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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대차이 극복하기
2023.03.26.(사순절제5주일)
선한목자교회 김 명 현 목사
1/ "나 만군의 주가 말한다. 용광로의 불길같이, 모든 것을 살라 버릴 날이 온다. 모든 교만한 자와 악한 일을 하는 자가 지푸라기같이 타 버릴 것이다. 그 날이 오면, 불이 그들을 살라서, 그 뿌리와 가지를 남김없이 태울 것이다. 2/ 그러나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할 것이니 너희는 외양간에서 풀려 난 송아지처럼 뛰어다닐 것이다. 3/ 내가 이 일을 이루는 그 날에, 악한 자들은 너희 발바닥 밑에서 재와 같이 될 것이니, 너희가 그들을 짓밟을 것이다. 나 만군의 주가 말한다. 4/ 너희는 율법, 곧 율례와 법도를 기억하여라. 그것은 내가 호렙 산에서 내 종 모세를 시켜서, 온 이스라엘이 지키도록 이른 것이다. 5/ 주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너희에게 엘리야 예언자를 보내겠다. 6/ 그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고, 자녀의 마음을 아버지에게로 돌이킬 것이다. 돌이키지 아니하면, 내가 가서 이 땅에 저주를 내리겠다." (말라기 4:1-6)
들어가는 말
MZ세대. 요즘 젊은 세대를 일컫는 말입니다. 우리는 새로운 세대의 등장을 거부할 수 없습니다. 사실 사회의 부와 권력은 장년과 노년의 기성세대가 다 가지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젊은 세대가 기성세대에 고분고분 순종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모든 것을 가진 기성세대가 젊은 세대 앞에서 쩔쩔매면서 비위를 맞추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런 모습은 최근 들어 완전히 바뀐 외식문화를 보면 분명히 드러납니다. 제 친구의 이야기입니다. 부서에서 외식 모임이 있기는 하지만 젊은이들은 2차 자리에 없다고 합니다. 새벽까지 자리를 옮겨가며 삼겹살에 소주를 부어라 마셔라 하는 이들은 50대의 중년들뿐이라고 합니다. 나이 든 임원들이 앉아 있는데 젊은이들이 마지못해서라도 자리를 지킬 것 같지만 이제 그런 모습은 통하지 않습니다. 선도적인 대기업과 IT기업들은 이런 젊은이들을 위한 사내 환경을 앞 다투어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렇게 하는 것이 회사가 망하지 않는 길입니다. 옛날처럼 끈끈한 팀 정신으로 밤을 새워가며 일하는 것을 주장한다면, 그것은 망하는 지름길입니다. 지금은 법이 허용하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회적 변화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신앙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젊은이들이 만족할 만한 교회 분위기를 만들어 내기 위해 애써야 하고, 젊은 세대가 교회 문화와 신앙을 새롭게 주도하고 기성세대들은 젊은이들이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뒷받침해야 하지 않을까요? 하지만 한국교회를 보면 점점 노인들만의 세상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사회가 젊은이들을 붙잡기 위해 사활을 걸어가며 노력하고 있는 모습과는 달리, 교회는 젊은이들을 무시하며 노인들의 성을 쌓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러한 문제를 어떻게 보고 있을까요? 말라기는 구약의 마지막 책으로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이 있습니다.
마지막 날의 모습
말라기의 마지막 구절은 이후 유대인들의 삶을 하나님의 임재의 시간까지 연결하고 있으며, 신약성서를 가진 우리에게는 옛 것과 새 것을 연결하고 있습니다. 말라기와 마지막 구절이 그런 역할을 하지 못한다면, 유대인들에게는 또 다른 경전이 필요할 것이며, 우리는 구약과 신약을 구분할 수 없을 것입니다. 즉, 연결하는 무엇이 없다면 구약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의미 없는 경전이 되어 폐기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말라기는 어떻게 유대인들을 종말의 때까지 연결하며,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구약을 약속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도록 할까요? 대전제는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불러 시작하신 역사를 마지막까지 이끌고 가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말라기서를 통해 그 역사의 끝에 대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 끝은 이러합니다. “나 만군의 주가 말한다. 용광로의 불길같이, 모든 것을 살라 버릴 날이 온다.”(1)
하나님의 역사에는 끝이 있습니다. 그 끝은 먼저 악인들을 향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향한 마지막 모습을 모든 것을 완전히 태워 형태를 알아볼 수 없도록 잿더미로 만드는 불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악한 자들을 보면서 현재적 심판을 기대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심판을 분명히 하시면서도 마지막 때 단 한 번으로 미루십니다. 마지막 심판이 이루어지기 전에는 오직 심판의 잣대, 즉 모세를 통해 선포한 법만이 있을 뿐입니다. 지난주에 이미 살펴보았듯이 세상에는 의인과 악인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받아들여진 의인들을 악인과 구분할 수 있지만, 그 심판은 미루어져 있습니다. 불로 형상화된 그 날의 심판은 교만한 자들과 악한 일을 하는 자들을 향하고 있습니다. “모든 교만한 자와 악한 일을 하는 자가 지푸라기같이 타버릴 것이다.”(1) 심판은 먼저 악한 이들에게 내려질 것입니다.
“그 날이 오면, 불이 그들을 살라서, 그 뿌리와 가지를 남김없이 태울 것이다.”(1) 반복되는 선포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남는 아쉬움은 있습니다. 이 모든 일은 그 날이 와야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 날이 온다는 것을 하나님은 반복적으로 분명하게 약속하시지만,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여전히 오지 않은 미래일 뿐입니다. 반면, 악한 자들을 쓸어버릴 불과 대비되는 것이 태양의 떠오름입니다. 이 태양은 불의 심판이 끝난 뒤, 의인들에게 비취는 광선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나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할 것”(2)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그 때가 되면 의로운 사람들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실 것이며, 상처를 치료해 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의인들은 “외양간에서 풀려 난 송아지처럼 뛰어다닐 것”(2)입니다. 그러나 이것 역시 미래이기에 지금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미래와 현재를 이어주는 믿음
사실 지금 의인은 마음에 상처를 입고 있고, 악인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있습니다. 찬란한 미래는 오직 믿음 속에만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이러한 미래가 올까요? 믿음을 가진 의인들은 하나님께서는 영원하시고 진실하시기에 이 모든 말씀이 이루어질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믿음이 없는 악인은 어떻게 생각할까요? 한 부류의 악인은 그런 미래를 약속하는 하나님은 없다고 여길 것입니다. 또 한 부류의 악인은 하나님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미래의 일일뿐이며 현재를 살아가는 나에게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의인들의 믿음은 하나님이 약속하시는 미래를 현재와 이어주지만, 믿음이 없는 악인들은 미래가 없는 현재만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바로 의인들의 믿음 때문에 하나님은 악인들이 살아가는 세상에 간섭하지 않으십니다. 그저 하나님은 의인과 악인을 구분하는 잣대를 드러내실 뿐입니다.
도래하는 미래를 약속하시는 하나님의 현재적 관심은 의인들에게 있습니다. 의인들도 현재의 불공정한 모습에 시험에 들곤 합니다. 그들을 위해 하나님은 미래에 대한 약속을 보다 분명하게 하심으로써 이들의 믿음을 붙들어 주십니다. “내가 이 일을 이루는 그 날에, 악한 자들은 너희 발바닥 밑에서 재와 같이 될 것이니, 너희가 그들을 짓밟을 것이다.”(3) 의인들에게도 분노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분노를 마지막 때에 발산할 수 있도록 하신다는 말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마지막 때에도 의인은 의인이어야 합니다. 의인은 마지막 날에 법정에 끌려온 악인을 쥐어박는 역할을 해서는 안 됩니다. 3절의 표현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하나님께서 행동하시는 날에 악한 이들은 이미 재가 되어있을 뿐입니다. 우리들은 그들을 부수어 재를 만들어 버리고 싶겠지만 하나님은 그런 의인답지 못한 행동을 하도록 놔두시지 않습니다.
이 모든 미래에 이루어질 약속들을 보여 주신 하나님은 현재의 의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율법, 곧 율례와 법도를 기억하여라. 그것은 내가 호렙 산에서 내 종 모세를 시켜서, 온 이스라엘이 지키도록 이른 것이다.”(4)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모세의 법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의인들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 미래에 이를 때까지 대대로 이 법을 지켜가야 합니다. 모세의 법을 지켜내는 것이 의인들의 몫입니다. 의인들이 끊어진다면 더 이상 모세의 법을 지키는 사람들은 없어지는 것이며, 마지막 때에는 악인들만 남을 것입니다. 그 때는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지켜야 할 법을 주신 의미도 사라질 것입니다. 결국 악인만 남게 된다면, 영원히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결과적으로 실패할 법을 주신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끝 날까지 의인들이 남도록 하실 것입니다.
세대차이 극복
그렇다면 하나님이 주신 법은 어떻게 마지막까지 이어질 수 있을까요?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주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너희에게 엘리야 예언자를 보내겠다.”(5) 엘리야는 살아 있는 예언자들의 상징입니다. 엘리야는 죽지 않고 하늘로 올라갔으므로, 그는 언제든 하나님의 부름에 따라 이 땅에 내려올 수 있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의인들을 위해 언제든 예언자를 보내신다는 것입니다. 의인들은 이렇게 등장하는 예언자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법을 기억할 것입니다. 그리고 의심을 거두고 다시 믿음을 다질 것입니다. 모세 이후 우리에게 이르는 모든 세대에 예언자들은 끊임없이 등장해서 믿음을 굳건히 하고 의인이 끊이지 않도록 해왔던 것입니다. 구약 시대 마지막 서신의 마지막 구절은 종말의 시간까지 의인들이 믿음을 유지할 수 있도록 예언자들이 해야 할 역할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예언자들의 이 역할이 있기에 구약은 신약으로 이어지며, 유대교는 지금까지도 사라짐 없이 하나님의 종말을 기대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야 예언자를 보내시겠다고 말씀하시면서, 그의 역할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고, 자녀의 마음을 아버지에게로 돌이킬 것이다.”(6) 이것이 믿음을 종말의 때까지 이어지게 하는 모든 시대에 등장하는 예언자들의 역할입니다. 예언자들이 이렇게 함으로써 믿음은 오늘날까지 중단됨 없이 이어진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봅시다. 먼저는 ‘어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는 것’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언뜻 생각하면 이것이 나중처럼 보이지 않나요? 즉 ‘자녀의 마음을 믿음의 아버지에게로 돌이키는 것’이 먼저인 것처럼 보인다는 것입니다. 집을 나간 탕자의 비유에서도 자녀가 회심하고 돌아오는 것이 먼저인 것처럼 보이지 않나요?
하지만 신앙이 대를 이어 전수되기 위해서는 먼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켜야 합니다. 사실 이미 사고가 굳어버린 아버지는 끊임없이 자녀에게 잔소리를 하면서 자신의 뜻과 방식대로 돌아오라고 말합니다. 신앙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버지는 자신을 기준삼아 하나님을 믿으라고 자녀에게 설교합니다. 이런 아버지의 행동이 옳다면 사실 예언자는 필요 없습니다. 신앙의 선조인 아버지가 이렇게 그 믿음을 자녀에게 전수할 수 있다면 굳이 예언자가 필요치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실제로 이럴 경우 그 결과는 자명합니다. 자녀는 아버지를 떠나고, 믿음도 버릴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의 모습입니다. 예언자는 없고, 목사와 장로들의 주장만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참된 예언자를 오늘도 보내시는 것입니다. 예언자가 먼저 할 일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도록 하는 것입니다.
나가는 말
그러면 자녀들은 아버지의 믿음을 받아들이고 의인의 믿음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그렇게 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돌이키지 아니하면, 내가 가서 이 땅에 저주를 내리겠다.”(6) 부모세대가 먼저 돌이키지 않는다면 그것은 믿음의 종말이며 의인의 종말이 될 것입니다. 부모의 돌이킴이 없다면 자녀의 돌이킴은 없으며, 그것은 미래를 기대할 수 없기에 곧 도래하는 종말이 될 것입니다. 즉, 세대 차이를 극복하지 않는다는 것은 저주를 받는 것이며, 종말을 앞당기는 것입니다. 영어성경을 통해 이 마지막 구절을 보면 ‘내가 이 땅을 완전히 전멸해 버리겠다.(i will strike th land with total destruction)’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세대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는 것은 정말 완전히 전멸되는 것입니다. 기성세대가 젊은 세대를 향해 ‘우리 때는 애를 많이 낳았는데!’라면서 젊은이들을 비난하면서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진짜 종말입니다.
‘마루’에 오는 엄마들을 보면 아이들에게 좋은 것을 먹이기 위해 애쓰는 모습을 봅니다. 하지만 자신이 좋다고 여기는 것을 끝까지 주장하면서 아이들이 받아들이기만을 바란다면 ‘마루’는 문을 닫아야 합니다. 모든 것의 섬멸, 파멸, 종말은 기성세대가 젊은 세대를 받아들이지 않을 때 오는 것입니다. 신앙이 대를 이어 내려왔다는 것은 아버지가 그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켰기 때문입니다. 돈을 쥐고 있는 부자도, 권력을 가지고 있는 권력자도 젊은 세대의 마음을 붙들어야 부도 유지되고 권력도 유지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데, 신앙을 가진 부모들이 자기 고집에 매여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 시대 예언자들은 바로 그들의 마음을 풀어 젊은이들을 이해하도록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들입니다. 결국 우리의 닫힌 마음을 열고 젊은이들을 이해하는 것이 의인들의 세상을 유지하시는 하나님의 궁극적인 방법인 것입니다.