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미헌집 제9권 / 묘지명(墓誌銘)
5대 조부 통덕랑 부군 묘지(五代祖考通德郞府君墓誌)
인동부(仁同府) 서쪽 40리 팔룡곡(八龍谷) 정남향[坎坐离面]의 자리에 4척 높이의 무덤이 있으니, 곧 나의 5대 조부 통덕랑 부군과 부인 공인(恭人) 안동 권씨(安東權氏)의 합장 묘소이다. 공의 휘는 만중(萬重)이고 자는 정경(鼎卿)이며 성은 장씨(張氏)이고 본관은 옥산(玉山)이다.
시조는 휘 금용(金用)으로 고려 시대 삼중대광(三重大匡)을 지냈다. 조선조에 들어와 장령(掌令)을 지낸 휘 수(脩)가 있었는데, 정직하고 지조가 흔들리지 않으면서 조정에 우뚝하게 섰다. 6대 뒤 여헌(旅軒) 선생 휘 현광(顯光)에 이르러 사촌 동생인 월포(月浦) 선생 휘 현도(顯道)의 아들 휘 응일(應一)을 취하여 양자로 삼았다.
이분은 부제학(副提學)을 지냈으며 호가 청천당(聽天堂)으로 명성과 절조로 세상에서 추중을 받았으니, 공의 조부이다. 아버지는 휘가 영(𨥭)으로 위솔(衛率) 벼슬을 지냈으며 호는 소매당(訴梅堂)이다. 어머니는 숙부인(淑夫人) 광주 이씨(廣州李氏)인데, 숙부인의 아버지는 응교(應敎) 벼슬을 지낸 도장(道長)이고, 조부는 석담(石潭) 선생 윤우(潤雨)이며, 외조부는 하담(荷潭) 선생 김시양(金時讓)이다.
공은 인조 병술년(1646, 인조 24) 12월 4일에 태어났다. 벼슬하는 명문세가에서 생장하였지만 세상에 나아갈 뜻이 없었는데 음직으로 통덕랑에 제수되었다. 숙종 갑오년(1714, 숙종 40) 7월 5일에 돌아가셨다. 부인은 공인(恭人) 안동 권씨(安東權氏)로 통덕랑을 지낸 두장(斗章)의 따님이고, 참의(參議) 벼슬을 지낸 동계(東溪) 선생 도(濤)의 손녀이며, 수사(水使) 벼슬을 지낸 본관이 태안(泰安)인 박광경(朴光慶)의 외손이다.
공은 나면서부터 특출한 자질을 가져 어버이를 섬기는 60년 동안 사랑하고 공경하기를 하루같이 하였고, 한 분의 형님과 네 명의 동생을 대할 때는 화목하게 하여 우애의 도리를 극진히 하였다. 한번은 처가에 갔었는데, 처가의 사람들이 공을 매우 사랑하여 매일 아침 세수대야 옆에 은(銀)을 놓아두고 공이 취해가는지를 엿보았으나, 공은 시종 돌아보지도 않고 마치 그것을 기와와 돌같이 보았다.
아, 이것이 공의 생애 중 만분의 일이나마 개괄할 수 있는 점일 것이다. 불행하게도 세대가 오래되어 문적(文蹟)을 모두 잃어버렸고 징험할 만한 다른 것이 없다. 공은 아들이 없어 부사(府使) 벼슬을 지낸 동생 만익(萬益)의 아들 대열(大說)을 후사로 삼았다. 두 딸은 유위하(柳緯河)와 이정식(李廷植)에게 각각 시집을 갔다. 손자는 지목(趾穆)이며, 증손자와 현손자는 다 기록하지 않는다.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 송희준 (역) |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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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五代祖考通德郞府君墓誌
仁同府西四十里八龍谷。有背坎面离而崇四尺者。卽我五代祖考通德郞府君。恭人安東權氏之合墳也。公諱萬重。字鼎卿。姓張氏 。玉山人。上祖諱金用。麗三重大匡。入我朝。有掌今諱脩。正直不撓。鶚立朝端。六傳至旅軒先生諱顯光。取從父弟月浦先生諱顯道子諱應一爲嗣。官副學。號聽天。名節重於世。寔公祖也。考諱𨥭。官衛率。號訢梅。妣淑夫人廣州李氏。考應敎道長。祖石潭先生潤雨。外祖荷潭先生金時讓。公以仁廟丙戌十二月初四日生。生長簪纓世族。無意進取。以蔭授通德。肅廟甲午七月五日 。考終。恭人安東權氏。通德郞斗章女。參議東溪先生濤孫。水使泰安朴光慶外孫。公生有異質。事二親。六十年愛敬如一日。處一兄四弟。翕翕盡友道。嘗遊婦氏家。其家愛公甚。每朝置銀頮器傍。冀公之取。而公始終不顧。與瓦石無異。嗚呼。是可以槩公萬一哉。不幸世代寢遠。文蹟俱逸。他無得以徵之矣。公無子。以弟府使萬益子大說爲后。二女柳緯河,李廷植。孫趾穆。曾玄不盡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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