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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시 진전면 적석산(積石山. 497m)을 가다.
글 쓴 이 旲 熀 高 達 五
1월24일 혹한(酷寒)의 추위다. 절기(節氣)는 소한 대한을 다 지나 입춘(立春)을 향해 달리건마는 대구의 최저기온은 42년만에 영하13도의 날씨란다. 간단히 조반을 들고는 외투와 방한복으로 중무장하여 출발지 반고개 사거리에 도착하니, 안언니와 이미자님은 벌써 도착해 계시고 뒤 이어서 염종우님 등 세분이 차례로 도착하신다.
서로간에 반갑다는 인사도 장갑을 낀 채 악수(握手)를 하면서 한참을 웃슴니다. 연하여 여러 곳을 경유하여 칠곡IC를 최종 출발하니 염려했던 것 과는 달리 앉을자리가 모자란다.(46명)
현풍(玄風)휴게소에서 회원님들이 조식(朝食)을 할 동안 잠시 주위를 둘러보니, 넓은 주차장에는 비교적 한산하며 동녘에는 아직(am8:00)도 아침해가 보일락 말락하다. 1000고지가 넘는 비슬지맥이 동쪽을 가로막고 있어 해 뜨는 시간이 늦고, 게다가 북서쪽으로는 낙동강이 흐르고 있어 수침(水浸)의 피해도 많이 받는편이다.
차는 신나게 달려 칠서휴게소에서 잠시 휴식을 한뒤 줄곧 내달아 마산시내와 진동면을 거쳐 진전면 봉암리 출발기점에 이르니 시계는 10시 20여 분을 조금 지나있다. 대지(大地)는 간밤에 나린 눈으로 은백색(銀白色)의 빛깔을 뿜어내며 찬란한 태양빛에 반사되어 눈이 다 부시다!
단체로 기념촬영을 마치고 A,B조로 나뉘어서 B조는 하산기점에서 역산행 하기로 하여 떠나고, 정예부대 A조는 깃대봉으로 진행합니다. 아무도 가지않은 순백색의 포도(鋪道)위를 걷는 이 기분! 뽀드~득~ 뽀드~득~! 제 그림자를 밟으며 오름니다.
10여 분을 걸어서 ‘수발사’ 입구에 도착하니 등산진입로에는 “효열공 고종후 묘소(孝烈公高從厚墓所)”입구라는 거대한 비문이 세워져 있다. 다시 이정표를 따라 5분 여를 더 오르니 넓은 잔디밭에 “장흥고씨 효열공 진양종문회(長興高氏 孝烈公 晉陽宗門會)”의 선조묘들이 모셔져 있으며 5~60여 미터 더 높은 곳에는 “효열공 고종후 묘(孝烈公 高從厚 墓)”가 모셔져 있다.
고종후(高從厚 1554~1593)는 임진란 당시에 금산전투에서 순국한 의병장 “제봉 고경명(霽峰 高敬命. 1533~1592)장군”의 장남으로 시(詩)와 서화(書畵)에도 뛰어 났으며, 문과에 급제하여 현령에 이르렀다.
연하여 금산전투에서 아버지와 동생 인후(仁厚)의 순국으로 의분(義憤)에 떨며 “복수의병장(復讎義兵將)”으로 진주성에서 싸우다 성(城)이 함락되자 김천일(金千鎰), 최경회(崔慶會:論介夫君)와 남강에 투신 순절하게 되니 민족충혼(民族忠魂)의 化身으로 유방백세(流芳百世)하리라!(묘소의 비문참조)
天地는 고요하고 白雪로 덮여있어 봉분(封墳)은 백화(白花)로 찬란합니다! 살아 백년이 없는데~ 죽어 만년을 가오리다! 주산(準峰山)은 우뚝하고 장엄하며 백호(白虎)도 그만 그만하고, 청룡(靑龍)은 힘차게 뻗어나려 안산(案山)의 역할까지 겸하고 있으며, 조산(朝山)은 겹겹이 에워싸고 있어 그야말로 명당길지(明堂吉地)로다!
선채로 예를 드리고 다시 오르니 남산님들은 아무도 보이지 않슴니다. 남산님들이 먼저 오른 등산로에는 주위와 확연히 구분되어서 걷기도 한결 편하고 소복 소복 쌓인 검붉은 낙엽에 온기(溫氣)가 느껴집니다.
오를수록 온 몸에 땀이 배어나는데~ 추운날씨에 가끔씩 몰아치는 찬바람에 얼굴은 따끔 따끔하여 방한모를 벗었다 썻다를 반복하며 진행합니다. 모두들 어찌나 중무장을 하였는지 얼굴을 식별하기도 쉽지 않슴니다.
준봉산이 가까워 질수록 거대한 바위들도 많아서~ 얼어붙은 눈송이들이 설화(雪花)로 만발합니다. 오늘따라 휴식도 기념촬영도 없이 모두들 열심히 걸어서 그럭저럭 준봉산(520m) 정상에 이르니 어찌나 표석(標石)이 작은지 자칫하면 몰라보겠슴니다.
몇몇 회원님들에게 사진촬영을 해 드리고 다시 깃대봉으로 나아갑니다. 대부분의 등산객들은 “적석산” 주위로만 산행을 많이 하여서~ 준봉산, 깃대봉 주위로는 비교적 한적한 편입니다.
깃대봉 가는길은 능선길이라 비교적 순탄하여 한결 수월합니다. 중간 중간 벽송님, 김은철님, 황까페지기님 등에게 기념촬영도 해 드리면서 20여 분을 걸어 깃대봉(520m)에 도착하니 시계는 11시35분을 가리키고 있다.
이 곳 깃대봉 주위는 백두대간의 끝 지점인 지리산 천황봉 부근의 옥산에서 동남쪽으로 태봉산, 설봉산, 무선산, 무량산, 백운산을 거쳐 깃대봉에 이르니 낙남정맥의 중간깃점에 해당하며 그 잔여지맥은 다시 마산 부근의 여항산, 광려산, 무학산을 지나 진해의 보배산 입바위 부근에서 남해바다에 그맥을 드리우고 있다.
잠시 쉬면서 후미에 회원님들이 도착하는데로 차례 차례 사진촬영을 해 드리고 다시 선동치(0.7Km)로 내려갑니다. 등산로 주위는 쭉~쭉~ 뻗은 소나무 줄기사이로 눈꽃이 만발하여서 걷는 재미도 한결 좋슴니다.
선동고갯마루부터는 잘 닦여진 임도를 따라 10여분을 걸어서 다시 적석산(1.2Km) 이정표를 따라 산등성이를 오름니다. 등산길은 비교적 순탄하여 걷기도 수월하고 바람도 많이 잠잠해 졌슴니다.
20여 분을 걸어올라 정상이 가까워질수록 “적석산(積石山)” 특유의 바위들이 나타나는데~ 하나같이 “시루떡”을 포개 놓은 듯... 넓찍 넓찍한 바위들이 즐비(櫛比)하여서 모두들 우와~ 우와~ 하면서 감탄사를 연발합니다!
몇몇 회원님들에게 평평한 반석에 먼산들을 배경으로 기념촬영을 해 드리고 가파른 언덕길을 10여 분 더 오르니, 천지(天地)가 일시에 확~열려서 고성군 당항만 일대와 크고 작은 섬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고도가 480여 고지라~ 눈에 보이는 경치는 아름답고도 장쾌하건마는 능선에 휘몰아치는 칼바람은 잠시도 견디기 어려울 정도다. 벗었던 방한모를 다시 덮어쓰니 노출부위는 눈만 빠끔하다.
게다가 시장끼도 더 하여서 조그마한 빵 한조각을 황까페지기님과 나누어 들며 따뜻한 물 한잔을 곁들여 마시니 한결 힘이 남니다. 다시 몇 걸음을 더 나아가니 출렁다리 바로 아래 통천문(通天門:포개진 바위사이로 난 굴)을 통과한 능선님과 그 일행들은 만세를 부르며 사진촬영을 요청하신다.
아름다운 배경들을 디카에 담으면서 정상에 이르니 다른 산악회에서도 많이 오셔서 기념촬영에 분주하여 얼마를 기다리다 사진촬영을 마친 후 필자(筆者)와 디카맨 김해진님, 황까페지기님 셋이서 따뜻하고도 고요한 바위 옆에서 중식을 합니다.
올 겨울은 유난히도 포근해서 1월 산행지로 적석산이 좋을 것이란 생각으로 선정했는데~ 뜻밖의 초강한파(超强寒波)로 아름다운 풍광들을 충분히 감상하지 못해서 훗날 봄 가을에 한번 더 산행할 것을 희망합니다.
점심 후 잠시 주위를 조망(眺望)하니 동남방으로는 마산의 여항산, 광려산, 무학산 일대에 낙남정맥의 연봉들이 줄지어 내 달리고, 서북쪽으로는 멀고 가까운 곳에서 지리산 일대와 연화산 일대의 준봉들이 겹겹이 이어져 달리고 있슴니다.
연(連)하여 남으로는 당항포와 사천시(삼천포) 일대에 크고 작은 섬들이 광대무변한 바다에 점점이 떠 있어 그야말로 한폭의 동양화요, 아름다움의 극치입니다! 아울러 적석산은 깃대봉 부근에서 선동고개를 거쳐 남쪽으로 뻗어내린 작은지맥상에 있으며 그 잔여지맥은 남해바다 당항만쪽으로 떨구고 있다.
특히 당항포(堂項浦)는 임진왜란 때 충무공 이순신이 “구루시마 미지유기(來島通之)” 부대를 물리친 전적지(戰迹地)로 유명하며, 1592년 6월 5일 이(李) 충무공은 마산만에 나타난 왜선에게 짐짓 쫓기는 척 하면서 당항포로 유인해 미리 매복해 있던 우리 군사들에 의해 50여 척이 괴멸(壞滅)되었다고 한다.
아울러 근세에는 이 일대에 “2012년 경남고성 공룡엑스포”가 열리기도 했으며, 그 이후로 오늘날은 “공룡박물관”이 상설 전시돼 있어 언제라도 관광 및 학습을 할 수 있으니 우리 남산님들도 답사의 기회가 오기를 희망합니다.
또 정상에는 넓고 넓은 반석들이 여러곳에 산재돼 있어 1000여 명은 너끈히 앉아서 휴식을 취할 수 있으며, 천하를 조망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고 시산제(始山祭)를 모시기에도 좋은 곳이라 생각됩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온 몸에 추위가 엄습해 와서 더는 머무르기가 쉽지 않으며, 주위를 둘러보니 두분(김해진, 황재덕)외에는 우리 남산님들은 아무도 보이지 않슴니다. 하여 오래 오래 머물고 싶은 아쉬움을 뒤로한 채 하산길로 접어듭니다.
원래 계획은 357고지(옥수골)를 경유하여 일암리 “성구사(誠久祠)” 방향으로 되어 있지만, 모두들 추운날씨에 무리할 수가 없어 안땀마을의 주차장으로 내려갑니다. 하산길에 내려다 보니 일암리 일대와 건너편 양촌리, 봉암리, 발산리 까지 옹기종기 모여서 살고있는 우리들의 모습이 참으로 정겹게 느껴집니다.
가파른 경사로(傾斜路)를 30여 분 걸어 나려서 “일암소류지(작은 못)”를 경유하여 마을 주차장에 당도(當到)하니 아직도 14시 20여 분을 조금 지나있다. 추운날씨에 모두들 산행하시느라 수고 많았다고 서로들 위로하면서~ “일암마을회관”에 들어서 준비됀 하산주를 맛나게 드심니다.
귀갓길에 구회장님을 비롯하여 임원님들의 요청과 임기사님의 협조로 개천면 연화산 기슭의 “옥천사(玉泉寺)”를 잠시 답사합니다. 옥천사로 가는 도중에 마암면 장산리에 이르니 인위적으로 조성됀 “장산숲”이 있다.
이마을 숲은 조선 태조 때 김해 허씨 문중의 허기(許麒)와 성종 때 퇴계 이황의 제자였던 허천수(許千壽)가 연못을 파고 “노산정”을 짓고 나뭇숲을 조성하였다고 전해오는데, 오래전에 답사 기억으로는 우측 마을의 뒷산(主山)이 금성형(金星形)으로 노적봉에 해당하여서 마을에는 부자들이 많았다고 하며, 또 마을에서 보면 청룡(靑龍)쪽이 허(虛)하여 “비보림(裨補林)”으로 조성하였다고 한다.
아울러 숲 내에는 보인정(輔仁亭)과 연못 가운데는 원형의 대(臺)를 쌓아 작은 정자(亭子)가 있어 운치(韻致)를 더 해주며, 그 앞에는 구들을 놓은 듯 보이는 특이한 돌평상(石平床)이 있다.
시간이 여의치 못해 회원님들이 다 볼 수 없으니 아쉬움이 큼니다 그려! 다시 옥천사 방향으로 10여분을 더 달려서 주차장에 당도하니 늦은 시간이라 비교적 한산하여서 모든회원님들이 걷기에도 안전하고 신속합니다.
도량(道場)의 100여 미터 전방에는 고색어린 일주문(一柱門)이 홀로 창연하고, 몇걸음 위에는 감로수(甘露水)가 솟아 나오며, 바로 옆 산 기슭에는 열반 고승님들의 부도가 모셔져 있고, 그 뒤로 천왕문(天王門)이 절 입구에 세워져 있어 사천왕상(四天王像)이 8개의 눈을 부릅뜨고 있으니 잡귀는 얼씬도 못하겠심더!
여러개의 돌계단을 올라 경내로 들어서니 우측으로 무우당(無憂堂) 앞에는 이청담(李靑潭)스님의 부도탑(浮屠塔)과 비문이 모셔져 있다. 이청담(1902~1971)스님은 경남 진주시에서 출생하여 훗날 진주농고를 졸업한 후 25세(1926)에 도일하여 병고현(兵庫縣) 송운사(松雲寺)에서 “아끼모도 준가(秋元淳稚)”스님 밑에서 9개월간 행자수업을 했다.
그는 1년 반만에 귀국하여 고성 옥천사로 출가하여 남규영(南圭榮)스님을 은사로 득도하였으며 이 때 받은 불명이 청담(靑潭)이다. 그 이듬해 속가에 어머니로부터 대를 이어야 한다는 간절한 청을 뿌리치지 못하여 부인과 속연(俗緣)을 맺은 후 뼈를 깎는 참회와 고행으로 정진하였다.
엄동설한(嚴冬雪寒)에도 맨발로 눈속을 걸어 다녔는데~ 그가 남긴 발자국에는 피가 묻어 있었다고 하며, 또 한편으로는 민족독립운동을 계속해 문경 대승사에서 왜경에게 잡혀 7개월간 옥고를 치렀다고 한다.
성철(性徹)스님과는 막역한 도반이며 동산(東山), 효봉(曉峰), 금오(金烏)스님과 더불어 불교정화에 매진하여 1962년에 통합종단(統合宗團)을 이루는데 크게 기여 하였으며, 66년 12월에는 조계종 종정에 취임했으나 곧 물러나 북한산 기슭의 도선사에 들어가 “호국참회원” 건립에 착수하였고, 그 곳에 상주하면서 “육영수(陸英修)여사”에게 "대덕화(大德華)"라는 불명도 내리셨다고 한다.
그 이후 비구승단인 조계종 종권 다툼이 심화되자 1969년 여름에 조계종을 탈퇴했다가 주위의 간곡한 만류와 호소가 있어 70세의 고령임에도 다시 조계종 총무원장을 맡아서 봉사 하시다가 1971년 11월 15일 입적하였다.(청담 일대기 참조)
이제 스님의 겉 모습은 볼 수 없으나 고성군 무이산 문수암과 연화산 옥천사, 서울 도선사 등에서 스님의 참 모습을 친견할 수 있으니... 선채로 삼배의 예를 올리고 대웅전으로 향합니다.
높은 축대 위에는 웅장한 “자방루(滋芳樓)”가 정면7칸 측면2칸의 규모로 영조 40년(1764)에 세워졌으며 팔작지붕 양식이다. 자방루의 향기를 만끽하며 여러개의 돌계단을 오르니 정면에 대웅전이 진좌하고 있다.
대웅전은 영조 21년(1745)에 중건하였으며 정면3칸 측면2칸의 다포계 팔작지붕으로 고색어린 멋을 보여주신다. 가파른 돌계단을 올라 간단히 참배를 한 후 잠시 주위를 둘러보니 좌 우로 탐진당과 적묵당, 자방루로 둘러싸여 있다.
주산은 연화산 정상에서 뻗어내린 한 줄기에 속하며, 청룡(靑龍)은 허(虛)하여 전각이나 비보숲(裨補林)을 조성하였고, 백호(白虎)는 웅장하고도 튼실하여 지척에서 안산(案山)의 역할까지 해 주고 있어 조금은 답답한 느낌이 듬니다. 지세(地勢)는 전체적으로 연꽃이 반쯤 피어있는 연화반개형(蓮花半開形)이다.
이 밖에도 전각(殿閣)의 수는 많아서 팔상전, 명부전, 옥천각, 나한전, 산령각, 독성각, 조사당, 칠성각, 취향전, 종각 등 끝이 없슴니다. 우리 남산님들은 각자의 취향대로 답사 하시다가 1987년 “한국의 명수(明水)”로 선정됀 “옥천수(玉泉水)”가 샘솟는 옥천각 앞으로 모여 듭니다.
일설에 옥천샘은 태초에 일정량의 공양미(供養米)를 흘려주었는데, 어느날 한 스님이 더 많은 공양미를 얻기위해 바위를 깨뜨리고 샘을 헐었드니 공양미와 물까지 끊어져버렸다고 한다.
그 이후 다른 스님이 참회하는 마음으로 지극히 기도를 드리자 다시 샘물이 솟고 아울러 연꽃 한 송이가 피어나면서 옥천사(玉泉寺)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 각자의 신심(信心)이며, 인간의 과욕(過慾)을 경계한 것이리라!
옥천수 한 바가지를 마시면... “현재 나이에서 150년”은 풀러스(plus)라! 악~!
하루의 계획은 새벽에 하고
한달의 계획은 월 초에 하며
한 해의 계획은 년 초에 한다던가
積石에서 덕을 쌓고 玉泉에서 空을 배우네
단기 4349년(서기2016년) 1월 24일
경남 마산시 진전면 적석산(積石山. 497m)을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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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남산님들! 그간 강녕하신지요?
산행후기가 많이도 늦어 송구합니다.
당일 추운날씨에도 산행에 동참하신 모든분들(46명)께 깊은 감사를 드리오며~
아울러 진행에 수고하신 구회장님을 비롯하여 벽송대장님, 윤총무님, 김미소총무님,
능선운영위원장님, 윤상복님, 김은철님 등 많은 분들의 노고에 다시한번 감사의 말씀을 올림니다.
이제 1월도 내일 하루가 남았군요.
모든님들! 설빔준비 잘 하시고 늘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적석산에서 엄동설한의 참 맛을 보았고 산행 후기를 다시 보니 감회가 남니다.
항상 수고하시고 추억을 만들어 주어서 고맙습니다.
황까페지기님 당일 추운날씨에 수고 많았슴니다.
늘 좋은자료를 많이 올려주셔서 글 쓰기에 도움이 됩니다.
항상 건강하시고 가내 행복을 기원합니다.
고문님 .어김없이 산행후기올리시느라 수고가많습니다~덕분에 그날의기억들이 생생합니다.너무추워서 고생했던기억~또하나의 좋은추억으로 남았습니다 .감사합니다^^.
경숙님이 다녀 가셨군요~
오늘은 부산 태종대에 다녀 오셨드군요~
남산님들 너무 보기 좋았슴니다.
그날의 추위는 용광로에서 쇠를 담금질 하듯이~
대자연도 만물을 담금질 하는 것이라 봅니다.
님들이 계셔서~ 남산의 미래가 밝슴니다!
늘 건강하시고 가내 만복을 기원합니다.
고고문님의 산행기는 후일 남산의 좋은 자료로 남을것입니다.
긴장문의 산행후기쓰시느라 수고많으셨습니다.~~
벽송님이 다녀 가셨군요~
보잘 것 없는 장문의 글을 읽어 주셔서 감사드리며~
추운날씨에 당일 진행에 수고 많았슴니다.
늘 건강하시고 가내 만복을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