아, 장군은 참으로 잘 싸웠고 또 장하도다. 두숭(杜崇)과 유정(劉綎)은 중국의 명장으로서 군사 10만을 거느리고도 순식간에 오랑캐에게 유린을 당하여 피가 흘러 길에 물결을 이루고 병졸 한 명도 돌아가지 못하였다.
장군은 홀로 기세등등한 오랑캐를 맞아 엄청난 괴자마(拐子馬)를 제압하여 천 명 될까 말까한 약한 병졸들로 하여금 죽음을 편안히 여기게 하고 자신도 이처럼 오랑캐를 격살하였으니, 비록 관운장(關雲長 관우(關羽)과 악무목(岳武穆 악비(岳飛)이라 하더라도 어찌 이보다 낫겠는가.
교 유격이 죽을 때 동국의 병사는 정예이고 장수는 용맹하다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였으며, 오랑캐도 회군할 때 버드나무 아래의 전장을 피해서 가며 잊지 않고 말하기를,
“버드나무 아래의 장수는 온 힘을 다해 싸웠으니 두려워 할 만하다.”
하고, 시신을 수습하여 묻어주며 말하기를,
“호남자, 호남자로다. 훗날 다시 태어난다면 우리가 얻기를 바란다.”
하였으니, 장군의 명성이 중화와 오랑캐 땅에 진동한 것이 어찌 거짓이겠는가.
사람들이 항상 말하기를,
“강개하여 목숨을 버리기는 쉬워도 의연하게 죽기는 어렵다.”
하였는데, 장군으로 말하면 본래 종군할 때부터 전쟁터에서 죽겠다는 뜻을 굳힌 것이 분명하다.
아우 김응해(金應海)가 장군을 따라가려 하였으나 장군은 함께 죽는 것은 무익하다고 만류하였고, 집안사람과 영결할 때는 사적인 일을 말하지 않았으며, 인장을 봉인하여 군(郡)의 관리에게 맡기면서 적에게 더럽히지 말라고 경계하였으니, 이것이 의연하게 죽음에 나아간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애석하다.
정승 박승종(朴承宗)이 장군을 천거하지 않았으면 그만이거니와 이미 장군의 재능을 인정하여 천거한 이상 어째서 찬후(酇侯)가 회음후(淮陰侯)를 천거할 때처럼 대장의 직책을 맡기지 않았단 말인가. 아니면 그 사이에 국운과 천시가 작용한 것인가. 혹자는 말하기를,
“심하의 전투 때 오랑캐의 세력이 한창 강성하였는데 우리가 만일 그 강한 기세를 꺾어 버렸다면 오랑캐는 틀림없이 10년 동안 힘을 쓰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가 그 사이에 군사를 훈련하여 적이 감히 우리의 변방을 넘보지 못할 정도로 전력을 강화했다면 어찌 병자호란이 일어났겠는가.”하였다. 정말 그 말대로라면 강홍립과 김경서의 죄는 누대에 걸쳐 씻기 어렵다. 경신년(1620) 봄에 신종황제(神宗皇帝)가 장군이 분전하다가 전사한 일을 훌륭하게 여겨 황실 내탕고의 백금(白金 은) 만여 전(錢)을 내어 특별히 우리나라에 보내 장군의 집안을 돕도록 하였다.
이에 천하 사람들이 너도나도 장군을 칭송하고 서로 전하여 명성이 자자하였다. 갑옷으로 무장한 전사는 장군과 함께 오랑캐와 맞서 싸우다가 뒤따라 죽지 못한 것을 한으로 여겼고, 문인들은 장군이 격전을 벌인 실상을 빠짐없이 기록하여 확실히 명나라의 사서(史書)에 반영시켜 빛나게 하지 못할까 염려하였다.
지금 장군이 죽은 지 40여 년이 다 되어 가는데도 사람들이 마치 호령하는 장군의 모습이 눈앞에 보이는 것처럼 그 일을 이야기하여 생생하게 생기가 넘치니 그 누가 사람이 해골과 함께 모두 썩어 버렸다고 말하겠는가.
장군의 이름은 응하(應河), 자는 경의(景義), 성은 김씨(金氏)이며, 본래는 안동(安東) 사람인데 철원(鐵原)으로 본적을 옮긴 지는 겨우 몇 대밖에 안 되었다고 한다. 진(珍)은 태복시 판관을, 인상(麟祥)은 성균관 직강을, 인(軔)은 병조 정랑을 지냈고, 지사(地四)는 참판에 추증되었는데, 이 분들이 장군의 고조, 증조, 조부, 부친이다.
장군의 나이 14세 때 부모님의 상을 당하였는데 신통한 스님이 좋은 묏자리를 가르쳐 주었다. 예제에 따라 장사와 제사를 지내니 사람들이 아이로 보지 않을 정도였으며, 어린 아우와 우애가 지극하여 향리 사람들이 칭찬하였다. 장성해서는 활을 당겨 쏘면 화살이 돌에 박혔는데, 남의 손을 빌리지 않고 자신이 직접 특수한 활을 만들었다. 신장이 8척이고 지기(志氣)가 특출했으므로 당시 또래들이 모두 진짜 장군으로 인정하고 그의 부하가 되었다.
25세에 무과에 급제하였는데 당시 병조 판서를 맡고 있던 정승 박승종이 천거하여 선전관이 되었다. 이듬해에 시기하는 자에게 연루되어 태거(汰去)되자 그날로 귀가하였으나 조금도 원망하는 기색이 없었다. 무신년(1608)에 호남 안찰사(湖南按察使)의 비장(裨將)이 되었으니 바로 박공이 안찰사를 맡고 있을 때이다.
당시는 선조대왕(宣祖大王)의 국상 초기였는데 장군은 휘하에서 주색을 가까이하지 않으면서 한결같이 게을리하지 않고 경계해야 할 것을 지키니,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이 선비라도 그 보다 나을 수 없다고 하였다. 경술년(1610)에 다시 선전관에 제수되었는데, 이시언(李時彥)이 백사(白沙) 이상(李相: 이항복(李恒福)에게 극구 칭찬하자 이상이 발탁하여 경원 판관(慶源判官)에 제수하였다.
떠날 때가 되자 어떤 사람이 귀한 집의 미녀를 소개하며 장군에게 거두도록 권하였으나 장군은 사양하였다. 경원 판관의 임기가 만료될 때 관찰사 한 서평군(韓西平君 한준겸(韓浚謙))이 인사 고과를 하등으로 잘못 매기는 바람에 막부에 배속되었다.
서평군이 법망에 걸려 파직되었을 때 장군이 다른 사람보다 먼저 찾아가 위로하니, 사람들이 그의 본심이 아니라고 의심하였다. 장군이 말하기를, “한공은 나의 옛 상관인데 내가 무엇 때문에 사소한 일을 기억해서 혐의를 두겠는가.”하였으니, 그의 도량이 이렇게 넓었다. 이때부터 명성이 자자하였다.
도총부 경력, 삼수 군수(三水郡守)를 지내고 북우후(北虞候 함경북도 우후)에 이르렀는데, 비록 모두 정승 박승종이 천거한 것이지만 실은 여망을 따른 것이다. 북관(北關)에 재직하는 4년 동안 모든 직무를 잘 수행하였으며, 힘을 기른 것은 도 장사(陶長沙)가 벽돌을 운반한 것보다 나았고 또 자신의 공로를 자랑하지 않아 공손(公孫)의 대수(大樹) 같은 기풍이 있었다.
언젠가 중병에 걸려 거의 사경을 헤맬 때 그의 벗이 약을 가지고 와서 큰소리로 외치기를,
“그대는 평소 말가죽으로 시신을 싸겠다고 스스로 다짐해 놓고 지금 어찌 그까짓 병으로 죽는단 말인가.”하니, 장군이 눈을 부릅뜨고 세 사발을 비우더니 회복되었다.
심하의 전투에서 모두 그의 뜻대로 과연 몸을 아끼지 않고 순국하여 대절(大節)을 세웠으니 어찌 열렬(烈烈)한 대장부가 아니겠는가. 우리나라에서도 특별히 장군에게 대광보국숭록대부의 품계와 영의정의 관작을 추증하였으니 국가에서 충절을 현양하고 숭상하는 도리가 참으로 천고(千古)에 충분하다고 하겠다. 아우 응해 등이 의주(義州)에서 혼백을 맞아다가 선영의 아래에 의관을 장사 지냈다.
장군은 첨지중추부사 윤시익(尹時益)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 2녀를 낳았다. 장남 익련(益鍊)은 무과에 급제하여 전라 우수사(全羅右水使)를 지냈다. 뚜렷하게 부친의 풍모가 있었으나 불행히도 그 재능을 다 발휘하지 못하고 죽었다. 차남 시련(時鍊)은 요절했다.
딸은 선전관 유신걸(柳信傑), 유학(幼學) 김기(金基)에게 출가했다. 측실의 아들은 승련(承鍊)이다. 손자 선전관 세귀(世龜)는 익련의 소생이고, 세성(世聲)은 시련의 소생이다. 유신걸은 2남을 낳았는데, 장남은 강계 부사(江界府使) 탄연(坦然)이고, 막내는 숙천 부사(肅川府使) 비연(斐然)이다.
김기는 4남 1녀를 낳았다. 아들은 익훈(翊勳), 익화(翊華), 익문(翊文), 익무(翊武)이다. 딸은 유학 조일선(趙一善)에게 출가했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칼과 활은 어디로 갔는가 / 鈹弨何歸乎
오랑캐 무찌르다 다 닳았도다 / 殫於斫虜兮
의관은 어디로 갔는가 / 衣冠何歸乎
무덤에 묻혔도다 / 藏於若斧兮
혼은 못 가는 곳이 없는데 / 魂無不之兮
하물며 고향이겠는가 / 矧此狐丘
죽었어도 얼굴이 산 사람 같으니 / 死面如生兮
선진이 이에 필적할 만하고 / 先軫其儔
이가 남김없이 부서졌으니 / 齒碎無餘兮
진원도 앞서지 못하겠네 / 眞源莫先
황제가 장군에게 보답하라 명하고 / 帝命胙女兮
우리 조정에서도 추증하였네 / 貤贈我宣
애닳프구나 저 항복한 장수는 / 痛彼降帥兮
대대로 오명을 남겼고 / 遺臭世世
고지식한 저 김유신은 / 繩彼庾信兮
공이 신라에만 그쳤네 / 功止羅際
그 누가 공과 같겠는가 / 夫孰如公兮
천자에게 목숨을 바쳤도다 / 效命天王
명성이 천하에 진동하고도 남으니 / 名噪薄海之不足兮
청사에 빛나고 향리에서 제향을 받네 / 汗竹煌煌而廟食其鄕兮
송백으로 사당 지어 경건히 혼령을 봉안하니 / 柏板松楹虔揭靈妥兮
찬란한 정려가 변방 먼 곳에 내려왔네 / 燁如旌節下大荒兮
<끝>
[註解]
[주01] 증 …… 신도비명 : 이 글은 김응하(金應河, 1580~1619)에 대한 신도비명이다. 김응하의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경의(景義),
철원(鐵原) 출신이다. 1604년(선조37), 무과에 급제하였다. 1619년 심하(深河) 전투에서 후금 군대에 맞서 고군분투하다가 전사
하였다. 1620년 명나라 신종(神宗)이 요동백(遼東伯)에 봉하고 처자에게 백금(白金)을 하사하였다.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
는 충무(忠武)이다.
[주02] 내복(內服) : 원래는 왕기(王畿) 안의 땅이라는 뜻인데, 여기서는 중국 내의 나라라는 뜻으로 쓰였다. 《書經 酒誥》
[주03] 먼저 …… 승리한다 : 이 말은 《사기(史記)》 〈염파 인상여 열전(廉頗藺相如列傳)〉에 보인다. 전국 시대 조(趙)나라의 허력(許歷)
이 조사(趙奢)에게 간언하기를 “먼저 북산의 정상을 차지하는 쪽은 승리하고 나중에 오는 쪽은 패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史記 卷81 廉頗藺相如列傳》
[주04] 대황(大黃) : 활 이름으로, 황색이고 몸체가 크다. 《史記 卷109 李將軍列傳》
[주05] 이소경(李少卿)이 …… 닿았다 : 이소경은 한(漢)나라 이릉(李陵)으로, 소경은 그의 자이다. 이릉은 흉노와 싸우다가 궁지에 몰리
자 투항하였는데, 이 말은 이릉이 소무(蘇武)의 지극한 충심을 보고 탄식하여 한 말이다. 위율(衛律)은 아버지가 본래 호인(胡人)
이었다.
위율은 한나라에서 생장하였는데, 협률 도위(協律都尉) 이연년(李延年)과 사이가 좋았다. 이연년의 추천으로 흉노에 사신으로 갔
다가 돌아올 때 마침 이연년이 처형되자 위율은 주살될까 두려워 도망쳐서 흉노로 돌아가 항복하였다. 《漢書 卷54 李廣蘇建傳》
[주06] 괴자마(拐子馬) : 기병의 진법이다. 정예 기병을 가려 큰 진의 좌익과 우익으로 삼아 상호 지원하면서 진격하거나 방어하는 진형이
다. 일설에는 돌격하여 적진을 함락하기 위해 가죽끈으로 연결한 인마라고 한다. 괴자진(拐子陣), 괴자마진(拐子馬陣)이라고도 한
다. 《武經總要 東西拐子馬陣》
[주07] 강개하여 …… 어렵다 : 《근사록》 〈정사류(政事類)〉에 “일시적으로 감격하고 분개해서 자기 몸을 죽이기는 쉬워도, 의연히 의리
를 위해 목숨을 바치기는 어렵다.〔感慨殺身者易, 從容就義者難.〕”라는 정이(程頤)의 말이 나온다. 《近思錄 卷10》
[주08] 찬후(酇侯)가 회음후(淮陰侯)를 천거 : 찬후는 소하(蕭何)의 봉호(封號)이고, 회음후는 한신(韓信)의 봉호이다. 소하는 한 고조
(漢高祖)를 설득하여 길일을 택해 재계하고 단(壇)을 쌓고 예를 갖추어 한신을 대장에 임명하도록 하였다. 《史記 卷92 淮陰侯列
傳》
[주09] 힘을 …… 것 : 도간(陶侃)이 주(州)에 있을 때 정무가 없으면 아침에 벽돌 백 개를 집 밖으로 옮겨 놓았다가 저녁에 집 안으로 옮겨
놓았다. 어떤 사람이 그 까닭을 묻자, 도간이 대답하기를 “내가 중원을 다스리는데 힘을 다하고 있는데〔吾方致力中原〕 지나치게
안일하면 대사를 감당하지 못할까 두렵다.”라고 하였다. 《晉書 卷66 陶侃列傳》
[주10] 자신의 …… 대수(大樹) : 공손(公孫)은 후한(後漢)의 장군 풍이(馮異)의 자이다. 후한(後漢)의 개국 공신(開國功臣)인 풍이(馮
異)는 광무제(光武帝)를 섬겨 많은 전공을 세웠으나 사람됨이 겸양하여 논공행상(論功行賞)할 즈음이면 언제나 자신의 공로를 말
하지 않고 큰 나무 아래에서 한가로이 쉬고 있었기에 대수장군(大樹將軍)이라는 별칭이 있게 되었다. 《後漢書 卷17 馮異傳》
[주11] 말가죽으로 시신을 싸겠다 : 영웅이 싸우다가 전쟁터에서 죽는 것을 이른다. 후한(後漢) 때 장군 마원(馬援)이 “남아는 마땅히 변
방에서 죽어 말가죽으로 시체를 싸서 돌아와 장사 지내야 할 것이니, 어찌 침상에 누워 아녀자의 손에 죽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
다. 《後漢書 卷24 馬援列傳》
[주12] 선진(先軫) : 춘추 시대 진(晉)나라 대부의 이름이다. 《춘추좌씨전》에 “선진이 투구를 벗고 적(狄)의 군중으로 뛰어 들어가 죽었
다. 적인(狄人)이 그의 머리를 돌려보냈는데 얼굴이 살아 있는 것 같았다.” 하였다. 《春秋左氏傳 僖公33年》
[주13] 진원(眞源) : 당(唐)나라 때 진원 영(眞源令)을 지낸 장순(張巡)을 가리킨다. 윤자기(尹子琦)가 장순에게 말하기를 “공이 전투를
독려할 때 크게 외칠 때마다 눈초리가 찢어져 얼굴에 피가 흐르고 이가 모두 부서졌다고 하던데 어찌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내 기세는 역적을 삼키고자 하나 힘이 부족할 뿐이다.” 하였다. 윤자기가 노하여 칼로 그의 입을 갈라보니 남아있는 이
가 서너 개였다. 《新唐書 卷192 張巡列傳》
ⓒ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 장유승 김하라 김재영 (공역) | 2015
-----------------------------------------------------------------------------------------------------------------------------------------------------
[原文]
贈領議政金將軍神道碑銘 幷序
皇明萬曆四十七年己未春。建州夷逆命。天子赫然出師征之。且徵兵我東。蓋視同內服也。時天朝經略卽楊鎬。我國元帥卽姜弘立。副卽金景瑞。分軍爲左右營。將軍以宣川郡守。兼助防將將左營軍。軍行。劉都督,喬游擊當前茅,我左營翼其左。李一元佐將軍。弘立,景瑞中勁。至深洲布陣。將軍謂一元曰。軍志有之。先據北山者勝。今我陣庳。殆不可乎。獨無高處。一元執不肯。趑趄間虜騎數千衷我左右陣。一元先遁。於是虜之精銳咸萃左營。將軍令軍中曰。砲者築藥。弓者持滿。聞吾鼓聲乃縱。否軍法在。俄而浴鐵之騎堵墻而進。間不十步。將軍授枹鼓之。虜中丸而死者不記其數。空鞍虜馬塞逕。虜大崩。居頃之。虜又選壯補缺。出死力進鬪者幾三四合。合必我軍捷。虜將走矣。大風忽衝塞。起沙礫擊人面。日色晦暝。火器與藥飄颺半空。我軍無所施其技。虜乃乘之。我軍亂。將軍獨倚柳樹。彎大黃射虜。中必疊雙。應絃而倒。虜之死者過當。矢盡則持長劍搏戰。其所斬刈。又有倍焉。將軍亦被數十創。性命已殊。猶握劍柄。植立不動。怒目勃勃云。當此時。爲中勁者出卒一隊。作蟻子之援。虜雖衆。未必不半折於將軍之一拳矣。弘立,景瑞徒從壁上觀而反覆生奸。甘心將軍血虎牙。不抎一矢向虜。非虜之寇。乃弘立, 景瑞也。李少卿言陵與律之罪上通于天。是猶自知罪也。不知弘立,景瑞其能自知罪也哉。噫。將軍信善戰。且壯哉。杜崇,劉綎以中國名將。將十萬兵。暫爲虜蹂躪。血流波道。無一卒還。將軍獨當乘勝之虜。抑萬萬拐子馬。使堇千弱卒。視死如歸。身所擊殺如此。雖關雲長,岳武穆。曷以過焉。喬游擊之至死。津津稱東國兵利將勇不容口。虜人旋師。猶避柳下戰場。必曰柳下將力戰可畏。至收屍瘞之曰。好男子好男子。異日再生。願我得之。將軍之名動華夷。豈虛也哉。人有恒言。慷慨殺身易。從容就死難。若將軍者。死綏之志素定於受脤之初。彰彰明矣。弟應海欲從。將軍以爲俱死無益止之。與家人訣。不及私事。封識印章 。屬郡吏戒勿汚賊。此非從容就死而奚。惜也朴相不薦將軍則已。旣才將軍而薦之。胡不畀之大將若酇侯之薦淮陰者。抑有國運天時之有與於其間耶。或曰。深河之役。虜勢方盛。我如挫其強而熸之。虜必十年不振無疑。我以其暇鍊士厲卒。以壯邊威。惡有丙丁之亂。信斯言也。弘立,景瑞之罪。歷世難貰。庚申春。神宗皇帝用嘉將軍力戰死之之狀。出天府白金萬有餘奇大賚我國 。俾恤將軍家。於是天下之人訟共頌將軍名。相傳道籍籍。介冑之士。則恨不得與將軍俱角虜接踵而死。秉筆之徒。則恐不能盡寫將軍鏖戰狀。以光皇明敦史之萬萬也。將軍之死。今近四十餘年。而談其事者。怳若挹將軍喑啞叱咤於阿睹中。凜凜有生氣。孰謂人與骨皆已朽哉。將軍名應河。字景義。姓金氏。本安東人。著籍鐵原堇數世云。曰珍。太僕判官。曰麟祥。成均直講。曰軔。兵曹正郞。曰地四。贈參判。於將軍高曾祖若考也。將軍生十四歲。遭父母喪。遇異僧指示好丘。葬祭以禮。不以童子爲解 。與少弱弟友愛備至。鄕里稱之。及長。彎弓石八。弓不假之人。自造殊制。身長八尺。志氣磊落。一時曹偶皆許以眞將軍。皆出其下。二十五。擢武科。朴相承宗判兵曹。擧爲宣傳官。明年。坐忮者見汰。卽日歸家。無幾微懟色。戊申。褊裨湖南幕。卽朴公按使時也。時宣祖大王國恤初。將軍居戲下不近酒色。持戒終始不怠。聞者以爲儒者不如。庚戌。再授宣傳官。李時彥盛稱于白沙李相。李相擢授慶源判官。將行。有人紹介貴家女美而艶者屬將軍畜。將軍辭之。在慶瓜滿。觀察使韓西平誤置下考。仍隷幕下。及西平扞文罔廢。將軍往唁先諸人。人疑其非情。將軍曰。韓吾舊將。吾何以記憶細故而形迹爲。蓋其胸次坦蕩類此 。自此名實籍甚。歷都摠經歷,三水郡守。至北虞候。雖皆朴相尉薦。實因衆望也。縻職處北關者四載。靡職不擧。至於爲植致力 。有過陶長沙運甓者。其不伐又有公孫大樹風。嘗遘厲虐苦幾死。其友操藥大呼曰。君平生自許馬革裹尸。今寧死於一病乎。將軍瞋目而飮盡三椀乃甦。至深河之役。果忘身徇國立大節俱如其志。庸不烈烈男子哉。 本朝亦特贈將軍階大匡。爵領議政。國家顯忠崇節之道。良足千古矣。弟應海等矢復于灣上。而葬衣冠于先壟下。將軍室。僉樞尹時益之女。生二男二女。男長益鍊。登虎榜。官全羅右水使。蔚有父風。不幸未究其用而卒。次時鍊。早世。女柳信傑。宣傳官。次金基。幼學。側室男承鍊。孫世龜 。宣傳官。益鍊出也。世聲。時鍊出也。柳信傑生二男。長坦然。江界府使。季斐然。肅川府使。金基生四男。翊勳,翊華,翊文,翊武。女趙一善。幼學。銘曰。
鈹弨何歸乎。殫於斫虜兮。衣冠何歸乎。藏於若斧兮。魂無不之兮。矧此狐丘。死面如生兮。先軫其儔。齒碎無餘兮。眞源莫先 。帝命胙女兮。貤贈我宣。痛彼降帥兮。遺臭世世。繩彼庾信兮。功止羅際。夫孰如公兮。效命天王。名噪薄海之不足兮。汗竹煌煌而廟食其鄕兮。柏板松楹虔揭靈妥兮。燁如旌節下大荒兮。<끝>
龍洲先生遺稿卷之十九 / 神道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